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적으로 잘못된 말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물이 없거니와 말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일시에 너무 많은 양의 변화가 있다든가, 상식에 맞지 않는 변화로 인해서 언어상의 조화가 깨지고, 의사소통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된다면 큰일이다. 말에는 생활 감정이 담겨져 있는 것이어서, 우리말이 남의 말처럼 귀에 설게 들릴 때, 그보다 더 속상하는 일이 없다.
요즈음 '저 사람은 귀가 먹었다.'라고 해야 할 것을 '저 사람은 귀를 먹었다'고 하고, 존댓말을 써야 할 경우에는 '선생님도 귀가 잡수셨나 봐.'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귀를 먹다니, 귀를 어떻게 먹으며, 귀가 무엇을 잡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꽤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예사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잘못은 '귀가 먹다.'의 '먹다'를 '밥을 먹다.'의 '먹다'로 알고 그것이 타동사니까 '귀가'를 '귀를'로 고쳐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먹다'(食)의 존댓말이 '잡수시다'이므로 '귀가 먹다.'의 존대 표현을 '귀가 잡수셨다.'라고 하는 모양이나 '잡수시다'도 타동사인데 이때는 '귀가'를 '귀를'로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것이 뭔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말을 바로 쓸 생각을 했어야 한다.
'귀가 먹었다.'란 말은 '귀가 막혔다.'는 뜻이다. 이때의 '먹다'는 '음식을 먹는다.'의 타동사 '먹다'[食]가 아니라 '막히다'의 뜻으로 '막다'와 어원이 같으면서 모음만 다른 말이다. '설'이 지나면 나이가 한 '살' 많아지는 '설'과 '살', 사람은 '늙고' 물건은 '낡아'지는 '늙다'와 '낡다', 소 한 '마리', 두 '마리'하는 '마리'와 '머리', '맛', '맛', '깎다'와 '꺾다'가 모두 같은 뜻의 말로서 모음만 바꿔서 조금씩 다르게 쓰이는 것들인데, '귀가 먹다.'의 '먹다'와 '막다'와의 관계도 그러한 것이다. '막히다'의 뜻으로서의 '먹다'가 다른 표현에서는 쓰이지 않지마는 '귀가 먹먹하다.'도 같은 어근 '먹'이 겹쳐 쓰인 것이다.
조금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귀를 먹었다.'거나 '귀가 잡수셨다.'란 말이 어딘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잠시 틈을 내어 사전을 들추어 보는 것이 마땅한 태도일 것이다. 하기는 그보다 먼저 사람들이 사전과 친해져서 사전이 생활 속의 일부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또 요즘 꽤 점잖은 사람들까지도 흔히 "선생님, 오늘 오후에 시간이 계십니까?", "지금부터 회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하는 말을 한다. 선생님이나 회장님은 '계실' 수 있지만 선생님의 시간이나 회장님의 말씀은 '있으시다'면 있으실 수 있지만 계실 수는 없다. 선생님의 시간도 계시고, 회장님의 말씀도 계시다면, 선생님의 책도 계시고, 형님의 돈도 계셔야 한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귀중한 책이 많이 계시죠?", "형님께서야 그만한 돈쯤 계시겠죠?" 하는 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이런 정신 나간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선생님, 오늘 오후에 시간이 계십니까?", "지금부터 회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와 같은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있다'의 존댓말은 '있으시다'와 '계시다'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다른 동사들은 어간에 '-시-'를 붙인 것 한 가지 뿐이다. 즉 '가다'는 '가시다', '보다'는 '보시다', '타다'는 '타시다'가 있을 뿐이다. '자다', '먹다'의 존댓말로 '주무시다', '잡수시다'가 있지마는 그 대신 '자시다', '먹으시다'가 없으니 한 가지만 있는 것은 같다. 그런데 '있다'에 대해서만 존댓말이 '있으시다'와 '계시다'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쓰임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계시다'는 주어를 직접 존대하고자 할 때 쓰고, '있으시다'는 주어를 간접으로 존대할 때 쓰인다. "선생님이 안에 계시다", "너도 부모님이 계시지?"의 '계시다'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직접 존대하는 것이고, "선생님께서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있으시겠습니까?"의 '있으시다'는 그 직접 주어인 '시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간접으로 존대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시간'을 직접 존대하자면 '계시다'가 쓰여야 할 것이나 '시간'은 계실 수가 없다.
"그 분이 어제 이곳을 다녀가셨습니다."의 '분'은 이른바 불완전 명사, 또는 의존 명사라고 하는 것으로 그 앞에 반드시 관형어가 와야 한다. 그래서 '이 분, 저 분, 그 분, 이런 분, 훌륭한 분......'과 같이 쓰인다. '분'이 단독으로 쓰이지 못하지만 명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분'을 마치 접미사처럼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남자분, 여자분, 기사분, 교수분......' 같은 표현이 꽤 보편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남자분, 여자분'은 그냥 '남자', '여자'가 옳다. 아니면 '남성', '여성'이면 족하다. '기사분, 교수분' 같은 것은 '기사님, 교수님'하면 된다. 남을 높이는데 '님'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분'까지 동원해서 접미사로 쓰는 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고 한없이 귀에 설다. 하기는 '여자님, 남자님'이라고 하지 않는 것만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님'은 접미사다. 그래서 '별님, 달님, 햇님'이 있고 '형님, 선생님, 과장님,......'까지는 좋다. 그런데 '회원님, 의원님, 위원님'은 조금 설고, '학장님실', '국장님실'은 아주 틀렸다. '학장실'은 누가 학장이 돼도 사무실로 쓸 방이다. 그리고 학장은 공직의 명칭이다. '학장실'은 마땅히 '학장실'이지 '학장님실'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계장'이 '계장님'이 되고, '과장', '국장'까지 올라가서 '과장님, 국장님'이 되더니 드디어 '장관님'까지 되었다. 아직 '국무총리님'까지 올라가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대통령에는 '님'보다 더 좋은 '각하'가 있으니까 '대통령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니까 '국무총리'만 남은 셈이다. 그때는 '국무총리실'도 '국무총리님실'이 될 모양이니 발음하기만 힘들게 되었다.
'나름'도 불완전 명사이다. '그 나름대로, 내 나름대로, 자기 나름대로 ......'와 같이 '나름' 앞에 관형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 층에서 "그 사람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우리도 나름대로 잘 하려고 애씁니다."하고 '나름'을 자립 명사처럼 쓰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아주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나름대로'는 '자기 나름대로, 우리 나름대로'이어야 한다.
근래의 방송국 아나운서들은 일부러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 뽑아 앉히는 것인지, 대중의 언어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방송 언어가 실로 엉망이다. "지금 중부 지방의 날씨는 맑고 있습니다."와 같은 일기 예보, "참으로 대단한 미모를 가지셨군요."하는 대담 프로 아나운서의 말을 들으면 우리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외국어를 듣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맑다'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진행형으로 쓸 수가 없다. "붉고 있다, 아름답고 있다, 깨끗하고 있다......"란 표현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맑고 있다'란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굳이 '맑다'란 말을 쓰고 싶으면 "날씨가 맑아지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요, 그런지 않으면 "날이 개고 있다." 혹은 "날이 개어 가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모를 가졌다."는 결코 우리말이라 할 수 없다. 왜 "참 아름다우시군요."라고 하지 못할까? 정 '미모'란 말을 써야겠으면 "미모가 뛰어나시군요."라고 할 수가 있다. '미모'를 가지다니, '미모'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는 말인가?
우리나라 법조문이 비문법적인 문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헌법에, 그것도 인권을 규정한 귀한 조문에 '신체의 자유'니 '양심의 자유'니 하는 야릇한 표현이 있다. '출판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쯤은 대강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능하나,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전문가의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신체의 자유'가 뜻이 통하는 표현이라면 '신체'의 일부인 '두발'에 대하여 '두발의 자유'란 말도 있고, 더 나아가 '장발의 자유' 또는 '단발의 자유'란 표현도 가능해야 할 것이며 '용모의 자유'란 말도 있을 수 있어야 할텐데 이들의 말뜻은 과연 무엇이 될까? '두발의 자유'란 자기 두발은 어떤 형태로 가꾸어도 좋다거나 남의 두발 형태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다는 뜻이 될까? 아니면 남의 두발 형태에 대해서 무제한한 비판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될까?
'집회의 자유'의 '집회'는 동사적 성질을 띠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유'가 동사와 어울리면 무엇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같은 말들은 어느 정도의 의미 추출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무, 돌, 사람, 담배......' 같은 명사와 '자유'가 어울리면 무슨 뜻인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는 '집회를 할 수 있는 자유, 출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줄인 말이 될 수가 있겠고, '출판'의 대상은 으레 서적류니까 그 앞에 '서적' 같은 목적어가 생략됐다고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같은 말은 상황 설명이 없는 한 문법을 무시한 억지 해석을 하지 않고는 그 뜻을 파악할 수가 없다. 다른 어떤 글보다도 정확해야 할 법조문, 그것도 모든 법의 근본이 되는 헌법에 이렇게 부정확하고 모호한 표현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 이름 있는 일간 신문 논설에 "이 문제는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질문되어 본 적이 없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꼭 영어 문장을 그대로 직역해 놓은 것같이 어색한 글이다. 우선 '질문되다'란 말부터 이상하다. '질문하다'는 '....에 대하여 질문하다'와 같은 구문으로 쓰이는데 '질문되다'는 자동사일 것이니까 '질문하다' 구문의 '......에 대하여' 앞에 오는 명사가 주어로 쓰일 것이다. 따라서 "어느 기자가 양곡 관리국장에게 내년도 식량 수급 문제에 대하여 질문하였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어느 기자에 의하여 양곡 관리국장에게 내년도 식량 문제가 질문되었다."라는 문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별 수 없는 영어 문장이다. '질문되다'와 같은 야릇한 조어도 문제거니와 앞에 든 신문 사설 문장에는 그나마 '질문되다'의 주어도 없다.
요즈음 "그런 일이 그렇게 잘 되어지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되어지다'란 말이 흔히 쓰인다. '되다'가 이미 피동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다시 '지다'를 붙여야 속이 시원한 까닭이 무엇일까? '되어지다'는 "정부는 ○○억불의 보유 외환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과잉 표현이다. '보유'에 이미 '가지다'란 뜻이 있는데 쓸 데 없이 이중 표현을 하는 것처럼 '되어지다'도 쓸 데 없는 중복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