번역과 우리말

張鎭漢/조선일보 기자

    (1) 머리말

    번역 작업은 두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原文 理解의 과정이고, 또 하나는 한국어에 의한 표현 과정이다. 原文 理解란 原文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원문의 의미를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어와는 아무 상관없이 원문의 내용을 원문으로서 이해하기만 하면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해한 내용과 형식을 한국어로 再表現하는 작업인데, 그 표현 방법은 譯者의 노력과 기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 번역이란, 일단 해체함으로써 이해한 원문을 그 형식에 가장 적합한 한국어로 마무리해 재현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번역의 本質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제 번역 작업에 뛰어들어 갔을 때 부딪히는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두 언어의 감각 차이에서 오는 문제, 번역어 선택의 어려움, 관용어, 표기법, 외래어 등 수많은 문제가 따른다.
    필자는 번역 전문가는 아니다. 단지 일본 문학을 전공한 이유로 몇 권의 일본 책을 우리말로 옮겨 보았을 뿐이고, 또 직업상 수많은 글들을 대하며 우리말의 순화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갖고 있는 직업인에 불과하다.
    따라서 本稿는 非전문가적 관점에서 그동안 필자가 느꼈던 번역에 대한 몇 가지 斷想과 의견을 일본어 번역을 중심으로 적어볼까 한다.

    (2) 번역의 害毒

   번역을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무한한 외국어 영역에 대한 한계일 것이다. 번역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겠지만, 단지 어휘와 문법적 지식만 갖추었다고 해서 原文의 理解가 완전히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글에 담겨진 학문적 지식이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이해된 원문을 어떻게 한국어로 나타내야 할 것인가도 문제이다. 단지 ‘A는 B다’ 라는 식으로 처리해서는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무런 이해와 감명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어느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譯書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겨 본다.

    나는 나와 똑같은 나들인 너들의 물음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을 존재하게 한, 그러나 그들의 여러 다른 존재들 중에서 하필이면 이 주어진 사회, 주어진 시간의 특정한 역사 속에서 존재하게 한 그 행위가……
   이것은 한국어로만 쓰여져 있을 뿐 도저히 우리말이라 할 수 없다. 얘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혀 간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문법적 구조와도 어긋나 혼란만을 야기한다.
   말속에는 그 나라의 얼과 생명이 숨쉬고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나 자기 나라 말을 가꾸고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한심한 구석이 많다. 우리가 예부터 간직해 왔던 우리 나름의 語法이나 글쓰기가 사라지고 조잡한 외국 문학의 직역 형태나 문장 서술법,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휘들이 난무함을 볼 수 있다.
   필자는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번역자들에게 있다고 본다.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活字化됐을 때, 그것이 끼치는 사회적인 영향은 적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번역서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誤譯과 우리말의 체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문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지식의 전달은 커녕 우리말에 커다란 해독으로까지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3) 誤譯에 대하여

   우리나라 번역서에 誤譯이 많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독문학을 전공하는 H대학의 K군과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귄터그라스의 ‘양철북’ 번역판을 사다 봤는데 원서와 대조해 보니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번역이 많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전차(Panzer)’를 ‘갑주(甲冑)’로, ‘읽기(lesen)’을 ‘인생’으로 옮겨 놓았는가 하면, 괴테의 ‘파우스트’를 ‘주먹(Faust)’이라는 보통 명사로 오역했다며 어떻게 이런 책들이 서점에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통탄해 했다. 전문 번역가인 Y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리스 作家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번역 소설을 보았더니 ‘미치광이 미칼레스’라고 했으면 좋을 ‘Mad Michnales’를 ‘매드 미칼레스’로, ‘無情山’쯤으로 번역해야 할 ‘Cruel mountain’이 그대로 ‘크루얼 산’으로 옮겨져 원작의 분위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오역이란 이론상으로는, 번역의 기본 바탕이 되는 어휘의 변환 과정에 있어서 목표 언어(Target Language)를 잘못 선택한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역자의 무지의 소치이거나 無誠意에 기인한다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도서에 오역이 많은 이유로 C출판사 H편집장은 ‘請負飜譯’과 ‘重譯’이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내노라 하는 저명 교수들에게 번역을 의뢰하면 그들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대학원생들에게 請負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洋書를 놓고 번역하기보다는 해독하기가 쉬운 日語版에 의한 重譯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앞서 예를 든 양철북의 경우도 ‘Panzer’를 ‘갑주(甲冑)’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일어판의 중역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양심 있는 번역자라면 번역어 하나하나에 상당한 사회적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담 삼아 誤譯으로 역사가 뒤바뀐 史實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45년 7월 연합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는데 일본은 이에 대해 ‘黙殺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즉시 중립국 보도망을 통해서 ‘ignore한다’는 말로 번역되어 연합국 측에 전달되었고 연합국은 곧바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어로 ‘黙殺’이란 ‘문제시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정도의 消極的인 태도를 나타내는 말인데 반해, ‘ignore’의 사전적 의미는 ‘to refuse to take notice of(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거부한다)’로 積極的 거부 행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번역어의 선택에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며 번역자의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예라 하겠다.

    (4) 일본어와 번역

   언젠가 현재 우리나라의 서점에 나와 있는 세계 문학 전집이나 사상 전집이 대체로 60~70년대에 번역이 이루어진 것들이고, 이때 번역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어 교육에 의해 외국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로서 그들이 번역시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원서가 아닌 일본어 번역판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 언어로 번역한 작품을 우리말로 다시 옮긴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역이나 의미 전달상의 제약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냄새나 언어 습관까지도 함께 묻어 올, 혹은 묻어 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일본적인 요소가 곁들여진 서구 문학 작품을 청소년들이 읽음으로써 그들의 생각과 언어 체계가 은연 중 日本化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를 우리말 가운데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필자가 생각해 본 일본어의 우리말 침투 유형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유의해야 할 점 몇 가지이다.

         1) 격조사 ‘の’
   우리가 잘 부르는 동요 가운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는 노래를 생각해 보자. 원래 우리말의 主格 助詞는 ‘은···가’인데, 이 경우는 ‘의’로 되어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이 아니라 “나의 살던 고향”인 것이다. 일본어의 格助詞 ‘の’의 용법은 여러 가지인데, 대부분 우리말의 ‘의’로 번역되는 것으로서 ‘내용·상태·성질의 한정’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즉 ‘父の財産(아버지의 재산)’, ‘異國の空(이국의 하늘)’ 하는 식으로, 명사와 명사 사이에 항상 집어넣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위 가사를 일본어로 옮긴다면 “私の住んでいた故鄕は···”가 되고, 이때의 ‘の’는 主格 助詞의 역할을 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할 때에는 ‘가’로 번역해야 마땅하고, 만일 ‘의’로 옮긴다면 誤譯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어법과 어긋나게 “나의 살던···”하고 수십 년 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일본어 ‘の’의 誤用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어진다.
   ‘の’가 우리말에 간섭하고 있는 예는 이 밖에도 많다. 예컨대 ‘세계 문학’ 하면 될 것을 ‘세계의 문학’이라 하고, ‘소설 연구’하면 될텐데 ‘소설의 연구’라 한다. 이때의 ‘의’는 아무 필요가 없는 데도 말이다.
   ‘아버지 코리아(87 열린책들 刊, 郭早苗 지음 김기실 譯)’ 15쪽을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TV를 켜자 일본 항공 점보 여객기 추락 희생자 첫 7일 생활이 방영되고 있다.

   우리말에 굳이 필요치 않은 ‘의’가 한 문장에 3개씩이나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오류가 일어나는 것은 번역자의 일본어 ‘の’에 대한 문법적 지식이 부족하거나 한국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결과로 보여진다.

        2) 피동 표현
   일본어의 특색 중 하나는 ‘피동 표현’이 많다는 점이다. 어떤 행위를 내가 남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으로부터 당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받아들이다’보다는 ‘받아들여지다(受け入れられる)’, ‘주목하다’보다는 ‘주목되다(注目される)’, ‘생각하다’보다는 ‘생각되다(考えられる)’, ‘분석하다’보다는 ‘분석되다(分析される)’를 더 즐겨 쓴다.
   이것은 행위의 주체를 消極化함으로써 그 책임성을 모호하게 하려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그대로 언어 습관에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 10쪽을 보면 “家の中にあるインターフオンのホタンが押されると自動的に鐵扉の鍵が開く(집안에 있는 인터폰의 버튼이 눌러지자 자동적으로 철문의 키가 열린다)”라는 문장이 있다. 만일 이 같은 문장을 한국 작가가 쓴다면, 버튼을 누르는 행위자를 주체로 하여 “집안에 있는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자···”로 했을 것이다.
   어쨌든 피동태의 문장을 자주 쓰는 것은 우리 고유의 언어 습관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어 번역서들을 읽어 보면 일본어 피동태의 직역문이 너무 많이 등장하여 왠지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실례를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由熙(89 삼신각 刊, 李良枝 作 김유동 譯)’에서 몇 개만 뽑아 본다.

① 지금은 개장이 치워지고 나무받침이 그 자리에 놓였고···(9쪽)
② “저만 이런 나이에 어머니한테 송금해받고 공부하고 있어요”(33쪽)
질문받기에는 익숙해졌겠지만 ···(37쪽)
④ 책이 곧잘 일본에서 보내져 왔다(42쪽)
⑤ 거꾸로 찔림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한 것처럼 ···(55쪽)
⑥ “언니는 아침에 눈이 떠졌을 때 먼저 무엇을 생각해?”(56쪽)
   어떤 사람들은 원문을 존중해서 피동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굳이 능동 표현으로 고칠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 번역이란 그 번역문을 읽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번역문을 읽는 사람이 이해하고 감명을 받을 수 있도록 읽는 사람의 언어 습관이 중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어휘
   작년 말 조선일보 독자란에 “‘忘年會’란 연말에 그 해의 노고를 잊기 위해 갖는 연회라는 뜻으로 일본에서 만든 말이니 ‘送年會’로 해야 한다”며 그 말의 어원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투고가 실렸다.
   평소 우리글에서 일본어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필자도 그 말이 일본어인 줄 모르고 써 왔던 데 대해 수치심을 느꼈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는 우리 고유의 말인 것처럼 쓰고 있으나 알고 보면 일본에서 온 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쓰는 일반 용어에 국한되지 않고 학술 용어나 전문 용어에 더 많다.
   일본어가 우리말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말로 거슬러 올라가고, 개화기를 거쳐 식민지 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후 광복 후에는 일제 잔재 추방 운동으로 인해 점차 줄었으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일본어 학습자가 급증함에 따라 다시금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 사례를 찾아보면 수없이 많다. 예컨대 ‘斜陽産業’이라 할 때의 ‘斜陽’이란 1947년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斜陽’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斜陽族’이란 유행어가 파급되면서 나온 말이고, 그 후 일정한 집단을 지칭하는 말에 ‘~族’이란 접미사를 붙이게 되었다. 장발족·히피족·좀비족 하는 것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생겨난 말이다.
   ‘소련 特需’할 때의 ‘特需’란 말도 6·25동란 때 ‘特別需要’(군수품 등의)의 단축형으로 일본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 밖에도 하나하나 어원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過剩保護·日照權·殘業·人災·案內孃·準準決勝·情報化社會 등도 일본에서 造語된 말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라 한다.
   얼핏 보아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유 일본에 의한 복합어들인 경우도 많다. 이들은 완전히 일본어로 訓讀되거나 부분적으로 訓讀되는데 한자 造語法과도 일치되지 않는다. 예컨대 ‘집을 나가다’는 ‘出家’이어야 하는데 ‘家出(いえで)’이라 하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유의 어휘는 그 밖에도 상당히 많다. 참고로 몇 가지만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우리 고유의 말이다.)

內譯(명세)·貸切(전세)·言渡(선고)·引出(꺼냄)·取締(단속)·取調(심문)·品切(매진)·割引(에누리)·手入(손질)·切取(자름)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가 그대로 우리말에 흘러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冷戰(Cold War), 壓力團體(Pressure Group) 등이다.
   이처럼 우리말이 일본어에 의해 간섭당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번역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적당한 譯語를 찾기 힘들 때 일본어 어휘를 편의적으로 원고에 적어 내면 그것은 곧 活字化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게 되고, 어느새 우리말인 양 인식되어 버리는 것이다.

        4) 속담 및 관용 표현
   언젠가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미국인과 TV 대담을 했다. 그 미국인은 “흐루시초프의 예상이 빗나가다”는 말을, 관용구를 써서 “barking up the wrong tree(엉뚱한 나무를 보고 짖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흐루시초프의 통역은 이것을 러시아 어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흐루시초프는 사냥개처럼 짖고 있다”는 뜻의 러시아 어로 통역하자, 이 말을 들은 흐루시초프가 노발대발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은 속담이나 관용 표현을 번역(혹은 통역)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얘기라 하겠다.
   속담이나 관용 표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그 나라의 오랜 문화적 전통 가운데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그 말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담이나 관용 표현은 한 두 마디가 수많은 말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그것을 한국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신중을 기해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컨대 “弘法にも筆の誤り”라는 말이 나왔을 때 “弘法에게도 붓의 실수가 있다”라고 해석하면 독자들은 도저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弘法’이란 ‘弘法大師’의 약칭으로 과거 日本 書道의 名人이었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리 달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하는 법이 있다”는 뜻으로서 우리 속담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과 같은 것이다.
   또 일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몰라보게 닮았을 때 “오이처럼 닮았다(きゅうりのように似っている)”라든가, “땅콩처럼 닮았다(ビナッツのように似っている)”라는 비유 표현을 쓰는데, 이 경우도 우리말로 직역해서는 너무너무 거북한 말이 되고 만다.
   일본어 관용 표현을 그냥 직역함으로써 거의 우리말로 굳어진 경우도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

애교가 넘치다(愛嬌が溢れる)·종말을 고하다(終を告げる)·흥분의 도가니(興奮の坩堝)·종지부를 찍다(終止符を打つ)·도토리 키재기(どんぐりの背比べ)·마각을 드러내다(馬脚をあらわす)·새빨간 거짓말(まっ赤なうそ)·귀에 못이 박히다(耳にたこができる)·낙인 찍히다(らく印を押される)

   등은 그 성립 과정을 하나하나 밝히기는 어려우나 일본어에 의한 飜譯 借用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분별없는 일본어 비유 표현의 수용은 우리말의 중심을 잃게 하는 주범임을 번역자들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격언 중에서도 일본어를 통해서 전해진 것이 많은데, 그중에는 誤譯된 사례도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의 ‘예술’은 ‘기술(醫術)’을 뜻하고,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자연을 따르라”는 뜻이었지 “사회를 버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한다.

         5) 표기법
   일본어의 人名과 地名 등 고유 명사를 어떻게 우리말로 표기해야 할 것인가도 문제이다. 즉 ‘名古屋’을 ‘명고옥’이라고 할 것이냐 ‘나고야’라고 할 것이냐, 혹은 ‘東京’을 ‘동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냐 ‘도쿄’라고 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일정한 規準이 없었기 때문에 책마다 역자 자의대로 표기하고 있고, 또 어느 책은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金閣寺’(82 주우 刊, 三島由紀夫 지음 김후란 譯) 45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쯔(足利義滿)는 사이온지(西園寺) 집안의 키타야마노도노(北山殿)를 양도받아 이 곳에 대규모의 별장을 꾸몄다. 그 주요 건축으로는 사리전(舍利殿)·호마당(護摩堂)·참법당(懺法堂)·호즈이잉(法水院) 등 불교 건물과 천경각(天鏡閣)·쿄오호쿠로오(拱北樓)·천전(泉殿) 등 주택에 관련된 건물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리전은 가장 정성을 들여서 지은 건물로서 뒤에 킹가쿠라 불리게 된 건물이다.
   이 번역문은 한 문장에 일본식 발음과 한국어식 音讀을 병행하고 있는데 어떠한 원칙을 따르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신문 편집인 협회에서 간행한 신문 외래어 표기집에 따르면, ‘일본어 고유 명사의 경우 원음을 소리 나는 대로 적되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관행이 있는 것에 한하여 한자 음독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예컨대 ‘東京’은 ‘동경’과 ‘도쿄’로 병기할 수 있으나, ‘名古屋’은 ‘명고옥’이라고 읽는 관행이 없으므로 ’나고야‘라고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관행’의 한계가 모호하다는 한계성은 남는다. 또 硬音을 취해야 할 것이냐 激音을 취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도 대두된다. 즉 ‘아키히토’냐 ‘아끼히또‘냐의 문제인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1986. 1. 7. 문교부 고시)에 따르면 외래어 표기에 있어서 경음은 인정하지 않기로 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혼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차피 외국어를 우리말로 나타내는 데 있어서 완벽을 기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최소한 국어 연구소와 같은 전문 기관에서 일정한 규칙을 정해서 혼선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6) 외래어
   일본어 번역시 또 하나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외래어이다. 일본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는 적당한 자기네 말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많을 때는 한 문장에서 서너 개씩이나 가타카나로 표기되어 있어 그에 익숙해 있지 않은 외국인들이 읽을 때 무슨 뜻인지 한참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같으면 한글 유관 단체 등에서 발끈할 법한데도 일본에서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일본인들의 미국 선호 사상은 상당히 뿌리깊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외래어를 번역할 때 영어 그대로 옮겨 놓음으로써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간단하다’고 하면 될 것을 ‘심플하다’고 하거나, ‘장점이 많다’고 하면 될 것을 ‘메리트가 많다’고 적어 놓는 따위 등이다.
   실제로 이런 사례들을 ‘한국인의 경제학(87 백양 출판사 刊, 室谷克實 지음, 추장준 譯)’에서 몇 개만 뽑아 보기로 한다.

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스트링거가 조사표라도 우송하면 ···(56쪽)
② 제휴사로부터 클레임시킨 제품이···(60쪽)
③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는 ···(65쪽)
④ 중역의 모습을 보면 타지않는 O.L이 많다(70쪽)
⑤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페이스가 되고마는 것이다(73쪽)
⑥ 소란을 듣고 달려온 일본인의 어시스턴트메니저이다(78쪽)
   위에서 지적한 문장 속의 외래어는 일본어 문장에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한국어 문장에서는 하등 필요없는 것이므로 번역시에는 이런 외래어도 완전히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5) 맺는말

   이상에서 필자가 느낀 번역상의 여러 가지 문제점 등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좋은 번역, 가치 있는 번역이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이 글을 끝내려 한다.
   첫째로, 번역에 대한 인식의 提高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번역이란 그 자체가 매우 창조적이며 수준 높은 學識을 요구하는 작업인데도 지금까지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를 절하시킨 채 외국어 해독자 누구나가 적당히 하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학자들은 그들의 번역을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대우 면에서도 저자 보다 훨씬 낮게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은 역량 있는 사람들이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를 꺼리는 주된 원인이 되어 왔고, 또 이런 풍토에서는 誤譯이나 狹譯의 난무를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출판계의 양식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 출판업도 영리를 목표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그 경영에 있어서 경제 원칙을 적용함을 탓할 수는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출판 시장이 좁고 영세한 출판사가 많은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는 보통의 물건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책을 만드는 지식 산업인 것이다. 출판사들이 지금과 같이 상업주의에만 너무 집착하여 번역료의 투자에 인색하다면 제대로 된 번역을 기대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필자는 외국과 같이 역자에게도 저자와 똑같은 비율의 印稅 지급을 제도화하는 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셋째로, 당국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당부하고 싶다. 번역 문화의 발전과 우수한 번역가들의 발굴을 위해서 정부 차원의 번역 문학상 제정을 고려해 봄직하고, 번역 작품의 비평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