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 允 杓 / 襢國大 敎授 國語學
1. 序 論
文字는 言語를 표시하는 記號 體系다. 그래서 "文字로 표시된 言語"인 '文字 言語'는 우리가 직접 接할 수 없는 지나간 시기의 언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資料이자 道具가 된다. 그런데 어떤 한 언어를 문자로 表記하는 데에는 일정한 原理와 方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이든 문자가 존재하는 한, 言語 事實을 문자로 표현하는 原理와 方法, 즉 表記法이 존재하게 된다. 그 表記法이 社會的 制約性을 지니며 사용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즉 그 言語 社會에 正書法(맞춤법)이로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간에, 언어를 문자로 표기하는 방법은 일정한 原理에 의한다. 文字 體系는 言語의 反映體이므로 言語 變化에 따라 그 시대의 表記法도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언어를 표시하는 문자가 일단 만들어져서 그 言語 社會에 통용되기 시작하면 그 문자는 언어 변화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保守性을 지니며 사용되어 오는 것도 매우 일반적이다. 그래서 그 문자가 아무리 그 音聲이나 音素를 정확하게 표시하는 表音 文字라고 하더라도 언어와 문자와의 不一致는 항상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表記法이나 正書法을 만드는 일은 그것에 담을 언어에 대한 정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며, 지나간 어느 한 시기의 언어에 대한 접근은 그 당시의 言語 事實을 표시하여 주는 표기법에 대한 정밀한 검토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國語를 표기하였던 表記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漢字의 音과 釋을 빌어 국어를 表記하였던 借字 表記法이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의 文字인 한글로 우리 국어를 表記하였던 방법이다. 前者는 古代 國語와 前期 中世 國語의 時期에 볼 수 있고, 後者는 訓民正音이 創製된 이후의 後期 中世 國語와 近代 國語그리고 現代 國語의 時期에 볼 수 있는 것임은 周知하고 있는 사실이다.
本 稿에서는 上記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近代 國語의 表記法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살피고 이 近代 國語 表記法이 중세 국어의 표기법이나 현대 국어를 표기하는 정서법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2. 近代 國語 表記法의 位置
近代 國語를 표기한 文字 體系는 근대 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진 문자 체계가 아니라, 中世 國語 그 중에서도 15세기 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文字 體系인 訓民正音을 그대로 빌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중세 국어에 비해 더욱 음성과 문자 기호의 불일치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 국어의 표기법을 검토하기 위하여서는 근대 국어의 표기법이 이 근대 국어의 音韻 體系를 정확히 분석한 후에 마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5세기의 表記法 體系는 15세기 국어의 音韻 體系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토대 위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訓民正音'이란 문자 체계를 설명하고 있는 '訓民正音'이란 文獻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現代 國語를 표기하는 現代 國語 正書法도 1933년에 이루어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近代 國語시기의 國語 表記法은 15세기나 現代 國語 시기의 表記法과는 다른 상태에 있다. 근대 국어 시기에 보였던 문자는 15세기에 만들어진 문자이지만 그 문자로 표기된 국어는 15세기 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15세기 국어는 근대 국어에 와서 그 언어 체계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나 그 변화된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즉 近代 國語를 표기하는 데에 알맞은 표기법 규칙을 별도로 정하여 近代 國語를 表記한 것이 아니고, 15세기에 創製된 文字 體系를 거의 그대로 지켜 오면서 15세기 국어와는 그 모습이 다른 근대 국어를 표기한 것이다. 그래서 문자와 언어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傳來의 문자로써, 변화된 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는 그 표기법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록 15세기에 만들어진 문자 중 몇 글자가 소멸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문자는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표기 체계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近代 國語의 表記法을 논의하는데 제일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근대 국어 시기에 근대 국어를 표기하는 일정한 규범이 존재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국어를 표기하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같은 規範的 案이 존재했을까 하는 문제인 것이다. 15세기 국어를 표기하는 일종의 정서법은 '訓民正音'을 통하여 하나의 원칙으로서 존재하였었고, 현대 국어의 정서법도 1933년에 만들어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볼 때에 近代 國語 시기에도 근대 국어를 표기하는 일종의 정서법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러한 표기의 원칙을 정해 놓은 記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 국어를 반영하는 많은 문헌들 중에서 中央에서 刊行한 文獻들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 校正한 校正本들이 존재하는데, 이 많은 교정본들은 그 교정한 부분이 거의 모두 漢字音의 교정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 한글 表記에 대한 교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1) 만약 한글 표기에 일정한 규범이 존재하였었다면, 한글 표기에도 틀림없이 교정이 이루어졌을 텐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한글 표기에 일정한 규범이 정해져 있지 않았음을 反證하는 것이다. 즉 外國語의 한글 轉寫法이나 漢字音의 한글 표기에는 어느 정도의 表記 規則이 있었지만, 固有語나 漢字語의 한글 표기에는 일정한 表記 規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근대 국어를 표기하는 近代國語 表記法에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당시에 한글을 解讀하고 한글을 통하여 자신의 意思를 전달할 수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는 일정한 表記의 方式이 일종의 慣行처럼 通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목적을 지닌 문헌을 간행하기 위하여 그 글을 한글로 表記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자를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가장 합리적인 표기 방법이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表記 方法에 대한 意識은 일종의 社會的 規範으로 굳어져서 알게 모르게 전체 언어 사회에 인식되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구체적인 구속력은 없으나 실제로는 구속되는, 表記의 원칙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고 한다면, 근대 국어를 표기한 다양한 많은 문헌에서 표기법에 대한 일정한 규칙이나 원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國家나 公共 機關에서 정해 놓은 정서법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국어를 표기한 많은 문헌에서 일종의 表記 原理가 발견된다고 하는 사실은 위와 같은 설명 이외의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근대 국어 시기에 간행된 많은 문헌에서는 일정한 표기의 원칙이 두드러지게 발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例外들도 다수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近代 國語 表記法의 特徵은 한마디로 말해서 일정한 規則 속에서 多樣性을 보이는 表記法이라고 할 수 있다.
3. 近代 國語 表記法의 特徵
近代 國語의 表記法上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特徵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間接 文字의 확대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間接 文字(indirect graphy)란 表音 文字에서 종종 발견되는 것인데, 한 문자가 자기 자신의 音價는 가지고 있되, 어느 경우에는 자신의 音價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단지 隣接 文字의 音價를 암시하여 주는 경우의 문자를 말한다.(2) 예컨대 영어에서 先行 母音을 길게 하기 위해서, 語末에 無音 e를 덧붙이는 경우가 있는데(made와 mad를 비교하여 보면 made의 e는 실제로는 앞 音節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만 視覺的으로는 제2의 音節을 만들고 있다.) 이 경우의 e가 바로 간접 문자인 것이다. 국어의 표기 문자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예컨대 모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ㅏ, ㅓ'로 쓰지 않고 '아, 어'로 쓰는 것도 'ㅏ, ㅓ'가 母音임을 표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이것은 국어의 音節 構造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문자상으로 볼 때에는 'ㅇ'이 실제로 後行 文字가 모음임을 표시하여 주는 간접 문자라고 할 수 있다.
近代 國語의 表記法에는 이 간접 문자의 확대가 특징적이다. 중세 국어의 표기법에서는 'ㅇ'을 後行 文字가 모음임을 표시하여 쓰는(한자음의 표시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도의 간접 문자가 있었지만, 近代 國語에 와서는 이 간접 문자의 기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특히 子音, 그 중에서도 어두 된소리를 표기하는 語頭 合用 並書의 表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近代 國語에 와서 語頭 子音群의 어두 된소리화가 전반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近代 國語 文獻에 보이는 語頭의 合用 並書 'ㅺ, ㅲ, ᄢ, ᄳ' 등은 [k']를, 'ㅼ, ㅳ, ᄣ'은 [t']를 'ㅽ, ᄤ'은 [p']를, 'ㅆ, ㅄ, ᄥ, ᄴ'은 [s']를, 'ㅾ, ㅶ, ᄥ'은 [c']를 表記하기 위한 문자들인 것이다.(3) (실제의 例는 紙面의 제약 관계로 생략한다. 대신 拙稿 ; 1986,121-122를 참고하기 바람.) 이들 合用 並書 중 앞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자는 ㅅ과 ㅂ이다. (또는 ㅄ, ㅽ, ㅆ도 보인다.) 이 ㅅ과 ㅂ이 제 音價인 [s]나 [p]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고 後行 子音 文字인 'ㄱ, ㄷ, ㅂ, ㅅ, ㅈ'의 음가가 [k][t][p][s][c]가 아닌 [k'][t'][p'][s'][C']임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ㅅ과 ㅂ이 간접 문자임을 증명하여 줄 수 있는 증거로 그 表記體를 들 수 있다.
15세기의 문헌에서는 합용 병서의 아래에 쓰는 母音字 즉 'ㅡ,ㅗ,ㅜ,' 등은 앞의 두 子音 文字 또는 세 子音 文字의 아래에 다 걸쳐서 쓰고 있다.
그러나 近代 國語 시기의 문헌 중에는 합용 병서의 아래에 쓰는 母音字가 합용 병서의 첫 글자인 ㅅ이나 ㅂ에는 관계하지 않고 이의 後行 子音字에만 관계함을 보여 주는 것들이 많다. 17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대부분이 이러한 表記體(또는 글자체라고 할 수 있다.)를 사용하고 있다. 이제 그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간접 문자의 사용은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그 종말을 보게 된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소위 '된시옷' 사용의 철폐를 결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間接 文字는 文字와 音聲 또는 文字와 音素와의 1:1의 對應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表音 文字가 지니고 있는 長點을 減少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近代 國語 表記法上에 나타나는 또 한 가지 특징은 근대 국어 시기의 국어 表記者들이 語幹에 대한 認識이 있어서 體言과 助詞, 語幹과 語尾를 구분하여 표기하는 分綴 表記의 방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국어 시기에 접어들면서 중세 국어에서 사용하였던 소위 連綴 表記의 방식에서 벗어나 重綴 表記의 방식으로 옮겨 가고 이 重綴 表記의 방식은 다시 分綴 表記의 방식으로 옮겨 간다. 즉 중세 국어에서, '사'(人)에 主格 助詞 '이'가 연결되면 '사미'로 表記되었었는데, 16세기에 와서 이것은 '사미'식으로 表記되기 시작하였고, 近代 國語에 와서 이 중철 표기가 점차로 '사이'와 같이 分綴 表記되어 간다. 그러나 用言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體言보다 늦게서야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먹-'(食)은 副動詞形 語尾 '-어'가 연결되면 중세 국어에서는 '머거'로 표기되었던 것이 '먹거'로 되었다가 다시 '먹어'로 표기되는 과정이 체언보다 뒤늦게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近代 國語 시기의 國語 表記者들의 語幹 意識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語幹 意識이 用言보다는 體言에서 먼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分綴 表記는 重綴 表記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관심을 끈다. 이것은 중세 국어에서의 표기 원리가 音素的 表記인데 비하여 近代 國語에 와서 形態 音素的 表記를 거쳐 形態的 表記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4) 왜냐하면 重綴 表記란 語幹도 보여 줄 뿐 아니라, 語幹 末音도 表記하려는 의식에서 연유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前述한 重綴 表記의 例인 '사미'는 '사'을 표기하여 그 語幹을 밝혀 주고 아울러 '미'로써 그 語幹 末音까지도 표시하여 주는 것이다. 현대 국어의 맞춤법에서 어간을 밝혀 쓰고 있는 것도 결국은 近代 國語 表記法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分綴 表記의 방법은 모든 單語의 表記에 그대로 다 통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分綴 表記는 語幹 末 子音을 지니고 있는 단어에 한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語幹 末 子音을 가진 單語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다 分綴 表記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간의 형태소들이 환경에 따라 異形態가 존재할 때 異形態들이 自動的 交替를 보이는 것인가 隨意的 交替를 보이는가에 따라 그 表記의 방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 국어 표기법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국어의 形態素 중 그 異形態들이 自動的 交替를 보이는가 隨意的 交替를 보이는가에 따라 그 表記의 방법을 달리 정했다고 하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語幹 末 子音群을 가진 단어들의 表記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국어에서 語幹 末 子音群을 가진 것들은 'ㄳ, ㄵ, ㄶ, ㄺ, ㄻ, ㄼ, ᄚ,
,
, ㄺ, ㅺ,
ㄾ'의 12개인데, 이들은 모두 그것이 나타나는 환경에 따라 그 異形態들이 다 존재하지만, 'ㄺ'과 'ㄼ'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異形態들이 自動的 交替를 보이는 것들이다. 예컨대, '넋(魄), 앉-(坐), 많-(多), 옮-(移), -(切), 읊-(詠), 없-(無), -(釣), 훑-' 등은 母音이 후행하면 두 子音이 다 발음되지만 자음이 후행하면 '넉도, 안, 만코, 옴기고, 타, 읍다, 업고, 낙줄'과 같이 되어 두 자음 중 第一子音이나 第二子音은 自動的으로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ㄺ, ㄼ'을 어간 말 자음군으로 하는 '닑-(讀), 늙-(老), 여(八), -(蹈)' 등은 모음이 후행하거나 자음이 후행할 때에 두 자음이 다 발음되거나 또는 두 자음 중 한 자음만 발음되는데, 그 두 자음 중 어느 자음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隨意的이다. 즉 '닑-'은 모음이 후행하면 '닐그니'처럼 되어 두 자음이 다 발음되지만, 자음이 후행하면 '닐다, 닉다'의 두 발음이 다 가능했던 것이다. '-'에도 동일한 현상이 보인다. 그 발음은 그 表記上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어간 말 자음군의 두 자음을 바꾸어 表記하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이제 그 예를 들어 보도록 한다.
위의 예들은 일반적으로 誤記로 처리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誤記가 아니라 그 당시의 실제음을 표기한 것이다. 만약 誤記라고 한다면 이 誤記가 모두 'ㄺ'과 'ㄼ'을 어간 말 자음군으로 하는 단어들에만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隨意的 交替를 보이는 'ㄺ, ㄼ'을 어간 말 자음군으로 하는 것들만이 어간과 어미를 분리하여 표기하려는 分綴 表記의 방식을 취하고 있고, 自動的 交替를 보이는 다른 어간 말 자음군을 가진 것들은 모두 連綴 表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隨意的 交替를 보이는 어간들은 모음이 후행하든 자음이 후행하든 거의 모두 分綴 表記를 단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表記의 原理는 현대 국어의 맞춤법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현대 국어의 정서법에 의하면 그 異形態들이 自動的 交替를 보이든, 隨意的 交替를 보이든, 어간 말 자음군을 어간 아래에 모아 써서 그 基本形을 표시하고 있다. 심지어 '흙'(土)이나 '여덟'(八)은 모음이 후행하거나 자음이 후행하거나 대개 한 子音만 발음되어 '흑이, 흑을, 흑도, 여덜이, 여덜도, 여덜과' 등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흙이, 흙을, 흙도, 여덟이, 여덟도, 여덟과'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方言에 따라서는 '흘', '여덟'만 실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표기의 현상은 어간 말 자음군이 아닌 다른 어간 말 자음을 표기하는 것과는 불균형을 이루는 셈이다. 왜냐하면 현대국어 정서법에서는 어간 말 자음 중 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그 어간을 밝혀 쓰고 (예컨대 '같-'(同)은 '같은, 갇고, 갗이'처럼 쓰지 않고 '같은, 같고, 같이'로 쓰고 있다.)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발음 나는 대로 쓰고 있다.(예컨대, '듣-' (廳)은 '듣고, 듣어, 듣으니' 등으로 쓰지 않고 '듣고, 들어, 들으니' 등으로 表記하고 있다.)
近代 國語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즉 어간 말 자음이 하나인 단어들 중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그 발음 나는 대로 표기하되 分綴 表記하는 법이 없이 連綴 表記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듣-'(廳)은 그 발음 나는 대로 '듯고, 드러, 드르니'로 표기하되, '들어, 들으니' 등으로 分綴 表記되는 일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이렇게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까지도 分綴하여 表記하게 되는 시기는 대개 19세기 말엽에 와서의 일이다. 그래서 이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절대로 重綴 表記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드르니, 드러'등이 '들르니, 들러'등으로 表記되는 일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어간을 '들-'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自動的 交替를 보이는 것들은 주로 分綴 表記를 행하게 되는데 그 중간 과정에서 重綴 表記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먹'은 '머그니>먹그니>먹으니'의 과정을 보여 준다. 連綴 表記에서 重綴 表記를 거쳐 分綴 表記로 변천되어 가고 있는 현상과 연관시켜 볼 때에 이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이 重綴 表記를 하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을 그 발음 나는 대로 표기하는 것은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그 표기는 주로 分綴 表記를 행하게 된다.
근대 국어의 표기법 중에서 특징적인 것 중의 또 하나는 이 시기에 이미 국어의 띄어쓰기 萌芽가 싹트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현대 국어의 정서법에서 각 낱말은 띄어 쓰되 토씨는 그 윗말에 붙이어 씀을 그 원칙으로 하는 띄어쓰기의 원칙이 제시되어 있으나, 이 띄어쓰기와 유사한 방법이 이미 근대 국어 시기의 문헌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근대 국어를 반영한 문헌에서 실제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보이지 않으나 이 띄어쓰기의 시초가 되는 句讀點이 근대 국어의 문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도 筆寫本이 아닌 版本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러한 句讀點이 나타나는 문헌은 지금까지 筆者가 조사한 바로는 세 가지이다. 즉 1765年(英祖 41年)에 藥師殿에서 開刊된 '地藏經諺解'와 1799년(正祖 23年)에 順天 松廣寺에서 開刊된 '妙法蓮華經諺解'와 1869년(高宗 6年)에 開刊된 '閨合叢書'가 그것이다. 이제 그 예를 紙面 關係上 하나만 들어 보도록 한다.
이상의 예를 살펴보면 그 句讀點은 현대 국어의 정서법에서 사용하고 있는 띄어쓰기에 매우 近接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어의 이러한 句讀點 찍기는 물론 漢文을 쓸 때에도 나타난다. ('訓民正音' 解例本이나 '龍飛御天歌'에도 이러한 句讀點이 보이나, 그것은 漢文에 사용된 것이다.) 현대 국어에 와서 주시경 선생이 띄어쓰기를 주장한 것도 英語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傳統的인 국어의 句讀點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結 論
근대 국어는 중세 국어와는 다른 음소 체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15세기에 만들어진 문자로서는 근대 국어를 합리적으로 표기하기 어려웠었다. 그대서 표기 체계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문자와 언어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間接 文字의 사용이었다. 語頭 子音群이 어두 된소리로 변화함으로써 발생한 자연 발생적인 것이 이 간접 문자의 출현이었다. 이 간접 문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 그 어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語源 意識의 소멸은 이러한 간접 문자의 소멸을 초래하게 된다. 語頭 合用 並書가 차츰 語頭 各自 並書로 변화하는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곧 音素 對 文字가 1 : 1로 대응하는 표기로 변화를 겪는 것이다.(5)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말에 와서 매우 일반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현대 국어의 정서법에서 合用 竝書를 폐기하고 各自 竝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이러한 변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中世 國語의 表記法은 音素에 대하여 하나의 文字 單位를 대응시켰던, 소위 音素的 원칙에 입각한 表記 體系였다. 그러던 것이 現代 國語의 正書法에서는 가능한 한 形態論的 고려를 개입시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표기 체계로 변천하였다(李基文, 1963 : 162 참조). 이에 비해 近代 國語 시기의 表記法은 그 중간 과정으로서 그 당시의 언어를 音素的 原理에 입각하여 표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形態論的 원리도 고려하여 표기하는 체계였다. 그래서 근대 국어 시기에는 음소적 원리에 의한 표기와 형태적 고려를 동시에 개입시킨 표기가 다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국어 시기의 표기법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음소적 원리를 주로 하였던 표기에서 음소적 원리에 형태론적 고려를 개입시킨 표기로, 그리고 다시 가능한 한 형태론적 고려를 개입시키는 표기로 변천하여 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앞에서 언급한 몇 가지 표기의 현상에서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곧 分綴 表記의 출현인데, 이 分綴 表記의 출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重綴 表記가 대두된다. 이 重綴 表記는 형태적 분석을 시도하여 그 語幹과 語尾를 구분하여 표기하려는 의식의 위에, 語幹의 未音도 동시에 표기하려고 했던 표기 방식이었다. 결국 形態 音素的 表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철 표기의 방법도 모든 것에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다. 體言과 用言에 대한 의식의 차이로 인하여 體言에서부터 그러한 표기의 모습이 보이다가 차츰 用言 語幹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래서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體言 語幹이나 用言 語幹이나 모두 그 語幹을 밝혀 적음을 원칙으로 하는 표기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그 語幹 形態素들의 異形態들이 自動的 交替를 보이는가 비자동적 교체를 보이는가에 따라 分綴 表記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즉 비자동적 교체 또는 수의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語幹 末 子音이 하나인 것은 그 발음 나는 대로 적되 連綴 表記를 하였으며 語幹 末 子音群을 가진 것들은 그 발음 나는 대로 적지 않고 語幹을 밝혀 적되 특히 分綴 表記의 방식에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자동적 교체를 보이는 것들은 어간 말음이 하나인 것은 발음 나는 대로 적되 그 어간을 밝혀 적는 分綴 表記의 방식에 따르고, 어간 말 자음군을 가진 것들은 발음 나는 대로 적되 그 어간을 밝히지 않는 연철 표기의 방법에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근대 국어 표기법 중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가 띄어쓰기의 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句讀點의 使用이 보인다고 하는 사실이다. 비록 현대 국어의 정서법에 보이는 띄어쓰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띄어쓰기의 원리와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句讀點을 찍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시대에 이미 單語나 句에 대한 인식이 표기법상에 반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근대 국어의 표기법은 매우 자연 발생적으로 변천되어 온 것이다. 특별한 언어적, 문자적 규제가 없었던 시기에 문자를 통하여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표기 방식이 언어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 발생적 표기의 규칙은 1933년에 이루어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상당히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참고 문헌
郭忠求(1980), 十八世紀 國語의 音韻論的 硏究, 國語 硏究 43.
金重鎭(1987), 近代 國語 表記法 硏究, 圓光大 傳土 學位 論文.
李基文(1963), 國語 表記法의 歷史的 硏究, 韓國 硏究院.
李翊變(1985), 近代 韓國語 文獻의 表記法 硏究, 朝鮮 學報 114.
田光鉉(1967), 十七世紀 國語의 硏究, 國語 硏究 19.
洪允杓(1986), 近代 國語의 表記法 硏究, 民族 文化 硏究(高麗大)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