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의 시제와 동작상

고 영 근 / 서울대 교수, 국어학

Ⅰ. 머 리 말
    시제와 동작상은 서법과 함께 언어학자들의 호기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분야에 속한다. 특히 최근에 와서 의미 분석에 대한 방법론이 정밀화됨에 따라 이 방면의 연구는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품사론이나 형태론의 영역에서 극히 미시적으로 다루어지던 이런 문제들이 나라 밖의 연구들에 힘입어 큰 성과를 거두어 왔다. 이 곳에서는 나라 안팎의 업적을 토대로 하여 국어의 시제와 동작상의 체계를 살펴보고 이들 상호 간의 관계는 물론, 서법과의 관계도 언급해 보고자 한다.

Ⅱ. 시 제
    시제란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동사의 활용 형태에 의하여 제한한다는 뜻이다.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구획하는 데 있어서 연호라든지 제왕의 재위 기간을 사용하는 수도 있지마는 요즈음은 예수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하는 서력 기원을 많이 쓰고 이를 다시 열두 달, 설흔 날, 스물네 시간 등으로 쪼개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의 단위를 시제라고는 하지 않는다. 시제는 어디까지나 동사의 활용 형태에 의한 시간 구분을 의미한다.

(1) 가. 철수는 지금 탁구를 친다.
나. 철수는 어제 탁구를 쳤다.
다. 철수는 내일도 탁구를 치겠다.

(1)에서 시제를 표시하는 부분은 '치다'의 활용형 '친다, 쳤다, 치겠다'인데 이와 같은 활용형에 국한하여 시제 범주를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1)에는 시간 부사 '오늘, 어제, 내일도'가 있어 활용형의 시제 내용을 분명히 해 주고 있지마는 이들을 따로 시제라고는 하지 않는다. 어휘적 수단에 의한 시간 표시라고 말할 뿐이다.
    시제는 발화시를 기준점으로 삼아 시간 내용의 선후를 지시하는 기능을 띠고 있다.

(2)
과거 현재 미래

0

(2)에서 0를 발화시라고 규정할 때 사건시가 0와 일치한다면 현재 시제가 된다. (1가)를 현재 시제라고 하는 것은 철수가 탁구를 치는 일이 일어나는 시간(사건시)은 화자가 이 말을 하는 시간(발화시)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건시가 발화시에 앞서게 되면 과거 시제가 된다. (1나)를 과거 시제라고 하는 것은 철수가 탁구를 치는 일이 일어난 시간이 화자가 이 말을 한 시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한편 사건시가 발화시에 후행하면 미래 시제가 된다. (1다)를 미래 시제라고 하는 것은 철수가 탁구를 치는 시간이 화자가 이 말을 한 시간보다 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화시를 중심으로 한 사건시의 구획이 형태상으로 분명하게 표시되지는 않는다.

(3) 가. 철수도 지금 여기 섰다.
나. 철수도 내일 탁구를 친다.

(3가)의 철수가 현재 여기 서는 일은 분명히 발화시와 크게 어긋나는 것 같지 않지만 과거 활용형을 취하고 있다. (3나)의 철수가 내일 탁구를 치는 행위는 분명히 발화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현실과 언어 형태 사이에는 1:1의 대응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시제 형태라고 해서 반드시 시간과 관련되는 의미만 표시하지는 않는다. (1다)의 '치겠다'에는 화자의 사건 발생에 대한 강한 추측이 파악되고, (3나)의 '친다'에는 화자의 사건 발생에 대한 강한 확신감이 표현되어 있다. 또(3가)의 '섰다'에는 동작의 완료라는 행동의 양상이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시제 형태는 시간을 구획하는 지시적 기능을 띠고 있지마는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기능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4) 가. 지구는 태양을 돈다.
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4)의 예들은 현재 시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현재 시제의 의미를 주기가 어렵다. (4가)의 '돈다'가 현재 시제가 되려면 '돌았다, 돌겠다'와 계열 관계(대립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데, 지구가 과거에는 돌았지만 현재에는 돌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이 있기가 어렵다. 또 (4나)가 현재 시제가 되려면 인간이 과거에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우리들의 세계관적 인식론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는 시제 형태가 지시성이 결여된 상황에 쓰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도 지시적 기능이 희박하다.

(5)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 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썪였다.

위의 글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지문의 일 절이다. 지문(地文)이란 작자가 작품의 내용이나 배경을 객관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글이다. 이러한 종류의 글도 '투르르거린다, 투르르거리겠다...'와 같은 계열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지시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시제는 '현재/과거/미래'의 삼분법을 취하는 것이 전통적 방법이지만 최근에는 '과거/비과거'의 구분을 시도하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 과거 형태는 뚜렷한 면 이 많지만 현재 및 미래 시제의 형태는 그렇지 못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전통적인 삼분법에 따라 국어의 시제 전반을 개관하기로 한다.

<현재 시제>
    국어의 현재 시제는 많은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해라체의 평서형과 감탄형에서 어느 정도 분명한 형태가 확인된다.

(6) 가. 간다/먹는다.
나. 가는구나, 먹는구나.

(6가)는 '갔다, 먹었다 ; 가겠다, 먹겠다'와 계열 관계를 이루므로 'ㄴ/는'이 독립된 형태소로 분리된다. (6나)는 (6가)와는 달리 받침이 있고 없음에 구애되지 않고 항상 '는'으로만 나타난다. '는'의 자리에 '었, 겠'이 나타날 수 있으니 독립된 형태소임에 틀림없다.
    해라체의 평서형과 감탄형을 제외한 환경에서는 특별한 형태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7) 가. ① 가네, 먹네 ② 가오, 먹으오 ③ 갑니다.
나. 가느냐, 먹느냐 ; 가는가, 먹는가 ; 가오, 먹으오 ; 갑니까, 먹읍니까.

(7가)는 하게체 이상의 평서형이다. ①③은 하게체와 합쇼체인데 표면상으로는 '네'와 '니'가 현재 시제의 형태소인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었, 겠'이 이들 어미 앞에 놓이기 때문이다. 곧 '먹었네, 먹겠습니다.'가 된다. ②는 하오체인데 이것도 '가겠소, 먹었소'가 된다. (7나)는 해라체로부터 합쇼체에 이르는 의문형이다. 이들도 '가겠느냐......먹었습니까'와 같이 '겠, 었'이 '느, 니'를 대치할 수 없으니 현재 시제 형태소가 분리되지 않는다. 위의 '느, 니'를 가진 어미들은 시제 형태소로 보기보다는 서법 형태소로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편리하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회상법과 일정한 계열 관계를 이루고 있다.

(7') 가. 가데, 먹데 ; 갑디다.
나. 가더냐, 먹더냐 ; 가던가, 먹던가 ; 갑디까, 먹읍디까.

(7)과 (7')의 예를 비교해 보면 국어의 시제는 서법 형태소를 발판으로 하여 표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어의 현재 시제 형태가 표시하는 기능은 다른 언어와 비교할 때 크게 다른 점이 없다. (1가), (3나), (4)의 예를 다시 가져온다.

(8) 가. 철수는 지금 탁구를 친다.
나. 철수도 내일 탁구를 친다.
다. 지구는 태양을 돈다.
라.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8가)는 사건시와 발화시가 일치할 때 쓰인다. 현재 관련의 시간 부사 '지금'이 쓰인 점에 의해서도 그런 사실이 명백하다. (8나)는 사건시와 발화시가 어그러진다. 이 문장의 시제가 미래가 되는 것은 미래 관련의 시간 부사 '내일' 때문이지만 화자의 사건 발생에 대한 확신이 수반될 때는 미래의 일을 표시할 때 현재 시제형이 쓰일 수 있다. (8다, 라)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 동작의 반복이나 보편적 명제의 표시에 현재형이 쓰이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엄격한 의미의 시제라고는 할 수 없으나 시제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명제가 지닌 보편적 성질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문장에는 '항상, 원래' 등의 부사가 함께 쓰일 수 있다.

<과거 시제>
    과거 시제 형태소는 현재 시제에 비하면 그 형태가 매우 뚜렷하다.

(9) 가. 보았다, 먹었다, 공부하였다.
나. 보았었다, 먹었었다, 공부하였었다.

(9가)에서는 '본다, 먹는다, 공부한다'와 비교하면 '았, 었, 였'이 독립된 형태소로 분리되어 나온다. '았'과 '었'은 어간의 모음의 종류에 따라 선택되므로 서로 음운론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였'은 특수한 어간 '하' 아래 쓰이므로 제약 조건은 형태론적이다. (9나)에서는 '았었, 었었'이 식별된다. 이 형태는 앞의 '았, 었'에 '었'이 덧붙어서 형성된 것으로 일종의 복합 형식이라 할 만하다. 현재 시제는 특수한 몇 개의 어미에 국한하여 나타나지만 과거 관련의 형태들은 명령이나, 약속 및 의지와 관련된 어미를 제외하고는 모든 어미에 다 나타난다.

(9') 가. 갔다, 갔느냐, 갔지만, 갔던...
나. 갔었다, 갔었느냐, 갔었지만, 갔었던...

과거 시제 형태소 '었'은 여러 가지 기능을 띠고 있다.

(10) 가. 철수는 어제 탁구를 쳤다.
나. 영철이는 지금 자리에서 섰다.
다. 너 앞으로 외가에는 다 갔다.

(10가)는 사건시가 발화시 이전이므로 과거 시제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시제의 기능은 과거 관련의 시간 부사 '어제'가 쓰임으로 하여 더 분명해 진다. (10나)는 과거 시제 형태소가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관련의 시간 부사 '지금'이 어울려 있다. 사건시와 발화시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인 것이다. 이 때의 '섰다'는 '서 있다'로 바꾸어 쓸 수 있는데 이런 경우는 시제라기보다는 동작상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10다)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표시에 '었'이 쓰였으니 역시 사건시와 발화시가 일치하지 않는다. 앞으로 외가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반어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화자의 강한 확신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제라기보다는 서법의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11) 가. 나도 시내에 살 적에는 자주 들렀었다.
나. 철수는 국민학교 때는 축구 선수였었다.
다. 영철이는 아까 자리에서 섰었다.

(11가)는 현재와 대비하여 과거의 상황이 대조적임을 표시하고자 할 때 흔히 쓰인다. 요즘은 교외로 이사를 와서 자주 찾지 못하지만 시내에 살 적에는 자주 들렀음을 강조하는 의미가 파악된다. 이 경우 '들렀다'로 쓸 수 없는 바 아니나 '었었'에 비하여 대조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대조나 단절의 의미를 표시하는 것은 덧붙은 '었'에 있다. '었었'의 의미는 과거 사건과의 대조 내지는 과거 사건의 단절이라고 할 것이다. 대조나 단절은 화자의 태도에 관련되는 서법적 의미, 흔히 말하는 양태성(moda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었었'의 이러한 기능은 동작성을 강하게 띤 동사에 자주 쓰이고 형용사나 서술격 조사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쓰이는 일이 있다면 (11나)와 같은 예가 있을 수 있는데 현재 상황과 대조하는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바 아니나 주로 문장체에서 오래된 과거의 일을 표시할 때 많이 나타난다. (11다)는 '서 있었다'로 바꾸어 쓸 수 있는데 대조나 단절보다 과거에 있어서 동작의 완료된 양상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래 시제>
    미래 시제의 형태에는 '겠'과 'ㄹ'어미 내지 'ㄹ'로 시작되는 어미 등 그 계통이 많다.

(12) 가. 겠
나. ㄹ것이다, ㄹ까, 리라

(12가)의 '겠'은 중세 국어에는 없던 것으로서 근대 국어에 형성된 미래 시제 형태이다. (12나)의 'ㄹ 것이다'는 미래 관형사형 'ㄹ'에 의존 명사 '것'이 합친 것인데 현대 국어에서 미래 표시에 많이 쓰이고 있다. 'ㄹ까'는 의문형에 나타나는 미래 표시의 형태이며 '리라'는 현대 국어에서는 주로 문장체에 국한하여 쓰이는 미래 표시 형태이다.
    미래 시간은 미지의 세계에 속하므로 가능성, 예측, 의도 등 여러 가지 양태성이 파악된다.

(13) 가. 내일도 눈이 오겠다.
나. 그러면 저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다. 그 정도 문제라면 나도 풀겠다.

(13가)는 발화시 이후인 내일에 눈이 온다는 사실을 예측하는 것이다. 눈이 온다는 사실은 미래에 속하지만 이와 함께 여기에는 어떤 근거에 의지할 화자의 강한 추측의 의미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문장에는 '틀림없이'와 같이 화자의 확신성과 관련되는 부사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러한 기능의 '겠'이 과거 시제와 어울리면 추측의 의미만 파악된다.

(13가') 어제도 눈이 왔겠다.

(13가')와 같은 쓰임에 근거하여 '겠'을 순전히 양태성의 각도에서 처리하는 일도 없지 않다.
    (13나)에는 미래 시제와 함께 의도의 의미가 파악되고 (13다)에는 미래 시제와 함께 가능성의 의미가 나타난다. 이러한 기능의 '겠'에는 '었'이 결합될 수 없다.

(14) 가. 내일도 비가 것이다.
나. 부산에도 눈이 올까?
다. 내일은 비가 그치리라.

(14가)는 구어체에서는 일반적으로 'ㄹ께다'로 줄여 쓰는 일이 많다. 사건시가 발화시 이후가 된다는 점에서 미래 시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나 '겠'과 마찬가지로 추측의 양태성이 수반된다. '겠'보다는 근거가 약할 때 쓰인다는 차이점이 있다. (14나)도 비슷한 의미가 파악된다. 미래 시제와 함께 추측의 양태성을 줄 수 있다. (14다)와 같은 형태는 주로 문장체에 나타나는 일이 많은데 앞의 두 예에 유추하여 그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 (14)의 경우도 (13)과 같이 과거 시제의 '었'과 결합되면 시제의 기능은 소멸되고 양태성만 나타난다. 그러나 의도, 가능성을 뜻하는 경우는 '었'과의 결합이 허용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세 종류의 세제는 발화시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시제를 절대적 시제라고 한다. 시제 가운데는 사건시를 기준으로 설명되는 시제가 있다. 이러한 시제는 관형사형에서 주로 나타난다.

(15) 가. 어제 동대문 시장은 추석장을 보는 주부들도 붐볐다.
나. 지금까지 원고가 이천 장이 넘는다.
다. 아직도 빨아야 옷이 많다.

(15가)의 '보는'은 발화시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 시제가 된다. 주문장의 시제가 발화 이전이므로 (~참조) '보는' 또한 과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는'의 시제를 주문장의 시제 '붐볐다'와 관련시키면 현재가 된다. '보는'의 사건시와 '붐볐다'의 사건시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곧 과거에 있어서의 현재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15나)의 '쓴'은 현재에 있어서의 과거, (15다)는 현재에 있어서의 미래가 된다. 이렇게 주문장의 사건시에 의존하여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시제를 상대적 시제라고 한다.

Ⅲ. 동 작 상
    국어 문법 연구에서 동작상은 크게 인식되지 못하였다. 현상 자체를 인식하고는 있어도 넓은 의미의 시제 가운데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동작상은 흔히 상(相)으로 부르고 있으나 이 곳에서는 학교 문법의 체계에 따라 동작상을 채택하기로 한다. 동작상은 원래 슬라브 어 문법에서 동작의 완료와 비완료를 표시하는 문법 형태에 대해 쓰여 왔다. 슬라브 어학에서 동작상 연구가 활발하고 레닌그라드 동작상 학파(Leningrader aspektologische Schule)까지 형성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언어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다른 언어에도 동작상이 확인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용어의 사용 범위는 넓어져 갔고 동사를 비롯하여 개별 어휘가 갖는 의미상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이 말이 쓰이게 되었다. 이 곳에서는 개별 어휘가 갖는 동작의 양상은 제외하고 활용형에 의해 표시되는 동작의 양상만을 동작상이란 이름 아래서 다루기로 한다.
    국어의 동작상은 보조적 연결 어미와 보조 동사의 결합에 의해 표시되기도 하고 연결 어미에 기대기도 한다.

(16) 가.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다.
나. 이제야 강물이 줄어 가는구나.
다.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었다.

(16가)는 보조적 연결 어미 '고'와 보조 동사 '있다'가 결합해서 된 진행상의 형태이다. '고 있다'가 동작성을 적극적으로 띤 동사와 결합되면 진행의 양상을 표시한다. 진행상은 '는 중이다, 는 중에 있다'에 의지하기도 한다.

(16가') ......먹는 중이다/먹는 중에 있다.

진행상이 처소격 형태를 띠는 것은 많은 언어에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고 있다'와 '는 중이다'의 차이점은 전자가 상태성을 띤 '알다'와 같은 동사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데 대해'는 중이다'는 그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16가'') 나도 그 곳을 알고 있다/*......아는 중이다.

(16나)는 보조적 연결 어미 '어'에 진행의 보조 동사 '가다'가 붙은 것으로 화자가 바라는 방향으로 동작이 진행되는 것을 바랄 때 쓰인다. '오다'는 '가다'와 짝이 된다. (16다)는 상대적 시제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일도 없지 않으나 완료상의 '고서', 예정상의 '고자'와 계열 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동작상의 형태로 간주한다. (16 가, 나)는 현재 진행상, (16다)는 과거 진행상이 된다.

(17) 가. 철수도 지금 자리에서 서 있다.
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라.
다. 밥을 먹고(서) 산보를 나갔다.

(17가)의 '서 있다'는 (10나)를 바꾸어 쓴 것인데 서는 동작이 끝나서 그 결과가 눈앞에 남아 있다. 곧 완료의 동작상이 표시되어 있다. '어 있다'가 붙어서 완료상이 나타나는 동사에는 '앉다, 서다, 뜨다, 차다(滿), 마르다' 등의 결과성을 띤 동사와 피동사가 있다. (17나)의 '어 버려라'도 완료상인데 여기에는 부담을 제거한다는 양태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계열의 완료상 형태에는 '어 지다, 어 두다, 어 놓다, 어 내다, 고야 말다'가 있다. (17다)의 '고서'는 동작성을 적극적으로 띤 동사에 붙어 완료상을 표시한다. (16다)와 비교하면 기능상의 특수성이 분명해 진다.

(18) 가. 저도 회의에 참가하게 됩니다.
나.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다. 저는 함께 가려고 하였습니다.

(18가,나)는 보조적 연결 어미 '게'에 보조 동사 '하다, 되다'가 붙어 예정상을 표시하는 것이다. (18가)는 현재 예정상을, (18나)는 과거 예정상을 각각 표시한다. (18다)는 연결 어미에 의한 예정상의 표시이다. (16다), (17다)와 비교하면 과거 예정상임이 분명하다. 차이점은 의도와 같은 양태성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어의 동작상에는 진행상, 완료상, 예정상이 있다. 이러한 부류는 시제의 삼분법에 대체로 병행된다.

Ⅳ. 휘 갑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시제, 동작상, 서법과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기로 한다.

(19) 철수는 심부름을 가고 있었습니다.

(19)는 시제로는 과거이고 동작상으로는 (과거)진행상이다. 서법으로는 직설법인데 이는 회상법 '가고 있었습니다'와 계열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곧 직설법 과거 진행상이다.

(20) 가. 나도 그림을 그린다.
나. 철수도 그림을 그리느냐?
다. 철수도 글씨를 썼다.
라. 영수도 그림을 그리겠다.

(20가)의 '그린다'는 시제로는 '그렸다'와 대립하여 현재를 표시하나 동작상으로는 진행상이다. (나)의 '그리느냐'는 '그리더냐'와 대립하여 직설법이 되나 시제로는 현재 시제, 동작상으로는 진행상이 된다. (다)의 '썼다'는 '쓴다'와 대립하여 과거 시제를 표시하나 동작상으로는 완료상이다. (라)의 '그리겠다'는 '그린다'와 대립하여 미래 시제를 표시하나 동작상으로는 예정상이다. 이렇게 시제도 동작상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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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國語 文法의 硏究」, 塔 出版社.
南基心(1978), 「國語 文法의 時制 問題에 關한 硏究」, 塔 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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