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일본의 차자 표기법

康仁善 / 서울대 강사, 言語學

1. 들어가는 말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던 중국의 문자를 이용하여 문자 생활을 영위하고, 한자를 정착시켜 온 과정은 이웃 나라 일본의 것과 병행적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에 <千字文>과 <論語>를 소개한 것이 百濟人王仁이었으며, 수백 년에 걸쳐 그들에게 종교, 제도 및 각종 문물을 전해 주는 교량적인 역할을 해온 소위 도래인이 대부분 우리의 선조들이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1) 異民族의 文字를 이용하여 자기 민족의 언어를 기록하고자 한 점, 그리고 漢譯佛經과 經書 등을 비롯한 漢籍을 이해 습득하여 문화적 상승을 꾀한 점 등은 우리와 同一한 조건이었다. 이 같은 노력은 越南에서도 볼 수 있으나 그들의 언어 자료는 14세기를 거슬러 올라가기 힘든 형편이므로 우리의 문자 생활을 돌이켜 보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8세기 이후 계속해서, 언어 자료가 우리에 비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으며 그 표기 체계 자체의 단절도 겪지 않고 오늘날까지 있어 온 점, 또한 중국어와 달리 우리말과 어법이 같은 점 등은 자료가 영성한 우리의 차자 표기법을 더듬어 보는 데에 매우 유리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현재에도 정리 연구할 자료가 산적해 있는 일본의 경우, 古代 奈良 時代의 국어 자료로서 萬葉集의 가요 4,516수, 日本書紀의 가요 128수, 古事記에 112수 및 기타 등등이 있음에도 불구아고 자료가 적어서 그 당시의 언어 상태를 잘 알 수 없다고 하고 있는 형편이다.

2. 개관
    먼저 일본어의 차자 표기 체계를 통시적으로 개관하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리값을 그대로 옮기는 고유 명사 표기에서 시작하여 문법 의식이 싹트면서 동사 앞에 목적어를 쓰고 나아가 중국어에는 없는 문법 형태소(조사, 활용 어미, 존대법 어미)를 표기하는 일본식 한문체, 소위 변체 한문이 쓰이게 되었다. 또한 5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요를 100여 년에 걸쳐 편집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가집 萬葉集에 실린 가요의 차자 표기 체계도 산문류의 표기법 발달과 병행적인데, 각 단계의 것이 混質的으로 들어 있고 기교적인 다양성도 보이나, 뒤이어 생기는 宣命體를 암시하는 표기도 존재한다. 이상은 우리 국어의 고유 명사 표기, 소위 誓記體(즉 변체 한문), 吏讀文 그리고 鄕札과 궤를 같이 한다.
    표기법에 쓰이는 用字 또한 漢字의 音과 訓이 각각 讀字와 假字로 쓰여, 音讀字, 訓讀字와 音假字, 訓假字가 있는데(2) 후자의 音假字와 訓假字를 萬葉假名(만요가나)라 한다. 이 만요가나를 草書化(즉, 흘림체로)하여 간략히 한 글자가 히라가나(平假名)가 되고 또 다른 필요에서 만요가나의 획을 생략하여 쓴 것이 가타카나(片假名)이다. 9세기 중엽 정도에 성립된 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정제·발전되어 내려와 현재까지 일본 문자로서 한자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
    본고에서는 8세기를 중심으로 그 전후 시기의 가나의 쓰임을 가능한 한 문헌과 자료에 의해서 살펴보고자 한다.(3)

3. 7세기 이전
    일본인이 한자를 처음 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직도 진위가 논란이 되고 있는 서력 57년의 「漢委奴國王」이라 새겨진 金印(福岡市立 美術館 소장), 그리고서 시대가 한참 떨어져 東晋太和 4년(369 년)으로 추정되는 「七支刀」(天理石上神官 소장)및 3세기 중엽으로 보이는 「方格四神鏡」(奈良縣 출토)「人物畵象鏡」(東京狛江市 출토) 등의 銘文이 있는 유물이 있고, 「宋書倭國傳」에 倭王上表文이 있으나 이는 正格 漢文으로 당시의 일본인의 손에 의한 것인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고유 명사 표기>
    5·6세기의 유물들에는 人名이나 地名이 音假字로 쓰이기 시작한다. 가장 오랜 것으로는 熊本縣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刀劍의 銘文인데, 「奉□典曹人, 名无□弓」「作刀者, 名伊太加」의 인명 「无□弓」의 '旡'는 '无'의 誤字로 보고 다음 자는 加로 추정한다, 이 无加弓와 伊太加는 表音的으로 적은 것이다. 또한 1978년 9월에 발표되어 국내 학계에도 소개가 되었던 埼玉縣稻荷山古墳출토의 太刀銘 115자는 전체는 漢文이나 「意富比蛫」「乎獲居」「獲加多支鹵」등은 인명, 「斯鬼」라는 地名, 「獲居」「足尼」등은 位名으로 1자 1음의 만요가나로 쓰여진 것이다.
    이러한 表記法은 中國 史書의 기록인 「卑彌呼」「邪馬臺(壹?)」(魏志倭人傳)보다는 일본에 전래된 漢譯 佛經에 기재된 「阿若憍陳如」「摩訶迦葉」「羅睺羅」등의 人名과 지명 「阿羅漢」「陀羅尼」(鳩摩羅什譯, 妙法蓮華經, 406년) 등의 표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표기에 쓰인 만요가나는 전부 1자 1음의 음차자이며, 그 字音 가운데 「意(0)」「宜, 奇(ga)」「己(kӦ)」「里(rӦ)」와 같이, 現在 傳來의 漢字音인 吳音과 漢音으로 설명이 안되는, 古層의 漢字音을 보이는 것이 있다.

4. 7세기
    <변체 한문>
    7세기에 들어서는 상당수의 木簡과 16여 점의 遺文이 국어 자료로서 들어진다. 人名과 地名이 音假字에 의하여 表記된 점은 앞 시대와 다름이 없으나, 日本語 表現力의 확대로 소위 和化 漢文, 변체 한문이 나타난다. 실제의 예는 적은 편으로 2점에 불과한데, 法隆寺藥師佛光背銘(607년 혹은 667년)에는 존대법의 표현인 「大御身」, 「大御病」및「勞」, 「願」「欲」「崩」「受」등이 나타나고, 목적어가 동사의 앞에 와 정격 한문과는 순서가 뒤바뀐「藥師像作」이 나타난다. 上野國山名村碑(681년)에는 「定」라는 존대 표현이 보인다.
    이것은 국어 자료의 서기체 표기를 생각나게 한다. 신라화된 한문으로, 壬申誓記石(552년 또는 612년)에는 「前」「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등등 목적어가 동사의 앞으로 가는 우리말 어순이 보인다. 5세기 초(414년)의 廣開土王碑에도 「我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4)에서 '鄒牟王'은 正式 漢文으로서는 앞구에도 뒷구에도 연결이 되기 어려운, 우리말식의 표현이다. 높임법의 '賜'는 鄕歌 표기에서 많이 보인다. 금석문으로서는 中原高句麗碑(475년)에 「來節敎賜」를 위시한 예가 있다.
    人名과 地名 表記에 쓰인 萬葉가나는 1자 1음의 음가자였고, 和訓을 빌린 訓假字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古文書>
    인명·지명의 표기가 주로 나타나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한 문서류의 戶籍帳에 약간의 略體字와 訓假名이 많이 쓰이게 된 점이 특징이다.
大寶 2년(702년)의 戶籍帳에는, 「 (tu), (Φe), (Φë),ム(mu)」등의 略體 假名과 「田(ta), 名(na), 眞(ma), 八(ya), 見(mi), 身(mï), 衣(so)...」등의 訓假名이 나타나는데, 전반적으로 획수가 적고 平易한 字母가 쓰였다. 새로 등장한 자모도 있어 「於, 志, 蘇, マ, 萬, 美, 也, 流, 爲」등은 다음의 奈良 時代의 用字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百濟 시대의 기와(5)에 도장으로 압인한 것에 제작 연도나 제작자의 이름 또는 그 사람의 속한 마을 등을 간단한 한두 자로 나타낸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上卩 」「中卩 」처럼 「部」의 약자인「卩」(日本 戶籍帳에)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자가 標記石에도 나타난다. 이는 우리의 경우에도 실용적인 목적의 표기법이 보다 생활에 밀착되어 자형도 약체나 홀림체가 많고 音假字외에 訓假字를 많이 썼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해 준다.

5. 8세기
    나라 遷都(平城京, 710년)부터 교토 遷都(平安京, 794년)까지를 나라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엔 이전의 표기법이 발달되어 완성된 면모를 보인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7세기까지의 萬葉가나는 거의 인명·지명을 표기하여 그것이 한문 가운데 삽입될 뿐이고, 萬葉가나로 일본어 문장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8세기에 들어서는 語句와 文章이 비록 韻文의 歌謠가 주이지만, 萬葉가나만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써 古事記, 日本書紀, 萬葉集과 같은 重要한 文學 作品을 낳을 수 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 시대의 기본적인 문자 생활은 한문에 의해 이루어 졌고, 순한문식 문헌이 주류를 이루었다.

<古事記>
    和銅 5년(712년) 太安萬侶가 天武天皇 명을 받들어 편찬한 3권의 書籍인데, 序文은 正格 漢文이나 本文은 일본식 한문이다. 당시까지 없었던 새로운 표기 방법은, 산문의 일부를 萬葉가나로 적는 것이다.

次國稚如浮脂而, 久羅下那州多施用弊流之時流字以上十字音(上卷);萬葉假名에 卷點.

이의 기록자인 오오야스마로(太安萬侶)가 序文에서 「......是以, 今或一句之中, 交用音訓, 或一事之內, 全以訓錄...」이라 하였다. 表音的 표기와 表意的 표기가 있는데 양자의 장단점이 있어, 이같은 표기 방법 즉 音과 訓을 交用하는 방법을 택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漢語의 訓讀字만으로는 적절히 표기할 수 없는 語句나 誤讀의 우려가 있는 말을 정확히 표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古事記내의 歌謠는 1자 1음의 만요가나로 적고 있으며, 漢字의 訓注를 만요가나로 적어서 일본어식 읽기를 지시하고 있다.

  二   一 一               一 訓高下天云
阿麻, 下效此
(上卷)
天地初發之時, 於高天原成神, 名天之御中主神
-천지가 처음 열릴 때, '다카마로하라'에 나신 神의 이름은 '아메노미나카누시'신 高 아래의 天은 訓으로 이에 따른다.
아마로 읽고, 아래도

수록된 가요(총 112수)의 표기는 다음가 같은 체제이다.

夜久毛多都, 伊豆毛夜弊賀岐, 都麻碁微爾, 夜弊賀岐都久流, 曾能夜弊賀岐袁(가요 1번)(八雲立つ, 出雲八重垣, 妻籠みに, 八重垣作る, その八重垣を)(6)

여기에 쓰인 만요가나의 音가나는 訓注와 歌謠에 쓰였으며, 訓가나는 人名과 地名에 병용이 되었는데 사용된 字母는 비교적 간단한 것들이다. 도표로 보이면 다음 장의 표와 같다.
    앞에서 본 大寶戶籍帳에 없는 글자인「迦, 弊, 微, 袁」등은 획수가 비교적 많은 글자이다. 이 가나 역시 佛典의 다라니에 쓰인 字母를 원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古事記 찬술 당시의 寫經으로서 다라니를 가진 것으로는 「金剛場陀羅尼經」(686, 河內國 志貴評의 寫本)이 있으며, 唐初에 漢譯된 「金光明最勝王經」(703, 唐 義淨 역)이 있다. 후자의 경우, 조사에 의하면, 총 자모 152字 가운데 古事紀의 자모 19종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日本書紀는 39종이나 보인다.

(◦표는 濁音<有聲音> 표기) 築島裕(1981) 37페이지 수록
良羅 麻摩 波     婆◦ 多當他陀◦ 佐沙奢◦邪◦ 賀◦何◦詞
迦加可珂
 
  微味
美彌
婓肥   備◦
比卑   毘◦
爾 儞 知智治遲◦地◦ 自◦
斯志芝色士◦
貴紀   疑◦
岐伎棄吉藝◦
 
&bsp; 流留琉 牟无 布賦   夫◦ 都     豆◦ 須洲洲受◦ 久玖   具 字汙
 

閈   倍◦
弊幣辨◦
泥尼禰 弓帝傳◦殿◦ 勢世   是◦ 氣   宜◦
祁 下◦牙◦
亞愛
袁遠
路盧漏
與余豫

煩◦
富本菩◦蕃◦番◦
能乃
怒努
登等杼◦騰◦騰
斗刀度◦
曾   叙◦序◦
蘇宗
許   碁◦其◦
故古高胡◦
淤意於

<日本書紀>
    720년에 撰進된 史書 日本書紀 30卷은 거의 순수한 漢文(7)이나 語句의 訓注가 상당히 많다.

瓊玉也
此曰努
 
以天之瓊 矛, 指下而探之(神代紀上)(瓊은 玉이라 여기서는 '누'라 한다)

      二
小男, 此云
    一
二烏等孤
薏哉, 遇可義小 男焉 (神代紀上)(小男, 여기서는 '워토코'라 한다)

그리고 128수의 歌謠에도 만요가나가 쓰였다.

夜句茂多菟, 伊弩毛夜覇餓岐, 菟磨語昧爾夜覇餓枳菟俱盧, 贈迺夜覇餓岐廻(歌謠1번)

위에서 보인 古史記의 가요 표기와 비교해 보면, 동일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획수가 많고 복잡한 字母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가나로 쓰인 자모의 수는 524자로 古事記의 4배에 이르며,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잘 쓰이지 않는 字가 대부분인데 이는 기록에 위엄을 부여하기 위한 장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出雲'의 표기에 쓰인 '弩'는 'du'의 표기로, 소위 漢音(8세기의 중국 장안음을 배경으로 한 일본 한자음, 舊音인 吳音과 대립적)인데 이 같은, 새로운 한자음이 적극적으로 이용된 양상은 卷에 따라 다르다. 森(1977)에 의해 밝혀진 대로 卷 14~19, 卷 24~27(소위 α군)은 주로 새로운 한자음에 기초한 字母를 균질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萬葉集>
    최초 5세기경의 노래부터 최후 759년의 노래까지 7세기 중엽부터 100여 년에 걸쳐 시대에 따라 수명의 편자에 의해 덧붙여져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20권의 만요슈에는 총 4,516수(학자에 따라 셈이 다르나 대개 國家大觀에 따름)의 가요가 수록되어 있다. 그 체제는 漢時集의 漢時 부분을 和歌로 바꿔 넣은 형식을 취하였는데 그 표기는 천차만별로 만요가나의 사용 상태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訓讀字만으로 된 부분과 1자 1음의 가나로 된 부분이 있는데, 후자는 記紀가요를 연상시키고 전자는 古事記에 보이는 일본식 한문과 類를 같이 한다.

。山超而 遠津之濱之......(萬 1188)
(산넘어 먼나루의 백사장의 ......)
。余能奈可波 牟奈之伎母乃等 志流等伎子 伊與余麻須萬須 加奈之可利家理(萬 793)
(세상은 공허한 것이라고 아는 때야말로 더더욱 슬플 것이구나)(8)

그리고 위의 양자를 혼합한 형태가 존재하는데, 訓讀字 뒤의 어미에 가나를 첨기하는 것과 1자 1음 가나 표기에 訓讀字를 섞어 쓴 것이다. <가나에 _ 표시)

◦ 白雲之 多奈引山之 高ヶ 吾念妹乎 將見因毛我母(萬 758)
◦ 御苑布能 百木乃宇 落花 安米爾登妣安我里等敷里家牟(萬3906)

用字의 面에서도 매우 복잡한데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訓讀字
명사 'ハナ (꽃)'을 '花로, 동사 'サク(피다)'를 '咲'로, 부정 어미 'ズ'를 '不'로, 의문 조사 'カ'를 '歟'로, 반어 의문 조사 'カモ'를 '哉'로, 추량 어미 'ム'를 '將'으로 표기.
2. 音假名
1자 1음 가나:余(yo), 能(nö), 等(tö), 家(kë)......
1자 2음 가나:梅乃散(ramu), 顇相(sanu), 奧名颯(saøu), 越乞(otikoti)
1자 1음이 主이고 1자 2음이 가나는 萬葉集 이전, 이후에 거의 없는 것이며, 이 글자들은 주로 1음절의 略音字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3. 訓假名
①1자 1음절:皁死耶(mo), 복잡한 획수의 (to), 煮(ni), 湯(yu)도 있다.
②2자 1음절:五十母不宿二(i)
③1자 2·3음절:相見鶴鴨(turukamo)
④2·3자 2음절:八十一喚鷄(kuku, tutu)
②이하는 기교적인 표기로서(9) 당시의 일반적 표기 경향이라기보다는 편자의 취향일 것이다.

文體의 면에서, 訓讀字와 가나의 혼합 표기 가운데 훈독자를 주로 쓰고 문법 형태소의 가나 표기를 생략한 형식(cf.p.98)과 그렇지 않은 형식은 略體 非略體로 불리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古體와 新體에 해당한다.
    또한 萬葉集은 20권이 각 권마다 표기법이 특색이 있어, 각각의 시대적 배경과 작자·편자의 성격을 생각하게 한다.(10) 복잡한 표기는 작위적이며 기교적인데 특히 5권에는 音가나와 訓讀字가 겹친 예가 많다. 「鳥梅」(ume, 매실),「河波」(kaΦa,강)「怨之美」(woshimi, 원한) 등 우리의 향가 표기의 말음 첨기 즉 「夜音」(밤), 「心音」(마음)을 생각하게 한다.(11) 그리고 제5원에는 한문 훈득(한문 새김)의 특유한 낱말들이 포함되어 있음이 지적되었다.

<風土記와 古文書>
    일본의 각 지방(~國)에 관한 地方誌인 風土記가 나라 시대에 편찬되어 일부 남아 있는데, 본문은 한문이며 그 속에 訓注와 歌謠에 만요가나가 삽입되어 있는데, 본문은 한문이며 그 속에 訓注와 歌謠에 만요가나가 삽입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여기에 쓰인 가나는 1자 1음절의 음가나로 평이하고 자획이 적은 것이 많아서 記紀萬葉의 화려한 用字와는 대조적이다. 이점은 古文書류와 통하는 점이다.
    나라 시대의 古文書로 현존하는 것은 주로 正倉院 文書인데, 計帳, 正稅帳, 宣命案, 紙背書狀 따위에 가나가 들어 있다. 앞 시대의 帳籍에서는 순전히 고유 명사에만 나타났던 萬葉가나가 이 시대에 들어서는 本文 중의 사물 이름 즉 보통 명사, 난외의 주 그리고 漢字는 大字로 조사·어미류는 小字인 만요가나로 쓴 宣命書, 나아가 全文을 만요가나만으로 쓴 문서까지 나타난다. 古文書는 실용적이고 私的인 성격때문에 진보적으로, 用字의 면에서 단순한 자획에 일정 수의 자모를 사용하고 또 訓假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 고문서의 표기字(만요나라)가 平가나 片가나의 직접적인 원류가 되는 점도 흥미롭다. 또 음가나와 훈가나 交用이 古事記에서도 많고 자유로이 됨이 특색이다.

<기타>
    752년 文室眞人 智努가 지는 종교적 찬가인 佛足石歌碑(奈良 藥師寺 소재)의 21수의 佛足石歌는 1자 1음의 가나 표기로 되어 있으나 자획이 많은 자가 사용되었다. 772년 藤原浜成가 쓴 和歌書인 歌經標式에도 한문의 행간에 노래가 1자 1음의 만요가나로 쓰였으나 복잡하고 특이한 자들이 쓰였다.

6. 9세기 이후
    平安 時代에 들어 萬葉가나는 漢文으로 된 역사서, 율령, 불전, 유교 전적, 의학서, 사전류 등에서 일본어의 表音 表記만이 萬葉가나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단순한 前時代의 계승만이 아니라 새로운 字母가 쓰이게 되어 그것이 平가나와 片가나의 字源으로 되었으며, 11세기에 이르러서는 漢文撰書에 片가나가 혼용되기에 이른다. 平가나는 주로 여성층에서 특히 和歌를 적는 데 이용되어「古今和歌集」(913~4년경)같이 全文 平가나의 책까지 나왔다.

<宣命書>
    訓讀의 漢字는 大字로, 문법 형태소를 나타내는 만요가나는 小字로 표기하는 형식의 宣命書는, 비록 12세기부터 만요가나가 草가나, 平가나로 대체되는 예도 있으나 후세에까지 계속되어 왔다. 宣命은 원래 임금의 勅을 전달하는 글인데 大字, 小字로 쓰는 독특한 문체여서, 여기에서 宣命書(宣命 쓰기법)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읽는 祝詞(노리토)도 형식이다.

...從五位上百濟王敬福伊部內少田郡仁黃金出在奏弓獻(12) (續日本紀 宣命 第12詔)

伊(i), 仁(ni), (te)가 小字의 萬葉가나로 쓰였다. 그러나 藤原宮 유적에서 발굴된 木簡(7세기 말~8세기 초의 유물) 가운데 宣命의 案文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쓰인 만요가나(止, 乎자)는 훈독 한자와 똑같은 크기를 하고 있고 少字는 없다.

(表)   _____ 詔大□□諸聞食
(裏)   _____ 御命受食國之內憂

이것은 우리의 吏讀文과 다름이 없다. 757년의 正倉院 文書 안의 宣命案이나 758년의 宣命에는 이미 小字로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宣命書란 8세기 중엽에 완성된 일본식의 표기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宣命에 나타나는 주격 조사·서술격 조사 '伊'는 우리말의 '이'와 同形인 점, 그리고 小字로 쓰인점 萬葉假名字와 비록 후대의 자료이지만 우리의 吏讀字와의 共通例(イ←伊, ヤ←也, タ←多) 등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小字의 표기가 원래 한문 훈독의 토를 다는 식에서 왔을 것으로 보면, 우리의 한문 읽기법과의 관련성도 생각해 볼 만하다.

7. 전망
    고대 국어의 차자 표기법의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日本의 나라 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만요가나의 발달상을 자료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각 자료의 표기는 연계성을 가지며, 자료의 성격 및 목적에 따라 用字에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그 표기가 배경으로 하는 언어 체계(音韻 體系)에 관해서도 마땅히 다루었어야 했고, 또 한자음의 문제도 그러했으나 지면의 제약상 다룰 수 없었다.
    본고에서는 국어, 일본어의 한자에 의한 표현만을 다루어 왔으나, 이와 대립되는 한문의 이해·수용의 측면에서 읽기의 역사, 그리고 그것과 표기법과의 관련, 나아가 우리와 일본의 경우와의 대조 또한 앞으로의 과제로 생각된다.

8. 참고 문헌
金思燁(1983) 日本의 萬葉集, 民音社.
南豊鉉(1980) '漢字·漢文의 受容과 借字 表記法의 發達' 學術 大會 發表 論文, 精神文化 硏究院.
李鍾徹(1983) 鄕歌과 萬葉集歌의 表記法 比較 硏究, 集文堂.
大野晋(1980) 日本語の成立, 中央公論(日本語の世界 1).
築島裕(1981) 假名, 中央公論(日本語の世界 5)
春日政治(1982) 假名發達史の硏究, 著作集 1. 勉誠社.
大野透(1977) 續萬葉假名の硏究, 高山本店.
西宮一民(1979/1980) 日本上代の文章と表記, 風間書房.
北川和秀(1982) 續日本紀宣命一校本·總索引. 吉川弘文館.
森博達(1977) '<日本書紀> 歌謠にける萬葉假名の一特質', 文學 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