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식 구문
황찬호 / 서울대 명예 교수.영어 영문학
국어 속에 서구 외래어가 필요 이상으로 과다하게 사용되는 현실은 모든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이고, 따라서 그 문제점들이 다각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국어 사용 실태는 외래어 단어 몇 개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구문에까지 영향을 미쳐 우리 국어 본래의 구문이 손상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외국어식 구문은 석.박사 논문, 젊은 기자들의 보도문, 젊은 학자들의 연구 논문, 심지어는 소설에서까지 무수히 찾아낼 수 있는 것인데, 이런 구문들도 비문법적인 것은 안되지만 어떤 것은 우리말 표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공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말이란 바뀌는 법이고 문법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평소 큰 관심을 기울이던 것으로 마침 편집자의 요청이 있어 몇 가지 문법 사항을 중심으로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1. 피동태(Passivization)
신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李人稙의 '血의 淚'(1906)에 나타난 주어와 그 주어에 호응하는 서술어와의 관계 중 피동형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또 같은 신소설의 '釋天明月'(작자 미상, 1919)의 경우 피동태 호응은 다음과 같다.
이 두 권의 신소설을 두고 볼 때 물론 그 소재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주어를 어떤 것으로 삼느냐 하는 우리 발상법의 한 유형을 여기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소설 전집을 다 읽어도 "기상으로 팔려간다", "도둑맞는다", "빼앗긴다", "......당하다" 등 극히 제한된 몇몇 상용적인 피동형 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말의 경우 주어는 생략되는 경우가 많고 생략되는 주어의 대부분은 사람이거나 유정물 명사(animate noun) 또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topic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전래의 발상법이 외국어의 영향을 받아 급격하게 변했고 또 계속해서 변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위의 다섯 문장이 문법적으로는 통용된다 하더라도 ③, ④, ⑤에는 뭔가 이질적인 저항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전형적인 어법은 ①일 것이지만 요사이는 ②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요사이 젊은 사람 중에는 ③, ④ 정도는 예사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또,
위의 글이 보다 한국적인 발상에서 나온 글이라면 '이 같은 이념들'이 문두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고 "그 동안 파키스탄에......영국 등이 이 같은 이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정도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또, "......경제 사정이 크게 호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식의 우리의 발상 유형이 (坤)평자의 글에서는 "......경제 사정이 크게 호전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로 된다.
위에 나온 동사들 '받아들인다, 주목한다, 기대한다, 생각한다, 분석한다'의 행위자(agent)는 우리 식으로는 사람이지 그 대상이 되는 명사절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말의 어순은 '동사+목적'이 아니고 '목적+동사'이기 때문에 목적이 복잡하고 긴 명사절로 될 때에는 글을 마무리하는 동사의 voice가 자칫하면 논리적이 못 되기 쉽다. 영어의 경우에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어와 동사의 voice의 논리성이 명확하다. 이 voice의 논리성이 우리말에 도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에는 별로 안 쓰던 피동형이 영어 표현에 유발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예문들은 영어 영문학회지, 신문, 석.박사 논문 등에서 뽑아 본 것이다.
위의 예들은 어딘가 우리 관용 어법과는 이질적인 표현들이다. 특히 '......에 의해 + 피동'은 'be+p.p+by~'의 영어 구문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피동형 표현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의 어법을 그만큼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것이기에 한편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패턴에만 따르면 어떤 표현이든지 정당화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복남이가 순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때'를 피동으로 '순자의 얼굴이 복남이에 의해 빤히 쳐다보일 때'라고 표현해도 그것이 우리말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topic, statement의 관계를 고려하여 topic선정을 잘 해야 우리글다운 것이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피동화의 새로운 경향은 외국 문학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 韓戊淑의 작품 '月彙'와 '感情 있는 深淵'에서 몇 개 뽑아 보자.
①의 '거두어져 버렸다'는 지금까지는 대개 '거두어 버렸다'로 능동으로 써 오던 것이고 ②의 '묻혀져 버렸다'는 대개 '묻혀 버렸다'로 써 온 것인데 피동이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해서 피동 표지인 '져'가 또 첨가된 것이 아닌가 싶다. ③과 ⑦의 '생각키는'은 '생각하다'의 피동인데 철자는 '생각히다'로 될 것인데 발음 나오는 대로 일부에서 관용적으로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 만일 '생각히다'의 피동이 성립된다면 영어의 be+killed의 해석을 '죽음을 당하다'니 '피살되었다'니 하지 말고 '죽혔다' 또는 '죽혀졌다'로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요는 그 문법이 관용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④의 '가셔지며 있었다'는 영문법의 '수동형 과거 진행형'에 해당되는 것인데 '......며 있었다'는 이상하다 '노래하며 있었다', '걸으며 있었다', '먹히며 있었다'는 '노래하고 있었다', '먹히고 있었다'가 자연스럽듯이 이것도 '가셔지고 있었다'가 좋지 않을까. ⑤, ⑥의 '채워져 있는'이나 '갈겨져 있는'은 극히 정상적인 피동형이지만 ②의 경우처럼 '묻히다'가 이미 수동인데 '져'가 또 붙는 경우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먹혔다'를 '먹혀졌다'로, '도둑이 잡혔다'를 '잡혀졌다'로. '팔린 물건'을 '팔려진 물건'으로 쓴다면 약간의 저항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⑨의 '놓쳐 주세요'는 '놓아주세요'가 아니라 '나를 놓치게 해 주세요'의 뜻인 것은 알겠는데 과연 이런 어법이 성립할는지 의심스럽다. 다만 위의 예들을 보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별로 안 쓰던 피동형을 문법 논리에 맞추어 쓰려는 새로운 조어 의욕이 강하다는 점이다. 단정할 근거는 좀 약하지만 이것이 외국어 구문에서 자극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의 관용 어법이 무시되더라도 그것이 절실한 필요에서 나온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아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말은 변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영어 구문을 직역한 것 같은 생소한 표현은 피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그는 친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그는 친구한테 죽었다.", "그는 친구의 손에 죽었다.", "그는 친구 때문에 죽었다."로 하는 것이 훨씬 우리말답다. 영어의 by를 무조건 '......의해'로 해석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2. 명사화(Nominalization)
영어에는 원래의 명사 외에 learning, speaking, walking 등 동사에 -ing를 붙여서 명사화한다. 이것을 동명사(Gerund)라고 한다.
To be kind is the best way to get a friend의 to be와 같이 부정사(Infinitive)를 써서 명사화하는 법이 있고 또 하나는 that......로 명사절을 만드는 법이 있다. 동명사는 우리말로 옮길 때 대부분 '배우기', '말하기', '걷기' 등 '......기'로 하고 부정사는 '정직한 것'과 같이 '......것'으로 옳기고, beautiful-beauty와 같이 형용사와 명사의 대비 때 명사는 '아름다운 것', '아름다움'으로, possible-possibility의 경우는 '가능한 '-'가능함' 등으로 옮긴다. 이 '......것'과 '......함'이 우리글에서 과용, 남용 또는 오용되고 있다.
위의 예들을 살펴보면 ①은 앞에 온 명사 '연민'과 어조가 맞지 않는다.
차라리 '연민과 비참에 빠져'가 좋다. ②의 '약속을 하지 말 것을'은 '약속을 하지
말라고'로 해야 되고, ③의 '결혼할 것을 결심하였다'는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가 옳고, ④의 '찾으려 함에 있어서'는 '찾으려는 데 있어서'로 고쳐야겠다. ⑤는 그대로 넘어 갈 수도 있지만 '보상이 있다는 것을'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고, ⑥은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가 옳다. ⑦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로, '인내해야 함을'은 '인내해야 된다는 것을'로, ⑧은 '동등'으로, ⑨는 '쓴 이면에는'으로 고쳐야 한다. 이런 오류들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영어의 Noun Infinitive와 Noun Clause를 번역하던 버릇이 그대로 습성화되어 우리말에 끼여든 것인데 이런 오용이 뜻밖으로 많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 시제(時制)-특히 과거 완료(過去 完了)
신소설의 시제를 살펴보면 과거는 '......하더라'라고 회상 시제를 쓰고 있다.
그리고 대화가 아닌 설명문은 대부분이 현재로 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시제 구분이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이 春園을 비롯한 근대 소설 작가들에게서는 시제의 논리성이 확립된 것 같지만 과거 완료만은 그렇지도 않다.
과거 시제를 가장 의식한 것이 金東仁이고 과거 완료 시제를 가장 의식한 것이 廉相涉이었던 것 같다. 그의 '標本室의 청개구리'에서만도 과거 완료를 무려 26번 쓰고 있다. 당시의 작가들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작가들까지 다 합쳐도 과거 완료를 廉씨만큼 쓴 사람이 없다.
위의 예에서 '미남자였었는데'는 시제의 논리로 보면 과거 완료를 쓸 이유가 없다. 따라서 '미남자였는데 '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다음 '......기뻐할 줄
알았었다.'와 '......생각하였다' 사이에 시제가 달라져야 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다음 '......헤매었다'와 '......갔었다'와 '......향하였다'의 일련의 시제 중에서 유독 '갔었다'만이 과거 완료가 되어야 하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위의 '알았었다', '나섰었다', '갔었다'는 '알았다', '나섰다', '갔다'로 해서 시제 변동에 따르는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갑자기 작가에 따라서는 그대로 과거 시제를 쓰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柳周鉉의 '張氏一家'에서 예를 들어 본다.
앞 문장의 경우 '오늘날까지'라는 부사구가 있음에도 '못했었다'는 좀 이상하다. 다음, '인정했었기 때문에'는 시제로는 맞지만 '인정했기'가 보다 관용적이다.
尹金渡 '얼굴', '들菊花'에는 과거 완료가 한 번도 안 나온다. 씨의 "그쪽 코스를 밟아서라도 갈 수밖에 없다고 급히 올라 탔던 것이다."의 '탔던 것이다'는 '탔었다', '탔던
것이었다', '탄 것이었다' 중 어느 것과도 환치될 수 있다. 이처럼 과거 완료는 우리 관용법에서는 과거와 맞바꿀 수 있는, 말하자면 자유 변이(自由 變異 free variation) 시제라고 할 수 있다.
康信哉, 孫昌涉, 朴淵禧, 孫素熙 등의 글에는 과거 완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근자 신문 기사 등을 보면 시제 논리상 과거 완료를 써야 할 것 같을 때는 의식적으로 쓰는 경향이 많다.
위의 예문을 보아 신문에서도 과거 완료를 얼마나 의식하고 쓰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는 이야기하는 시간의 기준이 현재인 만큼 굳이 과거 완료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⑥, ⑦, ⑧은 그 전문이 있어야 논술 시간의 기준을 알 수 있었지만 과거 시제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 같고, ⑨의 '......거부하였었다'는 지나친 시제 의식 같다. '......거부하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가 보다 자연스럽다.
이 과거 완료라는 시제가 우리 문법에 없는 것은 아니다. 崔鉉培는 완료시와 진행 완료시와 해서 '먹었었다', '먹고 있었었다'를 예시하고 있고, 李熙昇은 진행형은 없이 大過法라 해서 '먹었었다'를 예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제를 전적으로 외국어에서 도입한 외래 구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고찰해 보았듯이 과거 완료는 과거와 거의 자유 변이로 씌어져 왔기 때문에 아직도 사용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관용상의 거부감을 주는 것도 있다.
4. 대명사 - 특히 인칭 대명사
李海朝의 신소설 '花의 血'에 나오는 인칭 대명사의 제3인칭 '그'는 모두 관형사적 용법으로 '그 꽃', '그 여자', '그 고을' 등이고 대화에서 화자 표시를 할 때에는,
에서와 같이 '그자'로 되어 있다. 복수의 경우는 '그네'를 썼다.
위와 같이 '그'가 주격으로 쓰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 春園의 '사랑'에는 주격으로 쓴 '그'가 가끔 보인다.
다음 예를 보면.
와 같이 가급적 대명사를 안 쓰고 고유 명사를 반복해서 쓴다.
金東仁의 '金姸實傳'의 대화는 다음 식으로 이어진다.
위의 대화로 보아 金東仁은 春園과 달리 화자가 누구인지 추측이 가는 경우에는 가급적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廉相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春園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다녔고 橫步는 게이오 대학 문과, 金東仁은 메이지 학원 중퇴다. 세 사람이 다 영어 내지 일본어로 번역된 외국 문학 작품을 탐독했을 것이고 따라서 대화마다 나오는 He said "......", "......" said she, They said that......의 인칭 대명사에는 익숙해 있었을 텐데 그것들을 우리말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은 것은 인칭 대명사에 적이 이질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He에 해당하는 '그'는 있었어도 She '그녀'는 쓰이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한때 이 She를 '그 여자', '그녀', '厥女'로 하자고 논란이 많다가 '그녀'로 확정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You는 여전히 문젯거리다. '당신, 너, 그대, 자네, 선생님, 어르신네, 노형' 등등 상황에 따라 한도 없이 바뀌기 때문이다. 또 우리말에서는 언급하지 않아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경우에는 주어를 생략해 버리지만 영어는 명령문 외에는 꼬박 넣는다. 이런 영향을 받아 번역문 아닌 우리말에서도 대명사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늘어 가고 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용하면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이 글이 번역한 글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얼마나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가? 이 내용은 우리말식인 발상으로도 얼마든지 전달할 수 있다.
이런 대명사의 도입은 이미 '開闢'(1920)에도 많이 나타난다.
5. 상용 표현
어느 언어나 표현하려는 내용에 따라 거기에 해당하는 표현이 나오게 마련이라 이제 언급하는 표현들이 과연 외국어에서 온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어의 상용적인 표현들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 같은 것이 매우 많다. 신문기사가 그렇고 석·박사들의 논문이 그렇다. 너무도 자주 접해서 그런지 지금은 별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런 상용어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이 위기감은 벨로우의 전기적 요소를 그 기조로 한 채 그의 작가 정신의 전부를 지배한다.
위의 예 중 '외계에로의'는 '외계로의'로, 또 '그것에의 단골'은 '그것의 단골'로, '국제화에의 노력'은 '국제화의 노력'으로, '여왕으로서'는 '여왕으로'가 우리 어법에 맞아 자연스러울 것 같다.
6. 결어
지금까지 몇 가지 항목에 걸쳐 외래 구문 내지는 외래 구문의 영향을 받은 구문 또는 표현 같은 것을 수집해서 검토해 보았다. 외래 구문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깨는 부정적인 면도 많지만 새로운 조어의 가능성 또는 표현의 다양성을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면도 많다. 따라서 우리는 이 외래 구문에 대해 편협한 쇼비니즘도 버려야 하겠지만 콤플렉스도 버려야 할 것이다. 본인이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학생들의 석사 논문, 박사 논문 심사 때 그들의 글에 대한 저항감을 크게 느껴서 그런 것들을 고쳐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