兪 昌 均 / 계명대 교수, 국어학
Ⅰ.
訓民正音이 創製되기 以前의 長久한 期間에 걸쳐, 우리의 文字 生活이 오로지 中國에서 借用한 漢字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음은 周知의 事實이다. 漢字의 借用이 언제부터 비롯한 것인지 正確한 判斷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여러 가지 狀況으로 미루어 三國 時代 初期, 또는 그 以前부터 이미 使用되었을 可能性이 있다. 이와 같이 漢字가 일찍부터 우리에게 借用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側面에서 檢討될 수 있다.
첫째는 政治·文化·地理的 접촉을 들 수 있고, 둘째로는 漢字 그 自體가 지닌 本質的인 特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前者에 대해서는 箕子 朝鮮 以來 빈번한 政治·文化的 교섭에서 저곳의 文字가 流入될 수 있는 可能性은 充分히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舊高句麗 版圖에서 使用된 漢字音의 例들을 보면 적어도 漢 代의 音이 아니고는 解釋하기 어려운 例들이 적지 않게 殘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地方에 있어서의 漢字의 使用이 그때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1) 後者의 경우에 있어서는 漢字는 表語 文字의 代表的인 것으로 例示되는 바와 같이, 漢字는 그 字形에서 一定한 뜻(表語性)과 음(表音性)의 兩面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根源的으로는 漢字는 文(繪畵)에서 발달한 것이기 때문에 表語性의 字形이 槪念의 象徵的 意味와 密接한 關聯性을 가지게 됨은 말할 必要도 없다. 그러나 表音性은 第二次的으로 文이 字로 발달한 다음에 結合한 것이기 때문에 音은 字와 쉽게 接合하거나 分離될 수 있는 恣義性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漢字는 다른 어떤 言語와도 쉽게 結合할 수 있는 特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漢字를 借用하는 側에 있어서는 漢字가 지닌 兩面, 卽 表語性과 表音性을 적당히 利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漢字 借用에 있어서도 이 範圍를 벗어날 수 없음은 말할 必要도 없다. 漢字 借用의 歷史에서 볼 때 처음 文章의 表現과 固有 名詞의 表記에서 그 발달의 過程을 약간 달리해서 檢討할 必要가 있다. 文章의 表現에 있어서는 現存하는 誓記文과 같이 表語性을 利用한 것으로 생각되나 차츰 吏讀나 鄕札처럼 表音性을 補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固有 名詞의 表記는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文章이 뜻의 傳達을 目的으로 하는데 대하여 固有 名詞는 音形의 表象과 傳達이 一次的인 重要性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表音性의 利用이 重要性을 가지며, 表語性은 二次的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中國 自體에 있어서는 字類의 選擇에 있어서 어느 정도 表語性도 考慮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例컨대 '朝鮮'은 '朝汕 朝仙'으로 表記되는데,(2) '鮮'을 '汕'으로 적은 '汕水'와 關係가 있기 때문이며, '仙·鮮'으로 적은 것은 風土의 아름다움에서 由來하는 것임이 分明하다. 그들은 地名에 있어서 江河와 關係가 있을 때는 '番汗, 浿水, 沛水, 樂浪(洛浪) 洌水渾彌' 등과 같이 '氵'를 취함이 一般的이다. 이러한 傾向은 人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表音을 하되 字類의 選擇에 있어서는 表語性을 考慮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3) 固有 名詞의 이러한 表記法은 借用語側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制限된 紙面에서 本格的으로 이러한 問題를 다룰 처지에 있지는 않으나, 古代 우리의 固有 名詞에 있어서 中國側의 이러한 傾向을 考慮할 必要가 있다.
大體로 固有 名詞의 表記에 있어서는 그 語가 지닌 意味의 表象보다는 音形의 轉寫가 第一次的인 重要性을 가진다. 물론 人名이나 地名에 있어서 그 이름이 지어지게 된 有綠性이 無視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第一次的으로는 어떻게 하면 불리어지는 音形을 正確하게 表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問題가 된다. 이 경우 表音 文字를 利用하는 것이 가장 理想的이기는 하나, 漢字와 같은 表語 文字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거기에 알맞는 몇 가지 方法이 講究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 경우에는 漢字가 지닌 表音的 側面과 表語的 機能을 적당히 안배해서 利用하는 方法을 생각할 수 있다. 表音的 側面을 利用하는 것을 音借, 表語的 機能을 利用하는 것을 訓借라 한다면 우리의 固有 名詞의 表記는 音借와 訓借의 적당한 活用이라고 할만하다.
오늘날 文獻의 缺乏으로 三國 時代 以前의 傾向을 把握할 수가 없다. 그러나 三國 時代에 이르면 三國史記·三國遺事나, 그 뒤에 된 輿地勝覽·世宗實錄地理志 등 貴重한 資料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 傾向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이들 資料에서 볼 때 古代 固有 名詞의 表記에 있어서 三國이 共通的으로 漢字를 利用한 音訓借 表記라는 점에 있어서는 큰 差異가 없으나, 그래도 자세히 比較해 보면 表記用字의 선택에 있어서 어느 程度 차이가 있음을 窺知할 수 있다.
Ⅱ. 王號의 用例와 表記
다음에 三國의 王號를 比較하기 위하여 차례에 따른 對照表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다음의 表에서 볼 때 高句麗에서는 表面的으로는 漢語의 造語法과 類似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 그 呼稱이 音讀에 따른 것인지, 訓讀에 따른 것인지, 速斷할 수가 없다. 그러나 訓讀했을 可能性이 있음을 本文의 下註에서 엿볼 수 있다. 大武神王을 一云大解朱留王이라 하였고 三國遺事에서는
高句麗 | 百 濟 | 新 羅 | 高句麗 | 百 濟 | 新 羅 | |||
1 | 東明聖王 | 溫 祚 王 | 朴赫居世 | 20 | 長 壽 王 | 毗 有 王 | 炤知(毗處) 〃 | |
2 | 瑠 璃 王 | 多 婁 王 | 南解次次雄 | 21 | 文咨明王(明治好王) | 蓋 鹵 王 | 智證 〃 | |
3 | 大武神王(大解朱留王) | 己 婁 王 | 儒理 〃 | 22 | 安 藏 王 | 文 周 王 | 法 興 王 | |
4 | 閔 中 王 | 蓋 婁 王 | 脫解 〃 | 23 | 安 原 王 | 三 斤 王 | 眞 興 王 | |
5 | 慕 本 王 | 肖 古 王(素古王) | 柢摩 〃 | 24 | 陽 原 王(陽崗好王) | 東 城 王 | 眞 平 王 | |
6 | 大祖大王(國 祖 王) | 仇 首 王(貴須王) | 裟婆 〃 | 25 | 嬰 陽 王 | 武 寧 王 | 憲 德 王 | |
7 | 次 大 王 | 沙 伴 王 | 逸聖 〃 | 26 | 平 原 王(平崗好王) | 聖 王 | 興 德 王 | |
8 | 新 大 王 | 古 亇 王 | 阿達羅〃 | 27 | 榮 留 王(建 武 王) | 威 德 王 | 僖 康 王 | |
9 | 故國川王 | 責 稽 王(靑稽王) | 伐休(發暉) 〃 | 28 | 寶 藏 王 | 惠 王 | 閔 哀 王 | |
10 | 山 上 王 | 汾 西 王 | 奈解尼師今 | 29 | 法 王 | 神 武 王 | ||
11 | 東 川 王(東 襄 王) | 比 流 王 | 助賁(諸貴) 〃 | 30 | 武 王 | 文 聖 王 | ||
12 | 中 川 王(中 壤 王) | 契 王 | 沾解 〃 | 31 | 義 慈 王 | 憲 安 王 | ||
13 | 西 川 王 | 近肖古王 | 昩鄒(味照) 〃 | 32 | 景 文 王 | |||
14 | 烽 上 王 | 近仇首王 | 儒理 〃 | 33 | 憲 康 王 | |||
15 | 美 川 王(好壤王) | 枕 流 王 | 訖解 〃 | 34 | 定 康 王 | |||
16 | 故國原王(國 崗 王) | 辰 斯 王 | 奈勿(那密) 〃 | 35 | 眞 聖 王 | |||
17 | 小獸林王(小解朱類王) | 阿 莘 王 | 實聖 〃 | 36 | 孝 恭 王 | |||
18 | 故國壤王 | 腆 支 王 | 訥祗麻立干 | 37 | 神 恭 王 | |||
19 | 廣開土王 | 久亇幸王 | 慈悲麻立干 | 38 | 景 明 王 | |||
39 | 景 哀 王 |
大虎神王이라 하였다. 이것은 '武'가 '虎·解' 등으로 바뀌어 적힐 수 있음을 뜻하므로, 적어도 '武'는 訓借일 可能性이 있다. 大祖大王(國祖王)도 '大一國'의 交替가 가능함으로 訓借로 볼 수 있다. 東川王이 '東襄王'이 된 것도 '川'이 訓임을 뜻한다. '襄'은 西川王에서 미루어 '壤'의 誤字로 볼 수 있다. '美川王(好壤王)'도 '美一好'의 對應으로 미루어 訓借로 해석할 수 있다. '平原王(平崗王)'은 '原一崗'에서 미루어 亦是 訓借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高句麗의 王號는 表面上 漢語形과 一致하나 訓借를 利用한 것임이 分明하다. 그러나 訓借字의 선택에 있어서 表面上 漢語形에 接近시키려는 깊은 配慮가 있었음을 理解할 수 있다. 그러나 廣開土王 때부터는 적어도 漢字形에 대한 意識이 作用하고 있었을 可能性이 있다.
百濟에 있어서는 第24代 東城王을 경계로 造語法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第23代 三斤王에 이르기까지는 固有語形을 維持하면서 音借가 主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第24代 東城王 때부터 固有語形이 漢語形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東城王 때부터 漢字 漢文의 熟達이 그만치 擴大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新羅에 있어서는 '次次雄·尼師今·麻立干'으로 呼稱되던 段階와 王으로 呼稱되던 段階와는 區別된다. 前者는 王의 呼稱語가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등으로 된 것과 같이 大體로 固有語가 바탕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後者는 모두 漢字形이 기반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兩者 사이에 字類의 선택에 차이가 있음은 말할 必要도 없다.
以上과 같이 三國이 뒤에 固有 名詞를 漢語化하는 傾向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것은 漢字 使用의 熟達度가 그만큼 發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王號는 固有語形과 漢語形으로 區分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固有語形은 主로 音訓借 表記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音訓借 表記에 있어서 大體로 高句麗에서는 音借보다는 訓借字의 利用이 活發하고, 百濟는 거의 音借字에 의한 것이며, 新羅에서는 音借字가 優勢하나 赫居世의 '赫', 南解의 '南'과 같이 若干의 訓借字의 利用이 登場함을 볼 수 있다.
Ⅲ. 人名의 用例와 表記
1. 高句麗
高句麗의 姓으로는 '解·高·金·克·仲·室·少室·松·扶·薛·位·羽·負鼎·絡·松·鄒·大室·孫·穆 ·菸·陽·明臨·于·於·左·劉·葛·孟·芮·蓋·泉' 등이 나타난다. 이 中에서 '孫·薛·葛·孟·芮' 등은 新羅나 中國에서 流入된 것이 아닐까 한다. '仲室·少室·大室'과 같은 것은 漢語形일 可能性이 있고, '泉'은 訓借일 可能性이 있으나, 判斷하기 어렵다. 그외의 것은 모두 音借에 의한 것으로 判斷된다.
名에는 朱蒙(鄒牟·衆解), 類利(孺留·累利), 無恤(味留), 色朱, 愛婁, 於漱, 遂成, 伯固(伯句), 男虎(夷謨), 憂位, 然弗, 藥盧(若于), 相夫(相夫婁), 乙弗(憂弗), 斯由(釗), 丘夫, 伊連(於只支), 談德, 日連(臣連), 羅雲(明理好, 个雲, 高雲), 興安, 寶延, 陽成, 大元, 建武' 등과 같은 王諱에서 볼 때 대체로 廣開土王 때의 談德 以下의 例는 漢語形에 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나, 그 以前의 것은 거의 固有語形으로 해석되며, 音借에 따른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其他의 名으로는 夫婁, 阿蘭弗 등과 같이 거의 音借가 기준이 된 것으로 보인다. 高句麗에서도 末期에 이르러서는 '興安·陽成·勝·建武·桓權·男生·男建'과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漢語形을 意識해서 作名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다지 普遍化한 것은 아니다.
2. 百濟
百濟의 人名 表記도 高句麗와 同一하다. 마지막 義慈王 때에 이르러 '允忠·義直·殷相'과 같은 漢語形이 보이나 其外는 거의 固有語가 기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는 거의 音借가 主가 되고 訓借字는 찾아 보기 어렵다.
3. 新羅
新羅도 大體로 高句麗나 百濟에 準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漢語形의 선택이 高句麗 百濟보다는 빨리 나타난다. 다음에 例示해 보기로 한다.
王 | 固有語形 | 漢 語 形 |
朴赫居世 | 蘇伐都利·娥伊英·瓠公·俱禮馬·智伯虎·祗沱·虎珍·閼智 | |
南 解 | 阿婁(雲帝) | |
儒 理 | 日智·許婁(辭要) | |
脫 解 | 羽鳥·阿尼·熱漢·阿部·首留·郁甫·俱道·未鄒 | 順貞·吉門 |
婆 娑 | 奈老·史省·啓其·陁鄒 | 明宣·允良·吉元·保齋 |
祗 麻 | 摩帝·翌宗 | 昌永·玉權·申權·順宣·昕連·林權 |
逸 聖 | 支所禮·愛禮·近宗·阿道 | 雄宣·宣忠·大宣 |
阿 達 羅 | 內禮·仇道·仇須兮·廷鳥·細鳥 | 繼元·興宣·吉宣 |
伐 休 | 發暉·國良·薛支 | 述明 |
奈 解 | 骨正·伊買·利音·連珍 | 萱堅·康萱 |
助 賁 | 阿爾兮·干老·阿音夫 | 玉帽·連忠 |
沾 解 | 良夫·克宗 | 長萱 |
味 鄒 | 味照(未祖), 伊柒 | 光明·直宣·正源·弘權·良質·光議 |
儒 禮 | 末仇·大谷·智良 | 忠貞·長昕 |
訖 解 | 急利 | 命元·康世 |
奈 勿 | 大西知·未斯欣·沙覽·堤上·武謁 | |
實 聖 | 伊利, 登也, 禮生, 登保, 卜好 | |
訥 祗 | 保反(內禮吉怖) | |
慈 悲 | 巴胡, 未叱希·智德智, 伐智 | |
炤 知 | 善兮, 期寶·乃宿, 鳥含·實竹·比智·波路 | 碧花 |
智 證 | 鳥生, 習寶, 登欣·異斯天, 伊宗 |
여기서는 便宜的으로 新羅 上古記에 해당하는 것만 뽑아 보았으나 脫解王 때의 '順貞'과 같은 이름은 漢語形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新羅는 高句麗·百濟와는 달리 初期부터 漢語形에 따른 作名에 行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매우 興味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上例의 漢語形들은 訓借 表記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固有語形은 音借가 優勢하나, '瓠公·虎珍·辭要·翌宗·延鳥·細鳥·利音·良夫·大谷·大西知·堤上· 善兮'에 있어서 ·點 要素字는 分明히 訓借字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高句麗·百濟와는 다른 傾向이다. 즉 高句麗 ·百濟는 人名에 거의 訓借字가 나타나지 않는데 대하여 新羅는 그 보다 더 많은 訓借字를 利用하는 傾向을 보여주고 있다.
Ⅳ. 地名의 用例와 表記
三國史記의 地理志는 古代의 地名의 表記나 國語의 硏究에 도움이 되는 가장 貴中한 資料가 된다. 여기서는 그 地理志에 나타난 用例를 中心으로 檢討해 보기로 한다.
同一地名이 두 가지 이상의 表記 例가 있다. 이것을 同名異記라 한다면, 同名異記 例는 高句麗가 가장 많고, 百濟와 新羅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同名異記의 傾向도 三國이 一致한다고 볼 수 없다. 高句麗 地名은 若干의 例를 除外하면 同名異記는 거의 모든 地名에 共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同名異記는 한 地名에 두 가지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同一한 이름을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나타난 結果라고 하겠다. 漢字에는 同音字나 同義字가 매우 많기 때문에 音借를 하든 訓借를 하든 表記하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自由롭게 字類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同名異記의 例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高句麗의 例; | -國原城→未乙省·託長城 南川縣→南買 駒城縣→滅鳥 述川郡→省知買 楊根縣→去斯斬 今勿內郡→萬弩 道西縣→都盒 買忽縣→水城縣 |
위의 例는 同名異記에 속하는 것인데 表記法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上例에서 黑點의 字類는 訓借字에 속하고, 無黑點의 字類는 音借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地名의 表記에서는 訓借字와 音借字가 自由롭게 선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 訓借字를 선택하고, 어떤 경우에 音借字를 선택하는가 하는 기준은 전혀 찾아볼 수 가 없다. 그것은 순전히 表記者의 自由로운 선택에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上例에서 보는 것처럼 '南川·楊根·水城'처럼 基體部나 接尾辭를 모두 訓借字만을 利用하는 경우도 있고 '南買'처럼 基體部는 訓借, 接尾辭는 音借를 利用하는 경우도 있고, '今勿內·買忽'처럼 音借만을 利用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三國이 모두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百濟의 例 | 熊川-熊州 熱也山縣 伐音支縣 西原→臂城(子谷) 大木岳郡 甘買→林川 加林 |
上例에서 黑點字는 訓借, 그외의 것은 音借로 해석된다. 그러나 訓借보다는 音借가 優勢한 傾向을 보여주고 있다. 全體的으로 高句麗의 例에 비추어 同名異記가 극히 稀少하다는 事實이다. 同名異記는 다른 한 面에서는 語意나 音의 推定에 많은 도움이 된다. 同名異記 例는 大體로 한편은 訓借가 많이 利用되고 한쪽은 音借를 많이 利用하기 때문에 兩者를 對照하면 語意나 音의 把握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同名異記가 적은 경우에는 判斷에 主觀性이 많이 介在하게 됨으로 硏究 資料로는 그만큼 危險性이 따른다고 볼 수 있다.
新羅도 亦是 같은 傾向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同名異記의 例는 百濟보다는 많은 편이다.
上例에서 '昔理火'의 경우'昔'이 訓借인지 音借인지는 主觀的 判斷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同名異記의 경우도 高句麗와는 달리 同音異記가 많다는 것이다. '阿火→幷'과 같은 경우는 音―訓의 對應으로 볼 수 있으나 이러한 例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상과 같이 三國의 地名 表記는 모두 共通的으로 漢字의 音과 訓을 利用한 音訓借 表記法인 것임을 알 수 있다. 音訓借 表記法에서 특히 音借를 많이 利用하게 되는데, 같은 音을 表記하는 데는 될 수 있는 대로 同一字를 利用하고자 하는 傾向을 보여주게 된다. 그 結果 表音의 慣用 體系가 徐徐히 形成되어 가는데, 이 慣用 體系는 鄕札이나 吏讀의 發達에 기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新羅는 景德王 16年에 全國의 州郡縣名의 改定을 行하거니와 이때 從來의 州郡縣名을 두 字로 된 漢語形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漢語形이 普遍化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漢語形은 從來의 音借字를 그대로 선택한 것도 있지마는 訓借式 用法을 一步 發展시켜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Ⅴ. 參考 文獻
兪昌均;韓國 古代 漢字音의 硏究 Ⅰ. 1980.6.20, 啓明大 出版部.
韓國 古代 漢字音의 硏究 Ⅱ. 1983.12.10. 啓明大 出版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