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固有 漢字

南 豊 鉉 / 단국대 교수·국어학

Ⅰ. 序 言
    漢字는 表意 文字 또는 表語 文字라고 한다. 中國語의 單語나 形態素를 表記한다는 점에서는 表語 文字인데, 중국의 주변 국가에서는 다른 音이나 다른 방법(예컨대 訓)으로 읽으면서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表意 文字가 된다.
    單語나 形態素는 音聲과 뜻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文字는 여기에 視覺的인 形態가 가해지므로 表語 文字는 字形, 字音, 字意의 結合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중국에서는 文字의 三 要素라고 한다. 韓國의 固有 漢字라고 하면 이 三 要素 가운데 어느 하나 이상이 중국의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文字의 특성은 字形에 있고 字音과 字意의 특수성도 字形을 중심으로 하여 論議하게 되므로 固有 漢字의 特性도 字形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하게 된다.
    表語 文字인 漢字는 한 글자가 한 單語나 形態素를 나타내므로 이론적으로는 그 言語에서 사용되는 單語나 形態素의 수만큼 글자의 수가 많아야 한다. 그것도 시대에 따라 점점 增加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漢代의 說文解字에는 9,000여 자가 실리는데 그쳤지만 淸代의 康熙字典에는 50,000여 자나 실리게 된 것이다. 글자의 수가 이와 같이 많게 되면 자연 글자들 간의 변별을 위해서도 劃數가 복잡하게 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六書의 原理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배우고 익혀 사용하는 데는 여간한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를 단순화 하려는 경향이 나타나 俗字 내지는 異體字가 생겨났다. 또 漢字는 單音節語인 中國語의 특성을 반영하여 하나의 글자가 한 音節을 나타내는 音節 文字이기도 하다. 漢字가 가진 이러한 특성에다 韓國的 특성이 加味되어 만들어진 것이 韓國의 固有 漢字이다. 따라서 우리의 固有 漢字라고 하더라도 넓은 意味의 漢字이지 그와 동떨어진 별개의 문자는 아니다.
    漢字.漢文은 아주 이른 시기에 이 땅에 輸入되어 사용되었다. 아마도 漢四郡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미 이 땅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하여 19세기까지는 우리 先人들의 文語 生活의 中心을 이루면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우리의 文語 生活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사용되고 있다. 漢字를 接하게 된 민족 가운데는 漢字의 構成 原理를 응용하여 그들의 독특한 文字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契丹 文字, 女眞 文字, 西夏 文字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漢字.漢文을 받아들여 原形대로 사용하여 왔다. 우리 先人들은 이 文字를 外國의 文字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文字를 통하여 聖人들의 가르침을 배웠고 수준 높은 文學 作品을 즐길 수도 있었다. 또 당시는 漢文이 國際的인 言語여서 중국은 물론 契丹, 女眞, 蒙古, 日本 등 여러 나라와의 의사소통도 이것으로 이루어졌었다. 口語로는 뜻이 통하지 않아도 漢文으로는 뜻이 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敎養人들은 漢文을 당연히 배워서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또 이러한 文字 生活을 통하여 우리의 文化가 높은 水準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先人들은 漢文을 통하여 수준 높은 文語 生活을 하는 한편 漢文의 音과 訓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表記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鄕札, 吏讀, 口訣, 固有 名詞 表記라 불리는 借字 表記가 그것이다.
    借字 表記가 발달하는 배경에는 漢文의 學習 方法 내지는 그 讀法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漢文 독법은 漢文을 그 語順에 따라 읽으면서 句讀에 해당하는 곳에 우리말의 조사와 어미를 보충하여 읽는 順讀 口訣이지만, 이러한 讀法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漢文을 우리말로 새겨서 읽는 釋讀 口訣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讀法이 우리말 表記에 응용되어 鄕札과 吏讀가 발달했던 것이다. 漢文 讀法이 順讀 口訣로 바뀐 것은 고려 중엽 이후인 것으로 믿어진다. 漢文의 讀法이 이와 같이 바뀌었는데도 借字 表記法은 옛 관습에 따라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왔으므로 여기에 사용되던 漢字(借字)가 독특한 讀音과 字形을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固有 漢字를 이루는데 중요한 一翼을 담당했던 것이다.
    다음에 구체적인 事例를 통하여 固有 漢字가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Ⅱ. 合字에 의한 固有 漢字
    東國正韻 序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용렬한 스승과 세속의 儒生들이 反切法을 몰라서 韻躡의 要體를 혼동하고 字體가 서로 비슷함을 인하여 같은 음을 만들고 前代의 避諱로 인해서 他音을 빌리었다. 때로는 두 자를 合해서 한 자를 만들고 때로는 一音을 나누어서 둘을 만들었다. 때로는 다른 글자를 借用하기도 하고 點劃을 加減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漢音에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俗語에 따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字母에 있어서 七音의 淸濁과 四聲이 모두 변함이 있었다.

이는 우리의 漢字音이 訛傳된 경위를 밝힌 다음 그 是正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글이다. 이 가운데 두 자를 합해서 한 글자를 만들었다는 대목이 있어 주목을 끈다. 이러한 合字法은 우리의 漢字 使用에서 매우 오랜 傳統을 가진 것으로 이로 인해 새로운 漢字가 만들어진 예가 많다.
    萬機要覽(財用編 二, 田結)에서는 畓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旱田과 水田을 통틀어 田이라 일컫는다. (지금은 旱田을 일컬어 田이라 하고 水田을 일컬어 畓이라 한다. 畓은 본래 그 글자가 없었는데 두 글자를 이어 써서 한 글자를 만들었고 그것이 畓의 자형에 가까우므로 그 音을 빌어 쓰는 것이다.)

이는 水田을 縱書로 이어 써서 畓자를 만들었고 그 글자의 모양이 畓과 비슷하여 畓의 음을 따서 '답'이라고 읽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이 글자는 三國遺事(卷二, 駕洛國記)에 新畓坪이라는 地名 表記에 사용되었고 그 註에 "畓은 俗文이다"라고 하여 이 글자가 世俗에서 造字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또 畓자의 사용이 이미 고려 중엽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인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이미 사용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萬機要覽의 같은 조항에서 大豆가 太로 된 것도 畓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吏讀便覽에서는 "세속에서 黃豆를 太라고 한다. 黃豆는 콩 가운데서 큰 것이므로 大자의 밑에 콩의 모양을 본 뜬 점을 붙인 것이다"라고 하여 太자가 콩을 뜻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 太자는 大東韻府群玉에 '東人呼豆曰太 方言也'라 하였다. 이는 說郛를 인용한 것인데 說郛는 또 鷄林類事를 옮겨 적은 것이니 콩을 太라고 한 것은 이미 12세기 초에도 사용되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日本 正創院에 보존된 第二新羅文書는 8세기 중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大豆의 表記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豆자가 正字로 쓰였고 한 번은 大자 밑에 곡선으로 '之'자와 같이 써서 앞 뒤 문맥을 이해하지 않고는 大豆를 표기한 것임을 확인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로 보면 大豆도 畓의 경우와 같이 두 글자를 이어 써서 한 글자를 만들었고 그 다음 豆자를 흘려 쓰던 것이 점으로 바뀌어 太자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점이 콩을 象形한 것이라는 견해는 후대인이 附會한 俗說로 생각되는 것이다.
    萬機要覽에는 '六矣㕓'의 註에 "俗稱 六注比"라고 하였다(財用編 五). 矣자가 '주비'로 읽힘을 보여주는 註이다. 또 "百負가 結이 되고 八結이 한 夫가 되는데 夫는 '矣'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財用編 二, 田結) 즉 八結이 한 '주비'가 된다는 뜻이다. 또 矣가 '주비'로 읽히게 된 과정에 대하여

結夫의 夫는 夫자의 위에 圈標를 덧붙이어 쓰던 것이 夫가 圈標에 이어져서 矣가 되었다. 世俗에서 이를 '注非(주비) 矣'라고 한다.

고 하였다. 이는 結夫(주비)의 표시로 夫자 위에 ○표를 하던 것이 字形으로 굳어져 矣자와 같게 되었으므로 矣자를 '주비 의'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漢字 '矣'가 '주비'라는 우리 固有의 訓을 갖게 된 경위를 밝힌 것이다. '주비'라는 단어는 15세기에도 드물게 쓰였고 후대 문헌에선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비 의(矣)'자의 성립도 15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畓, 太, 矣 들이 成立된 경위를 종합해 보면 이들은 旣存의 漢字와는 무관한 과정을 밟아 만들어졌지만 만들어진 字形이 기존의 한자와 비슷하거나 일치하기 때문에 '답, 태, 의' 등과 같은 讀音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讀音은 후대에 와서 붙여진 것이고 이 글자들이 성립되던 당시에는 讀音이 없이 訓讀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畓', '太'의 경우는 그 訓이 單音節語인 '논', '콩'이었으므로 이것이 두 글자를 한 글자로 축약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자들은 公私 文書와 같은 實用文에 주로 쓰이고 詩文과 같은 正格의 漢文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行政 文書는 간편과 신속이 중요한 것이니 前後 文脈에서 辨別만 되면 반드시 正字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쓰고 읽기에 불편이 없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實用文에서 合字가 사용된 예는 멀리 三國 時代까지 소급된다. 591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慶州 南山新城碑에는 다음과 같은 合字의 예가 나온다.
(大舍) (小舍) (上干) (一伐) (一尺) (大烏)
(小烏) (上人)

이들은 官階名과 職責名에 한하여 나타나는데 統一 新羅 時代와 高麗 初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大舍)(新羅華嚴寫經造成記, 755)
(乃末) (功夫)(永川菁堤碑貞元銘, 798)
(乃末) (伯士)(新羅禪林院鍾銘, 804)
(大等) (大末) (乃末)(興法寺眞空大師塔碑陰記,940)
(大等) (大末)(龍頭寺幢竿記,962)

華嚴寫經造成記에 쓰인 大舍의 合字는 두 글자가 混淆되면서 한 획이 줄어들어 새로운 形態가 생겨났다.
    木은 等자의 草書體에서 변형된 것으로 三國 時代부터 흔히 사용되어 오던 것이다. 이것이 大자와 合字됨으로써 역시 새로운 자형이 생겨났다.
    이 合字들은 같은 글 안에서도 合字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여 그 形態가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宮階名이나 職名이 바뀌면서 이러한 자체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이러한 合字가 하나의 자체로 굳어지는 경향이 생기기도 하였다. 巬는 高麗史(元宗 15年)에도 쓰였고 大明律直解(工律)와 經國大典(工典)에는 巬(恐夫)와 같이 새로운 자체로 만들어져 쓰였다.
    漢字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借字 表記法에선 단순히 漢字의 音과 訓만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表意性을 加味하여 차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鄕藥救急方의 예를 보면 石決明의 鄕名 '보'는 '生包'로 쓰면 될 것인데 이것이 海産物이므로 '包'자에 意符 魚를 덧붙여서 '鮑'로 표기하였다. 薏苡의 鄕名도 '伊乙每'와 '伊乙梅'로 표기하였는데 後者의 梅는 '每'에 意符 '木'을 덧붙여 쓴 것이다. 이와 같이 漢字를 假字(表音字)로 사용하면서도 表意性을 덧붙이는 경향은 새로운 固有 漢字를 만드는 데도 나타난다. 長栍의 栍은 生으로 써도 충분한 것임에도 意符 '木'을 덧붙였다. 이와 같이 하여 固有 漢字 '栍'자가 만들어졌는데 漢字의 構成 原理에서 보면 形聲字이다. 이러한 固有 漢字의 形聲字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鮎貝房之進, 俗字攷 참조.)

岾(고개 점) 浌(개벌 벌) 猠(염소 전) 羘(소내장 양)
椧(흠통 명) 筽(고리 오) 䰳(가물치 정) 䑸(배무리 종)
䰶(망둥이 망) 艍(거루 거) 磚(박돌 박) 縇(선단 선)
獤(돈피 돈) 螦(좀 소) 鮰(민어 회) 䥜(줄칼 한)
鐥(대야 선) 襨(의대 대) 櫷(괴목 구) 欌(옷장 장)
䲈(삼치 삼)
(訓과 音은 필자가 현대어로 달았음.)

이 가운데 䲈는 麻자를 훈으로 읽어 '삼'音을 취하고 여기에 意符 '魚'를 붙인 것이다. 漢字의 音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訓도 빌리어 固有 漢字의 音으로 삼은 점이 특이하다. 椧, 䰳, 螦, 鮰, 鐥 등은 왜 그러한 聲音을 취하게 되었는지 미상이다. 아마도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한다. 일례로 䥜자는 '거훔한'이란 옛말이 있어서 그 끝음절 '한'에 맞추어 '閑'을 취하고 意符를 붙인 것이지만 지금은 이 말이 없어져 訓과 音이 동떨어지게 된 것이 참고된다.
    다음의 漢字들은 中國에도 있는 漢字이다. 그러나 그 한자와는 전연 관계없이 한국의 독특한 意味를 가지고 있고 訓과 音이 形聲의 原理를 나타내고 있어 韓國의 固有 漢字에 속하는 것이다.

椺(들보 보) 椳(욋가지 외) 橽(박달나무 달)
蔈(표고버섯 표) 鞰(온혜신 온) 鰱(연어 연)

이 밖에 形聲字에 가까운 것으로 㯑자가 있다. 이는 '탱자 탱'자인데 鄕樂集成方(1433)에 처음 쓰인 것이다. 이 글자는 中國에서 귤의 일종을 나타내는 漢字 棖의 음은 ''이어서 ''음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비슷한 글자인 張자에 木을 더하여 造字한 固有 漢字이다.
    三國史記(地理誌 杆城)에 䢘자가 쓰이고 있다. 이 글자도 形聲에 의한 固有 漢字로 믿어지지만 그렇게 쓰게 된 경위는 알 수가 없다.
    文語 生活의 주류를 漢字가 이루던 시대에 會意에 의하여 造字된 固有 漢字가 없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漢字가 알려져 있다.

硳(붉은 흙 적) 榌(사다리 비) 稤(경곡 수)

이 가운데 稤자는 禾의 古訓인 '쉬'의 音을 讀音으로 삼은 것이어서 䲈의 表音과 같이 漢文 釋讀의 化石을 보여 주는 것이다.

Ⅲ. 省劃에 의한 固有 漢字
    漢字는 복잡한 字劃을 가진 文字이어서 正字대로 쓰자면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글자이다. 그리하여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무방한 實用文이나 개인적인 備忘에서는 字劃을 생략하여 사용하는 관습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 생략은 한 두 획을 생략하는 것에서부터 거의 모든 획을 생략해 버리고 한 두 획만 남기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정하지가 않고 그 밖에도 변체자를 사용하는 등 단순하지가 않으나 오랫동안 사용해 오는 동안에 어느 정도 그 자형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자형은 근래에 와서는 거의 없어졌으나 옛 사람들의 手迹을 살피다 보면 매우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비록 朝鮮朝 후기, 17세기 이후의 것이긴 하지만 승려들이 개인의 備忘을 위하여 佛書에 記入한 註釋들 가운데서 무엇과 같은 省劃字들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A) 正字의 뒷부분을 省劃한 것
(1) (章) (2) (寂) (3) 㣗(徧) (4) (機) (5) (權)
(6) 亠, (音) (7) (疑) (8) (感) (9) 显(顯) (10) 叩(嚴)
(11) 屯(頓) (12) 豆(頭) (13) 角(解) (14) 加(迦)
※ ( ) 안의 글자가 正字임.

이 省劃字들은 한 책에 한 두 번 우연히 쓰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써넣은 두 책 이상에 쓰인 것이다. 이 가운데 (5)의 權자의 省劃字는 오른쪽이 卌로 된 것이 특이하지만 이는 艹에 한 획을 더 내려 그은 것이 아닌가 한다. (11)~(14)는 形聲字의 聲符에 해당하는 글자들이 남고 그 뒤의 意符는 省劃된 것인데 이는 表音字에 意符를 첨가한 造字(栍)와는 對照를 이루는 자형이다.

(B) 正字의 앞부분을 省劃한 것.
(1) (能) (2) (修) (3) 夆(釋) (4) (經) (5) 戋(識) (6) 寸(尊) (7) (緣) (8) (錄)
(9) 胃(謂) (10) 失(, 實) (11) 里(理) (12) 舍(捨) (13) 吉(結) (14) (葉) (15) 全(詮) (16) 勿(物)
(17) 辰(震) (18) 帝(諦) (19) 吾(悟) (20) 票(摽) (21) (碍) (22) 忩(總) (23) , 辻(邊) (24) 还(還)

(1), (2)는 독립한 文字로서는 쓰이지 않는 글자이지만 승려들 사이에서는 널리 사용되었던 글자이다. (3), (4), (5)는 正字의 聲符에 해당하는 부분을 딴 것이지만 변형된 것이다. (6)에서 (22)까지는 正字의 聲符만을 따서 쓴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독립한 文字로서 사용되는 글자들이므로 固有 漢字가 될 수는 없다. (23), (24)는 中國에서도 俗字로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24)는 永泰二年銘石毘盧遮那佛造像記(766)의 吏讀文에도 쓰이고 있어서 매우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어 온 자형이다.

(C) 正字의 중간 부분을 省劃한 것
(1) 䛁(謂) (2) 枋(榜) (3) 汏(滅) (4) 㭧(槃) (5) 扎(提)

이 字形은 (A), (B)항에 비하여 적은 편이다. (1)과 (2)는 康熙字典에 올라 있으나 뜻이 전연 다른 것이어서 이와는 다른 글자이다. (2)는 또 形聲에 의한 造字로, (3)은 會意에 의한 造字로 볼 수도 있으나 그 正字에서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항에 넣는다. (4)와 (5)는 전형적인 우리의 固有한 字形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5)는 재방변(扌)과 是의 略體字 乀를 합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是의 略體字는 口訣에서 쓰이는 것을 이용한 것이므로 우리의 문화적 배경이 없이는 이러한 字形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D) 基 他
(1) 罖(羅) (2) 㕵(国, 國) (3) 众(衆) (4) 朩(等) (5) 刂(行) (6) 月(洐)

(1)은 中國의 俗字로는 ¿와 같은 字形이 쓰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선

이 字形이 일찍부터 쓰였다. 이 字形에서 앞부분을 省劃한 '亽'자가 13세기 중엽의 鄕樂救急方에 이미 쓰였고 이 글자의 앞부분을 또 省劃한 '∙'자가 고려 시대의 口訣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2)는 '國'자의 俗字인 囯에서 큰입구자를 작은입구자로 바꾼 것이다. 한결 간편한 자형이다. (3)은 衆자의 本字인 从人자를 변형시킨 것이다. 이러한 字形은 중국에서도 쓰였음직하다. (4)는 等자의 草書體를 直線化한 것이다. 이미 三國 時代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인데 朝鮮朝 末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5)도 行자의 草書體를 單純化시킨 것이다. 이 字形이 바탕이 되어 (6)의 자형이 나온 것이다. (4), (5)는 중국에서도 쓰임직한 것이지만 (6)은 우리의 固有한 字形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省劃字들의 사용은 매우 이른 時期부터 사용되었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古代의 古文書나 書籍이 거의 다 湮滅되어 자세한 쓰임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지난해(1988) 蔚珍에서 발견된 鳳坪의 新羅碑에서 謂의 省劃字인 '䛁'와 條의 省劃字인 '夈'를 확인할 수 있어서 이러한 省劃字의 역사가 매우 오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碑는 524年(法興王 11年)에 이루어진 것으로 推定되는 新羅 最古의 碑의 하나이다.
    佛家에서는 이들 省劃字들을 合字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朝鮮朝 後期의 佛書에서 確認한 것으로는

(菩薩) 扎(菩提)

의 두 가지가 있다. 은 均如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어서 매우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省劃字들은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中國에서도 이러한 字形들이 일찍부터 사용되어 왔다. 몇몇 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 号(號) 予(豫) 声(聲) 杀(殺) 岑(嶺)
(B) 余(餘) 処(處) 垦(墾) ¿(復) 內(納)
(C) 圧(壓) 夺(奪) 奋(奮) 㱓(齡) 寻(尋)

(A)는 뒷부분의 획을, (B)는 앞부분의 획을, (C)는 중간 부분의 획을 생략한 것이어서 우리의 省劃字들과 같은 原理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日本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省劃字들이 사용되었었음이 알려져 있다. 6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隅田八幡神社의 銅鏡에 銅과 鏡의 省劃字로 믿어지는 同과 竟이 쓰였고 8세기 초의 文書에 牟의 省劃字 '厶'가 쓰였다고 한다. 9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東大寺諷誦文稿에는

旦(檀) ¿(懺悔) (菩薩) (涅槃)

과 같은 省劃字와 그 合字가 쓰였다. 12세기에 이루어진 玉篇類 類聚名義抄에는

才(於) 亠(音) ㄴ(訓) 巠(經) 彳(從) 牛(物) 禾(和)
广(應) ¿(漢) 吾(語) 朱(珠) 彦(顔) 巽(選)

과 같은 省劃字가 쓰였다. (築島裕, 1981, p.111 以下 參照)
    이로 보면 韓.中.日 三國이 비록 구체적인 자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같은 原理에 의하여 省劃字들을 사용해 왔고 그 사용 연대도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그 最古碑의 하나인 6세기 초의 碑文에까지 소급됨은 놀라운 일이다.
    이제까지 보아온 省劃字들은 비교적 그 正字들을 용이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石文이나 古文書들을 대하게 되면 전연 이해할 수 없는 異體字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자는 三國 時代의 金石文에서부터 13세기 중엽의 鄕樂救急方에까지의 實用文에서 사용되어 온 것이다. 이 字形은 字典에도 올라 있지 않은 字形인데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는 巴자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로이 고증한 바로는 包자에서 변한 異體字임이 밝혀졌다. 최근 日本의 奈良市 長野王의 邸宅 遺址에서 발견된 木簡에서는 鮑자를 䰾로 쓴 것이 발견되었다. 자가 包자에서 변형된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자료이다.
    鄕歌와 口訣에서 사용되고 있는 尸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ㄹ'音을 나타내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三國遺事의 彌勒仙化 未尸郞에 대한 說話가 있고 이에 대한 說者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未는 彌와 聲이 서로 가깝고 尸는 力과 形이 서로 비슷하다. 이에 그 近似함으로 말미암아 (彌勒仙化와 末尸郞이) 서로 混迷된 것이다.
    이는 尸자의 형성이 '勒→力→尸'의 과정을 밟은 것임을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鄕札, 口訣의 '尸'자가 'ㄹ'음을 나타내게 된 것은 이와 같은 省劃과 變形의 과정을 밟은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미一然의 시대에도 그 정확한 고증을 하기 어려워 說者의 말을 인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新羅華嚴寫經造成記(755)와 若木掙寺造塔記에는 人名의 表記에 '莫''¿'과 같은 字形이 나온다. 이는 固有 名詞 表記에만 사용된 글자이어서 어떤 글자의 異體字(省劃字)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아마도 世宗實錄地理志 등의 固有 名詞 表記에 사용된 '英'과 '莫'은 이 글자가 달리 정착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이러한 자형들을 고증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이러한 省劃字들은 다음에 소개할 口訣의 略體字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Ⅳ. 借字 表記와 固有 漢字
    借字 表記法은 漢文이 이 땅에 수입되어 보급된 다음 오래지 않아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表記法은 漢字·漢文과 분리되어 獨自的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漢字·漢文의 사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하였다. 따라서 借字 表記法에서 사용한 文字는 漢字와 分離시켜 借字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標記法이 漢字·漢文에 의지하여 발달되고 사용되었으므로 넓은 의미의 漢字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재 固有 漢字라고 일컬어지는 글자들은 거의가 다 借字 表記法에서 造字된 것이므로 이 글자들이 비록 漢文 文脈 속에 사용된다 하더라도 借字 表記法을 떠나서 固有 漢字를 논하기는 어렵다.
    借字 表記法은 固有 名詞 表記, 吏讀, 鄕札, 口訣로 나뉜다. 이들 각 表記法에서 固有 漢字는 造字되고 사용되었다. 앞에서 보아온 固有 漢字들은 固有 名詞 表記와 吏譯에 관계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口訣은 略體字를 사용하는 것이 그 특징이고 이 字形이 固有 漢字를 만드는 데도 간여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이해가 固有 漢字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口訣의 略體字들은 正字의 楷書體에서 따오느냐 草書體에서 따오느냐의 구별이 있고, 正字의 앞부분을 따느냐 뒷부분을 따느냐의 구별이 있다. 현재 略體字가 쓰인 最古의 口訣은 舊譯仁王經 釋讀 口訣인데 여기에 쓰인 것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 楷書體의 앞부분을 딴 것
(1) ꑔ(衣) (2) ꑔ(在) (3) ㅌ(飛) (4) 失(和) (5) 罒(羅) (6) (音) (7) 氵(沙) (8) 彳(徐) (9) 二(示) (10) 丿(乎) (11) ム (矣)
(B) 楷書體의 뒷부분을 딴 것
(1) 口(古) (2) 八(只) (3) 卜(臥) (4) 七(叱)
(C) 草書體의 앞부분을 딴 것
(1) (良) (2) ろ(五) (3) 刂(是) (4) 今(彌) (5) ソ(爲)
(D) 草書體의 뒷부분을 딴 것
(1) 厼(彌)

이 밖에 劃이 단순한 借字들은 全字가 그대로 쓰인다. 이 경우에도 楷書體와 草書體로 갈린다.

(E) 楷書體 全字
(1) 這 (2) 丁 (3) 刀 (4) 冬 (5) 乙 (6) 毛 (7) 火 (8) 白 (9) 下
(F) 草書體 全字
(1) ¿ (與) (2) 之(之) (3) (去) (4) の(人) (5) W(以) (6) 十(中)
全字
따온부분

이들 자형들은 시대와 개인에 따라 여러 變體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같은 借字의 略體字들이라도 앞 뒤 어느 부분을 따느냐에 따라 자형이 달라진다. 고려 말 조선 초의 口訣에서 몇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또 같은 글자의 같은 부위를 따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자형을 얼마만큼 간략화시키느냐에 따라 자형이 달라지기도 한다. 몇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邑 → 巴 → 罒
利 → 禾 →
果 → 木 → 
舍 → 全 → 人
羅 → 亽 → •
隱 → 阝 → 卩 → 乛
多 →夕 → 夕 → 丨

이러한 略體字들은 주로 손으로 써넣는 記入吐에 쓰인다. 記入吐는 私的인 學習을 위하여 써넣는 것이므로 이러한 略體字가 쓰이는 것이다. 公的인 性格을 띠는 印刷物에 들어가는 印刷吐는 略體字를 正字로 고치는 것이 原則이다. 이것은 비록 略體字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더라도 항상 正字와 關係를 맺고 사용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關係가 끊어져서 略體字의 正字를 찾을 수 없는 예가 생겨난다. 尸(ㄹ)자의 정자에 관한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거니 舊譯仁王經 口訣에 쓰인

亇(마) 仒(리) 二(과) (?) 牙(?) ∟(?)

와 같은 글자들의 정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이 口訣이 연대적으로 다른 口訣보다 훨씬 앞서 있어 이 口訣과 맥락을 지을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尸자의 경우와 같이 이미 13세기에도 정자와의 맥락이 끊어져서 밝힐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亇(마)자는 이 口訣 이외에 鄕藥救急方에도 사용되었고 후대의 固有 名詞 表記에도 자주 사용된 것인데 그 정자와의 관계가 끊어져 결국은 固有 漢字의 범주에 들게 된 것이다. 이 口訣과 吏讀 鄕札에 쓰인 '冬'도 왜 ''로 읽혀야 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口訣의 略體字는 그것이 언제나 正字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固有 漢字가 될 수 없으나 正字와의 맥락이 끊어진 특수한 자형들은 古文書나 漢文 文脈에도 사용되므로 결국 固有 漢字의 범주에 들게 된다.

口訣과 吏讀에 쓰이던 글자들이 合字되어 특수한 자형을 만드는 예가 있다. 몇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乫(갈) 䪪(감) 㖙(갓) 䯩(곱) 厁(산) ꧨ() 唜(끗) 㖯() 兺()

이들은 古文書나 佛事의 施主秩과 같은 데서 우리의 固有語들을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固有 漢字의 범주에 넣고 있다. 그러나 合字의 원칙은 간단하여 終聲을 표기하는 借字들을 初·中聲을 나타내는 借字에 이어 쓴 것과 ᄉ系 合用 竝書를 나타내기 위하여 ㅅ음을 나타내는 '叱'자를 덧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한 글자가 한 音節을 나타내도록 합자한 것이니 官階名이나 職名을 나타내는 借字들을 合字한 高麗 時代 이전의 합자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러한 자형은 初··終聲을 모아서 音節 單位로 표기하는 한글의 표기법을 본뜻 것이므로 한글 창제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 글자들은 漢字를 넓은 의미로 볼 때 固有 漢字라고 할 수 있으나. 固有語를 表記하는 데 사용되었고 또 表音만 있고 表意는 없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漢字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Ⅴ. 結 語
    이상에서 固有 漢字라고 일컬어져 오던 文字들에 대하여 개괄하여 보았다. 이 글에서는 固有 漢字들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어떠한 맥락에서 이러한 자형들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였다.
    이제까지 검토한 내용을 정리하면 固有 漢字는 漢文 文脈에 쓰이는 우리말을 表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글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漢字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借字의 범위에 넣어야 할 것이다. 우리 先人들이 사용한 文字들을 漢字와 한글로 兩分하면 固有 漢字는 漢字의 범주에 들 수밖에 없지만, 이를 漢字, 借字, 한글로 三分하면 固有漢字는 借字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固有 漢字가 現代의 文字 生活에서 왜 생명력을 갖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도 자동적으로 나오게 된다. 현재 우리의 文字 生活은 한글과 漢字의 두 문자 체계를 사용하고 借字 表記法은 이미 오래 전에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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築島 裕(1981), 假名, 日本語の世界 5, 中央公論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