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홍 빈 / 서울大 교수, 국어학
1. 부정과 부정문
국어의 부정문은 그 통사적인 구성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단순히 부정소 '아니'나 '못'을 서술어 앞에 놓아 형성되는 부정문이며,(1) 다른 하나는 보문자 '-지' 뒤에 부정 서술어 '아니하-'나 '못하-' 또는 '말-'을 놓음으로써(2) 이루어지는 부정문이다.(3) 앞의 것을 제1형 부정 또는 단형 부정, 뒤의 것을 제 2형 부정 혹은 장형 부정이라고 하나, 여기서는 앞의 것을 '단형 부정문' 그리고 뒤의 것을 '장형 부정문'이라 불러 이 둘을 구별하기로 한다.
(1 가)는 (1 나,다)에 대한 긍정문이며, (1 나)는 (1 가)에 대한 단형 부정문이며, (1 다)는 (1 가)에 대한 장형 부정문이다. (1 가)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긍정문이라 보는 이유는 (1 가)의 어떠한 성분이나 구성에도 부정과 관련되는 요소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이와 똑같은 원리에서 (1 나)나 (1 다)에는 부정과 관련되는 '아니'나 '아니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부정문의 부류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정문의 정의적 자질을 형식적인 데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성격 지어 보기로 한다.
이는 아주 자명하여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치 않은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어 부정법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의에서는 이 점에 관한 논의가 명사적으로 제시된 일이 드물기 때문에, 그 부류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가)는 '오늘'에 강세가 놓일 때를 보인 것이다. 이 때, (3 가)는 (1 가)와는 달리 '철수'가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함축을 가지게 된다. (3 가)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3 가)가 부정문으로 해석된 일은 없다. 이 이유는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3 가)가 부정과 관련된 어떠한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3 나)는 이른바 수사적 의문으로 그 의미는 '철수'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3 나)는 결코 부정문이라고 할 수 없다. (2)에 의하여 부정과 관련되는 요소가 쓰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 다)는 이중 부정의 예이다. 부정의 부정을 긍정이라고 할 때, (3 다)의 의미는 틀림없이 긍정이 된다. 그러나, (3 다)를 긍정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2)의 원리에 충실한 부정문의 성격 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예들과 달리 (3 라)의 성격은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아니하-'의 의미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3 라)의 '-잖니'는 언제나 긍정의 의미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잖니' 앞에는 '-겠-, -었었-' 등과 같은 시제 형태소들이 '자유롭게'나타날 수 있다는 특이성도 지적될 수 있다(김동식(1980) 참조). 문미의 억양도 일반적인 판정 의문에서와는 달리 적어도 非上昇調의 억양이 걸리는 특이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특이성은 아무래도 제2차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통사적인 구성 자체는 '-지 않니'에 의하여 형성된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은 문미의 억양이 판정 의문의 억양이 아니라는 사실이 화자의 어떤 의도와의 관련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4) '잖'에서
'아니하-'부분이 극히 쇠퇴한 형식을 보인다는 사실도 '-잖니'가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의 일단이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2)에 의하여 부정문이라는 것이 원리적으로 형식적인 요건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이므로, (3 라)가 언제나 긍정의 의미를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곧 그 문장이 긍정문이 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또한 (3 라)가 '철수가 어제는 분명히 학교에 갔다'고 하는 평서문적인 형식으로 표현되는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은 (3 나)가 평서문적인 긍정의 의미를 가지는 것과 매우 유사한 특징이다. 부정과 긍정, 그리고 부정문과 긍정문은 다른 것이며, 그런 한에 있어서 (2)는 유효한 원리로 정립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어려운 문제고 있다. '아니'나 '아니하-' 등과는 관계 없이 '없다'나 '모르다' 혹은 '반대하다, 거역하다, 거절하다, 부정하다, 비현실적' 등과 같은 일련의 어휘적인 요소들이 쓰인 문장도 부정문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없다, 모르다'의 문제를 보기로 한다. 이에는 다시 두 가지 문제가 포함된다. 하나는 '없다'나 '모르다'가 '안 있다'나 '못 알다'와 같은 부정의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들이 쓰인 문장이 부정문인가 하는 문제이다. 앞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예를 검토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4)에서 '있다, 없다'는 '돈'의 존재성을 문제삼는다.(5) 특히 이러한 문맥에서 '없다'와 '안 있다'는 그 최대한의 차이를 드러낸다. (4 가)와는 달리 (4 나)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5 가)와 같이 '알아내려는' 행위가 이미 전제된 경우, 그에 대해서는 절대로 (5 나)와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없다=안 있다, 모르다=못 알다'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라면, (4가, 나)와 (5가, 나)와 같은 차이는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4)(5)에 나타난 현상 자체는 그렇지 않다. '없다'를 어떤 경우 '안 있다'와 같이 환언할 수 있고, '모르다'를 '못 알다'와 같이 환언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둘의 가치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닌 것이다.
뒤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다' 등의 예와 함께 검토해 보기로 한다.
(6)은 부정 극성을 띤 '아무도'나 '아무것도'와 문제의 서술어와의 공기 관계를 보인 것이다. (6가, 나)는 '없다'와 '모르다'가 아무런 이상을 가지지 않음을 보인다. 그러나, (6다, 라)는 '반대하다'와 '거절하다'가 그와는 다른 통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보인다. (7)도 부정 극성을 띤 부사와 문제의 서술어와의 공기 관계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도 사정은 대체로 유사하다. (7 가)와 같이 '없다, 모르다'는 전혀 아무런 이상을 가지지 않는 데 대하여 (7 다)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다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 (7나)의 '비현실적'이란 어휘인데, 일반적인 성립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제약을 가진다. '별로'에 대해서는 거의 성립하지 않는 데에 대하여 '전혀'에 대해서만 다소의 성립성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은 '전혀'가 과연 그 온전한 의미에 있어서 부정 극어인가 하는 점이다. '전혀'가 부정 극성을 어느 정도 띠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예는 어느 정도 성립할 수 있으므로, 그 부정 극성은 어떤 경우 약화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8 가)를 다소 이상하다고 느끼는 화자가 있을지 모르나, (8 나, 다)의 문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8 가-다)에서 '손을 떼었다, 다르다, 손방이다'와 같은 예를 부정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부정문의 정립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구분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9 가)와 함께 (9 나)를 통사적인 부정과 관련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9 나)의 통사론은 (9 가)가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9 다)는 단지 어휘적인 부정으로서만 가치를 가지므로, 통사적인 부정에는 포함될 수 없다. (9 라)는 의미론적으로 어떤 상대적인 반대의 개념으로 작용할 뿐이므로, 부정의 영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2)는 다시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2.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
(1 나)와 같은 유형의 단형 부정문에 비하여 (1 다)와 같은 장형 부정문은 보문자 '-지'를 가진다든지, 또 '-지' 뒤에 '을/를'이나 '이/가'가 나타날 수 있다든가, 부정이 부정소 '아니'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아니' 뒤에 '-하다'를 가지는 부정 서술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든가 하는 특이성을 가진다. 이러한 요소들의 성격이나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의 차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가지의 엇갈린 견해들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려고 한다.
먼저,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은 때로 그 부정의 의미 작용이 동일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두 부정의 방식이 어떠한 측면에서나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최근의 부정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서조차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0 가, 나, 다, 바)는 송석중(1977)에서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이 의미가 다름을 보이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다. (10 가)의 '안 됐다'는 '불쌍하다'나 '불행하다'의 뜻이지만 '되지 않았다'는 적어도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10 바)는 금지의 뜻을 가지는 경우이다. '안 돼'가 자연스럽고, '되지 않아'는 다른 요소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직접적인 금지의 뜻을 가지기 어렵다.(6) (10 나)의 '못 됐다'도 '되지 못했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일이 있으나, 그 나쁜 정도의 표현에 있어서 '못 됐다' 쪽이 보다 강한 의미를 가진다. (10 라, 마)의 '못나-, 못생기-'는 단일어처럼 취급되는 것이나, 그 구성은 '못'과의 결합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장형 부정문은 어떤 의미 요소의 부가(가령 '잘'과 같은 요소를 말한다)에 의하여 비슷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정도에 있어서 보다 나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단형 부정문 쪽이다. (10 사)의 경우 단형과 장형의 의미가 매우 유사하지만, '안 살겠다'의 의미로는 단형이 보다 적합하고, 장형은 '살고 있지 않다'고 하는 상황 기술적인 의미를 보다 많이 가진다. (10 아)는 (10 다)의 경우와 같이 장형보다는 단형이 성립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10 다, 아)를 제외하면, 대체로 장형 부정문보다는 단형 부정문이 특수한 의미나 관용적인 의미를 가지기 쉽다고 할 수 있다.
부정의 단형이나 장형이 가지는 이러한 차이는 다소 과소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때로 단형 부정문이 가지는 특수한 의미를 '확대된 용법'으로 이해하는 일도 있으나, 만약 단형 부정문이나 장형 부정문이 동일한 부정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장형 부정문에 비하여 특히 단형 부정문이 의미상의 특수성을 보다 가지기 쉬운 이유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 단형이나 장형은 그 고유한 부정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잘 지적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현상이다.
(11 가)는 '못'이 상태성 서술어와 함께 단형 부정문을 이룰 수 없음을 보인다. 그러나, (11 나)와 같은 장형 부정문에서는 '못하-'라도 성립할 수 있다. 상태성 서술어의 경우, 단형 부정문에서 '못'은 그 능력 부정의 의미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7) 이에 대하여 장형 부정문은 능력 부정의 의미 특성보다는 어떤 상태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불급 부정의 의미 특성을 보다 강하게 가진다고 할 수 있다. (11 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비상태성 서술어의 경우에는 능력 부정이나 불급 부정의 차이가 그렇게 크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시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12)는 부정 명령으로 구체적인 청자에 대한 부정 명령에는 '-지 말-'이란 형식만이 쓰인다. (13)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본 문장이나, 구체적인 청자에 대한 단형 부정 명령은 그 어휘적인 결여로 인하여 그 존재성 자체에 결함을 가진다. 만약,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이 아무런 차이를 가지지 않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우연적인 어휘적 결여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우연적인 결여일 뿐이므로, 장형과 단형에 대한 차이를 뒷받침하지는 못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청자에 대한 부정 명령이 장형 부정문으로만 가능하다는 현상의 특이성은 '말-'이 가지는 중단의 의미 특성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을 '그만 가라'고 해도 그것이 (2')적인 의미에 있어 부정문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8) (14가)에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상승조의 억양이 걸리지 않는다. (14 나)에도 (14 가)에서와 같은 억양이 걸릴 수 있고, 그런 한에 있어서 (14 가)와 (14 나)의 의미는 같을 수 있다. 그러나, (14 나)에는 보다 자연스럽게 상승조의 억양이 걸린다. 이러한 차이를 다소 과장하면, (14 가)와 같은 부정에 해당하는 단형 부정의 성립은 다소 결함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이 동일한 부정 방식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차이가 생길 리 없다.
이기용(1978)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동의성이나 이의성이라는 것이 곧 단형 부정문이나 장형 부정문의 심층 구조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된 몇 가지 사실은 지나치게 과소 평가하지만 않는다면, 그 구조상의 특징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장형 부정문이 단형 부정과 동일한 구조에서 '부정소 융합'이나 "'하'-지지" 혹은 "보문자 '-지' 도입" 등과 같은 변형 절차를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증거가 있는 것이다.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15 가)는 장형 부정문에는 여러 보조사가 쓰일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원리상 단형 부정문에는 동사가 하나밖에는 없으므로 (15 가)와 같은 표현은 불가능하다. (15 다)와 같이 (15 나)의 어떤 성분에 '도'를 연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15 가)의 '가지도'가 쓰인 예와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는 장형 부정문의 두 개의 서술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하는 피상적인 차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니'를 논리적인 서술어로 하는 심층 구조에서 어떤 방식으로 '는, 도, 만, 조차' 등과 같은 보조사를 도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일단 장형 부정문을 생성시킨 뒤에 다시 보조사를 어휘 삽입하는 절차를 취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명백히 의미 내용을 가지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형 부정문을 단형 부정문과 동일한 심층 구조에서 유도하는 방법은 올바른 것일 수 없는 것이다. 장형이나 단형의 심층 구조는 그들의 표면 구조와 매우 가까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심층 구조를 소략하게 보이면 아래와 같다. '철수가 안 논다'와 '철수가 놀지 않는다'의 예를 그 부정의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표시하기로 한다.
(16 가)는 단형 부정문의 심층 구조(혹은 D-구조)를 보인 것이며, (16 나)는 정형 부정문의 심층 구조를 보인 것이다.(9) 통사적인 측면에 있어서 (16 가)의 '아니'는 서술어를 수식하는 자리에 있으므로 '서술어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고,(10) (16 나)는 보문 명제와 관련되므로 그것을 '명제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위의 논의가 암암리에 전제로 하고 있었던 구조는 바로 위와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타, 장형 부정문과 관련되는 모든 문제는 (16 나)와 관련하여 명확해 질 수 있다.
첫째, 장형 부정문에 나타나는 보문자 '-지'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부정 서술어 '아니하-'(기타 '못하-'나 '말-'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가 어휘적으로 선택하는 보문자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11) 송석중(1971, 1973, 1977) 등에서는 '-지'가 명사화의 '-기'에서 유도되는 것으로 상정하였으나, '-기'와 '-지'와의 동일성은 확립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명사화의 '-기'는 '아니하-' 앞에서 '지-'로 변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철수는 아침에 뛰기를 아니했다'에서 '뛰기'가 '뛰지'로 되지는 않는다. 명사화의 '-기' 뒤에는 격조사의 출현이 제약되지 않는데, '-지' 뒤에는 격조사의 출현이 제약된다는 사실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인 경우, 명사화의 '-기'와 서술어 사이에는 부사적인 성분의 출현이 가능하나, '-지'와 '아니하-'사이에는 그들의 출현이 엄격히 제한된다. 송석중(1971, 1973, 1977)에서의 견해는 예의 '-기'가 일반적인 '-기'가 아니라, '철수가 학교에 가기는 했다'와 같은 예에 나타나는 '-기'라고 주장하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나, 이 구성 자체는 '는'의 출현이 필수적이다. '*가기 했다'라고는 할 수 없다. 장형 부정문의 경우는 '가지 않았다'와 같이 '는'이 없이도 부정문의 형성은 가능하고, 그것이 오히려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지'는 '아니하-'와 같은 부정 서술어가 어휘적으로 선택하는 보문자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둘째, 보문자'-지' 뒤에 나타날 수 있는 '을/를'이나 '이/가'는 적어도 목적격 조사나 주격 조사가 아니라는 것이다.(12)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전형적인 경우, '이/가'는 (17 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지' 앞에 오는 서술어의 품사가 형용사일 때 가장 자연스럽게 쓰인다. 물론, '을/를'도 가능하다. '이/가'가 쓰일 수 없는 혹은 쓰이기 어려운 경우는 (17 다)와 같이 행동주의 행동이 문제될 때이다. (17 나)에서도 적어도 행동주의 행동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이/가'나 '을/를'이 모두 쓰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17 라)이다. 행동주의 행동성 자체가 문제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이/가'의 쓰임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가'나 '을/를'이 (16 나)에서의 보문의 성격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통사적인 존재로서의 '이/가'나 '을/를'은 결코 문제의 보문의 의미론적인 성격에 영향을 입는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17)에서의 '이/가'와 '을/를'이 통사적인 무조건적인 존재가 아님을 말해 준다. 따라서, 장형 부정문의 보문자 '-지' 뒤에 나타나는 '이/가'와 '을/를'은 격 조사일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은 의미론적인 존재로서의 '이/가'와 '을/를'이라고 할 수 있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졸고(1973, 1976)에서와 같이 주제와 관련을 가진 어떤 요소, 혹은 초점과 관련되는 어떤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아니하-'의 '하-'에 대해서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장형 부정문의 기저 서술어를 '아니'만으로 설정하고, "'하'-지지"에 의하여 변형의 중간 단계에서 '하-'를 도입하는 입장도 있고, '아니하-'의 종류를 구별하여 타동사적인 '아니하-'와 자동사적인 '아니하-'(혹은 형용사적인 '아니하-')를 상정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처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를 변형에 의하여 도입할 경우는 보문자 '-지'의 도입을 설명하기 어렵다. 보문자 '-지'는 '아니하-'의 어휘적인 선택과 관련되는 것이지 '아니'의 선택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의적인 기술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니' 자체가 문장의 서술어 앞에 다른 절차를 요구함이 없이 도입될 수 있다는 국어적인 직관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니하-'의 종류를 자동사와 타동사로 분류하는 방식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전병쾌(1984)에서는 '아니하1-/못하1-'을 자동사로, 또한 '아니하2'/-못하2-를 타동사로 상정하였으나, 이 밖에도 형용사 '아니하-/못하-'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그렇다고 하더라도 (17 라)와 같은 예가 성립할 수 있다고 할 때, 예의 '아니하-'는 그 보문이 타동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는 '아니하-'를 동사나 형용사에 관한, 범주 중립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보문의 성격에 따라 '아니하-'의 성격이 결정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에는 자질 삼투의 방식이 적용된다. (16 나)에서 보문의 성격은 [-정태적]이므로, 동일한 자질이 동사구를 거쳐 '아니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13) 선어말 어미{-느-}가 심층 구조, 즉 D-구조에서 삽입된다면, 이러한 작업도 D-구조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작업은 '하기는 한다, 가든가 오든가 한다, 예쁘거나 밉거나 하다' 등과 같은 구성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명사문 부정의 경우는 흔히 '아니다'가 장형 부정문이 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명사문 부정에도 '-지 아니하-'의 형식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 '철수가 학생이 아니다'를 장형 부정문이라고 하는 것은 장형 부정문의 형식적인 요건 자체를 전혀 고려에 넣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장형 부정문의 형식은 엄격히 보문자 '-지'와 '아니하-'가 쓰이는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므로, '아니다'만으로 이루어지는 명사문 부정은 이에 포함될 수 없다. 계사 '이다' 앞에 '아니'가 연결될 때, '아니+이다'는 '아니다'가 된다는 기술로 '아니다'의 형성은 설명된다. 서술어 앞에 '아니'가 쓰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아니다'를 하나의 어휘 단어로 인식해 온 전통적인 사고법만이 문제된다.
(18 가)는 명사문의 단형 부정문이며, (18 나)는 장형 부정문이다. (18 나)와 같은 단형이 잘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18 나)와 같은 부정이 원리적으로 가능한 부정의 방식이라는 것은 '않는다'와 같은 형식이 거의 절대로 성립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16 나)에 대하여 상정된 자질 삼투와 다른 것이 아니다. (18 나)의 형식의 존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의 하나는 (18 다)와 같은 부정의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못'에 의한 단형 부정문이 '적극적'과 같은 예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형식은 필연적으로 장형의 형식으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적극적'에 대해서 '-지 못하다'와 같은 부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적극적'에 대한 '못' 부정은 원리적인 결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장형 부정문과 단형 부정문을 동일한 부정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동일한 기저 구조에서 두 가지 다른 부정문의 유형을 도출해 내는 방법도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소한 차이를 과소 평가해 온 것이 문제의 이 부분에 대한 접근법이었으나, 사소한 것을 놓친 뒤에 중요한 차이의 인식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단형 부정문을 통사적인 구성상'서술어 부정'인 것으로, 장형 부정문을 '명제 부정'인 것으로 특징지었다. 이는 서술어 부정에는 서술어만이 부정의 범위에 포함된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님은 특별한 강조를 필요도 한다. 단형 부정문의 경우에도 서술어 외의 성분이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 부정의 범위
부정의 범위란 부정의 의미론적인 작용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이는 부정의 통사적인 구성과는 그 작용의 방식을 달리한다. 가령, 단형 부정문에 있어서 부정소 '아니'나 '못'은 그 본용언을 수식하는 위치에서 본용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그 부정의 작용은 비단 본용언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14) 이제까지는 '아니하-,못하-, 말-' 등과 같은 서술어만을 '부정 서술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이를 위하여 '아니'가 본용언과 이루는 구성 또한 '부정 서술어'가 되는 것으로 보기로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기로 한다.
(19 나)를 일종의 '재구조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 나)를 '준 부정 서술어'와 같이 부를 수도 있으나, 부정의 범위에 관해서 특별히 차이를 보이는 경우 외에는 모두 '부정 서술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부정의 범위에 관하여 먼저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해 보기로 한다.
(20)은 다소 예외적인 현상을 가지고 있으나, 현상 일반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설명력을 가진다. 즉, 하위문에 포함된 부정 서술어의 의미 작용이 상위문의 요소들을 그 부정의 범위 속에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21 가)에서 '아니하-'의 부정의 범위는 그 내포문을 넘지 못한다. (20)의 원리에 의한다. '아니하-'는 그것이 포함된 내포문을 부정에 관한 최대의 범위로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위절에 '아니하-'가 쓰이는 경우 그 의미는 매우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상위절의 '아니하-'가 내포문을 그 부정의 범위로 하는 경우라도 그 의미는 특이한 경우에만 유사한 것이 될 수 있을 뿐, 일반적인 경우 그 의미의 유사성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21 가)의 '아니하-'가 상위절 성분의 부정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 국어와의 공기 관계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다.
(22 가)는 상위문의 '아무도'가 내포문의 부정 서술어와 공기되지 않기 때문에 비문법적인 예가 된 것이고, (22 나)는 동절 성분과의 공기 관계를 보이기 때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20)은 일반적인 원리로 유지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21 나)는 (21 다)와 그 의미가 매우 근접되어 있다. 종래 '생각하-'와 같은 서술어를 '부정소-이송' 동사와 같은 것으로 불러 온 이유이다.(16) '믿-, 바라-, 원하-, 상상하-, 선택하-, 보이-, 듯하-, 듯싶-, 성싶-' 등과 같은 서술어들이 '부정소-이송'을 유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21 나, 다)가 보이는 현상은 (20)의 원리에 대한 반증례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은 이러한 용언들이 가지는 의미론적인 특수성이 (21 가,다)와 같은 부정을 어느 정도 근접된 의미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중시되어야 한다. 이들 용언들은 의식적인 활동을 문제삼고 있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의식의 부정은 이미 그 내포문 속에 주어진 의식의 내용에 의하여 의식 자체의 부정까지를 의미할 수 없게 된다. 의식성 서술어의 부정은 그러므로 곧 내포문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된다. 의미의 근접성이 초래된 이유이다. (20 나)의 '아니하-'가 상위문으로 이송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부정 극어와의 공기 관계를 통하여 검증될 수 있다.
(23 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정소-인상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고, '생각하-'가 부정소-인상 서술어라는 것이 인정될 수 있다면, (23 가)의 '아무도'는 그 인상된 부정 서술어와 공기 관계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23 가)가 보이는 현상은 그와 다르다. 부정소-인상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는 내포문 부정과 모문 부정이 가지는 의미상의 근접성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부정소-인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포문 부정과 모문 부정은 '확실성'이나 '통제성' 혹은 '지각의 직접성'이란 측면에 있어 차이를 가지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17) 가령, '영희는 철수가 집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는 '영희는 철수가 집에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보다 더 확실함을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선택하-'의 경우에는 통제성의 정도가 문제되고, '듯하-'의 경우에는 지각의 직접성이 문제된다.
여기서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위와는 오히려 반대의 경우이다. 즉, 모문 혹은 상위문의 부정이 그 내포문에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가 하는 문제이다.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24 다)를 먼저 보기로 하자. 다소 그 성립성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배제될 만큼 이상한 것은 아니다. 상위절의 부정의 영향에 의하여 부정 극성을 띤 '아무도'가 내포문 자체에서는 그 공기 관계가 충족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쓰일 수 있다. 그 성립이 광범한 것은 아니나, 어떤 가능성은 인정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24 가, 나)에서는 보다 잘 드러난다. (24 가, 나)에 대하여 각 문예 뒤에 보인 괄호 속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문제의 예를 부정하여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에 속한다. 부정의 작용이 하위문에도 미칠 수 있음이 확인된다. (24 라)의 경우는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놀라-'는 사실 동사로서 사실 전제를 가지는 예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 (24 라)에서 내포문에는 상위문의 부정의 영향이 미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24 라)의 괄호 속에 보인 바와 같은 다른 전제가 주어지는 경우, (24 라)의 부정도 내포문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단, 괄호 속에 주어진 상황도 사실 전제이어야 한다.(18) 그렇지 못할 경우, (24 라)에서 내포문은 부정의 영향권 밖에 있게 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기로 한다.
(25)는 (24 라)의 '놀라-'가 사실 동사라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그에 대하여 부정의 작용이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도 같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인 경우, (26 가)의 '많은'은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Sagawa(1970)에서와 같은 [+specific]의 자질을 가지는 성분은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은 (26 나)와 같은 예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26 나)는, 전제된 또 다른 대안이 있는 경우에 특정적인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부정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인다. 여기에서의 '특정성'은 사실 전제와는 다른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화자 전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화자가 자기 전제로 하고 있는 사실을 자기 말에 의하여 부정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청자와의 공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부정의 범위가 전제라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제 다음과 같은 예를 보기로 하자. 편의상 (1 다)를 (27 가)로 다시 가져오기로 한다.
(27 가)는 초점 강세(이는 이병근(1986)에서의 '프러미넌스'를 말한다.)가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최소한 (27 나-마)와 같은 네 가지의 해석을 가진다. (27 나)는 (27 가)의 '철수'에 초점 강세가 놓이는 경우이며, (27 다)는 (27 가)의 '오늘'에, (27 라)는 (27 가)의 '학교'에 (27 마)는 (27가)의 '가-'에 각각 초점이 놓이는 경우이다. 이러한 해석은 (27 가)의 각 요소에 초점 강세가 놓일 때, 문제의 성분이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 현상으로 해석하여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27 나-마)는 (27 가)의 문두에 있는 성분에서부터 그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 요소를 순서적으로 나열한 것일 뿐, 그것이 서상규(1984:76)에 제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필연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자에게 이미 주어진 사실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무작위적인 순서일 따름이다. 여기서 화자에게 이미 주어진 사실, 화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화자 전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가령 (27 나)의 화자가 '영희가 오늘 학교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이와 같은 화자 전제를 (27 가)에 적용할 때, (27 가)가 가질 수 있는 해석은 '철수'에 초점 강세가 놓이는 (27 나)의 해석밖에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철수가 어제 학교에 갔다'는 사실이 화자 전제로서 주어질 때, (27 가)는 당연히 (27 다)와 같은 해석을 가지게 된다.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 성분, 혹은 부정의 작용을 받는 문장 성분에 어떤 순서적인 층위가 있다고 보는 것은 화자에게 주어지는 사실 전제에 어떤 순서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실 자체나 그에 대한 인식의 순서는 무작위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27 나-마)의 초점 성분과 관련되는 화자 전제 외에 (27 가)나 (27 나-마)에는 또 다른 전제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27 나-마)의 전제부에 표현되고 있는 전제로서, 이를 '담화 전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여기서 '담화 전제'란 담화의 진행과 더불어 선행 화자들의 담화에 나타나는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반드시 사실만이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담화를 보기로 하자.
(28 가)에서 '화자 A'는 '누군가 학교에 갔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 (28 가)가 (28 가)로만 머물러 있는다면, '누군가 학교에 갔음'은 단지 화자 전제의 성격만을 가진다. 실제적인 상황에서 누군가 학교에 간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사실 전제이면서 동시에 화자 전제가 된다. 사실이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단지 화자 전제에 그친다. (28 가)는 '화자 B'에 대한 질문이므로, (28 나)의 '화자 B'는 (28 가)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 가)에 대하여 (28 나)와 같이 답한 경우, '화자 A'와 '화자 B'의 전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 전제일 가능성은 많지만, 반드시 사실 전제인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그릇된 믿음을 토대로 하여 담화를 전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8 가)의 '화자 A'의 화자 전제는 (28 나)에서 담화 전제가 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28 가, 나)에서 '화자 A'와 '화자 B'는 동일한 담화 전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해석법을 (29)에 적용해 보기로 하자. (29 가)에서 '화자 A'는 '누군가 학교에 가지 않았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화자 전제는 (29 나)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진다. (29 가, 나)에서 '누군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은 담화 전제가 된다.
이제 (27 가)를 다시 보기로 하자. (27 가)가 가지는 초점 해석을 (27 나-마)와 같이 네 가지로만 해석하는 것은 담화 전제가 긍정으로 주어지는 경우만을 고려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27 나-마)와 같은 해석을 '긍정 담화 전제 해석'이라고 할 때, (29 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27 가)는 부정적 담화 전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19)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보기로 한다.
(27' 나-마)는 (27 나-마)와 달리 (27' 가)가 부정 담화 전제를 가졌을 때의 해석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27 나-마)와 같은 해석만을 고려하는 것은 문제를 매우 단순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확인되는 부정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셋째, (27 나-마)에서는 부정의 초점이 해당 부정문 전체에 있어서 하나만이 상정되는 것으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부정의 초점은 반드시 하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부정 담화 전제가 주어질 때 초점 성분은 부정되지 않아 부정의 범위 바깥에 있게 되므로, 부정의 범위에 관한 논의에는 일단 포함되지 않는다. (27' 나-마)와 같은 경우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27 나-마)와 같은 예에 초점 성분으로 두 개의 요소가 나타나는 경우를 상정해야 한다. 가령, '철수'와 '학교'가 부정의 초점이 되는 경우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넷째, (31)과 같은 해석을 전제로 할 때, 종래와 같이 부정의 범위를 단순히 괄호로 표시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화사나 부사가 나타나는 예와 함께 그 표시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술어 논리 또는 양화 논리에 의하면 (32 가)의 '많-'이 부정의 범위 안에 있을 때, 즉 '적은 학생'이 문제일 경우의 (32 가)의 해석은 (32 나)와 같이 된다. 반면, (32 가)의 '많-'이 부정의 범위 바깥에 있을 때, 즉 부정 담화 전제가 주어지고 '많-'이 초점이 될 경우의 해석은 (32 다)와 같이 표시된다. 그러나, (32 나, 다)와 같은 표시법은 주로 논리적 서술어를 중심으로 한 부정의 표시법이기 때문에 문장의 어떤 성분이 부정되는 경우의 표시법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것도 어떤 하나의 성분만이 부정의 범위에 포함될 때의 표시에 적합하다.(20) 그러나, 자연 언어에 있어서의 부정은 논리적 서술어 외의 성분이 부정의 대상이 되는 일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33 가)의 '아무도'는 부정 극어로서 언제나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며, (33 다)의 '오늘,'(33 라)의 '학교'는 대조적 의미를 강하게 가지는 '은/는'에 의하여 해당 문장이 긍정 담화 전제를 가지는 경우 언제나 부정의 범위 속에 포함된다. (33 마)의 '철수'도 보조사가 가지는 특이한 뉘앙스와 함께 예의 문장이 긍정 담화 전제를 가지는 경우 언제나 부정의 범위에 포함된다. (33 바)와 같은 분열문에서는 그 통사적인 구성 자체에 의하여 '오늘'이 언제나 부정의 범위에 포함된다. (33 나)의 '열심히'는 서법 부사 혹은 서상규(1984)에서와 같이 동사 수식 부사로서 '열심히'가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해석은 매우 기묘하다. 이와 달리 화자의 태도가 표현되는 (33 가)의 '다행히'는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 일이 없다. 이는 화자 전제로 표현되는 일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원리에 의한다. (32 나, 다)와 같은 표시법이 (33)의 예들에 대하여 가지는 문제는 설령 (33 가)의 '다행히' 혹은 (33 나)의 '열심히' (33 다, 바)의 '오늘'을 논리적 서술어와 같이 취급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특히 (33 라)의 '학교'나 (33 마)의 '철수'를 논리적 서술어로 취급하는 일은 매우 어색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도 논리적 서술어가 될 수 있다고 할 때, (34 가)는 그런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34 나)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철수'가 부정의 범위 안에도 있고 그 밖에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32 나)와 같은 표시법으로는 하나의 성분이 부정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므로, (31)과 같이 두 개의 요소가 부정의 작용을 받게 될 때, 효과적인 표시법이 발견되기 어렵다는 약점을 가진다. (32 나)와 같은 방법이 이미 부정의 의미 작용을 나타내는 방법인데 이에 더하여 또 다른 해석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타, 다소 기술상의 난점이 따르는 것은 (33 가)의 '아무도'와 같은 예이다. '아무도'는 부정 극어이므로 언제나 부정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정 운용소를 문장 밖으로 보낼 때, '아무도'를 가지는 문장이 긍정문이 된다는 약점이 있다. (33)의 괄호 속 문장이 비문법적임을 보기 바란다.
이에 대한 Jackendoff(1972)의 표시법은 람다-추상을 원용하는 것이다.
(36 가)는 어떤 초점 성분이 부정적 전제를 가지는 개방 표현에 속함을 나타낸다. 이 경우 예의 초점 성분은 부정되지 않는다. (36 나)는 어떤 초점 성분이 개방 표현의 구성 요소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초점 성분은 부정의 범위에 포함된다.(21) (36 다)는 두 개의 성분이 동시에 부정되는 경우를 보인 것으로 순서가 일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지표를 사용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36 라)는 어떤 표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으로 부정 문장에 아무런 초점 성분도 상정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부정문에서 부정의 작용을 받는 요소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부정의 범위와 관련되는 문제를 아주 소략하게 다루어 보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흔히 이야기되는 것은 양화사와 부사가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문장의 어떤 성분이 초점이 될 때에 흔히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실의 하나임을 중시하였다. 담화 전제가 어떻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예의 초점 성분이 부정의 범위에 포함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되는데, 이는 람다-추상의 방법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표시될 수 있다.
4. 결 론
국어 부정법이 가지는 특이성에 대해서는 변형 생성 문법이 국어에 도입된 이후 실로 적지 않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한 논의들을 통하여 국어 부정법의 많은 현상이 밝혀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의의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 서는 아직도 적지 않은 오해나 불투명성이 깔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의에서 가장 힘을 들인 문제의 하나는 '부정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부정은 의미론적인 문제인 데 대하여 부정문은 형식적인 요건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모르-'와 '없-'은 통사론적인 공기 관계를 보인다는 점에서 예외적으로 형식적인 관계에 포함될 수 있게 된다. 다른 문제의 하나는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단형 부정문과 장형 부정문을 동일한 부정의 방식으로 보려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 장형과 단형은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 차이의 모든 것이 때로는 아주 미묘한 직관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미묘한 차이를 모두 무시한 채 부정문에 대한 효과적인 논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단형과 장형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증거를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또 다른 문제의 하나는 부정의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부정의 범위에 관한 논의에 흔히 포함되는 것은 양화사이거나 부사적인 성분이다. 그러나, 초점을 받는 부정문의 어떠한 성분도 문제의 예가 부정 담화 전제를 가질 때 부정의 영향을 받게 됨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주로 Jackendoff(1972)의 논의를 국어에 적용한 것으로, 양화 논리나 술어 논리에 의한 표시법보다도 비교적 정확하게 그 부정의 작용 대상을 명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부정의 문제는 문장의 통사론이나 의미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므로, 앞으로 밝혀져야 할 문제가 더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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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 난다. 잘못해 놓고서야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는 말. ■ 물이 깊을수록 소리가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깊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아는 체하고 떠벌리지 않는다는 뜻. ■ 얽은 구멍에 슬기 들었다. 얼굴은 얽었으나 슬기롭다 함이니, 사람은 외양만 가지고 평가할 수 없다는 말. ■ 초사흘 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 지혜롭고 민첩한 사람만이 미세한 것을 살필 수 있다는 말. ■ 기운이 세면 소가 왕노릇 할까 가운이 세면 장수노릇 하나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지도적 위치에 설 수 없다는 말. ■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일에 임기웅변하며 산다는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