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觀 洙 / 弘益大 敎授, 國語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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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民正音이 창제(1443)되기 이전에 고유한 古代 文字를 사용했다는 설은 訓民正音의 起源을 캐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訓民正音의 起源을 우리나라의 이웃에 있는 모든 나라의 文字에서 찾아보기도 하였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아니함을 보고, 그 연원을 우리나라 안으로 돌린 것이 古代 文字 사용설이다.
訓民正音이 창제되기 이전에 漢字의 차용이 아닌 우리의 고유한 古代 文字를 사용했다는 설은 한별 權德奎(1890~1950)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는 「朝鮮語文 經緯」(1923:162-171)에서 '訓民正音이 그 이전의 朝鮮 文字의 復興'이라고 하여 古代 文字 11종을 내세웠는데 다음과 같다.
한결 金允經(1894~1969)은 '한글의 起源이 우리의 古代 文字에 있다'라고 하고 「朝鮮 文字 及 語學史」(1983:46-57, 154-156), 「새로 지은 국어학사」(1963;21-28, 61-62)에서 9종을 열거하였다.
또 退耕 權相老(1879~1965)는 「朝鮮 文學史」(1947:7-13)에서 '우리의 古代의 文字가 꼭 있었든지 없었든지 알 수는 없지만 '글월'만은 있었던 것이 事實'이라고 하여 8종을 제시하였다.
그 후 李鐸(1898~1967)은 「國語學 論考」에서 燕岩集과 海東繹史의 기록을 들어 이른바 耽羅 文字說을 주장하여 이것이 우리 古代 文字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古代 文字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나 그 견해가 일치된 점은 文字(言語材)가 전하지 않은 것으로 古文獻에 끼어 있는 片言들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宋鍋洙(「廣場」 1984, 1월 호)가 '한글은 世宗 이전에도 있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그것은 檀君三世(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임) 때 만들어진 '加臨多文'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한글과 거의 같은 字形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후설)
지금까지 알려진 古代 文字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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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古代 文字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文蹟들의 기술을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言語의 歷史的 硏究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시되는 자료는 남아 있는 言語材이며, 그리고 그것은 言語學的 硏究 方法에 의해서 論證이 되어야 한다. 후세의 기록인 文蹟들은 확실한 言語材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결정적 典據로는 삼을 수 없는 것이다. 言語의 기원은 너무 요원해서 알 수 없으나 문자의 기원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 안에 드는 문제로서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인류 역사를 전후하여 제 나름대로 종족의 특성에 맞게 文字를 만들었다. 人類가 文字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國語가 가지는 時間的 空間的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一朝一夕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천 년에 걸쳐 人智의 발달과 더불어 서서히 生成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文字 發達史는 言語 發達의 一般的인 발달 과정, 즉 보편 타당성의 一般的인 원리가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文字의 일반적인 발달 과정을 살펴보면 歷史 時代에 들어 매듭을 매어 뜻을 전달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남아메리카를 비롯 한국·중국·일본·티베트 및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中國 古代의 기록에 의하면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 易之以書契'(蔣伯僣, 文字學纂要:19)라 하였고, 朱熹는 '結繩 今溪洞諸蠻有此俗'이라 하였으며, 嚴如煜은 '苗民不知文字......性善記懼有忘則 結語繩'이라 하여 '結繩'이란 것이 古代 中國에만 있은 것이 아니라 이웃 여러 오랑캐들이 이 풍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梁書諸夷傳 新羅條에 '無文字 刻木爲信'이라 하였으니 서로의 기억을 돕는 수단으로 나무에 눈을 새겨 뜻을 교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세 崔萬里의 訓民正音 反對上疏文 가운데서도 '若我國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姑借諺以資一時之用猶可 而報正義者...'라 하여 文字가 없었을 때 옛 사람들의 생각의 보존이나 전달 방법의 일단을 말해 주고 있다.
서기 10세기경 잉카(Inca)족에 의해 건설된 잉카 제국에 있어서도 역시 매듭 제도가 있어 이를 qipus라고 했는데 페루 말로 매듭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매듭처럼 기억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는 지금도 미개인 사이에 쓰이고 있는 아메리카 토인의 자개띠(wampum)를 들 수 있고, 오스트레일리아 토인의 사자의 막대(messenger stick)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文字는 아니나 文字의 선도적 구실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쓰던 시대를 '기억돕기 시대'(memory stage)라 한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이러한 흔적들은 人類의 思考의 발달 과정이나 인류 문화의 창조 과정을 추정하게 하며, 이는 또 文字 生成 過程이 비슷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古代 文字라는 것도 대부분 傳說的인 이야기로 확증이 없는 것이며, 文字의 단계에까지 발전하지 못한 繪畵 文字(pictography)이거나 漢字 혹은 漢字 借字 體系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先史 時代의 岩刻은 수십 종이 넘고 있으며, 南海島의 石刻文에 대해서도 종래와 다른 線刻畵라는 견해가 발표되었고 학계에서도 대부분 古代의 岩刻畵로 보고 있다. 이러한 岩刻畵도 대개 先史 時代에 풍요를 빌던 종교 의식의 유적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것은 우리 古代의 祭天 儀式과 관련이 있을 것이며 民族 傳來의 線刻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金敏洙:1980:38-41)
기억돕기 시대의 이러한 과정을 거쳐 文字가 生成되는데 繪畵와 象形의 과정을 거쳐 文字 生活에 편리한 表意 文字와 表音 文字로 發展한 것이다. 오늘날 表音 文字인 英語도 이집트의 繪畵 文字에서 발달한 것이다.
中國의 漢字도 繪畵 文字와 연줄하여 발달한 것인데 鐵雲藏龜(劉顎, 1903)에 의해서 알려진 中國 最古의 甲骨 文字도 약 3000~3500년 전의 것이다.
古代에 漢字 借字 體系가 아닌 고유한 古代 文字를 사용했다는 설은 그 字形이나 音素 體系에 대해서 어떤 설명이나 言語材도 없기 때문에 推斷하기는 어렵지만 訓民正音과 비슷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일 것이다.
文字 生成 초기에 일반적인 형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音素 文字가 탄생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발달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일인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言語材가 어떠한 형태로 든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고유한 古代 文字를 썼다고 아무리 강조하여도 설득력이 없는 일인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傳說的인 이야기에 時代에 따른 한갓 添論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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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人에 대한 文字 生活에 대하여, 거슬러 살펴볼 때 그들이 최초로 접한 文字는 확실한 물증이 없는 한 漢字일 가능성이 높다.
漢字의 傳來 時期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文蹟에 따르면 서기 전 3세기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는 中國의 戰國 時代(BC 403~256)로 華北 地方의 대혼란으로 部族東進과 함께 遼寧 靑銅 文化가 수입되었으며 燕나라 流民에 의한 衛滿朝鮮이 수립되었다. 그 후 漢武帝에 의해 衛滿朝鮮이 멸망하고 漢四郡(BC 108~313 AD)이 성립되는 한편, 三國이 部族 國家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漢文 傳來는 三國에 따라 다르나 扶餘에서 갈린 高句麗는 國初부터 漢字가 쓰였음을 다음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三國史記에 佛敎 傳來와 太學 設立이 小獸林王 二年(372)인 것으로 되어 있다.
1세기경의 平南 龍岡의 秥蟬碑文, 357년 黃海 安岳의 高句麗 冬壽墓黑書銘 등의 金石文은 漢字의 傳來 時期나 使用 段階 등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 후 본격적으로 漢字 借字 時代로 들어가게 되었다.
漢字 借字의 첫 人名·地名·官名 등의 표기였는데, 처음은 借音의 방식으로 中國에서의 外來語 表記의 方法과 같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漢字의 借訓은 일차적인 表記 方式은 아닐 것이며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鄕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音訓借에 의한 漢字 借字 表記 體系가 확립되었을 것이다.
借字 體系에 대하여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借字 體系에 의한 몇 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借字 體系의 발달은 鄕札·史讀·口訣이라는 체계를 갖게 되었는데 漢字를 빌어 쓴 借字 表記 體系인 점에서 동일한 것이나 그 원리와 용도에서 각기 달리 붙여진 名稱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위에서 보인 예와 같이 처음에는 人名·地名·官名 등 간단한 固有 名詞로부터 시작하여 鐘銘·塔碑·帳籍 등에 미치고 마침내는 新羅 鄕歌의 文學的 創作에까지 미치는 발전을 하였다.
國字가 없을 때 外來 文字가 傳來하면 그것을 借用하여 母國語를 표기해 보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漢字의 傳來 후 위의 例와 같은 借字 方式이 母語 表記의 첫 시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訓民正音 창제 이전에 쓰여온 文字 中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言語材이기 때문이다.
東洋 漢文化圈은 일찍부터 先進한 漢文化의 영향을 받아 漢字를 借用하여 文字 生活을 했는데, 우리와 같이 고유한 文字를 갖지 못한 日本이 漢字 傳來 후 借用 時代를 거쳐 假名을 만들 때까지의 과정을 우리와 비교해 보면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鄕歌를 표기한 鄕札과 같은 借字法이 萬葉假名으로 전하며, 假名의 형성이 吏讀의 略字와 같은 方法으로 되었으며, 日本의 漢文의 讀法이 口訣의 釋讀 方法과 같다. 이는 일찍이 우리나라의 舊譯仁王經(14C초)에서 그 讀法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借字 表記 體系의 발전에 佛家側이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日本의 僧侶들도 佛典 講釋 때 讀法과 註解를 위해 經典行間에 漢字 略字로 표기하는 등 借字 體系를 발전시켜 假名을 生成하는데 공헌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釋日本記에 日本紀私記의 설을 인용한 '其字體頗似梵字 未詳字義所准據'와 新井白石의 同文通考에서 '新字는 梵書를 닮았는데 漢字의 體는 아니다.'라고 한 것은 高麗 翰林學士 崔行歸의 鄕札에 대한 그의 論說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즉 '...鄕札似梵書連布 彼士難諳'이라 하여 鄕札이 漢字로 되어 있지만 梵書가 連布한 것과 같아 中國人은 알기 어렵다고 했으니 漢字 借字 體系의 유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日本에서도 이와 같은 借字 時代를 거쳤음에도 固有 文字說이나 허무맹랑한 神代 文字說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지금부터 약 300년 전부터 주로 神道家, 일부 國學者에 의해 일기 시작한 神代 文字說은 그들의 言語觀·歷史觀에서부터 출발점이 달랐고, 그 사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金澤庄三郞과 小倉進平 같은 現代 言語學者의 考證으로 神代 文字 存在說은 하나의 虛構였음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古代 文字說도 漢字에 의한 借字 體系였으리라고 추단한 점도 우리의 古代 文字 유무의 논란에 참고가 될 것이다.
本來 母國語 表記를 위해 外來 文字를 借用한다는 것은 音素 體系, 統辭 體系, 文法 體系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訓民正音 創制 후 訓民正音과 漢字를 雜用하기 위해 방편을 마련했는데, 訓民正音解制 合字解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文興諺雜用則有因字音而補以中終聲者 如孔子ㅣ魯 ㅅ 사람之類'
만약 고유 문자가 있었더라면 訓民正音 창제 이전에도 고유 문자와 借字 體系, 고유 문자와 漢字와의 雜用 方法이 반드시 있었을 법한데 그러한 흔적이 하나도 없음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고유 문자나 借字 體系 모두가 文字 生活을 하기에 불완전했을 테니까 雜用은 너무나 필연적인 방법이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古代 文字의 출처 중 三國史記에 있는 기록을 가지고 말하는 '高興博士를 얻어 비로소 書記를 갖게 되었다―百濟 文字說'이나 高句麗 文字說, 그리고 舊唐書나 高麗史에 있는 '文字와 記錄이 있다―渤海 文字說'과 旅庵 申景濬(1712~1780)이 그의 訓民正音解序에서 '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以形一方言之形 而備一方之用也 正統丙寅 我世宗大王製 訓民正音 其例反切之例'라고 한 '俗用 文字'를 전래하는 우리의 고유 문자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으나 當代의 文化的, 歷史的 배경으로 보아 漢字이거나 漢字 借字 體系의 一環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手宮 文字는 外國 文字로 해석될 여지가 많으며, 淸脾錄의 高麗 文字說은 중국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漢字 借字 體系를 말하는 것이다(졸고:弘大 論叢 16집, 한글과 日本 神代 文字 참조)
三皇內文, 法首橋碑文, 王文文字, 南海石刻文, 刻木文, 玄妙訣文 등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기록이며, 만약 이 기록을 믿는다면 이것은 岩刻畵나 濠洲土族의 使者棒(messenger stick)과 비슷한 文字 이전의 기호에 불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檀君時 神誌가 秘詞를 만들었다고 하는 神誌秘詞文이나 天符經文은 같은 맥락의 것으로 檀君 때 文字(한글)가 있었다는 주장인데 최근에 한글의 원형까지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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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세운 고대 문자설은 說로서 그칠 뿐 일체의 言語材를 제시하지 못하였는데, 최근 한글은 檀君三世 때 창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지금과 거의 같은 한글 字形을 제시함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論旨는 과거 日本에서 거론된 이른바 日本의 神代 文字와의 관련에서 한글의 元型을 찾으려 한 것이며, 世宗 大王의 訓民正音 창제설을 부인하고 檀君三世, 즉 4200년 전에 한글이 만들어졌음을 주장하고 과거 日本에서 전하고 있는 神代 文字라고 하는 것이 우리 한글과 일치하고 있는 점을 들어 日本 神道家 및 國學者들에 의하여 주장된 論據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日本 神道家 및 國學者에 의하여 주장된 神代 文字야말로 日本 古來의 神代 文字이고 우리 한글은 이를 모방한 것이라는 '日本 神代 文字와 한글은 親子 關係'와 같다 라는 황당무계한 설에 주목하고, 그 앞뒤가 바뀐 것이라는 데 대한 反論 形式으로 論旨를 전개하고 있다.(2)
이러한 典據는 桓檀古記로 그 속에 合編되어 있는 檀君世紀의 '第三世檀君 嘉勒 ...... 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 是爲加臨土其文曰......'과 太白逸史의 '檀君嘉勒二年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 是爲加臨多其文曰......'(두 책 인용문 말미의 점선 친 곳에 오늘날의 한글과 거의 같은 字形 三十八字를 보이고 있음)의 기사와 東國歷史·檀奇古史 등에 실려 있는 加臨多文 창제설을 그대로 인정하여, 기사에 의거 그것은 高麗初 光宗 때까지 散在해 있었다고 한다(太白逸史:94). 지면 관계로 詳論을 펼 수 없고 (拙稿:弘大論叢 16집 참조) 그 論據의 허구성을 개략하기로 한다.
(1) 典據나 論證이 言語 科學的이 못 되고 傳說的이고 神話的인 면은 앞서의 古代 文字說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中國 最古의 甲骨 文字도 3000~3500년 전의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보다 약 1000년 전, 지금부터 4200년 전에 音素 文字인 지금과 거의 同形인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것은 言語 發達史上 수긍하기 어렵다.
(2) 남아 있는 言語材가 하나도 없다.
(3) 典據로 내세운 桓檀古記는 1911년 大宗敎徒인 雲樵 桂廷壽가 다음 5개서를 합편하여 刊行한 것이다.
凡例에서 5개서의 編纂者, 編纂經緯, 所藏家들에 대한 설명이 있고, 1911년에 太伯敎徒인 桂廷壽가 妙香山 檀君庵에서 썼음을 말하고 있다. 이 책들은 檀君을 중심으로 한 古朝鮮에 관한 기사인데 歷史에 대한 객관적 기술 태도라기보다 太白敎徒로서 檀君을 추앙하는 태도로 기술하고 있다. 이 외에 檀奇古史(729), 神事紀(失名著) 등에서 한글에 대하여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檀君朝鮮 47世 檀帝까지의 年條別 記錄史가 一律的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거의 같은 내용의 책들인 것이다. 檀君朝鮮에 대한 歷史的 評價는 두고라도 이러한 野史들의 기록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한글의 字形을 보이고 있는 太白逸史는 李陌(1455~1528)의 편찬으로 檀君世紀를 편찬한 李嵒(1297)~1364)의 玄孫이다. 이 책에는 大宗敎의 經典인 天符經과 三一神話가 들어 있으며 桓雄 天皇이 神誌赫德에게 명하여 書契를 만들게 했다든지, 神誌의 纂文, 南海島의 石刻文에 대한 이야기 등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해오는 傳說的인 이야기들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편자가 訓民正音 창제 후의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지 않는다.
檀君世紀는 高麗 末期의 學者 李嵒(1297~1364)이 지었는데 호는 杏村이다. 檀君世紀는 李嵒이 편찬한 것과 雲樵 桂廷壽가 1911년 5개서를 합편한 桓檀古記 속에 있는 檀君世紀 외에 수종의 별본이 세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것이 李嵒이 쓴 檀君世紀인지 알 수 없는 일이며, 그것도 李嵒 저술한 것이 아니라 奇古之書를 접하여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1년 桂廷壽가 합편한 檀君世紀가 原本이라고 할 아무런 보장도 없다. 앞에 든 여러 책에서 古朝鮮에 文字가 있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李嵒도 檀君 때의 文字 創制說을 믿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加臨多文(筆者의 생각으로는 漢字 借字 體系를 말한 것으로 봄)이라고 표현했지만 李嵒이 쓴 檀君世紀에는 한글의 字形이 없었는데 후세의 大倧敎徒들이 先驗的 思考에 의해 한글의 字形을 加筆 添加한 것으로 보인다.
高麗末의 주권 회복 운동과 관련시켜 볼 때 檀君의 추앙과 더불어 古代 文字說을 檀君과 결부시킨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편찬 연대도 李嵒이 죽기 1년 전인 66歲 때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믿기 어려운 일이다.
國字에 대한 先人들의 기록은 口傳되어 오던 온갖 傳說的인 이야기들로부터 筆者의 推論, 후세인의 添論, 歷史的 狀況에 따른 각색과 윤색 등으로 사실과 동떨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古代 文字 사용설은 古文獻의 여기저기에 끼어 있는 片言들로서 그 그림자조차도 접할 수 없는 것들도 科學的 論證이 서지 않는 한, 한 推論에 그칠 뿐이다. 최근 제시된 桓檀古記 속의 자료들은 信憑性이 빈약한 野史에 들에 실려 있는 그것으로 古代에 고유 문자가 없었다는 지금까지의 說을 뒤엎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言語材와 諸記錄 그리고 文字 發達上의 일반적 과정으로 보아 訓民正音 創制 이전에는 우리말을 표기하는 고유 문자가 없었고, 鄕札·吏讀·口訣의 漢字 借字 體系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 參考 文獻
權悳奎(1923):「朝鮮語文 經緯」
金敏洙(1980):「新國語學史」
金允經(1933):「朝鮮 文字 及 語學史」
------(1963):「새로 지은 국어학사」
李覲洙(1984):'한글은 세종 때 창제되었다'「廣場」2월 호
------(1984):'한글과 日本 神代 文字' 弘大論叢, 16輯
최현배(1982):「한글갈」
허 웅(1981):「언어학」
桂廷壽(1911):「桓檀古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