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자형(字形)과 서체(書體)에 대하여

이 강 로 / 단국대 교수·국어학

Ⅰ. 머 리 에
    이 글은 한자의 자형(字形)을 대상으로 하여 두 갈래로 갈라서 서술하였다. 첫째는 한자의 으뜸이 되는 글자를 중심으로, 이것을 잘못 쓰는 경우와, 이와 비슷한 다른 글자와 혼동하여 쓰는 경우에 주안점을 두었고, 둘째는 한자를 쓰는 방법을 해서 (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예서(隸書)들로 갈라서 이들 서체를 잘 쓴 사람과 그 특징에 대하여 논하였다.

Ⅱ. 자형에 대하여
    한자는 글자 수가 굉장히 많다. 최근의 집계에 의하면 약 50, 000자 가량의 한자가 쓰였다. 이 대목에서는 설명의 편의상 두 갈래로 갈라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어느 으뜸이 되는 한자를 잘못 쓰는 경우이고, 둘째는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두 글자를 혼동하는 경우이고 셋째는 약자(略字)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1. 잘못 쓰는 글자
    한자는 어느 으뜸자가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글자를 생산하였다. 그런데 그 으뜸이 되는 글자-부수(部首)를 포함하여-가 약 200자 가량이나 되는데, 이것들이 서로 비슷하여 본디의 자형에서 벗어나서 잘못 쓰는 것들이 많다. 이중에서 흔히 쓰고 또 잘못이 심하다고 생각되는 몇 자만을 골라서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古文眞寶와 右丈直實 어느 글방의 선생이 제자에게 이러한 책을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고 종이에 '古文眞寶'라고 써 주었다. 그랬더니 그 제자가 얼마 뒤에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못 찾은 이유가 선생님이 써 준 '古文眞寶'를 '右丈直實'로 잘못 알고 그런 책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슷한 한자는 조심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잘못 알기 쉽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좋은 경구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한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기가 정말 쉽다. 앞의 책이름에서 '古'자를 '右'자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文'자와 '丈'자는 조금만 세밀히 살피면 곧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丈'을 잘못 알고 그 위에 점을 찍어 '¿'으로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이고, 丈을 소리 부호로 한 '杖'에 한 점을 찍어서 '¿'으로 쓰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주의할 점이 또 있다. 까딱하면 '枚'자와 '杖'자를 혼동하기 쉽다. '杖'은 '지팡이장'이고 '枚'는 '낱매'로서 원고를 '1매, 2매' 할 때에 쓰는 글자다. 이 글자에 관계되는 상식 문제 하나를 덧붙인다. '1매'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둘로 보아 이르는 말이고 장(張)은 앞뒤 면을 한 단위로 이르는 말이다.
   '直'과 眞 이 글자를 자전에서 찾아내라고 하면 학생이나, 일반 사람들은 어느 부(部)에 들어 있는지 몰라 상당히 애를 먹을 것이다. 이 두 글자는 모두 目(눈목) 부에 들어 있다. 또 이 두 글자는 잘못 쓰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줄로 안다. '直' 이것이 정확한 글자이고, ¿.¿, 들은 모두 잘못이다. 이 글자는 目 부 3획이다. '眞'자는 잘못 쓰는 사람이 더 많다. 目 부 5획에 들어 있는데, '眞'으로 써야 할 것을 '¿'으로 또는 '¿'으로 또는 '¿'으로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이 글자는 '目'을 중심으로 위로는 匕, 아래로는 '¿'이 이어져서 이루어진 글자이다.
    '內'와 全 이 글자는 모두 '들입 入'부수에 들어 있는 글자이다. '內'자는 入 부수의 2획, '全'자는 4획이다. 이 글자들은 대부분이 '人'부수에 딸린 글자로 알고, '內'자를 '¿', 또는 '¿'로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이다. 그리고 이 글자는 冂(나무의 끝 부분을 상징함) 안에 入(도끼나 낫의 자루)을 넣어서 만든 글자로서 여기에 '木'자를 붙여서 자루예(枘)자를 만든 데에서 '內'에는 '자루예'와 '안내' 등 '예'와 '내'의 두 음이 있는데, 현재에는 이 두 글자를 분리하여 '枘'는 '자루예'로 쓰고, '內'는 '안내'로만 쓰는 경향이 있다.
    '全'자는 '金'자와 두 군데가 다르다. '全'은 들입入 부수인데, '金'은 人(사람인)이고, 앞엣것은 王인데, 뒤엣것은 ¿이다. 이런 원리에서 '全'자를 '¿'으로 쓰는 것도 잘못이고, '金'자를 ¿으로 쓰는 것도 잘못이다. 정확하게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글자도 부수 8획에 딸린 글자인데, 이 글자를 흔히 '¿'으로 잘못 쓰고 있다. 잘못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잘못된 글자 '靑'을 허용할 것인지까지가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 글자를 허용하게 되면 이 글자를 모체로 한 靖이나 淸, 晴, 睛, 靜 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의 문제가 차례로 제기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으뜸 글자를 정확하게 써야 할 것이다.
    이 글자는 부수(部首)로 쓰이는 글자로서 이 글자를 바탕으로 다른 많은 글자를 파생시키었다. 12획으로 반드시 '¿' 아래에 '¿'을 이어서 정확히 黃이 되도록 써야 한다. 그런데 잘못 쓰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黃, 또는 ¿ ¿들은 모두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으뜸 글자가 잘못 되면 이 글자를 바탕으로 한 橫, 潢 들은 모두 잘못 알게 된다. 으뜸 글자를 정확히 쓰도록.
    이 글자는 흔히 쓰는 검을 흑(黑)자이다. 黃 자와 마찬가지로 부수자로 12획인데, 이 글자를 흔히 ¿으로 잘못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렇게 쓴 것은 글자가 아니다. 이 글자가 으뜸 글자인데, 이 글자를 잘못 쓰면 이 글자에 딸린 '黙, 點, 黜' 들과 같은 글자를 모두 잘못 쓰게 된다. 이 글자에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은 ¿.¿.¿ 들로 쓰는 일이 있는데 되도록 정확하게 써야 한다.
    辵변에 딸린 글자 이 글자는 본디 머뭇거릴 착辵자인데 실지로 독립한 글자로는 현재에 잘 쓰이지 않고 '책받침'이라 하여 '辶'와 같이 꼴을 바꾸어 쓰고 있다. 문제 되는 점은 다른 글자를 파생시키는 과정에서, '辶'으로 쓰기도 하고, '¿'으로 쓰기도 하여 '近:¿, 遠:¿, 過:¿'의 양형으로 달리 쓴다. 중국의 강희자전이나 우리나라의 전운옥편 등에 모두 왼쪽을 표준 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써 내려온 것은 오른쪽의 '¿'의 자형이다. 현재로서는 처리 문제가 아주 난처하게 되었다. 두 자형을 모두 쓸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지, 어느 한 자형을 표준으로 정할 것인지, 어느 한 쪽을 표준 삼는다면 어느 자형을 표준으로 삼을 것인지는 신중히 검토한 문제인데, 나의 사견으로는 현재까지 교과서에서 써 온 자형을 추인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2. 혼동하기 쉬운 글자
    한자를 혼동하여 쓰는 것을 지칭한 우스갯소리에 어로불변(魚魯不辯)이란 말이 있다. 고기어魚 자와 노나라로魯 자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 이상으로 아주 비슷하여 얼른 보아서는 그 구별을 전혀 변별하지 못할 만한 글자가 수두룩하다. 이 대목에서는 이런 글자 중 흔히 쓰는 것 몇 개만 골라서 제시하고 약간의 설명을 붙였다.
    刺와 剌 이 글자는 자형이 너무 비슷한 데다가 작은 활자체에서는 분간하기가 무척 어렵다. '刺'는 '찌를자'로서 刀부 6획이고, '剌'은 '어긋날랄'로서 똑같은 刀부 7획이다. 임금이 잡수시는 밥을 '수라'라 하는데, 차자 표기로 '수라(水剌)'라고 쓴다. 그런데, 이것을 자전석요(字典釋要)에서 조차 '水刺'로 잘못 쓸 정도이다. 전염병 중에서도 무서운 병으로 콜레라(cholera)가 있다. 이것을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 글자인 한자로 '虎列剌'라고 썼다. 이 음이 중국음으로는 콜레라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호열랄'로 읽어야 할 터인데, 剌자가 刺자와 비슷한데, 剌자는 흔히 쓰지 않는 글자이고, 刺자는 흔히 쓰는 글자이므로 이것을 '호열자'로 잘못 읽어서 국제적으로 수치를 겪는 일도 있다. 이 두 글자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未와 末 이 두 글자는 모두 木부 1획에 속하여 있는 글자다. 이 두 글자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木'자에 대하여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木자를 '¿'자와 같이 갈고리 모양으로 위로 삐쳐 쓰는 것을 흔히 보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이다. 木자의 변에 딸린 글자가 약 700자 가량 되는데, 木자로서 ¿자로 잘못 쓰게 되면 그 여파가 木부에 딸린 다른 글자에게도 미치게 된다.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未는 위의 가로획이 짧고 아래의 가로획이 길다. '아닐미'로 읽는다. 이것에서 파생된 낱말로 미래(未來), 미안(未安), 미달(未達)... 등의 낱말이 있다. 末자는 위의 획이 길고 아래 획이 짧다. 말기(末期), 월말(月末), 연말(年末) 들의 낱말이 있다. 잘못 쓰거나 잘못 읽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求와 朮 求는 水부의 2획이고, 朮은 木부의 1획으로 계보가 아주 다른 글자이다. 다른 글자이면서도 그 모양이 아주 비슷하여 흔히 혼동하고 있다. 求는 '구할구'로서 무엇을 '찾아서 얻다', '고르다' 따위의 뜻이고, 朮은 '삽주출'로서 음은 '출'이고 약재에 쓰는 풀의 이름이다. 求는 '水'가 으뜸 글자이므로 亅(갈고리궐)과 같이 써야 하고, 朮은 木부이므로 丨(위아래로 통할 곤)이 으뜸이 되어서 올려 삐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와 같이 으뜸 글자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여야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글자를 해독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혼동하는 일이 거의 없다. 述자는 朮에 '辶'이 합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베풀술'이다. 뜻은 '베풀다'이고 음은 '술'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진술(陳述)이니, 술회(述懷)따위와 같은 복자어(複字語)로 발달하였고, '行'자의 가운데 끼이어 들어 '術'자로 발달하여, 술책(術策), 술수(術數), 학술(學術), 기술(技術)들과 같은 낱말을 생산하였다. 求자는 '辶'자와 어울리어 述자를 생산하였는데, 이 글자는 '짝구'로서, 시경의 窈窕淑女 君子好求의 뜻에 해당하는 글자다. 꽤 오래 전 모 대학에서 원술랑(元述郞)을 원구랑(元逑郞)으로 잘못 쓴 일까지 있었다.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東과 柬 東은 木부 4획의 '동녁동' 자이고, 柬은 역시 木부 5획의 '가릴간'자이다. 이 차이는 마치 黑과 ¿의 차이와 비슷한데, 이 두 글자는 黑이 표준이 되므로 ¿은 잘못이다. 그러나, 문제의 글자는 아주 별개의 글자이면서 그 자형이 아주 비슷하여 많은 혼선을 빚고 있다. 東자는 '木'과 어울리어 '기둥동'으로 발전하여 일동(一棟), 오동(五棟) 들과 같은 '동'음이고, 뜻은 기둥을 지시한다. 그러나 '棟'은 쓰기로 유명한 '소태나무련'자이다. 이 밖에 金과 어울리어 鍊자를 생산하고, 糸와 어울리어 練자를 생산하였는데 이 글자의 음은 모두 련이다. 그런가 하면 才와 어울리면 揀자가 되는데, 이 글자는 으뜸 글자인 柬자와 통용되는 '가릴간'자이다. 東과 柬은 미세한 차이지만 아주 다른 글자이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夫, 太, 天, 夭' 犬 위의 5개 글자 중 '犬'만이'犬(개견)'자로 부수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大'를 으뜸 글자로 하여 파생된 것들이다. 우선 夫와 天의 차이는, 지아비부(夫)자는 天에 비하여 제일 위의 가로획의 위로 꿰뚫고 올라갔다. 이런 특징 때문에 속칭 출두천(出頭天) '하늘천의 머리 위로 치솟은 글자'라는 익살스러운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변별적 요소는 위에 있는 획에 막히어 있느냐 치받고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음 天과 夭의 차이는 天의 위의 획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에서 위로 약간 올려 긋는데 반하여 夭자는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를 향하여 가볍게 삐치는 데 있다. 의미와 쓰임은 전혀 다르다. 天은 하늘을 기본 뜻으로 하여 이것을 기저에 깔고 확장된 것으로 천의(天意), 천심(天心), 천자(天子) 등 무수한 낱말을 양산한다. 그러나 夭는 굽을요, 아름다울요, 일찍죽을요 등 음이 '요'이고, 뜻은 여러 갈래로 다양하게 쓰인다. 天과 夭의 차이는 아주 미세하여 식별하기가 어려우므로 조심하여야 한다. 그래서 '可笑롭다'의 '可笑'를 파자(破字)하여 '丁囗竹夭'(정구죽요)라는 은어가 쓰이는데, '丁口'를 합하면 '可'자가 되고 '竹夭'를 합하면 '웃음소(笑)'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 글자의 음을 나타내는 요소가 '夭(어여쁠요)'이므로 '笑'의 음이 '소'가 된 것이다. 太와 犬의 변별적 요소는 '점'을 찍은 위치에 있다. 이 두 글자를 잘 구별하여 쓰지 않으면 큰 잘못을 범하기 쉽다. 太子라 하면 임금의 아들로 지극히 높은 존재이다. 그러나, 犬子라고 하면 욕에 흔히 쓰이는 '개새끼'가 된다. 그 차이는 점이 놓이는 위치에 불과하지만, 그 미치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 한자가 이런 특징 때문에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3. 약자와 본자와의 혼동
    한자는 글자 수도 많지만 한 글자에 대한 이형(異形)도 많다. 이 이형동자(異形同字)에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 바로 약자이다. 중국에서는 글자 생활을 한자로만 꾸려 나가니까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버젓이 한글이 있는데, 쓸데없이 약자를 제정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었다. 다음에 약자에 의하여 혼동하는 몇 가지 보기를 들어 그 시정을 촉구한다.
    藝의 약자로서의 芸과 으뜸 글자인 芸 조선조 말기에 흥화 학교(興化 學校)를 졸업하고, 배재 학당에서 오랫동안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당시의 조선어 학회(현재 한글 학회의 전신)의 사전 편찬원으로 큰 사전편찬에, 우리나라 제도어를 맡아 큰 공적을 쌓은 분으로 동운(東芸) 이중화(李重華) 선생이 있다. 이 어른이 우리나라의 고제도에 워낙 아는 것이 많아서 두계(斗溪) 이병도 박사가 '나의 연구 생활의 회고'(?) 인가하는 글을 사상계에 발표한 일이 있었고, 이것이 나중에 대학의 교양 국어 교재에로서 실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교양 국어에는 '東芸 李重華 선생'이 '東藝 이중화 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까닭은 간단하다. 이병도 박사가 존경하는 분에게 약자를 쓴다는 것이 예의가 아니어서 芸자의 본자인 '藝'자로 일부러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芸'자가 '藝'자의 약자인 줄만을 알고, '향풀芸(운)'자가 본디부터 있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토막극이다. 백 년 이백 년 후에 東藝와 東芸이 혼동하여 쓴 경위를 모르는 사람이 그 진가를 무엇에 의하여 변별할 것인가? 여기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데에 짧은 지식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산 교훈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臺와 그 약자로서의 台와 본자로서의 台 일본에서는 '臺'와 '台'의 음이 모두 다이(タ イ)로서 두 글자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臺'자는 至부 8획에 들어 있는 글자로 음은 '대', 뜻은 돈대, 축대(築臺) 등에 쓰이는 '무워 쌓은 높은 지대'이다. '台'는 口부 2획에 들어 있는 글자로서 음도 둘이 있고, 따라서 뜻도 둘로 갈린다. 첫째는 음이 '태', 뜻은 삼태성(三台星)이란 별 이름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台'자를 '별이름태'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기쁠이'이다. 뜻은 '기쁘다', 음은 '이'이다. 여기에서 남이 장군(南怡 將軍)이라고 속칭하는 怡(편안할 이)가 파생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는 '藝'와 '台'는 음으로나 뜻으로나 아무 관련이 없는 전혀 별개의 글자이다.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쓰는 것을 맹목적으로 흉내내어 혼동하여 쓰고 있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경건하게 모시어야 할 호국의 영령이나 ○ ○臺로 깍듯이 써야 할 경우에 ○ ○台로 쓰고 있는 것을 흔히 본다. 靑瓦臺, 顯彰臺들은 마땅히 '臺'로 써야 한다. 이런 것을 아무 반성 없이 '台로 쓰고 있는 것은 잘못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
    豫자의 약자 予와 본자의 予 한글로 '예산'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한자의 '予算'으로 쓰는 일이 있다. 予자는 '亅(갈고리궐)'부의 3획에 들어 있는데, '나여, 줄여' 들로 뜻은 일인칭의 자신을 가리키는 '나(我)'와, 남에게 무엇을 갖게 한다-주다-이고, 음은 모두 '여'이다. '豫'는 '豕(돝시)'부 9획에 들어 있는 글자로서, '편안할 여, 기쁠여'로 읽는데, 음은 '여'이다. 요즈음 '예'로 읽고 '미리'의 뜻으로 읽는 것은 곁가지이다. '豫'의 본디의 음이나 본디의 뜻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다. 본자로서도 으뜸이 되는 뜻이나 음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한술 더 떠서 이것의 약자를 쓰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약자에서 오는 교육적인 혼란은 너무나 크다. 할 일이 많은 현 시점에서 이런 데에 시간을 낭비할 까닭이 있을까?

Ⅲ. 서체(書體)에 대하여
    서체는 한 마디로 글자를 쓰는 본이다.
    글을 쓰는 데에는 문체(文體)가 있다. 이것은 글을 짓는 격식(格式)과 규모로서 요즈음으로는 글을 짓는 스타일(style)이다. 글을 짓는 데에 문체가 있듯이 글씨를 쓰는 데에도 서체가 있다. 즉 글씨를 쓰는 법식(法式)과 여러 가지 본보기이다. 서체는 크게 두 가지로 갈라서 풀이할 수 있다. 하나는 글자가 처음 생겼을 때의 아주 복잡한 형태로부터 현재의 자체(字體)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큰 자체적인 변화에 따라 외견상을 아주 다른 자형으로 바뀐 분기점을 기준으로 하여 가른 것으로 대전(大篆), 소전(小篆), 예서(隸書)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똑같은 글자를 쓰는 방법을 기준으로 하여 해서(楷書), 초서(草書), 행서(行書) 들이 있다. 다시 이 두 가지를 한데 아울러서 다섯 가지 체가 있는데, 이것을 오체(五體)라고 한다. 이 오체를 다시 가늘게 자르면 전체(篆體), 팔분체(八分體), 진서(眞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고문(古文), 대전(大篆), 소전(小篆), 예서(隸書), 초서 들의 다섯 갈래로 나누기도 한다. 이상의 오체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서예인을 기준으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전서체(篆書體)와 한국 명필
    전서에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 있는데, 대전은 중국 주나라(周)의 선왕 때에 태사(太史) 벼슬로 있던 사주(史籒)가 비로소 쓴 글씨체라고 하여 주문(籒文) 또는 주서라고도 하는데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라 큰 대나무를 쪼개어 이것을 납작하게 다듬고 가죽끈으로 이어 매어서 두루마리를 만들고 거기에 잘 드는 칼로 하나하나 새기어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서체는 워낙 복잡하여 쓰기도 어렵고 알아보기도 힘들며 현재는 구하여 보기도 힘들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그 표본을 보이기가 어려워서 대체적인 설명으로 끝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서를 쓰는 서예가도 대체로 소전을 쓰는 분이 많고, 대전에 대하여서는 참고할 문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2. 소전과 한국 서예인
    소전은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때에 재상(宰相)으로 있던 이사(李斯)가 창안하여 쓴 서체이다. 대전은 고문(古文), 기자(奇字) 들에 속하는 글자인 까닭에 쓰기도 무척 어렵고, 알아보기도 힘들다. 소전은 이런 글자들 중에서 불필요하거나 겹치기로 그어진 획을 덜어 버리고 약 십분의 팔 정도로 줄이어 만든 글자라 한다. 다음에 그 본보기를 보인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도 그 개인의 기호와 능력에 따라 특별히 잘 쓰는 서체가 있다. 전서를 잘 쓰는 한국 서예인 두어 사람을 다음에 소개한다.

(1) 이암(李嵒)과 그의 전서
    이암은 고려 충렬왕 때 사람인데, 자는 고운(古雲)이고 호는 행촌(杏村)이며, 고성 이씨이다. 고려사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옮겨 본다.
    이암은 옛날 성현들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어서 말과 행동이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집의 살림이야 어떻게 되든,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책 보고 글씨 쓰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그 서법이 절묘하기로 당시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서경의 태갑(太甲) 팔편(八篇)을 손수 써서 임금께 바친 일이 있었다.

하였다. 그의 글씨를 다음에 보인다.
    옆에 제시한 글씨는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費碑)의 전액인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전서야말로 진전(秦篆)의 정통적인 진수(眞髓)를 얻은 신품이라 한다. 다음의 작은 글씨는 그의 행서체인데, 당시 중국의 제일 가는 명필로 명성을 떨치던 조맹부가 행서에 능하였고, 이암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다. 그러나 이 비문의 행서는 억세고 아름답고 쇄락한 품이 조맹부로서도 한 검음 물러설 정도의 경지에 달하였다. 이 비는 조선조 정조 때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이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稿)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그 부서진 조각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文殊寺藏經碑 李嵒 高麗時代
(2) 허목(許穆)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전서
    허목(1595-1682)은 본관이 양천(陽川)이고,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 호는 미수(眉叟)이다. 유학자로 등용되어 우의정까지 올랐다. 학문이 깊어 미수 기언(記言) 20권을 저술하였다. 글씨는 전서를 전공하여 독자적인 서법을 창시하였고, 해서나 행서도 그의 전서법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응용하여 고아한 운치를 드러낸다. 그의 전서는 정통의 서법에서 어긋났다는 지탄을 받기도 하나, 그의 독자적인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그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살피어 풍부한 예술성을 발휘하였다.
陟州東海碑 藁本 許穆 李朝時代
    이 동해비는 그가 삼척 부사로 있을 때에 글도 자신이 짓고, 글씨도 자신이 써서 세운 것인데, 뒤에 풍랑에 침몰되어 없어져 버렸다. 마침 부본으로 써 둔 것을 가지고 다시 써서 비문에 새기어 세운 것이 현재 삼척 군내에 서 있다. 위에 그 일부만을 소개한다.
    이것을 정서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瀛海¿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

(3) 신작(申綽)의 고상서(古尙書)
    신작의 처음 이름은 경(絅)이고 자는 재중(在中), 호는 석천(石泉)이다. 영조 36년(1760)에 출생하여 순조 28년(1828)에 세상을 떠났다. 중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으나, 방방(放榜) 되기에 앞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뒤로는 벼슬에 오를 것을 단념하고 평생을 경전 연구와 글씨 쓰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문장도 뛰어났거니와 글씨를 잘 써서, 특히 한나라 이후 발달된 예서(隸書)나 고전(古篆)을 잘 썼다. 그리하여 고문 상서(尙書)의 복고와 그 주해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글에서 소개할 것은, 그의 육필(肉筆)로 고상서(古尙書)를 쓴 적이 있는데, 서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겠기에 그 몇 줄을 다음에 소개한다.     정자로 쓴 문장
    曰若稽古帝堯 曰放勳 欽明文思 安安允恭克讓 光被四表 格于上下

3. 예서체(隸書體)와 한국 서예인
    예서는 전서를 간소화한 것으로, 대전의 약 십분의 2를 줄이어 간소화한 것이 소전이라면 예서는 다시 이 소전을 간소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서(楷書)에 가까운 것으로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예서에 대하여는 그 서체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는데 꼭 집어 어느 것이 예서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예서에 대하여 당나라의 육전서학(六典書學)의 주에 기록된 것을 우리말로 알기 쉽게 옮기어 소개한다.

"자체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중 제5번째가 예서에 대한 기록이다. 이 예서는 전적(典籍)이나 표문 주문(奏文) 들과 같은 공사(公私) 간의 문서에 널리 쓰고 있는 서체이다. 유견오(庾肩吾)가 말하기를 예서는 현재의 정서(正書)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였고, 장회관(張懷瓘)은 말하기를 예서란 것은 정막(程邈)이 창안한 것인데, 이 글자는 모두 진정(眞正)이다. 또 이것을 진서라고도 하는데 당나라 이전에는 모두 해자를 예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구양집고록(歐陽集古錄)에는 팔분(八分)을 잘못 알고 예서라 하기도 하였다."

고 하였다.
    현재도 엄격히 따져서 예서와 팔분체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하다.
    우리나라의 서예인으로서 신라나 고려 시대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이 글에 소개하기에 적절한 것을 찾지 못하였고, 조선조 말기의 서도 대가 추사 김정희의 예서를 본보기로 보이는 데에 그치고자 한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널리 알려진, 학자요, 문장가요, 서예가이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다른 사람은 몇 줄의 소개로 끝났는데, 추사만은 자그마치 6쪽에 걸쳐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호가 수백 가지가 되어 호(號)가 많기로도 이름 높고, 그의 서화, 특히 글씨는 추사체라 하여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인데, 호는 널리 알려져 있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이외에 시당(詩堂), 시암, 예당, 과파, 노과...등 일설에는 100여 개가 넘는다 한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병조 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죄로 몰리어 남으로는 제주도로 귀양 가고 다시 북으로는 북청(北靑)에까지 유배되어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경학(經學)과 금석학(金石學)에 조예가 깊었다. 24살 때에 중국에 들어가서 옹방강(翁方鋼), 완원(阮元) 등 청나라 학자들과 사귀었다. 특히 완원에게서는 절대적인 지우를 받아서, 그의 호 '완당'은 완원을 그리는 뜻을 호에 반영한 것이라 한다. 그의 특징은 역대 명인의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의 탁본을 널리 보아서 그의 식견을 크게 넓히었다.
    서법에 관한 것은 그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과 그의 유묵 가운데에 많이 나타나는데, 해박한 금석문의 지식과, 자신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난 것으로 우리나라 역대의 학자들 중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을 비롯하여 옹방강의 서풍을 따랐으며, 뒤에는 중국의 예서의 필법을 체득하여 예서를 잘 썼고 행서에도 예서의 운치를 살려서 일가를 이루어 추사체라 일컬을 정도다.
    이 글에 실린 글씨는 書藝 '한국미술전집' 11의 도판 104를 복사한 것인데,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인 임창순 님의 해설을 그대로 인용하여 다음에 소개한다.

먼저 위의 횡획(橫劃)을 일직선으로 맞추어 평면을 이루면서 '頑'자 오른쪽 이마 위의 한 획은 살짝 우상(右上)을 올리어 변화를 일으키고, 아래로 여러 삐침 획을 참치부제(參差不薺)하게 늘어뜨려 소밀(疎密)를 조화시키는 포치(布置)를 마련하였다. 각 글자의 결구(結構)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들을 모두 혼합해 놓은 수법을 사용하였다. '殘'자의 아래 戈자와 '頑'자의 元은 전법(篆法)으로 썼고, '樓'자의 아래의 女는 초서법이다. '書'자의 者는 전(篆)을 예(隸)로 고친 자원(字源)을 살린 시도(試圖)이다. '石'자의 口는 획법을 응용한 것이다. '書爲瀟俟三十六鷗主人'의 행서관(行書款)은 예의(隸意)의 정신을 그대로 끌고 나간 필치임이 뚜렷이 보인다. 그의 서법상 수련도 대단하거니와 또한 예술적 천분을 갖지 않고서는 착상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다.

위의 글은 예서 횡액(橫額)에 대한 글씨평이다. 글을 쓴 사람의 솜씨도 대단하거니와 이 글을 평한 분도 높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이어서 행서(行書) 횡액의 글씨평도 아울러 덧붙인다.

形摸彌勒-布袋文字江河萬古流
    이 글씨는 다른 행서가 기굴(奇屈)에 힘쓴 것과는 달리 근엄과 장중을 힘써 나타냈다. 그러나 일획과 자형 가운데에 전항에서 말한 한례(漢隷)의 정신이 항묵간(行墨間)에 숨어 있는 것은 여기서도 음미할 수 있다.

오른쪽에 이 글 두 편을 실어 보인다.

4. 해세체와 한국의 명필
眞鑑禪師碑 崔致遠 新羅時代 河東 雙谿寺
    해서는 정서, 진서, 해례(楷隷) 들로 부르는데, 한나라의 예서체에서 전화(轉化)한 것이다. 후한의 왕차중(王次中)이 창안한 것이라고 한다. 얼마 뒤에 위나라의 종유(鍾繇)가 하극첩표(賀克捷表)를 썼는데, 해서의 쓰는 법도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정서의 조종이라고 일컫는다. 당나라 때에 와서 그 법식이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의 명필로는 최치원을 들 수 있다.

(1) 최치원(崔致遠)의 글씨
    신라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이며 서예가로서 김생과 병칭할 만한 사람으로 최치원을 들 수 있다.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라고도 하고 해운(海雲)이라고도 하며, 유선(儒仙)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문성황 18년(856)에서 세상에 태어나서 열두 살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18살 때인 874년에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얼마나 대단한 수재인가. 그때에 중국에서 황소(黃巢)란 사람이 난리를 일으키었는데, 이 황 소를 정벌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 글에 견줄 만한 문장이 없을 정도로 썩 잘 지은 글이라 한다.
    현재 그의 글씨로는 쌍계사(雙溪寺)의 진감국사(眞感國師)의 비문이 남아 있는데,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강왕 원년(887) 정미(丁未)에 세우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는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진주 지리산에 있다.

하였다. p.73에 이 비의 서체를 제시한다.
    최치원의 필력에 대하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편자인 권문해(權文海)는

李白詩帖 韓濩 李朝時代

그의 글씨는 힘줄과 뼈가 매우 단단하고 질기고 세어서 속태(俗態)로서는 도저히 범하기 어려운 기상이 있으니, 정말로 용이 꼬리를 한 번 치면 바위라도 부서뜨릴 기세가 있다가 하였다.

(2) 명필로 손꼽히는 한석봉(韓石峰)
    한석봉(1543~1605)은 그 이름보다도 호로 널리 알려진 서예가이다.
    자는 경홍(景洪)이고, 석봉은 그 호이고, 본관은 삼화(三和)이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도맡아 썼다. 그의 서법은 조선조 초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던 조맹부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체를 배웠다. 그는 사자관으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박은 듯한 글씨를 많이 썼다. 그러나, 그는 글씨를 워낙 많이 썼기 때문에 작자(作字)가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필력이 강하여 일세의 독보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까지 크게 그 영향을 미쳐, 우리나라에서 한석봉하면 어린 아이까지도 알 수 있게 되어 명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석봉의 글씨는 해서체로 거의 표준형에 가까운 것이다.

5. 행서와 한국의 명필
    행서는 해서를 약간 흘린 서체로서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창안하였다 한다. 서단(書斷)의 행서 조(條)에 보면

행서란 것은 후한 때에 영천 사람 유덕승이 창안한 것인데, 정서에서 약간 벗어난 서체이다. 간략하고 쉽게 쓰는 데에 목적을 둔 적으로 글씨와 글씨가 흐르는 듯이 서로 이어지므로 행서라고 한다. 왕암(王愔)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이후로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은 행서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많은데, 종원상(鍾元常)이 행서를 잘 쓴 사람 중의 하나이다.

하였다. 선화서보(宣和書譜)의 행서서론(行書敍論)에서는

예서법이 세상을 휩쓴 뒤에는 진서는 너무나 구속이 심했고, 초서는 너무나 방만하여졌다. 그리하여 진서와 초서의 중간쯤 되는 서법으로 행서가 생기었다. 이래서 진서에 가까운 행서를 진행(眞行)이라 하고, 초서에 가까운 서체를 행서라 한다. 유덕승이 창안했다고 하는 행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 서법은 간편하면서도 쓰기 쉬워서 행서라고 하는데, 덕승의 문하에서 이 서체의 명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상에서 행서라는 개념과 그 발달 과정 등의 대체를 이해하였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행서 명인에 대하여 언급하겠다.

(1) 신필(神筆)로 이름난 김생(金生)
田遊巖山家序
    김생이 우리나라의 제일의 명필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면서도 워낙 옛날 사람이라 뚜렷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여기에 그 대강을 소개한다.
    김생에 대한 기록은 상국사기의 본전(本傳)과 파한집(破閑集),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에 실리어 있다. 이중 필요한 것만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 수가 없다. 신라 성럭왕 10년(771)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평생을 글씨로 벗하여 살았다.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글씨 쓰는 일에 전념하여 예서, 행서, 초서에 모두 입신(入神)의 묘경에 이르렀다. 지금(삼국사기를 지을 당시, 1100년쯤)도 더러 그 유적이 있는데 학자들이 보물로 전하고 있다 하였다.

그 글씨 한 편을 다음에 소개한다.
    앞의 글은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인데 행서로 쓴 것이다. 천년이 넘은 옛날의 글씨로서 비(碑)에 새겨진 것이라, 진짜 모습은 많이 훼손되었다고 보는 것이 원칙일 터인데도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이 생기가 넘친다.

(2) 탄연(坦然)의 문수원기(文殊院記)
文殊院記 儈 坦然 高麗時代
    고려 때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 중에 첫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분이 당시에 문수원이란 절의 중으로 있던 탄연이다. 탄연(1070~1159)의 속 성은 손씨로 재주가 뛰어나서 유학의 경전을 달통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19살 때에 어지러운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당시에 이름이 높던 혜소국사(慧沼國師)의 제자가 되어 불도에 정진하였다. 뒤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예종 임금의 왕사(王師)가 되었다가 뒤에는 국사(國師)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는 대감국사(大鑑國師)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런데 이 탄연은 훌륭한 스님으로 존경을 받는 이상으로 서도에 있어서는 고려 왕조를 통하여 제일 가는 명필이라 한다. 이규보의 동국제현서결(東國諸賢書訣)에서는 김생의 글씨를 신품(神品) 글씨의 첫째로 꼽고, 탄연의 글씨를 신품의 둘째로 꼽았다.
    이 글씨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특히 행서에 능하여 전통적인 구양순 법의 전통을 깨고 왕희지의 글씨본에서 출발하여, 운치에 풍부한 유려한 새로운 틀을 창안하였다. 김생과 함께 우리나라의 서성(書聖)으로 받들기에 충분하다.

6. 초서와 한국의 명필
    일반적으로 말하는 초시는 행서를 다시 흘림으로 써서, 곡선을 많게 하여 빨리 쓸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편리한 서법이다. 글씨를 쓰는 순서로서는 해서 그 다음이 행서, 맨 마지막에 초서의 순서로 배워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초서에서는 이 순서에 따르지 않은 것이 많아서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초서를 가장 잘 쓰던 사람의 글씨를 다음에 소개하여 초서의 개념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초서 성인(聖人) 황기로(黃耆老)
孟浩然詩 黃耆老 李朝時代
    황기로는 본관이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인데, 매학정(梅鶴亭)이라고도 한다. 진사과에만 합격하고, 관계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알려져 있다. 용사비등하는 듯한 운필(運筆)이 한 점 한 획도 군색함이 없고, 자유분방한 가운데에도 쇠심줄과 같은 힘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글씨는 '槿墨' 가운데에 수록된 것인데 당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옛 친구의 집을 지나면서 (過古人莊)'를 쓴 것이다.
(2) 양봉래(楊蓬萊)의 초서
詩箋 楊士彦 李朝時代

양봉래(1517~1584)의 이름은 사언(士諺)이요, 자는 응빙(應聘)이고 봉래(蓬萊)는 그 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풍채가 신선 같고, 필법은 기고(奇古)하며 청신한 운치를 풍기고, 그 한시는 청아(淸雅)하기로 이름이 높다. 나라 안의 명승지로 이름 있는 데는 모조리 관상하였고, 특히 금강산을 제일 좋아하여, 자기의 호도 금강산의 별명인, 봉래로 지었다. 금강산에
    蓬萊楓岳元化洞天
이란 큰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는데, 이광사(李匡師)는 그의 圓嶠書訣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내가 일찍이 '蓬萊楓岳元化洞天'의 글씨를 보니 글자의 체는 멋이 있고 자연스럽고 살아서 흘러 움직이는 듯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어리게 하는데, 획력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주 괴이쩍게 생각하였다. 지난해에 금강산에 놀러갈 기회가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만폭동의 누운 바위 위에 새겼는데, 물에 씻기어 글씨가 많이 마모된 데다, 관장(官長)이나 유산객들이 매일 탁본을 찍어 가는 바람에 몇 해 못 가서 글씨가 제 모양이 없을 정도로 갈리었다. 이것을 스님들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쪼고 다듬고 하기를 백여 차례나 하였다. 그러니 글자 모양만 양봉래의 글씨로 남아 있을 뿐이고 그 신기(神氣)와 정광(精光)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저 양봉래의 글씨인 줄만 알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로다.

지금도 이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마멸된 글씨라도 이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이 생기가 돋는다고 하니 그는 필력이 얼마나 세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 실린 것은 '大東書法'에 실리어 있는 것이다.
    활달자재한 초서체는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독특한 필세가 엿보인다.

Ⅵ. 마 무 리
    이 글은 크게 두 조각으로 갈라서 풀이하였다. 첫째는 자형에 대해서 이고, 둘째는 서체에 대하여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한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적으면서도 꼭 그것을 쓰고 싶어 하는, 또는 써야만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풍조가 팽배하다. 이런 현실에서 한자의 자형에 대하여 기본 상식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을 세 갈래로 갈라서 풀이하였다. 그 첫째는 한자의 으뜸이 되는 조자 원리나 그 짜임새에 있어서 잘못된 것을 보기를 들어 그 시정을 촉구하였고, 둘째로는 자형이 서로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 것을 몇 가지 보기를 들어 바로 알고 바로 쓰도록 유도하는 데 힘썼다. 다음으로는 약자와 본자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점 들을 예시하여 약자에서 오는 폐해를 논하고 본자의 이해를 촉구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여러 서체에 대하여 그 서체의 특징과 그 서체로써 이름을 떨친 한국 명필에 대하여 그 필적(筆跡)을 제시하고 아울러 그 글씨와 글씨를 쓴 사람에 대하여 짤막한 해설을 붙이어 이 방면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힘썼다. 다만 자형과 서체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하고 사례 위주로 설명한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