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자(한글) 이름의 변천에 대하여
1.
'훈민정음'이 세상에 공포된 것은 우리 겨레의 긴 역사를 통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뜻깊은 일이다. 이것은 중국에 대한 우리 겨레의 자주정신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에는 반드시 가로막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말을 적는 우리나라 글자의 이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한글'에 이르기까지 온갖 어려움을 겪어 왔다. 다음에 우리나라 글자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일컬어져 온 것을 들고, '한글'로 정착된 내력을 최현배 지은 <한글갈>에 기대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훈민정음(訓民正音)]
'훈민정음'은 세종 25년(서기 1443년)에 창제하여 세종 28년 음력 9월 상한(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잡아서 '한글날'로 정함.)에 반포했다.
세종 대왕은 글자를 창제할 때부터 반포한 뒤 얼마 동안은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계속 써 왔는데, 그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으며 <월인석보> 첫머리에 붙어 있는 희방사본(喜方寺本), 박승빈 님이 간수한 단행본과 궁내성(宮內城) 장본(藏本)의 제목이 모두 '훈민정음'으로 되어 있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두 가지의 뜻이 있다고 하겠는데, 하나는 창제된 글자의 이름을 나타내고, 하나는 글자를 만든 원리를 풀이한(반포용으로 펴낸) 책의 이름을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본문의 해설에 "百姓셩 치시논 正 소리라." 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하였다. 소리와 글자의 개념은 엄연히 다르지마는, 창제된 글자가 한자(漢字)처럼 뜻을 나타내는 뜻글자가 아니고 소리를 적는 소리글자이므로, 소리를 곧 글자로 본 것이다.
세종 대왕은 '훈민(백성을 가르치는)'의 목적을 어디에 두었을까?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말에 적합한 글자가 있는데, 우리나라만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 글자인 한자를 빌어 쓰니 안타깝고,
둘째, 한자는 배우기 어려운 글자이기 때문에 배우고 익히는 데 일반 대중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니 가슴아픈 일이며,
셋째,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해,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이르지 못하여 백성에게 원망을 듣는 정치가 이루어져 어진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으므로,
넷째, 이 글자를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말글살이를 하는 데 편리하게 쓰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곧, 대중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있다.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줄여서 '정음(正音)'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렇게 줄여서 처음 쓰기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도 우리 민족의 생활 모습을 기록한 것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모두 한자를 빌어서 표기한 것이거나 한문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냈다고는 볼 수 없다. '훈민정음' 창제와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민족의 생활 모습이 문학 작품으로 표현되고 말글살이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언문(諺文)]
'훈민정음'을 '언문'이라고 일컬었는데, '언문'이란 말이 쓰인 것을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록에 기대어 보면,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 혹은 창제 초기에 '언문청', 곧 말글을 연구 제정하는 관청이 금중(禁中)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가 있어서, '언문'이란 말은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부터 있던 이름이라 하겠다.
'언문'은 처음에는 넓은 뜻으로 그 당시에 쓰인 '글'을 나타냈는데,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는 좁은 뜻으로 '훈민정음' 그 자체를 '언문'이라고 하였다. '언문'에서 '언(諺)'을 취한 것은 중국을 높이고 우리나라를 낮추려는 생각에서 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약을 향약(鄕藥)이라고 했듯이, 중국의 한자가 아닌 우리나라 글자란 뜻으로 이름한 것이다.
세종 26년(서기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이 낸 반대 상소문에 '언문'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언서(諺書), 언자(諺字, 언에·은에(諺語)]
'언문'과 비슷한 이름으로 '언서(諺書)'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한문을 진서(眞書)라 함에 대하여 '정음'을 '언서'라 한 것이다.
'언문'을 '언자(諺字)'라고도 했다. '언서'와 '언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경상도 시골말에는 '언에', '은에'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반절(反切)]
중종 22년(서기 1527년) 최세진이 펴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우리 글자를 '반절(反切)'이라고 하였다. '반절'이란 한자의 두 자음(子音)을 반씩 따서 한자음을 표시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를테면, '東'자의 음은 '德'의 초성 'ㄷ'과 '紅'의 중성과 종성 '옹'을 합쳐서 '동'이 되는 것이므로 '德紅反' 또는 '德紅切'이라고 표시하였다. '훈민정음'은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낱내글자(음절문자)가 아닌 낱소리글자(단음문자)이기 때문에, '반절'과 같다고 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절'의 기원에 관하여 살펴보면,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반절법은 본래 한인(漢人)에게는 없던 것인데 서역(西域)에서 나왔다고 하며, <안씨가훈(顔氏家訓)>의 음사편(音辭篇)에 한말(漢末)의 사람 손숙(孫叔)이 홀로 '반어(反語)'를 알았는데 위(魏)에 이르러 쓰였으며, 진(晋)의 <송경문필기(宋景文筆記)>에는 위(魏)의 손염(孫炎)이 처음으로 '반절'을 만들었다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반어', '반절'의 이름은 없었으나 실제로 사용한 증거는 있으니, 반절법은 중국에서의 불경 번역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어떤 이는 승려가 만들었으며, 시대를 훈몽자회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고, 영조 이후로 보는 이도 있다. 어떻든지 '반절'이란 이름은 우리 글자의 이름으로서 걸맞지 않다.
[암클, 창살글자, 뒷간글자, 과두문자(蝌蚪文字)]
사대부들이 세종 대왕의 참뜻을 깨치지 못하고 한문에 도취된 한자살이를 했기 때문에, 우리 글자는 부녀자들이나 익히고 쓰는 글자라고 해서 한때는 '암클'이라고 일컬었으며, 우리 글자를 일부러 낮추어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전하기도 했는데, 세종 대왕께서 용변을 보실 때 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면서 '창살글자' 또는 '뒷간글자'라고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훈민정음' 반포에 대하여 극력 반대한 최만리 무리들은 한자는 보기에 의젓한 좋은 예술스런 글자인데 반하여, 우리 글자는 마치 올챙이가 고물고물 기어가는 꼴의 과두문자(蝌蚪文字)라고까지 했다.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우리 글자를 만든 원리에 대하여 구구한 설도 있었지마는, 다행히도 광복되기 5년인 전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원본이 발견되어, 그 구구한 억측은 깨끗이 사라졌다.
[국문(國文)]
우리 글자는 지난날 멸시를 당하면서 수세기 동안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고종 3년(서기 1894년) 갑오경장 때에는 우리 글자를 '국문'이라고 일컬었다.
갑오경장으로 인하여 종래의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관리 임명 개혁과 동시에 각 방면에 자각의 광명이 비치게 되었다. 따라서 국어, 국문에도 자각이 있게 되어, 학자 중에는 '정음'이 조선 고유의 문자임과 그것이 과학적 기초 위에 선 것임을 주장하고 '언문'이라고 하던 이름을 '국문', 방언이나 속어라고 하던 것을 '국어'라 하게 되었다. 또 당시 한국 정부에서도 갑오경장 이래로 공사(公私) 문서에 비로소 한자와 정음을 섞은 문체, 국한문체란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국문'이라고 하면 글자 이름으로서는 걸맞지 않지만, 한문만을 숭상하던 정신만은 다소나마 누구러질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한글]
세종 대왕 이후 우리 말글 연구와 그 보급 및 계몽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주시경 님이 처음으로 우리 글자의 이름을 '한글'이라고 이름하였다.
'한글'의 뜻은, '한국(韓國)'의 '한'과 '한길, 한물' 따위의 '한' 곧 '큰'의 뜻과 '한낮, 한밤중, 한가운데'의 '한' 곧 '바른'의 뜻과 오직 '하나'라는 뜻 들이 합쳐진 글자로 풀이된다.
최현배 지은 <한글갈>에서 '한'글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신문관에서 발행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보이>의 끝에 가로 글씨의 제목으로 실린 것이 처음인데, 이 이름이 '언문'의 이름을 가름하는 새 이름으로 널리 쓰인 것은 '훈민정음' 반포의 제1회 기념식을 치른 뒤이다. 그 해 음력 9월 29일의 기념일을 '가갸날'이라 이름지어 매년 기념식을 지내기로 하였는데, 이듬해 연구 잡지 '한글'이 간행되어 일반 사람들이 '한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자 기념일을 '한글날'로 고치고, '한글'이란 이름이 점차 자리잡게 되었다.
주시경 님은, 나라의 바탕은 국민이 쓰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선각자이시다. 우리나라의 말과 글이 이렇게 혼란해서는 나라가 부강해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선생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말과 글을 바로잡으려고 결심하고 온갖 고생을 참아 가며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글자를 얕잡아 부르던 것을 '한글'이라고 높여 부르게 된 것도 선생에게서 시작된 것이니, 세종 임금 이후 '한글'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지금까지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한글'에 이르기까지의 글자 이름이 여러 가지로 일컬어져 온 것을 들고 '한글'로 정착된 내력을 살펴보았다.
'한글' 이름의 변천을 통해 보더라도 우리의 문화유산인 '한글'은 가시밭길을 헤쳐 온 수난의 역사를 걸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어렵게 지켜 오기까지는 많은 선각자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것이다. 이젠 먹구름을 걷어 내고 우리 말과 글을 바로 잡고 지켜 나가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다시는 우리 말과 글에 멍에를 씌워서는 안 된다.
요즈음 '한글'을 나라의 글자라는 뜻으로 '국자(國字)'라고 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한글 전용을 반대하는 이 가운데 어떤 이는 '한글'이란 말을 하기도 듣기도 싫어서 '국자'로 고쳐 부른다고 하니, 그런 말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나라 글자라고 할 정도면, 나라 글자에 대한 마음가짐으로서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 그렇다고 하면, 자가당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