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소리 표기에 대하여
1. 우리말의 운소(韻素)
전통적 운소론(prosody)에서 다루어지는 세 가지 요소, 곧 말소리의 세기(stress), 높이(pitch), 길이(length) 중, 현대 국어에 있어서 단어(혹은 형태소)의 뜻 구별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길이를 들 수 있다. 방언적 특색의 기술(記述)에 있어서는 높이가 지적되기도 하나, 특정 음절(단수 혹은 복수의)에 부가되는 높이가 어의(語義) 구별에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문말(文末)의 억양(intonation)이 단정, 의문(질문), 명령 등의 법(mood) 표시와 관계되기도 하며, 문중(文中)의 어떤 단어나 구, 절 등에 결부된 높이가 화자(話者)의 감정 표출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일정한 틀(型)이 있는 게 아니어서,(1) 수의적(隨意的)인 양상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북한의 문법 기술에서는
라고 하여(2) 높이도 단어의 뜻 구별에 간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함경도 말의 음운 현상에 따른 해석일 테지만,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음절에 부가되는 소리의 높낮이가 형태소 단계의 변별적 자질을 표시하는 성조(tone)는 중국어의 큰 특징인데, 동남어나 아프리카 및 일부 유럽 말들에서도 나타나는 운율적 현상이다. 성조를 가지고 있는 말에서는 이 음절 음조가 변별적 기능을 표시한다. 훈민정음에서 말한 4성은 말소리의 높낮이를 중국어식 성조에 따라 구별했던 것인데, 그중 상성 계열은 현대어에서 대체로 긴소리로 나타난다.
2. 긴소리 표기의 필요성
긴소리는 분절 음소인 모음 위에 얹히는 부차적(副次的) 요소다. 한 개 형태소에서의 어떤 모음이 가지는 긴소리 특성도 일률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놀다, 놀지'에서의 모음 /ㅗ/는 긴소리 [ㅗː]인데, '놀아, 놀았다'에서의 /ㅗ/는 짧은소리 [ㅗ]로 실현되는 것이다. 길이 자체는 부차적 양상으로서, 그 모음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1음소 1자모의 대응이 완전한, 이상적인 음소 문자(phonemic alphabet)의 체계라 할지라도, 음의 장단까지 기본 자모를 가지고 표기하기는 어렵다. 각 모음 음소가 환경에 따라 지니게 되는 길이를 표기하는 기호는 하나의 음소에 대응되는 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긴소리 표기 문제가 맞춤법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바람직한 표기법에서는 기본 자모를 합리적으로 활용하여 긴소리가 지니는 변별적 특징을 표지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글로 표기되는 '개, 눈, 밤, 종' 등은, 그것이 사용된 문맥(文脈)을 떠나서는 '浦, 眼, 夜, 鍾'인지 '犬, 雪, 栗, 僕'인지 분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긴소리 표기를 하면 동철이의어(homograph)(3)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말의 발음 현상은 매우 혼탁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단 구별의 문란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전에서 긴소리를 가진 어휘가 통일적으로 다루어지고,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과정에서부터 철저한 발음 지도가 행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말하기, 읽기 교과서 및 교사용 지침서에 긴소리 표시가 합리적으로 학습 자료가 충분히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3. 그동안의 방식
(1) '훈민정음해례'에서의 성조 표시
'훈민정음해례'의 '합자해'에서는 "凡字之左, 加一點爲去聲, 二點爲上聲, 無點爲平聲, 而文之入聲, ..."이라고 하였는데, 긴소리 표기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조 기호를 사용하여 변별적 특징을 표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뒤의 사전에서 긴소리 음절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을 쳐서 표시한 것은 훈민정음의 상성(上聲) 표시 방식을 본뜬 것으로 생각된다.
(2) 사전에서의 긴소리 표시
(3) 외래어 표기법에서의 긴소리 표기
1948년, 학술 용어 제정 위원회 제20분과 언어 과학 위원회에서 심의 결정된, 문교부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야아드(yard), 토오쿄오(東京)'처럼 같은 모음을 거듭 쓰는 방식을 취했었는데, 1985년 12월 28일 고시된 (개정)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같은 모음 거듭적기 방식을 폐지하였다.
(4) 그 밖의 의견
(2)에서 보인 사전에서의 긴소리 표시 방식 이외에, 'ㅏㅏ, ᆂ, ᆍ'같이 같은 모음을 겹쳐 쓰자는 안(이길수), 아주 딴 글자를 써서, 'ㅓ'의 긴소리는 '·'로, 'ㅕ'의 긴소리는 'ᆝ'로 적자는 안(김윤경) 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5)
4. 문제점
국제 음성학회의 '국제 음성 기호(I.P.A.)'에서는 긴소리(full length)[ː], 반 긴소리(half length)[ꋿ], 짧은소리[무기호]로 표시하게 되어 있다. 3-(2)-⑦의 방식이 이를 따른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예컨대 'こうちょう(校長), じゅうぶん(充分)'처럼 긴소리 음절 뒤에다 'う'를 써서 표기하는데, 다만 외래어 표기에서는 'サ-カヌ(circus), サ-ビヌ(service)'처럼 긴소리 음절 뒤에 <->을 쳐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자처럼 음소 단위로 적는 경우나, '가나' 글자처럼 개음절 (open syllable) 단위로 적는 경우는 [ː]을 치거나, 혹은 같은 모음(음절)을 거듭 쓰든지 특징 모음을 사용하는 방식이 채택될 수 있지마는, 한글 맞춤법은 음절 단위로 이루어지며, 국어의 음절에는 폐음절(closed syllable)이 많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국어의 음운 구조에 있어서는, 예컨대 ① '갸(륵하다), 궤(櫃)' 같은 2중 모음 음절에서의 긴소리는 반모음 /j,w/를 제외한 /ㅏ, ㅔ/이며, ② '감(柹), 골(谷)' 같은 폐음절에서의 긴소리는 가운뎃소리인 /ㅏ, ㅗ/인 것이다. ①을 [갸ː르카다], [궤ː]처럼 표시하면 'ㅑ, ㅞ'가 긴 것으로, ②를 [감ː], [골ː]처럼 표시하면
',
' 또는 'ᄆ, ᄅ'이 긴 것으로 파악되는 형식인 것이다.
또 일본의 경우와 같이 특정 모음을 긴소리 표기에 이용하여 '감(柹)→가음/가움, 뱀(蛇)→배음/배움, 빌다(祈)→비을다/비울다'처럼 적을 수도 없다. 가능한 것은 '가암, 배앰, 비일다'처럼 동일한 모음을 거듭 쓰는 형식인데, 2중 모음의 경우는 '벼얼(星), 궤에(櫃)'처럼 후행 모음만 덧써서 표기하게 된다.
긴소리 표기에서 같은 모음을 거듭 쓰는 데는 읽기에서의 발음 및 형태 구조의 면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우리말에 숙달하지 못한 어린이나 외국인의 경우, '가암, 고올, 벼얼'처럼 적힌 단어를 [ka#am,ko#ol,piə #ə l]과 같이 두 개 음절로 읽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단음절어인 이 단어들을 2음절어로 잘못 인식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5. 어떤 방식이 좋을 것인가
유만근 교수는, 우리말에서 소리의 길이가 차지하는 기능 부담량으로 보아 한글 맞춤법에서 긴소리 표기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그 방안으로로서 현용 'ㅎ' 받침을 폐지하고 그것을 긴소리 기호로 돌려 쓰자고 하였다(6) 그 논지(論旨)는, 'ㅎ' 받침의 형태 음운론적 성격보다 음성학적 견지에서의 조음적 특성 해석에 주안점을 둔 이론으로 'ㅎ' 받침의 무용론을 주장하였으며, 무성 성문 마찰음(breathed glottal fricative consonant)인 /ㅎ/은 결국 무성 모음(devoiced vowel)으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ㅎ'자를 모음 다음에 받침으로 놓아 긴소리 기호로 삼는다면 음리상(音理上)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자형상(字形上)으로도 시각(視覺)에 불편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시어 '(事),
밥, 갷(犬), 샣(鳥),
(栗),
(生)짐승,
(石),
북(慶北), 겋리(距離)' 등의 표기 형태가 당장 생소하긴 하지만, 첫째, 긴소리 표시를 해당 음소(모음) 단위로 한다는 점, 둘째, 사전 등에서의 발음 표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맞춤법의 차원에서 긴소리를 표기한다는 점, 셋째, 새로운 자모를 만들거나 보조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 등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만한 방식래고 생각한다.
그러나 'ㅎ'을 긴소리 표기에 이용하자는 의견에는 거부 반응도 큰 것 같다. 그 이유는, 첫째, 모음(음소)의 긴소리를 적는 데 자음(음소) 글자를 사용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괴, 둘째, 이른바 형태주의 표기 원칙에 따라 어휘 형태소의 받침으로 쓰이는 'ㅎ' 받침을 다만 음성학적 해석에만 의거하여 폐지하는 것이 당치않다는 것이며, 셋째, 오랜 관습 때문에, '(개밥; 犬飯→)갷밥, (새집; 鳥巢→)샣집'처럼 적을 때 [개팝, 새칩]으로 읽히는 혼란이 따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 방식이 좋을 것인가?
한글의 풀어쓰기가 실행되면 이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수 있겠지만, 풀어쓰기가 조속히 실현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현행과 같은 음절 단위(받침이 붙는 경우가 많은) 표기 형식에서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긴소리 표기 방식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 음성 기호 [ː], [ꋿ]의 사용은 음표 문자(phonetic alphabet)에 의한 기록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한글 맞춤법에서 적합하게 활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4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전에서 발음 형태를 보이는 경우에는 긴소리인 모음의 발음을 정확하게 표시하지 못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우리글에서는 비합리적인 방식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모음의 중복 표기는 가장 무난한 방식이긴 하지만, 자칫 한 개 음절이 두 개 음절로 읽힐(발음될) 염려가 있고, 또 실제의 음절 수와 표기 형태상의 괴리(乖離)가 생기므로, 역시 합리성이 결여된다.
모음은 성절음(syllabic)이지만, 맞춤법에서의 음절은 반드시 첫소리 자리에 'ㅇ'를 붙여서 적게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자형(字形)의 정제(整齊)에 있다고 치더라도, 표기 형식상의 모음 음절은 앞에 'ㅇ'를 가지는 것이다. 이 'ㅇ'는 중국어에서의 자음 음소 /·/나(7) 일본어에서의 자음 음소 / '/에 상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모음 음절에 'ㅇ'를 안 붙인 것은 하나의 음절 표기 형식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아'는 하나의 음절을 표기한 것이지만, 'ㅏ'는 하나의 음절을 표기한 형태가 아니라, 단순히 모음 음소 /a/를 나타내는 기호인 것이다. 이런 해석에 입각하야, 필자는 긴소리 표기 방식으로 'ㅇ' 없는 모음 글자의 중복 형식을 제안한다. 예컨대
감[감ː]→가 | 없다[업ː따]→어다 |
솜[솜ː]→소 | 줄줄[줄ː줄]→주ᅮ줄 |
그림[그ː림]→그-림 | 빌다[빌ː다]→비다 |
뱀[뱀ː]→배 | 게눈[게ː눈]→게ᅦ눈 |
괴다[괴ː다]→괴ᅬ다 | 야구[야ː구]→야ᅡ구 |
별[별ː]→벼 | 교육[교ː육]→교ᅩ육 |
유명[유ː명]→유ᅮ명 | 얘기[얘ː기]→얘ᅢ기 |
예술[예ː술]→예ᅦ술 | 화재[화ː재]→화ᅡ재 |
왜가리[왜ː가리]→왜ᅢ가리 | 웬걸[웬ː걸]→웨걸 |
쥐다[쥐ː다]→쥐ᅵ다(8) | 의견[의ː견]→의ᅵ견 |
처럼 적게 된다.
물론, 이 방식도 활자 제조의 부담, 자형의 짜임새 등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으나, 자모의 음가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불합리성도 해소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6. 맺는말
위에서 알아본 긴소리 표기 방식은 (1) 보조 기호를 사용하는 것, (2) 같은 모음(음절)을 거듭 적는 것, (3) 특정 모음(음절)을 이용하는 것, (4) 'ㅎ' 받침을 붙여서 적는 것 등이다. 그런데 우리글은 음절 단위로 표기되며, 또 우리말에는 폐음절이 많기 때문에, (1)의 방식은 해당 긴소리(모음)를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하며, (2)의 방식은 자칫 두 개 음절로 읽히거나 어형을 그릇 인식하게 할 수 있고, (3)의 방식은 어형과 발음 형태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4)의 방식은 해당 모음의 긴소리를 정확하게 표시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자음 글자로 모음의 긴소리를 표기한다는 불합리성과, 이른바 형태주의 원칙을 취하고 있는 현행 맞춤법에서 'ㅎ' 받침을 없애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지적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2)의 방식을 취하되, 두 개 음절로 읽히거나 어형을 그릇 인식하게 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ㅇ' 없는 모음자만을 거듭 쓰는 것이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맞춤법에서 긴소리 표기 방식이 갖추어진다면 동철이의어(homograph)의 수가 대폭 줄어들 뿐 아니라, 국어의 발음 현상을 시정,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검토를 통하여 바람직한 방식을 결정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