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국어의 표기법에 관한 연구

정 길 남 / 서울 교대 교수, 국어학

1. 서 론
    개화기에 간행된 우리말 문헌에 나타난 표기법은 전대(前代)의 그것과는 특이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개화기란 갑오경장을 중심으로 한, 19세기를 전후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던 격동기의 한 시대를 일컫는다. 이 무렵에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전래됨에 따라 국역 성서를 비롯한 그 외 성서 관계 문헌들이 줄이어 나왔다. 뿐만 아니라, 신식 학교의 설립으로 새로운 교과서가 발간되고, 동시에 신문들이 발행됨으로써 국어의 표현면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체로 정연하고 규칙적이었던 전대의 표기법에 비해 19세기의 그것은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즉, 새 것을 받아들이려는 하나의 경향과 전대의 것을 지키려는 또 하나의 보수적인 경향이 서로 대치되는 가운데 극심한 혼란상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러한 표기법은 그 후 1910년 합방을 지나 해방이 오기까지 한글의 독특한 세 가지 표기법을 이룩하게 되고,(1) 나아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 글에서는 주로 성서를 중심으로 표기 실태를 살피되, 당시에 간행된 다른 문헌의 그것과도 비교 검토할 것이다. 또한, 여기 자료로 삼은 문헌은 19세기를 전후하여 간행된 것으로서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되어진다. 자료<Ⅰ>에 속하는 것은 기독교 전래에 따라 국역된 성서와 그 외 성서 관계 문헌들이고, 자료<Ⅱ>는 개화 사상과 관련된 교과서 및 신문들이며, 자료<Ⅲ>은 종래의 전통적인 기타 일반 문헌들이다.
자료 문헌(간기) 약호 자료 문헌(간기) 약호

국역성서

그것과
관련된
문헌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1882) 82눅
개화사상과
관련된
교과서와
문헌들
독립신문(1896~1899) 독립
예수셩교 요안복음(1883) 83요 국민소학독본(1894) 국민
예수셩교 누가복음, 데자젹(1883) 83눅· 소학독본(1895) 소학
예수셩교 말코복음(1884) 84말 신정 심상소학(1896) 심상
신약마가젼복음셔언(1884) 84막 조선문전(1897~1904) 조선
누가복음젼(1890) 90눅 국문론(1897) 국문
셩경직(권 2)(1892) 92직 경향신문(1906) 경향
누가복음(1895) 95눅 국어독본(1906) 국어
셩경직(권 1)(1897) 97직 녀독본(1908) 녀
신약젼셔(1900) 젼셔
종래의
전통적인
일반문헌
三聖訓經(1880) 삼성
신명초(1908) 신명 過化存神(1880) 과화
훈진언(1894) 훈진 敬信錄諺釋(1880) 경신
신편촬요(1898) 시편 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1881) 81윤
Corean Primer(1877) CP 御製諭八道四都耆老人民等綸音(1882) 82윤
Corean Speech(1882) CS 경셕지문(1882) 경셕
한불뎐(1880) 한불 관성제군명셩경언해(1886) 명셩경
한영뎐(1890) 한영 역대천자문(1911) 역천
Grammaire Coreenne(1884) GC    

Ⅱ. 어두 된소리 표기
    김윤경(1960:38-40)에 따르면, ① 기독교 표기체, ② 왜정 총독부 학무국 제정의 맞춤법(교과서식), ③조선어 학회 맞춤법으로 나뉜다.19세기를 전후해서 쓰여진 어두 된소리 표기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ㅅ계와 ㅂ계 그리고 각자 병서가 그것들인데, 대개는 ㅅ계로 나타나고 있다.

(1) ㄱ. 을<83요 4:34>, 함박<한불 76),  에 <독립 1, 1>
ㄴ. 글기<경석 4a>, 고<82윤 2a>, 아<과화 4b>, 흠<경신 4b>, 이고<82윤 1a>,

ㅅ계가 자료<Ⅰ>, <Ⅱ>에서 일반적인데 비하여 ㅂ계는 자료<Ⅲ>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자료<Ⅰ>, <Ⅱ>에서 보이는 ㅂ계는 다만 <국민소학독본>과 <관보>에 한정되고 있다.

(2) 堯舜禹湯上에 <국민 5과>, 委託야<관보 4호>

(2)에서 보인 ㅂ계는 '以'의 우리말 번역인''에만 쓰인 듯하다.
    본래 어두 된소리 표기는 17세기 중엽에 어두 자음군이 된소리화함에 따라 하나의 소리가 ㅅ계, ㅂ계, 그리고 희소하나마 각자 병서의 세 가지 형태로 표기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18세기에 들어와서 어두의 'ㅂ'과 'ㅅ'이 그 변별성을 상실하면서 ㅅ계로 통일되고 만다.
    이러한 어두 병서는 17세기까지는 ㅅ계보다 ㅂ계가 더 우세했으나, 18세기에 들어서는 ㅅ계로 바뀌었고 19세기 당시에는 이것이 더욱 강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8세기에 이미 약화된 ㅂ계가 자료(Ⅲ)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음은 종래의 전통적인 문헌이 지니는 보수성의 영향인 듯 하다. 한편, 자료(Ⅰ)에서 ㅂ계가 19세기의 국민들의 교육용 교과서인 <국민소학독본>과 국가의 공문 지시용인 <관보>에서 희소하게나마 쓰였다는 것은 공공 기관의 표기에서 새로운 것의 수용이 오히려 거부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에는 전대에 이미 사라졌던 각자 병서가 어두 된소리 표기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3) 꿀<97직 一, 6> 뜻<신명 一, 1>, 빠져<92직 二, 9>, 썩기<92직 二, 4>, 썩기<92직 二, 4>, 찌니<92직 二, 96>

위와 같은 어두 된소리 표기로 전면적인 각자 병서가 나타난 것은 19세기의 활판본 천주교계 성서들에서 이다. 이런 표기법은 현대 정서법에 비추어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표기 형태이다. 이것은 다른 문헌들이 대체로 ㅅ계 합용 병서를 쓰고 있고, 더구나 ㅂ계까지도 썼던 것과는 대조가 되고 있다.
    여기 각자 병서는 <원각경>이후 16세기에 사라졌던 것이 다시금 문헌에 전면적으로 나타난 것이 된다. 따라서, 개화기에 들어, 각자 병서가 ㅅ계, ㅂ계를 대신하여 모든 무성 자음에 두루 나타난 것은 1892년의 활판본 천주교계 성서인<셩경직>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당시 각자 병서를 시도한 천주교계 번역 성서들은 서양인 신부들의 엄격한 '감준'(감수)하에, 또한 그들에 의하여 교육된 한국인 조력자들에 의해 발간되었다. 이에 따라 각자 병서의 출현은 번역에 관여한 서양인들이 추구하는, 간편하고 체계적인 합리성이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그들이 저술한 우리말 사전의 된소리 표기 형태를 들 수 있다.
    서양 선교사들은 된소리의 음성 기호로 [pp], [tt]들을 쓰고 있었다.

(4) 다[KKAI-TA]<한불 121>, 둑이[KKAK-TOUK-I]<한불 123>
(5) 밧가튼(外) [baggatun] 잇갓슴(有)[iggasum]

<한불뎐(1880)>에서는 (4)에서처럼 'ㅺ'의 된소리 음성 기호로 [kkl가 쓰였다. (5)의 에서도 음성 표기로 [gg]가 역시 쓰였다. 이렇듯이 사전류에서 사용된 각자 병서 표기는 그들 나름의 문법적인 사고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국역 성서에서 각자 병서의 출현은 이와 같은 서양인들의 문법 의식과 이조 초기에 사용되었던 각자 병서를 다시금 운용하고자 하는 복고 의식이 복합적으로 표출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이 되는 것은 이러한 각자 병서가 일반 문헌에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만 그 후에 간행되는 천주교계 성서에만 국한되고 있을 뿐이다.(2) 당시 천주교계 성서를 제외한 개신교계 성서들이나 신문들에서 주로 ㅅ계가 쓰였고, 일반 문헌을 비롯하여 <관보>나 <국민소학독본(1895)> 등에 간혹 ㅂ계가 쓰일 뿐 각자 병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보아, 각자 병서는 당시에 사용된 일반화된 표기는 아닌 듯하다.
    천주교계 성서에서 이와 같은 형식을 과감하게 채택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사실로 여겨지는데, 이는 독특한 '기독교 표기체'라는 한 표기법을 형성시킨 것이 되고 있다.
    이처럼 19세기의 어두 된소리 표기는 각 문헌에 따라 ㅅ계 또는 ㅅ계와 ㅂ계의 혼기, 그리고 각자 병서로 각각 나타났던 것이다.

Ⅲ. 종성 표기
    개화기 문헌에서는 어말 위치에서 7종성의 대립만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말에서 자음이 내파화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어말 7종성은 근대 국어의 특징이다. 즉, 음절말 자음은 'ㄱ, ㄴ, ㄹ, ㅂ, ㅅ, ㅇ'으로 표기되며, 또 어말에 중자음 'ㄺ', 'ㄻ', 'ㄼ'이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이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 종성 'ㅅ'을 들 수 있는데, 이의 표기 실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ㄷ'의 'ㅅ'표기

(6) ㄱ. 맛아<한불 226> cf. 아<월석序 14>
ㄴ. 욕을 만히 밧을 징죠<젼셔, 눅 2:34>, 업수이 넉임을 밧<독립 1,2> cf. 받고 <두언 四, 21>
ㄷ. 그 말을 듯고<독립 1,3>, 演說을 듯더니<국민 28과>, 말을 듯거든<삼성 20b> cf. 듣고져여<월석 一, 32>

(6ㄱ)의 '맛아들'은 앞 형태소의 말음 'ㄷ'이 대립적인 모음과 연접되고 (6ㄷ)은 자음 시작의 의존 형태소와 연접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ㅅ'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것은 원래 말음 'ㄷ'인 어간은 후속 형태소가 자립이건, 의존이건 상관없이 'ㅅ'으로 표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현상은 당시 국역 성서를 비롯하여 기타 문헌들에서 두루 나타났는데, 이것은 19세기 종성 표기의 한 현상이었다.
    또한, 특이한 것으로는 어간 말음 'ㄷ'이 어미의 첫음 'ㄴ' 앞에서 'ㅅ'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7)업수이 넉임을 밧<독립 1,2>, 밧넌<82눅 2:34> cf. 받고 <두언 四, 21>

(7)의 '밧'은 뒤의 콧소리 'ㄴ'앞에서 동화를 겪지 않고 그대로 'ㅅ'으로 표기되었다.(3)
    이와 같은 어말 종성표기가 'ㅅ'으로 통일된 것은 18세기 국어에서였다. 이것은 18세기의 <윤음> 등에서 대량으로 나타났던 현상이다. 이러한 종성 표기는 'ㅅ'과 'ㄷ'이 종성 위치에서 내파음이 되어 동일한 음적 자질을 구현하기 때문에 (전광현, 1971:44), 'ㄷ' 혹은 'ㅅ'으로 혼기되다가 나중에 'ㅅ'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특이한 현상으로는 당시 여러 문헌에서 'ㄷ'말음이 모음 시작의 의존 형태소를 만나 그대로 연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8) 그졔야 바드셨단 말<명성경 18a>, 봉쟉을 바다<과화 10b>, 즉시 보믈어더<84막 10:52>, 世上에 미들바<국민 25과>

이와 같은 'ㄷ'의 연철 현상은 (6), (7)과는 다른 표기 방식이다. 즉 'ㅅ' 대신 실제음 'ㄷ'을 어미의 첫소리로 표기한 것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용언에서 연철 분철의 혼란이 심했던 문헌들과 몇 개의 성서에서만 나타났다. 성서의 경우, 이것은 19세기 후반기에 들어 용언의 분철 표기가 이뤄지면서 어간 말에 'ㅅ'으로 다시 복귀하고 만다.

2. 종성 'ㅌ'의 'ㅅ'표기
    'ㅌ'종성이 자음 시작의 형태소와 만날 때도 역시 음절 말음은 'ㅅ'으로 나타났다.

(9) 맛기니<국민 9과> 맛기고 <명셩경 34b>

그런데, 이런 'ㅌ'말음이 모음 시작의 형태소와 연접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10) ㄱ. 밧틀엇고<83뎨 1:18> cf. 바<능엄 1:86>
ㄴ. 훗허<경석 6a>, 겻<국민 28과>, 목쟈들이 밧헤 잇서<젼셔눅 2:8>, 밋<경석 6a 국민 10과>, 밋헤<국민 (10)과>

이것은 (10ㄱ)의 'ㅅ+ㅌ'류와 (10ㄴ)의 'ㅅ+ㅎ'류로 구분되어 표기된다. 이러한 표기 형식은 개화기 문헌에서 수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10ㄱ) "밧틀"의 말음 'ㅅ'은 체언 말음의 내파음 [tl]를 나타내며, 다음에 따르는 'ㅌ'은 실제의 현실음을 반영하고 있다. (10ㄴ)의 "밧헤"는 유기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열음과 과도음(Gliding Sound) /h/과의 결합 상태를 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0ㄴ)의 표기 유형은 사역원에서 간행된 <한청문감, 1779> 등에서 자주 나타났다.
    한편 'ㅌ'말음을 가진 형태소에 'ㅣ'모음 시작의 형태소가 연접될 경우 구개음화된 'ㅊ'으로 나타나고 있다.(4)

(11) 치<젼셔눅 2:13, 독립 1,1, 경석 1a> cf. 티<월석 一, 42>

3. 그외 종성 'ㅈ', 'ㅊ', 'ㅅ'표기
    본래의 어간 말음 'ㅈ', 'ㅊ', 'ㅅ'이 자음 시작의 형태소를 만나서, 어간 말음이 'ㅅ'으로 표기되는 것은 앞에서와 같다. 또, 모음 시작의 형태소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로 어간 말음은 'ㅅ'으로, 어미에는 실제의 현실음 'ㅈ', 'ㅊ', 'ㅅ'이 그대로 표기되는데 그 용례는 다음과 같다.

(12) ㄱ. 눗지<독립 1,6>
ㄴ.져가기를 <독립 1,8>, 슈<국민 38과>
(13) ㄱ.다든지<독립 1,7>, 숫블<국민 30과>
ㄴ. 예수도라 그 좃츠물 보고 <83요 1:38>, 梢進기에좃<국민 38과>
(14) ㄱ. 웃기<국민 39과>
ㄴ. 옷슬<81윤 3a, 경신 9a, 84막 5:27>, 유모의 졋시<독립 1,12>, cf. 오<용 92장>

각 (ㄱ)은 자음 시작의 어미가 연결되고, 각 (ㄴ)은 모음 어미가 연결되었다. 이 때도 어간 말음이 'ㅅ'으로, 어미에는 실제의 현실음을 표기하고 있음은 앞에서와 동일하다. 다마, (12ㄴ)의 '져' 등이 그냥 연철만 되고 있어 대조를 이루는데, 이것도 19세기 혼기 현상 중 하나에 속한다.

4. 종성 'ㅍ', 'ㅄ'의 'ㅂ'표기
    종성 'ㅍ', 'ㅄ'이 자음 어미 앞에서 'ㅂ'으로 표기되고, 모음 어미 앞에서는 중자음 'ㅄ'이 연철되고 있다.

(15) ㄱ. 놉고<독립 1,6>, 업<과화 4a>, 업기<81윤 1a, 국민 39과>
ㄴ. 업사문<83요 5:28>, 업시야<국민 12과>, 업며<경신, 11a> cf. 업스샤<용 111장>

한편, 종성 'ㅍ'은 모음 어미 앞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16) ㄱ. 압페서<83데 2:25>, 갑푸며<삼성 11b>
ㄴ. 놉히<명셩경 6b, 경석 4b>, 덥허<경석 1b>, 깁히<81윤 4b>
(16)의 결합 방식은 앞서 (10)의 경우와 동일하다.

5. 종성 'ㅋ', 'ㄳ'의 'ㄱ' 표기
종성 'ㅋ', 'ㄳ'이 자음 어미를 만나면 'ㄱ'으로 분철 표기되고, 중자음 'ㄳ'이 모음 어미를 만나면 연철되는데, 이는 앞서 (15)와 표기 방식을 같이 한다.

(17) ㄱ. 동녘동<녀 16과>, 북녁져에 <녀下8과>, 사을 쥬어<경석3b>
ㄴ. 거두쟈삭슬바다<83요 4:36> cf. 삭슬<杜초上 11>

종성 'ㅋ'이 모음 시작의 어미를 만났을 때도 역시 어간 말음이 'ㄱ'으로 분철 표기되고 있다.

(18) 별이 동녘에 <92직 二, 1>, 부억을<경신 24a>

6. 중자음 'ㄺ', 'ㄼ', 'ㄻ'의 종성 표기

(19) ㄱ. 셩경을닑고져<젼셔, 눅 4:10>, 밝고<삼성 19b>, 맑고<81윤 4b, 삼성 20a> 닑다가<경석 2a>
ㄴ. 밝아지며<경셕 2b>, 이보심을 <신명上, 3>, 붉은 <독립 1,35>, 늙은 이<경신 9a>
ㄷ. 말그미업고<명셩경 9b>, 불근담과<명셩경 10a>, 늘근니를 <삼성 12a>

(19ㄱ)은 어간 말 중자음 'ㄺ'이 자음 어미를 만나 그대로 나타난 경우이다. 한편, (19ㄴ)의 '늙은', '이'와 (19ㄷ)의 '늘근', '말그미'는 모음 어미 앞에서 각각 분철과 연철이 되고 있다. 이것은 문헌에 따라 수의적인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중자음 'ㄺ'은 후속음에 관계없이 어느 것 하나 묵음되지 않고 모두 표기된다.
    이러한 표기 형식은 'ㄼ'도 마찬가지다.

(20) ㄱ. 길흘다가<92직 二, 6>, 여번<독립 1,31>,
ㄴ. 엷어셔<국어 八, 2과>, 밟으며<경셕 1b> 넓어<녀 下, 11과>
ㄷ. 동를발바<명셩경 31a>
한편, 종성 'ㄻ'은 모두 연철되어 표기되고 있다.
(21) 사람의 살미만아니라 <83눅 4:4>, 셩이바부론에올무물<로쓰, 마 1:10>,

이러한 중자음의 연철 현상은 개신교 성서와 기타 일반 문헌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분철이 주로 천주교계 성서에서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Ⅳ. 어간 고정 표기
    개화기 표기의 한 특징으로 어간 어미를 분리하려는 어간 고정 표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품사에 따라 달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22) ㄱ. 불이물밧들어<83눅 1:26>
ㄴ. 일흠을<83눅 1:62>, 사은<독립 1,1>

(22ㄱ)은 활용 어미가 연접되고, (22ㄴ)은 격 조사가 연접되어 각각 연철과 분철로 달리 표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19세기 초 국역 성서 및 문헌들에서 보였는데, 연철과 분철은 체언과 용언의 범주에서 그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용언마저도 19세기 말에 번역된 성서들과 교과서들에서는 모두 분철이 되고 있어 19세기 말 이후로는 분철 표기 의식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는 약간 표기를 달리하는 두 어사가 있다.

(23) ㄱ. 거시니<95눅1:2>, 거슨<과화 4>, 거
ㄴ. 무어<신명 9>, 무어시든지<독립 1,11>

(23)의 '거시'와 '무어'은 성서를 비롯하여 신문들에서 대개 연철되어 표기되었다. <국민소학독본>에서도 '것시<2과>~거시<6과>~것이<6과>'가 혼기되고 있는 가운데 '거시'가 가장 우세하게 쓰였다.
    특히, 여기서 주의를 끄는 것은 '이것'에 대한 주시경의 언급이다. 주시경은 <국문론(1897. 9. 28 독립신문에 게재)>에서 '이것이'가 '이것시', '이거시' 등으로 잘못 쓰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897년 7월 15일자 <독립신문>에서부터 '것'과 '무엇'을 이미 완전한 분철 표기를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언중들이 호응하지 않는데 대해서 나온 것 같다.
    그 뒤에도 성서와 <황성신문(1898)>, <경향신문(1907)>에서는 '거시', '무어'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 두 어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어휘들은 어간 고정의 분철 표기를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Ⅴ. 결 론
    개화기에 나타난 표기 양상은 그 혼기로 인하여 일정한 규칙을 설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난점이 있었다. 우선 그 가운데 어두 된소리 표기와 종성 표기, 그리고 어간 고정 표기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어두 된소리 표기는 ㅅ계와 ㅂ계, 그리고 각자 병서가 두루 혼기되고 있었다. 그 중에도 후기 천주교계 성서에서는 전면적인 각자 병서가 시도됐지만 일반 문헌에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 종성 표기는 7종성의 대립만을 보였으며, 특히 ㅅ종성 표기는 특이한 면을 지녔다. 또한, 개화기에 들어서 어간을 고정시켜 어미를 분리 표기하려던 한 경향을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