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국어 순화 운동
이병찬 / 서울대 교수·독어학
1. 17·8세기 독일의 국어 통일 운동
독일 말이 독일의 실체로 표현하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제 것을 찾고 통일시키자는 것이 그 목적으로서 프랑스나 영국과는 달리 독일 말이 국어 형태의 성립을 못 본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루터의 성서 번역(1522)으로 설교나 문학어에서 표준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 국어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계층에 따라서 또는 지역에 따라서 언어 편차를 극복하지 못했던 데도 그 원인이 있다. 계층으로는 귀족, 기사, 소시민, 상인, 농민, 승려 등등으로 나뉘어 통용어, 민중어, 문학어, 문서어, 직업어, 유태 독일어, 구어, 일상어 등이 뒤섞여 있었고, 지역적으로는 크게 나누어 남부 고지 독일 말, 북부 저지 독일 말, 동·중부 독일 말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나 이 당시의 독일은 아직 통일된 국가가 아닌 여러 영주국으로 분할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 나라말의 순화는커녕 우선 나라말의 통일과 외래어 추방이 목전의 초미였던 처지였다. 당시의 문화 주도 세력인 승려들의 저술은 나전 말 일변도였고 궁중에서 쓰는 일상어는 프랑스 말이 대종을 이루었고, 시인들의 글은 방언과 지역 말에 한정되어 있었다.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말은 문서로 쓰는 상업어와 또 이것과는 종류가 다른 구어인 통용어가 혼용되어 같은 언어 공동체이면서도 같은 하나의 말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문제는, 저술에서 외래어를 없애야 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상하층을 막론하고 제 나라말을 쓰도록 해야겠고, 그것도 통일된 말을 써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말의 통일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 후에도 이중적인 난점을 가지고 국민과 국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첫째 여러 가지 형태의 계층어를 없애야 하는 난점이고, 둘째 이 균형어에서 생긴 말을 내적이나 외적인 면에서 철자법 또는 발음의 영역에까지 발전시켜 통일시켜야 한다는 난점이었다.
이를 위한 국가의 최초의 국어 통일과 노력은 1617년에는 안할·쾨텐의 영주인 루드비히와 작센의 세 공작에 의해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독일 국어학회다. 1582년 프로렌츠에서 설립될 로만어 계통의 아카데미(Accademia della Crusca)를 모방한 학회로서 처음 명칭을 국어 결실 학회 (Fruchtbringende Gesellschaft)라 하여 1680년까지 존속시켰다. 그 목적은 첫째 모국어를 정화시키고 보호 장려하며, 둘째 모국어를 통해 조국애를 높이고 관습 및 도의를 순화시키는 데 두었다.
이 학회를 계기로 국어 통일에 대한 관심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체젠(Ph.V.Zesen)은 독일 통일 국어학회(Deutschgesinnte Genossenschaft)를 1643년에 설립시켜 18세기 초까지 존속시켰고, 1644년에는 하르스되르퍼(G.Phil.Harsdörfer)와 클라이(Joh.Klaj)에 의해 뉘른베르크에 설립된 페크니쯔 국어학회(Pegnitzorden)가 있었고, 1660년에는 리스트(Joh.Rist)에 의해 설립된 엘프슈바넨 국어학회(Elbschwanenorden)가 있었고, 또 1667년에는 시인 협회를 모태로 하여 라이프치히에서 설립되었다가 1726년에 시인 고트쉐트에 의해 개편된 독일 국어학회(Deutsche Gesellschaft)가 있었다. 이 학회들이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독일 말의 정확성과 언어미를 가꾸고 비독일적인 성향의 표시로서 외래어의 만연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을 폈다. 여기에는 영주, 귀족, 소시민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참여하여 프랑스 말의 매혹에서 국어를 건지고, 라틴 말을 의존하는 인문주의적 사고방식을 독일화시키고 문학어와 상업어를 통일어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이 무렵 국어 형태의 성립이 정치적 영역에서가 아니라 문화적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정치적으로 우세했던 고지 독일 말이 통일어로 부각된 것이 아니라 루터가 성서 번역에 이용했던 중·동부의 독일 말이 통일어로 관철된 것이다. 이것은 기원 전 천 년경에 게르만 말만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이 발달된 이래 처음 보는 대역사다. 원래 독일의 언어사는 원시 게르만 말에서 제1차의 자음 변천과 7세기경에 제2차 자음 변천을 겪고 또, 울필라 (Wulfila)가 성서를 고텐 말로 번역(383년경)할 때까지는 비문이나 로마 문헌에만 독일 말에 대한 약간의 유물이 남아 있을 뿐이지 그것이 문헌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750년부터로 보고 있다. 이때도 독일 말은 종족어의 형태로 나타나 영주국의 정치적 분할과 교회 주교의 관할 분할에 따라 수다한 방언으로 난립되어 있었고 중세 중반기에 와서야 비로소 고전적인 중세 표준 독일 말이라는 초지역적 문학어가 발생한 것이다. 이 말은 대략 1190년 이래 궁중에서 발전되기 시작하다가 차츰 전 지역으로 확산된 독일 말이다. 이것은 전 지역에서 서로 쉽게 의사소통을 하자는 의도와 형태를 통일하려는 노력에서 같은 단어 형식과 같은 어휘를 갖고자 한 데서 그런 소산을 가져온 것이다. 루터가 성서를 번역할 때도 이런 초지역적인 문학어와 일부 중·동부 독일 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지방의 상용어를 그의 번역에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음에서는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또 이 문학어를 사용하는 층은 일부 시민층도 있었겠지만 궁중 사회와 그 주위에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 말은 내적인 발전에서 새롭게 강력해진 종교의 영향과 시민적인 특성이 부가됨에 따라 초지역적인 문어체, 전문어 및 특수어로 나타나고 연이어 발달된 수공업의 다분화는 직업어를 발전시키게 된다. 같은 시기에 독일의 문학어는 대부분 지방색을 담은 말들이었으나 종교 분야의 말은 수도회의 교리서나 설교에서 나전 말 대신에 이 초지역적인 문어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국어로 교리를 읽히게 하려는 의도와 모국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독일의 언어사는 기독교의 수용과 그 속에서의 내적인 발전과 근대 사회의 산업화와 분업화, 그리고 조국애의 정신이 상호 교체적으로 교호(交互) 작용을 일으키면서 발전되어 왔다.
이 발전을 이끈 주도 세력은 처음에는 수도사, 종교인, 귀족이었으나 중세 후기부터는 시민 계급과 문법 학자들이 이 세력을 이어받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18세기까지 지속된다.
2. 시민 계급의 성장과 표준어 확산
19세기에 와서는 표준어가 중류 계층과 하류 계층에 영향을 주면서 언어 계층의 균형이 요구되고 촉진되었다. 이를 위한 토대는 마련되어 있었다.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새로운 상황이 일어났다. 독일 제국은 삼십 년 전쟁 이후 수많은 군소 연방으로 분열되었고 삼백 개가 넘는 주권 연방 국가들 이외에 많은 반자치 지역과 도시들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제국의 영토 분할 문제는 거의 해결될 수 없었다. 공식 명칭인'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 제국의 권력이 1806년까지는 독일 황제에게 있었지만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개별 연방 국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별 연방 국가들의 내부에서는 새로운 경제력이 태동하고 근대의 특징이나 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계급이 형성되었다. 특히 여러 도시에서 상업과 금융업, 공장, 수공업 등을 통해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시민 계급의 등장으로 힘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궁정 문학에만 치우쳐져 있던 문학이 시민 계급을 통해 하층민에까지 파고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궁중의 문학어가 가진 시민에서 안 가진 시민 계층으로 이동하면서 표준어는 확대되어 갔다. 예를 들면 1766년도의 독일의 작가 2천 내지 3천 명이 주로 궁중에 소속된 전속 궁중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1800년대에 와서는 1만 명으로 증가되어 이제는 궁중과는 상관없이 순수 문학이나 시민 계급의 대변자가 되어 시민과 호흡을 같이 하는 작가들이 되었다. 이 중에서 1천 명 내지 3천 명의 전적으로 저작 소득에 의해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표준어의 확산은 자연적인 추세를 띠게 되었다. 물론 1800년대의 연간 저작 종 수는 2,569종으로 한 편에 평균 1천 부를 인쇄하더라도 그 수가 엄청나겠지만 저소득층의 도서 구입량은 별로 보잘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독일 인구 이천오백만에 비하면 불과 10% 정도의 독자층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여러 영주 국가들은 저마다 도서관을 개설하여 없는 계층을 위하여 국민 계도에 힘썼고 그 중에서도 베커(Z.Becker)가 지은 '농민을 위한 예비 참고서'는 1788년에서 1811년 사이에 백만 부 이상이나 인쇄된 것을 도서관에도 비치하고 농민들에게도 무상으로 배부하여 독일의 언어 통일에 중요한 매개체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다한 작가, 저작가들의 작품은 저마다의 개성이 있었고 형식이 달랐고 철자도 그랬다. 명사나 형용사를 쓸 때 대소문자가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다. 이럴 때 고전주의, 낭만주의의 문예 사조를 겪은 독일은 민족의 자존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고 그림(J.Grimm 1785~1863) 같은 사람은 국회 개원 연설에서 "한 민족이라는 것은 같은 말을 하는 인간의 총화"라고 주장하면서 말과 민족을 동일시하려는 사조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말이 여러 상이한 말을 사용하는 이질 집단이 한 국가를 형성하고는 있는 현대 사회에 적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크나큰 설득력을 지녀 쉴러(Schiller 1759~1805)도 "말은 한 국가의 거울이다.
우리가 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의 큰 모습, 뛰어난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당시의 언어관은 민족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런 풍조 것에 그림은 독일 말의 원류를 찾다가 자음 변천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비교 문법을 통해 역사 문법을 완성시켜(1819~1837년간 완성시킨 독일 말 문법) 독일 말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그 기초를 마련하였으며(현재 학교 문법에서 쓰는 독일 말의 강 변화, 약 변화, 혼합 변화 등의 용어는 그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뒤이어 그의 동생 뷜르헬름(W.Grimm 1786~1859)과 함께 1961년에야 완성된 독일 말 사전을 출간했다. 이 때 훔볼트(W.von Humboldt 1767~1835)는 말을 전체(Ganzheit)라는 테두리에서 관찰하면서 한 민족의 정신적 특성과 언어 형성은 긴밀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언어 철학적인 관점에서 그림의 형태론, 계보학적 접근 방식을 지원하였다.
3. 독일 말의 통일 규칙과 그 학문적 규명
19세기에서는 그 마지막 30년대에 들어와서 소위 소장 문법 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독일 말의 정화나 통일에 역점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 말의 언어 전반에 대한 학적 규명에 전념하게 된다. 이들은 말을 총체적 정신 생활과의 연관에서 관찰했던 그림, 훔볼트와는 달리 말을 자연 과학적 구성체로 간주하여 말의 의미 내용을 도외시시키고 형태, 특히 음운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그 연구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연구는 자연 법칙적인 사고 형식을 언어에 전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었고 그 방법론적 요청으로서 면밀하고 상세한 세부 작업만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부 작업에는 통일의 결실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음운의 원자론적 규명에만 전념한 나머지 정작 필요한 철자법의 통일, 발음의 표준화 등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의 이런 연구 풍토 때문에 국민학교, 고등학교에서 철자법 및 발음법에 대하여 통일을 요청하는 소리, 예를 들면 1. 명사와 형용사의 대소문자 사용 여부, 2. 무성 파열음이 다 같이 기식음을 동반하는데 유독 》t《만을 》th《로 써야 하느냐의 여부, 3. 개폐(開閉)에 따라 달리 발음되는 》e《의 표기 방법, 4. 》 äu《, 》au《, 》eu《......등의 발음 방법 등을 통일시켜 달라는 소리 높아졌다.
1854년부터 몇몇 주정부가 주동이 되어 이에 대한 통일 노력을 1860, 1861, 1866, 1872년 도합 5회에 걸쳐 각 대학 교수에게 일임하였다가 1876년의 백림 회의에서 겨우 철자법 규칙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게 되었다.
1855년에는 독일 말의 정화와 외래어의 독일 말 바꾸기 그리고 철자법 및 발음의 통일을 주된 목표로 정하고 기관지(Der Sprachdienst:언어 봉사)까지 가진 독일어 국어 협회(Deutscher sprachverein)가 리이겔(Herm.Riegel)의 발의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교사였던 두덴(K.Duden 1829~1911)의 독일 말 철자법 사전(1880년 초간)이 자극제가 되어 이의 학문적 보장을 위해서 출발했었던 것이다. 이 학회의 업적으로는 피에토르(W.Viëtor 1850~1918)의 음성학 이론과 라우머(K.von Raumer)가 주장한 음성학 원리에 입각한 지잎스(Th.Sieds 1862~1941)의 독일 말의 무대 발음 사전을 들 수 있다(이것은 지금까지도 독일 말의 상용어에 대한 예술적이고 순수한 발음 사전이 되어 있다). 원래 독일 말의 발음에 통일적인 규칙을 가지려는 시도는 1803년 괴테가 시도했지만(Regeln Für Schauspieler)이 사전보다 포괄적이고 엄격한 규칙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898년과 1908년 2차에 걸쳐 있었던 독일 무대 협회와 학자들이 정한 무대 발음의 규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모음 성량을 표시하는 분야가 미흡했던 것이다. 1901년 백림에서 개최된 유월 회의라는 철자법 회의에서 획일적으로 규정된 철자법은 두덴의 사전과는 많은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잎스의 발음 사전(비록 북부 저지 독일 말의 발음 형식을 많이 수용하기는 했지만)과 두덴의 철자법 사전의 영향으로 근세 독일 말이 자리를 굳히게 되고 각 주의 교과서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4. 동·서독의 언어 분화와 그 극복
20세기 전반기의 독일은 전쟁과 공황이 거듭되는 문화의 쇠잔기다. 양차의 대전을 겪는 동안 독일어 국어 협회는 그 의의를 잃게 되고 1947년에 다시 뤼네부르크에서 독일 국어학회(Gesellschaft für deutsche Sprache)가 창설되고 1965년부터는 본부를 비스바덴으로 자리를 옮겨 독일 말의 순화를 위해 전념하고 있다. 1947년부터 발행되는 기관지 '모국어(Mutter sprache)' 착실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국어 통일에 대한 사건이라면 독일 문자(Fraktur)를 로마 문자(Antiqua)로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서 변경시킨 것뿐이다. 독일 문자는 고텐 문자(Gotische Schrift)를 본 따서 만든 글자로서 1485년에 뉘른베르크의 관청 문서에서 제일 먼저 사용되다가 1513년에 기도서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보편화된 독일 특유의 글자다. 예술적이고 미학적이 가치가 있어서 독일 사람과 그 주변 국가에서 애용되었지만 유럽 문화권에서는 소외되는 폐단이 없지 않아 민족 지상주의가 그 근본인 국가 사회주의 정부도 1941년에 법령으로 이를 폐지시키고 말았다.
20세기 후반기는 동서 양분으로 인한 언어 분화가 문제의 초점으로 등장한다. 언어 분화에는 그 내적인 원인도 있지만 외적인 것도 있다. 외적인 것에는 동서 양분에 의한 국토의 분할, 나치 체제에 의한 유태 독일 말 (Jiddisch)의 대폭 감소, 남미와 북미에서의 독일말 상용자 수의 격감,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국가 권력 회복 등과 그리고 1959년 서독 국가 위원회가 결정한 소문자 쓰기와 철자의 분리 및 결합법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위원회가 기각했다는 사실 등이다.
내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무대 발음이 표준 발음으로 굳어졌고, 간접 화법에서 접속법 현재형 대신에 과거형이 쓰이게 되고,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미래 완료형이 소멸되었다. 소유격이나 여격에 음편으로 쓰이는 》e《가 탈락되고 고유 명사의 어미에 붙는 》s《도 탈락되었다. 어휘 면에서는 완전 동사 대신에 기능 동사구가 대치되게 되고 추상 명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을, 특히 기능 동사구와 추상 명사의 사용 증가를 양식학적, 언어 비판학적, 관용어학적 등의 의미에서 언어 파괴 현상, 언어 비하 현상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독일 국어학회에서는 기관지 '모국어'를 통해 이는 오히려 언어의 의미 분화 현상이라 주장하여 이를 언어학적인 의미에서 옹호하고 권장한다. 이들은 지난 세기와는 달리, 언어의 종합화와 분석화, 차용어의 수용, 단어의 발전 과정을 위한 단어의 세분화 그리고 외래어의 과감한 수용 등은 전 시대의 언어 정화주의에 대한 역행인지 모르나 범유럽화 내지는 범세계화의 추세 면에서는 오히려 바람직스러운 현상으로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체계와 사회 지역적인 면에서는 수직적인 방향에서 방언이 교제어로 동화되어 공통 독일 말의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어휘 면에서는 지역적으로 규범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정치적인 양분에서 그러한 상황이 생긴다. 그 중에서도 동독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면에서 공식적인 문어체와 구어체의 어휘들은 그 형식과 의미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어학적인 면에서 볼 때 동·서독 간에 새로운 단어들의 발생이 많고, 같은 의미의 단어라도 그 형식을 달리하여 나타난다. 서로 체제가 다르다 보니 동독의 공식 용어에서는 많은 단어들이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고, 서독의 경우는 서구, 특히 미국말의 영향이 크다. 자유(Freiheit), 학문(Wissenschaft)과 같은 단어들도 양독 간의 의미 해석을 달리한다. 그러나 형태론을 포함한 통사 구조는 여전히 같으며 철자법과 발음의 규칙도 같다. 그러기 때문에 독일 국어학회에서는 이러한 통사론과 철자법 및 발음법의 개발과 연구에서는 각기 제 나름의 이론에 입각해서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으나 신조어와 의미 규명에서는 태도를 달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분할 국가의 체험으로 이를 우리와는 다르게 잘 극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