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외국 말의 문제
서정수 / 한양대 교수·국어학
1. 들머리
이 글은 국어 순화의 차원에서 서구 외국 말의 사용 실태와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책에 관해서 소견을 밝히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여기서 서구 외국 말이란 서구 계통의 말로서 우리나라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 이는 옛날부터 사용되어 우리말처럼 익혀진 외래어와는 구별된다. 외래어는 대개 우리만이 미처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에 빌어다 쓰는 말임에 반해서, 외국 말은 그런 현실적인 필요성을 떠나서 함부로 쓰이는 남의 나라 말이다. 이런 외국 말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점이 많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외국 말이 얼마나 많이 쓰이고 있는지를 실태 조사 등의 결과를 토대로 분석하고 그 원인을 따져 보며 아울러 그 대책에 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외국 말이 쓰이고 있는 경우는 대체로 다음 4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4)의 경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앞의 (1), (2), (3)과 관련된 분야도 문제 거리가 되고 있으나, 이 (4)의 문제는 오늘날 매우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새로 만들어지는 가게 이름이나 물건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만들어졌던 이름마저 외국 말로 바뀌어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 안 가서 외국 말 일색의 상호와 상품명이 도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생길 정도이다.
여기서 주된 자료로 삼고자 하는 것은 서울 시내의 5개 지역의 상호와 일상 용품의 이름에 관해서 조사한 결과이다. 상호는 종로 2가, 명동, 신촌, 영등포 시장 및 여의도 일대, 그리고 강남의 번화가 일대 등 5개 지역으로 나누어 직접 조사 수집한 2,311개소의 것이다. 한편, 상품명은 15개 부류의 일상 용품 1,653가지를 대상으로 하였다.[이 조사는 약 2년 반 전에 필자의 기획과 지휘로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학생들(유경종, 김장순, 정민, 이종대)이 실시한 것이다.]
상호와 상품명에 사용된 언어는 다음의 4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폈다.
2. 상호와 상품명의 언어별 사용 실태
앞의 들머리에서 말한 방식으로 상호와 상품명을 조사하여 분류한 결과를 보기로 한다. 우선 5개 지역의 상호를 업종별로 분류하여 각 언어의 사용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용 언어 업종
|
우 리 말 | 한 자 말 | 외 국 말 | 섞 임 말 | 계 |
요 식 업 | 271(26%) | 444(43%) | 294(29%) | 17(2%) | 1,206 |
다 방 | 31(19%) | 94(57%) | 36(22%) | 4(2%) | 165 |
의류 판매업 | 69(15%) | 109(23%) | 282(60%) | 10(2%) | 470 |
신발류 판매업 | 7(11%) | 12(20%) | 41(67%) | 1(2%) | 61 |
부동산 소개업 | 7(9%) | 59(77%) | 10(13%) | 1(1%) | 77 |
보건 의약업 | 5(4%) | 101(81%) | 17(14%) | 1(1%) | 124 |
위 락 업 | 6(7%) | 59(70%) | 16(19%) | 3(4%) | 84 |
위생 숙박업 | 4(7%) | 41(73%) | 10(18%) | 1(2%) | 56 |
그 밖의 업종 | 17(7%) | 178(72%) | 46(19%) | 7(3%) | 248 |
계 | 417(18%) | 1,097(47%) | 752(33%) | 45(2%) | 2,311 |
<표1>에서 보듯이 서울 시대 5개 지역에서 조사한 상호 2,311개를 각 사용 언어별로 보면 순 우리말로 된 이름은 417개 곧 18%, 한자 말 이름 1.097개 47%이고, 외국 말 이름은 752개 33%, 섞임 말은 45개로 2%가 된다. 사용 언어별 순위는 한자 말, 외국 말, 우리말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현상은 외국 말 상호가 우리말 상호를 33 : 18의 비율로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조사 자료보다 1년쯤 뒤의 가게 이름 조사(김윤학, 1986)에 따르면 토박이말 : 18.6%, 한자 말 : 40.8%, 서양 말 : 27.2%, 일본 말 : 0.5%, 섞임 말 : 12.9%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 조사의 결과도 앞의 것과 비슷하며, 섞임 말이 대부분 서양 말로 된 것임을 감안하면 서양 말 가게 이름이 40%에 이름을 알 수 있다.
<표1>에서 다시 상호를 업종별로 살펴보면 의류 판매업과 신발류 판매업의 상호가 외국 말 사용이 가장 두드러진다. 의류 판매업은 외국 말이 60%로서 한자 말 23%, 우리말 15%를 합친 것보다 월등히 많다. 신발류 판매업의 경우도 그와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그 밖의 업종에서도 외국 말 상호가 순 우리말 상호보다는 압도적으로 많다. 외국 말 이름의 실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은 종래 거의 한자 말로 되어 있던 상호가 최근에 이르러 외국 말과 우리말로 바뀌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외국 말 상호가 우리말 상호보다 월등한 비율로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주목된다. 이와 같은 비율은 조사 지역을 확대하면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위의 5개 지역만으로 한정하여 볼 때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엄연한 한국의 땅에 있는 상점의 상호, 그것도 대부분 국산품을 팔고 있는 업소들의 상호가 최고67%, 평균적으로도 33% 가량이나 외국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의 추세로 보면 이런 외국 말 상호가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 말 상호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상인들은 외국 말 상호를 써야만 상품이 잘 팔린다고 대답을 한다. 한국말로 상호를 붙여 놓으면 드나드는 손님이 현저히 줄고, 외국 말로 바꿔 놓자마자 고객의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특히 여성의 의류나 소모품을 판매하는 점포가 많은 신촌 지역과 명동 지역이 그러한 외국 말 상호의 선호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와 같은 사실은 상인들만의 잘못이라기보다 외국 말 상호를 좋아하고 외국의 상품을 즐겨 찾는 고객,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 구조로 빚어진 현상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외국 말 선호 현상은 우리말 상호까지도 야릇하게 변질시키고 있다. 우리말을 가지고 외국 말처럼 조어를 해서 알쏭달쏭한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예를 들면 'Diell'(디엘), '두리' 등의 이름이 있다. 이런 상호를 붙인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디엘'은 "앞엘 봐라, 뒤엘 봐라"라고 할 때의 음을 따서 지은 것이고, '두리'는 '둘이'를 연철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말 발음을 가지고 외국 말처럼 들리도록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외국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외국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상인들이 고객을 은근히 우롱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국산품을 외산품인 것처럼 가장 포장하여 외산품만을 찾는 사람들에게 속여 파는 것과 일맥이 상통한다.
다음에는 상품명의 언어별 사용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용 언어 종류 |
우 리 말 | 한 자 말 | 외 국 말 | 섞 임 말 | 계 |
과자류 식품류 의류 문구 운동구류 화장품류 비누 세제류 주류 아이스크림류 피혁신발류 잡지류 완구류 가정용 소모품류 난방 및 가전 제품류 자동차류 기타 |
63(32%) 51(32%) 27(8%) 20(12%) 13(21.6%) 18(17%) 1(2%) 14(32%) 1(1%) 32(15%) 19(25%) 4(8%) 6(15%) 2(8%) 2(10%) |
16(8%) 47(29%) 54(15%) 43(25%) 7(11.6%) 9(8%) 18(36%) 2(5%) 18(23%) 114(54%) 13(26%) 12(24%) 6(29%) |
100(50%) 57(35%) 237(66%) 93(55%) 40(66.6%) 81(75%) 28(56%) 27(61%) 60(75%) 32(15%) 51(68%) 31(62%) 17(41%) 21(88%) 13(62%) |
20(10%) 7(4%) 41(11%) 14(8%) 3(6%) 1(2%) 1(1%) 32(15%) 5(7%) 2(4%) 6(15%) 1(4%) |
199(12%) 162(10%) 359(22%) 170(10%) 60(4%) 108(7%) 50(3%) 44(3%) 80(5%) 210(13%) 75(5%) 50(3%) 41(2%) 24(1%) 21(1%) |
계 | 274(16.5%) | 359(21.7%) | 888(53.7%) | 133(8%) | 1,653(100%) |
<표 2>는 조사 대상 상품 1,653가지를 15개의 부류로 나누어 나타낸 것이다. (여기 기타 상품이란 시계, 필름, 피아노 등을 가리킨다.) 이 표에 나타난 것은 김윤학(1986)의 물건 이름에 대한 조사 결과보다는 외국 말의 평균 비율이 낮은 편이다. 김윤학(1986)에서는 토박이말 9.4%, 한자 말 8.6%, 서양 말 67.6% 일본 말0.5% 섞임 말 13.9%로 나타난 바 있으니, 외국 말 사용 비율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외국 말의 홍수가 점점 더 거세어 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각 부류별로 외국 말 이름의 일부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3. 원인과 대책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상호와 상품명에 쓰이는 외국 말의 실상은 참으로 놀라운 바가 있으며, 계속 그 사용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현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우려되는 바가 있다. 우리말의 발달에 치명적인 타격이 됨은 말할 것도 없고, 제 것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만을 숭상하고 받드는 사고 방식이 체질화되고 있으며, 마침내 우리 겨레의 동질성과 나라의 운명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말을 쓰는 것이 지금 당장의 편의나 이익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로 말미암아 겨레의 말과 나라가 병들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이처럼 심각한 외국 말의 홍수 사태에 대하여 그 원인을 분석해 보고 그에 관해 소견을 펴고자 한다.
(1) 외국 말 상호가 이처럼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근본 원인은 뿌리 깊은 사대주의적 의식과 국산품에 대한 사랑 또는 인식 부족이다. 자기의 것은 하찮게 보고 남의 것은 거의 무조건 숭상하고 우러러 보는 사대주의적 발상이 외국 말 홍수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직장에서는 국산차를 외국 말 상호의 봉지에 담고, 반대로 외국산 차를 국산품 봉지에 담아 놓고 자유로이 마시게 했더니, 거의 모두가 전자만 타 마시면서 맛있다고 했다 한다. 이는 사대주의적인 맹신을 증거하는 예이거니와 외산품을 무조건 숭상하는 의식이 얼마나 깊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더구나 이런 사대 사상 때문에 국산품에 대한 과소 평가의 습성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국산품이 놀라우리 만큼 향상되었으며, 특히 섬유 등 경공업 분야에서는 국산품이 세계 시장을 누비며 호평을 받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과소 평가하면서까지 외국 상호이면 거의 무조건(가짜인 것도 가리지 못한 채)사려 덤비는 데서 외국 말 상호의 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1)의 원인과 관련된 대책으로서는 일반 대중의 사대주의적 의식을 청산케 하고 국산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사대주의적 의식의 개조 문제는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장기적인 정신 교육과 사회 운동 등으로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길러 가야 해소될 문제이다. 특히 정치적, 경제적 자립 운동 등을 통하여 남의 나라의 예속을 벗어나야 한다는 자세가 일반화되어야 하고, 문화, 경제, 운동 경기 등을 통하여 우리 겨레의 우위성을 상대적으로 확인하는 국민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번 올림픽과 같은 기회를 최대로 선용하여 우리가 세계인을 주도할 수 있는 국민임을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자각함으로써 망국적인 사대주의 의식을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한편, 국산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도 오랜 숙원의 과제인데, 이는 근래 그 품질이 급속도로 향상된 국산품의 참모습을 일반 국민들에게 직접 확인시킴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공업 진흥청에서는 국산품 몇 가지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품과 품질 비교를 한 바 있는데, 국산품의 품질이 저들 유명 상품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으면서도 값은 2.5배나 싸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국산품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며, 앞으로 이런 비교 고찰과 홍보 활동 등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2) 외국 말 이름의 상호와 상품의 이름이 쏟아지고 있는 또 한 가지의 원인은 최근 들어 외국으로 수출한다는 명목으로 상품명을 외국 말로 지어서 국내 시장에 유출시키는 데 있다. 이는 그러지 않아도 외래품을 숭상하는 사대적 풍조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하는 결과를 빚었다. 외국 상호만 붙이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니 업자들은 앞다투어 외국 상호를 들여오고, 국내 상품도 덩달아서 외국 이름을 새로 지어서 붙이는 현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2)의 원인과 관련된 해결책은 무엇보다도 정책 당국과 관계 업자들의 자세에 달려 있다. 수출용 제품을 국내 시장에 그대로 유출시키지 않고 그것을 수출용으로 활용하기만 해도 외국 말 상호의 문제는 적어도 국내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출 정책에서 외국 상호의 의존을 하루 속히 탈피하는 일도 그들의 손에 달린 문제이다. 다행히도 국내 제품의 수준 향상은 상당 분야에서 그러한 자주적인 상호 정책을 촉구할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민족 자주 역량을 드러내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모든 상품에 우리의 이름을 달아 세계 무대에 내보내는 일이 바람직하다. 이 일이 앞당겨만 진다면 외국 말 상품명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3)외국 말의 범람이 우리말 나아가서 겨레와 나라의 발전에 얼마만큼 해악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일반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다. 학교의 건물 등에는 "말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 뜻이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거의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얼마만큼 지배하고 있는지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으며, 비록 다소의 인식이 있는 사람들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단적인 증거로는 대다수의 국민이 우리가 지금 외국 말의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그 물결에 덩달아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3)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통한 교육, 언론 매체를 통한 지속적인 홍보 활동 그리고 각 학회 등에서 공청회나 발표회를 자주 가짐으로써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말이 우리의 의식 구조를 형성하는 모태가 된다는 점, 우리말만이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연장이요 바탕이라는 점, 우리말이 겨레의 동질성을 지탱하는 근본 요소라는 점 등을 온 국민이 뚜렷이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온갖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우리말이 외국 말의 홍수에 밀려 병들게 되거나 외국 말의 잡초에 억눌리게 되면 우리말의 독자적 기능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말 것이니, 겨레의 삶과 문화는 얼치기나 튀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게 깨우쳐야 한다.
(4) 외국어의 범람을 가져온 데는 관계 정책 당국을 비롯한 국어 교육/연구 기관, 언론 매체 등에도 책임이 있다. 우선 정부 당국이 그동안 경제 성장을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어 등 정신문화의 문제를 뒷전에 방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수출 증대라는 구실로 외국 말 남용을 오히려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국어 교육이나 연구 기관에서도 외국 말의 홍수를 막는 뚜렷한 대비책을 마련하여 교육하고 계몽하는 노력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일부 기관에서 연구 발표 등을 통하여 관계자들의 각성을 촉구한 일이 더러 있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론 매체 특히 방송 매체들은 이런 외국 말의 물결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텔레비전이나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만 하더라도 외국 말이 태반이며, 더구나 방송 매체를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 외국 말 이름의 선전 광고는 외국 말 이름들을 귀가 따갑도록 온 국민들에게 퍼뜨리고 있다. 물론 이 광고의 문제는 광고주의 책임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사회의 공기로서 국가 장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방송 기관에서 아무리 광고라 할지라도 무조건 내보내는 행위는 나라말의 앞길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4)의 문제와 관련된 대비책으로서는 첫째, 정책 당국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시정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경제 일변도의 정책으로 인한 정신문화 부면의 부작용을 시정하는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비록 경제적인 강국이 된다 할지라도 겨레의 동질성과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만다면 우리 겨레의 앞날은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당국자는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외국 말이 얼마쯤 들어와서 섞이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고 안이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대로 나가다가는 우리말은 설자리를 잃게 되고 만다는 것을 미리부터 내다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둘째, 국어 교육이나 연구 기관, 어문 관계인들의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자세도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외국 말의 심각성을 널리 알려 국민을 이끌어 나갈 책임이 있는 이들로서 이 심각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든지, 보고도 남의 일 구경하듯이 한다는 것은 겨레와 나라에 대한 배신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일반 국민들에 대한 계몽 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는 한편, 외국 말을 우리말로 대치할 수 있는 방법의 개발과 보급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본다. 외국 말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적절한 국어 낱말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념해야 할 줄 안다. 상품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참신하고 감칠맛이 있는 국어 낱말이 발견되지 못하여 외국 말을 부득이 쓸 수밖에 없다고 푸념하는 이들이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인과 관계 당사자들이 협의하고 연구하여 적절한 낱말을 공급하는 기구 등이 설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산학 협동의 국어 문제 기구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만 같은 데서는 일찍부터 그러한 기구가 설립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도 정부 차원이나 민간 연구 기관 차원에서 국어 순화 문제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상설 기구가 설립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셋째, 언론 특히 방송 매체의 자세 전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오늘날 텔레비전 등의 시청각 매체는 국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외국 말 홍수를 가져오는 데도 이 매체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홍수를 막고 국어의 오염을 정화하는 데도 이 매체의 구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제2의 하느님"이라고 일컬을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가진 방송 매체가 외국 말을 일체 배격하는 시책을 마음먹고 실천에 옮길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리리라고 믿는다. 가령, 외국 말 이름의 상품 광고는 일체(적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다는 과감한 시책이 나올 수만 있다면 외국 말 상호의 범람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까지는 기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기관의 자세는 외국 말 문제를 포함한 국어 순화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의 구실을 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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