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쓰고 싶은 내 고장 사투리
-----강릉 방언을 중심으로-----


李 翊 燮 / 서울大 교수, 국어학

1

자기 고장의 말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애정을 가지게 마련이다. 특히 그 중 몇몇 단어나 표현에 대해서 유난히 애착을 보이는 수가 있다. 유난히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아니면 그 造語法이 신통하여서거나 그 有用性이 높다고 느껴서일 것이다. 가령 호남 쪽 사람들은 '낫우다'라는 말에 애착을 가진다. 병을 낫게 하다, 즉 병을 고친다는 뜻의 단어다. '낫다'에 '세우다, 지우다'의 사역형 어미 '-우-'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단어다. 그 造語法도 그럴 듯하고 병을 고친다고 할 때보다 '병이 낫는다'는 말과의 관련으로 그 의미도 더 선명하게 여겨지는 단어다. '보듬다'와 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큰 애착들을 가진다. 가슴에 안는다는 뜻이나 '안다'보다는 한결 정다운 느낌을 주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이를 무미건조한 '안다'로 대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투리라고 하여 버리기에는 아까운 단어들이 분명히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투리를 표준어로 格上하여 널리 보급하는 문제도 종종 대두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보다 그리 단순치 않다. 그 고장 사람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감칠맛이 나는 말이라도 他地사람에게는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기 쉽기 때문이며, 또 말의 보급이란 그처럼 人爲的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낫우다'나 '보듬다'를 예로 보아도 가령 서울 사람들에게는 이 단어는 뜻모를 生硬한 단어들일 뿐이다. 그것을, 오늘부터는 표준어로 삼겠으니 이러이러한 뜻의 단어로 쓰라고 公布한다고 해서 이 단어들이 쉽게 보급되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필자는 사투리, 즉 방언의 표준어화 문제에 대해서는 퍽 신중을 기하는 편이며 얼마간은 회의론자인 편이다. 편집자가 이 글을 청탁하였을 때 몇 번이고 사양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방언의 표준어화 문제는 어떻게든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이며, 고장별로 표준어로 발탁하여 쓸 만한 후보들을 찾아보는 일은 뜻있는 일일 것이다. 사투리이던 것이 저절로 표준어가 되는 일이 없지 않다. 가령 '멍게'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이 단어는 표준어 '우렁쉥이'보다 훨씬 큰 세력을 잡게 되었다. 實物과 함께 한 방언이 서울로 침투해 온 것일 것이다. '역겹다'나 '뒤안길'은 문학 작품을 통하여 이제 표준어 자리에 앉힐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억지로는 어렵지만 사투리로 표준어로 만들어 쓸 길은 잘만 찾으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필자의 고향(강릉을 포함하여 강원도 일대)의 말에서 표준어로 간택될 만한 후보를 몇 개 내세워 보고자 한다.

2

쟁기꾼/밭갈애비 논이나 밭을 갈 때 쓰는 농기구로 쟁기와 극젱이가 있다. 그런데 이 기구를 다루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준어는 아직 査定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여러 사전을 뒤져 보아도 이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강원도 일대에서 보면 쟁기나 극젱이로 논이나 밭을 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여러 방언형이 있다. '신일꾼, 성군, 쟁기꾼, 밭갈애비, 보애비' 등이 그것이다. 크게는 '-꾼'系와 '-애비'系로 나뉨을 볼 수 있다. '-꾼'은 '지게꾼'이나 '일꾼'의 '-꾼'일 것이며, '-애비'는 '홀애비, 함진애비' 등의 '-애비(-아비)'일 것이다.
    이 중'신일꾼, 성군'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 지방민 이야기로는 '신일꾼'은 힘이 센 일꾼이라는 뜻이 아니겠느냐는 것인데 민간 어원일 것이다. '보애비'의 '보'도 확실치 않은데 이 지방에서 쟁기를 '보구래'라고 하는 곳이 많은 것을 보면 그 '보구래'의 '보'와 관련이 되는 듯 싶기도 하다. 어떻든 위의 여러 방언형 중 '쟁기꾼'이나 '밭갈애비'는 어느 쪽이든 어원이 분명하고 그 造語法도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어느 것이든 표준어로 발탁하여 빈 구멍 하나를 메우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으력/응거름/으렝이 가뭄이 심하면 논바닥이 말라 큰 틈을 내며 갈라지는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신문에서 이 현상을 놓고 흔히 '거북등'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거북등이 되었다는 표현은 이 龜裂 현상에 대한 이름을 따로 두고 일부러 쓴 修辭가 아니라(물론 균열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마땅한 용어가 없어 쓰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지는 이 현상을 가리키는 표준어 역시 아직 査定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다녀 본 농촌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으레 있었다. 대체로 '응거름, 으렝이, 으력' 등이 그것인데 해마다 신문에도 그 이름이 쓰일 만한 단어이므로 그 用途도 크다 할 것이다. 좀더 여러 고장에서 이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 그 중 어느 하나를 표준어로 정하여 썼으면 싶다.
    생각하면 이런 단어를 만들어 써 온 조상들이, 또 시골 사람들이 고맙기도 하다. 가끔 한국어의 어휘 부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면 이 어휘 부족 현상을 절감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방언을 수집하다 보면 참 신통하게도 샅샅이 이것저것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수가 많다. '응거름, 으력'도 그 중의 하나이거니와, 다른 한 예로 '숨베'를 들 수 있다.
    숨베는 호미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호미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느냐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대개 호미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에서부터 그 위로 뻗어 올라간 부분을 가리킨다. 이런 부분에까지 따로 이름을 만들어 썼을까 하는 경탄을 자아내는 단어임이 분명하다. 어휘 부족을 한탄하기 이전에 이처럼 숨어 있는 단어들을 정성 들여 찾아내야 할 것이다. 많은 경우 어휘 부족 현상은 국어 자체의 문제이기보다 각 개인의 문제인지지 모른다.

우두구네/추천이여 단오 무렵 우리 고향에서는 그네뛰기가 큰 행사였다. 동네 장정들이 모여 그네 줄로 쓸 굵은 밧줄을 트는 일에서부터 동네는 축제 기분으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큰 밤나무에 그네 줄이 매어지면 단옷날까지 수시로 우리들은 그네를 뛰곤 하였다.(단오가 지나면 낫으로 그네 줄을 잘라 버려 더 이상 그네를 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네를 뛰면서 앞으로 높이 솟아올라 갈 때 우리는 신바람이 나 환호를 질렀다. 강릉 쪽에서는 '춘천이여! '라고 하였는데 민간 어원으로는 그네가 높이 솟아올라 대관령 너머 춘천도 보인다는 기분 때문에 그렇게 소리지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추천, 즉 鞦韆에 '이여'를 결합한 '추천이여'가 '춘천이여'로 변한 것이라 여겨진다.
    嶺西 쪽에서는 전혀 엉뚱하게 '우두구네! '라고 한다고 한다. 그 어원은 알 길이 없으나 퍽 정감이 가는 말이다. '춘천이여! '보다 더 순수한 우리말의 느낌도 주고 어딘가 民俗的인 냄새도 더 풍긴다.
    '추천이여'이든 '우두구네'이든 표준어로 보급하였으면 싶은 단어다. 傳統을 되살린다고 이미 자취를 감추었던 것을 復元하기보다 이러한 말 하나 하나를 바로 살려 놓는 것이 아직도 핏속에서 살아 뛰고 있는 우리의 숨결을 이어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까치구멍 기와집이든 초가이든 한옥을 보면 지붕 양쪽에 구멍이 나 있는 수가 있다. 通風口 구실을 하는 구멍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를 강원도에서는 대개 '까치구영(즉 '까치구멍')'이라 한다. 지역마다 가옥 구조가 얼마간씩 다르기 때문에 이 구멍이 어느 지방에나 있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그 명칭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표준어로 이에 해당하는 단어를 뭐라고 하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직 査定된 바가 없다면 '까치구멍'이라고 하든 더 좋은 이름을 찾든 방언에서 좋은 이름을 하나 찾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엌문/뒤꼍문/정지밖문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부엌문'은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가옥에서는 부엌문이 하나만 있지 않다. 앞마당으로 통하는 문도 있고 뒤꼍으로 통하는 문도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그 외에 側門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이들은 각기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다.
    앞마당으로 통하는 문의 이름은 그리 일정치 않은 편이다. '앞문'이 그 중 많이 쓰이는 편이다. 뒤꼍으로 통하는 문은 '뒤꼍문' 쪽으로 통일되어 있다. '뒤꼍'은 '뒤안'이라고 하는 곳이 많은데 강원도에서는 이것이 줄어 '됀'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뒤꼍문은 '됀문'이라 한다.
    만일 남향집이고 부엌이 동쪽 끝에 배치되어 있다면, '됀문'은 부엌에서 북쪽으로 나 있을 것이며 '앞문'은 남쪽으로 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쪽으로 문이 하나 더 나 있는 수가 있다. 이 문의 이름은 그 동쪽의 부엌 밖 공간의 이름을 따게 된다.
    이 공간에는 나뭇가리도 있고 방앗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이 공간이 없을 수도 있고, 있어도 그 명칭이 없는 수도 있다. 강릉에서는 여기를 '정지밖'이라 한다. 부엌을 '정지'라고 하므로 '부엌밖'이라는 뜻이다.(여기를 '벅뒤' 즉 '부엌뒤'라고 하는 곳도 있다.) 따라서 강릉에서는 이쪽으로 난 부엌문을 '정지밖문'이라 한다.
    '정지밖'에 해당하는 표준어도 하나 있었으면 한다. '뒤꼍'이라는 이름이 있으면서 여기에 따로 이름이 없는 것은 지역에 따라서 이 공간의 구실이 낮기 때문일 것이나 지역에 따라서는 오히려 여기가 뒤꼍보다 쓰임이 많다. '굴뚝모퉁이' 또는 '굴뚝뒤'처럼 구석구석에 이름을 붙여 쓰는 고장도 있는 터이므로 '정지밖'에 해당하는 표준어도 필요할 것이며 그러면 '정지밖문'의 표준어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을 '부엌문' 하나로 통칭하는 것은 게으름을 피우는 짓이 아닌가 한다. 이제 아파트 생활에 익숙하여 하나의 부엌문조차 찾기 어렵게 된 마당에 부엌문 세 개의 이름을 찾아 주자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나중에 古語로 남더라도 표준어로 그러한 이름이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은 사뭇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퇴(를 만나다) 뜻하지 않던 선물을 받으면 '퇴를 만났네' 또는 '퇴를 냇네'라든가 '이게 무슨 퇴야'라는 말이 강원도 곳곳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퇴'는 말하자면 작은 橫財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다. 이런 뜻을 가령 충청북도 丹陽에 가 물으면 '홍재 만났다'고 한다면서 강원도 사람들은 '퇴 만났다'고 그런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것을 보면 '퇴'는 橫財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횡재이되 작은 횡재다. 복권이라도 당선된 사람에게 '퇴만났다'는 말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 때에는 '횡재 만났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조그만 장난감이나 과자를 사 주었을 때, 또는 아주머니나 할머니에게 조그만 옷가지를 사 주었을 때 '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이다.
    '횡재'라는 단어와는 의미차도 있지만 그 분위기가, 즉 그 語感이 우리것답고 향토적이어서 애정을 느끼게 하는 단어라고 생각되어 '퇴'와 같은 뜻의 단어가 널리 보급되면 외래어로 침식 당하여 상처가 커 가는 국어에 새로운 生氣를 주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퇴내다'는 염상섭의 소설에서도 쓰이고 있고, 경기도 일원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퇴'는 어떻든 표준어로 사전에 올라야 할 단어로 여겨진다.

3

이상에서 몇 개 소개한 단어나 표현 이외에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말들이 상당히 더 있다. 한 예로 씨갈이는 일가붙이라는 뜻인데 씨, 즉 種子가 갈려 나온 한 겨레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재미있는 造語로 여겨지며, 놀래쿠다는 '놀라다'의 사동형이며, 만지키다는 '만지다'의 피동형으로 '만져지다'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인데 표준어에 없는 재미있는 派生法으로 여겨진다. 다른 방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형용사와 부사 등에는 특히 표준어로 옮기기 어려운 재미있는 단어들이 많다. '잘다'의 뜻의 재롬하다나 이 語根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부사 재롬재롬, '나란히'와 거의 같은 뜻의 쫄로리, '몽땅'의 뜻이지만 아주 특이한 語感을 가지는 오부뎅이 등 이 방면의 단어는 참으로 많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이런 단어들의 용법이나 어감을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런 단어는 아무리 훌륭한 단어들이라도 표준어로 삼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반복하지만 방언 하나를 표준어로 승격시키려면 문학 작품을 통하여서라든가 어떤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언어는 言衆이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방언에서 살려 쓸 만한 단어들이 없을까를 살피는 일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造語 方式 등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방언은 수없이 제공해 준다. 직접 방언 자료를 표준어로 쓰지 못하더라도 국어를 가꾸어 가는 길은 적어도 방언 현상에서 示唆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몇 개만이라도 표준어로 발탁하여 국어를 살찌게 할 玉같은 자료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방언이 여러모로 우리에게 귀중한 寶庫라는 점을 이 점에서도 다시 한번 바로 인식하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