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문자 개혁과 언어 순화
서재만 / 한국 외대·정치학
1. 들어가는 말
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나라든 그 나름대로 언어 순화 운동은 있을 법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고유한 나라말을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터키로 바로 그런 예의 한 나라이다. 이 글에서 우리와 같은 언어 가족 즉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진 터키의 언어 순화 운동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나라마다 언어생활의 사정은 다를 터이고, 한 나라의 언어 순화 운동 또한 그 언어생활의 사정에 따라 다를 터인즉, 터키의 언어 순화 운동을 살피기에 앞서 터키 인의 언어생활 사정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바른 순서나 생각된다.
Ⅱ. 언어생활의 환경의 변천
터키 인들은 일찍이 중앙 아시아의 알타이 산맥과 톈산 산맥 사이에 있는 줌가리아 분지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나, 장구한 세월에 걸친 파상적 이동을 통하여 오늘날 터키공화국이 위치한 소아시아의 아나돌루(Anadoulu)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터키 인이 알타이 어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서쪽에, 그리고 우리 한국인과는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 연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오랜 시간에 걸친 장거리 이동 경로는 터키 인으로 하여금 스텝 지대 변방의 여러 정착민들과 많은 접촉을 가져오게 하였고 또한 복잡하고 다양한 언어생활 환경을 경험하게 하였다.
터키 인들이 언제부터 문자 생활을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괴크 튜르크(Gök Türk, 552~745) 시대에 의사 룬(quasi-runic) 모양으로 된 그들의 고유 문자인 괴크 튜르크 문자(일명 오르크혼 문자라고도 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이구르(Uigur,745~940)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마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온 소그디아(Sogdia) 문자를 변형시켜 새로이 14개의 자모로 된 우이구르 문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다시 터키 인들은 카라한(Karahan, 840~1212) 때에 이르러 이슬람교를 승인하게 되자(920년경), 이제 기왕에 사용하던 우이구르 문자를 버리고 아랍 문자를 빌려 쓰기 시작했다.
카라한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이후 터키 인들의 언어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터키 인들은 이슬람 문화의 강력한 영향과 더불어 전혀 언어 체계가 다른 아랍 문자를 차용함으로써 새로운 여러 문어체를 생겨나게 하여 종래의 터키 어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상실하여 가게 되었다. 또한 가즈네(Gazne, 962~1183) 때에는 이란 지역으로 이동하여, 소그디아 문자 유입 이후 계속되던 이란어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다시 터키 인들은 셀추크(SelÇuk, 1040~1308) 제국 이후로 소아시아를 터키 인의 고장으로 만들고 십자군을 맞아 이슬람권의 보호자 역을 맡았다. 이의 뒤를 이어 받은 오스만(Osman, 1299~1920) 제국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가장 큰 위협적 존재이던 비잔틴 제국을 소아시아에서 없애 버리는 한편 이슬람권의 통치권인 칼리프권을 획득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듯 터키 인들이 그동안 유목 부족 연합 형태의 이동 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 체제로 정착하면서 궁중 통치제가 확립됨에 따라 궁중 생활을 중심으로 한 문학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와 더불어 이제 터키 인의 문어체에 침입한 아랍 어와 이란 어 요소들은 터키 어에 잠식을 가속시켰다. 15~16세기에는 아랍 어와 이란 어로부터 유입된 외래어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16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에는 터키 어, 아랍 어, 이란 어의 3개 혼합어의 조어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터키 어의 순수성을 거의 완전히 상실해 버린 셈이다.
터키 인의 언어생활의 복잡한 변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후 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이른바 개혁 세력이 주도한 터키의 근대화 운동기 즉 19세기 중엽 이후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또 다른 양상을 가져왔다. 신진 개혁 세력에 의한 서구 문물의 수입과 더불어 종래 지나친 아랍 어와 이란 어의 유입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아랍 어와 이란 어의 영향이 점차 쇠퇴하여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반면 서구의 영향을 받아 서구 언어의 급속한 유입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터키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을 이어 받아 공화국으로 발전하였고, 잃어버린 아랍 영토와 함께 1928년, 1000여 년이나 차용하던 아랍 문자를 되돌려 주었다. 이제 라틴 문자를 도입하여 29개 자모로 새로이 문자 개혁을 한 것이다. 새 문자 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언 갑년을 맞기에 이르렀다.
Ⅲ. 언어 순화 운동
터키의 언어 순화 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그 하나는 문자 개혁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외래적 요소를 버리고 터키 어가 지닌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아 가꾸려는 정화 운동(Özleşmeı)이다. 이 두 운동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아서 늘 함께 하였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역사상 터키 인은 여러 번 문자를 바꾸어 사용하였다. 이는 기존의 문자 생활로서는 새로이 들어온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소화하기가 어려웠던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터키 인들이 그들 고유의 괴크 튜르크 문자를 버리고 우이구르 문자를 제작하였을 때에는 이란을 본원지로 한 마니교의 전파에 따른 고대 이란어의 유입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아랍문자를 차용할 때에도 이슬람교를 통한 아랍 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터키 인들이 다시 아랍 문자를 버리고 라틴 문자로 개혁을 단행한 것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공화국을 출범시킨 터키 정신에 입학한 언어 순화 운동에서 그 맥락을 찾아야 할 줄 안다. 왜냐하면 터키에서 문자 개혁의 필요성이 어느 하루아침에 느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외래 문자의 차용이 안겨 주는 불편과 함께 자라 온 것이기 때문이다. 차용 문자의 불편은 언어 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언어 순화 운동은나라 사랑 정신을 낳고, 조국애는 다시 언어 순화 운동을 차원 높이 이끌어 주는 운동의 연속성을 우리는 바로 터키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체계가 다른 언어의 문자를 차용하는 일은 우선 급격한 외래 문화의 수용을 위하여 취해진 조치이겠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국 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차용 문자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따라서 이의 시정을 위한 노력이 있게 마련이다. 터키 어는 알타이 어로 원래 모음이 아주 발달되고 있고 특히 정교한 모음조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아랍 어는 셈어계로 아람(Aram) 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자음이 크게 발달한 데에 비하여 모음은 a, i, u 3개뿐인 언어이다. 따라서 아랍 어는 모음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하레케(Hareke)라 부르는 여러 가지 기호를 덧붙여 쓰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근대화 개혁 시대를 맞은 터키에서는 신진 개혁파 세력의 민족 자각 의식의 고취와 더불어 터키 어의 표기상 아랍 문자의 부적합성을 지적하고 나서는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또한 외래어를 피하고 순수 터키 어로 작품 활동을 주장하는 작가들도 많이 나왔다.
1851년 아흐멛 제브덷 에펜디(Ahmet Cevdet Efendi)가 카바이디 오스마니예(Kavaid-i Osmaniye, 오스만 어 문법)라는 저술을 통하여 아랍 문자로 표기할 수 없는 터키 어의 표기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필요성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1862년에는 뮤니프 에펜디(Münif Efendi)가 학술원에서 발음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아랍 문자의 어려움과 라틴 문자의 편의성을 지적하였다. 1863년에는 아제르바이잔 출신 시인 미라즈 페탈리(Miraz Fetali)가 아랍 문자의 개혁안을 만들어 수상에게 제출하였다. 이는 곧 학술원에 상정되어 검토되었고, 그 결과 아랍 문자가 터키 어 기술에 부적합하다는 점과 문자 개혁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문자 개혁은 이슬람을 상실한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부결되고 말았다. 1869년 개혁 지도자이며 민족 시인인 나믁 케말(Namık Kemal)도 아랍 문자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특히 라틴 문자의 편의성을 강조하여 찬양하였다. 한편 인쇄 업계에서도 문자 개혁이 논의되었는데, 1884년 에부지야 테브피크(Evzziya Tevfik는 519개의 문자와 기호로 된 아랍 활자를 110개로 대폭 줄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894년 페라이즈지자데 메흐멛 샤키르 에펜디(Feraizcizade Mehmet Şakir Efendi)는 기존 아랍 문자에다 터키 어 표기에 필요한 몇 개의 문자를 보충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1900년에는 솀섿딘 사미(Şemseddin Sami)가 아랍 문자에다 여러 가지 기호를 덧붙여 다른 문자처럼 새 이름을 붙여 놓기도 했으나 여전히 표기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문자 개혁에 관한 논의는 제2차 입헌 혁명(1908년) 이후 더욱 크게 대두되었다. 우선 문교부에서 문법 회의, 철자 회의, 사전 회의, 학술 용어 회의 등 상설 기구를 만들어 언어 순화 운동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고 지야 괴칼프(ziya Gökalp), 이스마일 하크(Ismail Hakkı), 리자 테브피크(Riza Tevfik) 등 당대 저명한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인 엔베르(Enver) 장군은 아랍 문자를 띄어서 쓰는 법(주:아랍 문자는 붙여서 쓰며, 같은 문자가 단어의 첫머리, 중간, 말미의 위치에 따라 각기 모양을 달리한다.)을 창안하였다. 이를 엔베르 문자라고 이름하고 한때 터키 군에서 사용하였으나, 곧 이어 일어난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아직 시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군 작전에 기민성을 기할 수 없어 이의 사용이 폐기되었다. 엔베르 장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차용하기를 주장하였으나, 한편 아랍 문자의 불편을 인정하면서도 이의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쟁으로 문자 개혁의 논의가 공백을 가졌으나, 공화국이 수립되자 다시 대두되었다. 1923년 국가 경제 회의에서 나즈미(Nazmi)에 의한 라틴 문자 차용 주장을 시작으로 이슬람의 통일성을 저해한다고 맞선 반대파와의 열띤 논쟁의 포문이 열렸다. 클르츠자데 하크(Kılıçzade Hakkı) 등 당시 라틴 문자의 차용 주장자들은 아랍 문자의 터키 어 표기 부적정, 터키 어의 순수성 저해, 아랍 문자의 난해서, 서양 문물의 도입 필요성, 라틴 문자의 편의성 등을 들고 있으며, 이에 반하여 카즘 카라베키르(Kazım Karabekir) 장군을 위시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논리에 라틴 문자의 차용이 새로운 라틴계 언어의 영향을 가져와 더욱 터키 어의 순수성을 침해할 것이며, 이슬람 문화 전통을 상실케 하고, 기존 문화유산을 사장시키며, 새 문자를 익히기에 많은 부담을 주어 국민의 언어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줄 것 등이다.
이와 같은 문자 개혁 논의는 각종 회의나 언론을 통해서 계속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여론은 대체로 라틴 문자 차용 쪽으로 기울어 갔다. 1928년 5월 행정부는 만국 공용 숫자 승인에 관한 법률안을 의회에 상정하였는데, 이의 가결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계기로 문자 개혁 논의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행정부는 이에 용기를 얻어 6월 무스타파 케말(주:후에 국부라는 뜻의 아타듀르크 칭호를 얻음)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3명의 국회 의원, 3명의 문교구 고급 관리, 3명의 전문가 등을 포함하여 총 14명으로 구성된 언어 회의를 설립하였다. 이 기구는 각종 라틴계의 언어를 조사 연구한 결과 알파벳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토대로 새 문자 개혁안이 의회에 상정되어, 11월 1일 통과, 11월 3일 공포됨으로써 이른바 터키의 문자 혁명이 이룩된 것이다.
Ⅳ. 맺음말
무스타카 케말은 이후에도 터키 어의 정화를 통해 언어 순화 운동에 크게 역점을 두었다. 터키 어 학회를 창설하여 터키 어 연구를 장려 지원하는 한편 스스로 순수 터키 어 발굴 및 사용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터키의 언어 순화 운동은 무스타파 케말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외래어 특히 아랍 어와 이란 어 단어가 크게 줄어들었고, 문어체에 잠식했던 많은 외래어적 요소들이 정화되었으며, 많은 고유 터키 어휘들을 발굴하는 등 그 성과는 매우 크다 하겠다.
그러나 터키의 언어 순화 운동은 여전히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첫째 여전히 차용 문자가 같은 언어 가족의 문자가 아니므로 터키 어 표기에 완벽하지 못하며, 둘째 차용 어휘와 외래어가 지나치게 많고, 셋째 유럽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넷째 보수파와의 마찰이 잔존하고 있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