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化期의 語文 政策과 表記法 問題


李秉根 / (서울大 敎授, 國語學)

1. 序論
    1876년 開港으로부터 빚어진 外勢에 의한 外來 文化의 영향은 朝鮮의 전통 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 주었고 政策上의 급격한 변화를 계속 겪는 소용돌이까지 일으켜 주었다. 이른바 甲午改革이 시작된 1984년으로부터 統監府 時代를 거쳐 國權을 완전히 잃고서 일본의 帝國主義 아래에 들어간 1910년까지는 더욱 극심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던 시대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이 交替期에 그래도 語文 政策에 따른 語文 改革 있어 새로운 방향이 정립되었고 이에 따른 表記法 統一에 대한 노력이 있었으며, 나아가서 語文 民族 思想도 어느 정도로는 확립되게 되었다.
    開化期라는 이 시기에 있어서의 語文 整理 및 語文 硏究는 朝鮮 時代의 그것과 現代의 그것과의 過渡期的인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朝鮮 時代에 제기된 語文에 관한 여러 主題들을 대부분 이어 받으면서 外來的인 영향 속에서 새로운 현대적인 틀로 바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開化期에 앞선 시대인 實學 時代의 語文에 관한 관심은 그 主流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訓民正音」의 전통 속에서 보인 性理學的인 中國 韻學式의 관심으로서, 儒敎를 國是로 출발했던 朝鮮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實學 時代의 中國의 강력한 영향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語文 整理에 관한 관심으로서 文字 體系와 表記法에 관련되는바, 대체로 音韻史的 主題들이 되기도 하는 것들이었다. 셋째는 語彙의 수집·정리에 대한 관심이다. 中國語·滿洲語·蒙古語·倭語 등의 譯學 關係의 辭書는 물론이고 漢字語 固有語 그리고 方言 語彙에까지 걸치는데, 語源풀이를 곁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세 가지의 흐름 가운데서 뒤 두 가지가 開化期로 크게 이어진 것이다.
    鄭東愈의 「畵永編」 이후의 19세기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語文 關係의 論著로 鄭若鏞의 「雅言覺非」 (1819), 柳僖의 「諺文志」(1824), 金炳圭의 「事類博解」(1838), 石帆의 「諺音捷考」(1856), 鄭允容의 「字類註釋(1856)」및 姜偉의 「東文字母分解」(1869) 등을 흔히 들고 있는데, 이들 모두 17·8세기의 전통을 이은 것들이다. 이 중에서 특히 姜偉(1802~1884)는 弓馬에 전념하던 武班의 出身으로 「古歡堂集」 등을 남긴 漢學者로 金澤榮 李健昌 黃炫과 함께 韓末의 四大 詩人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六穚(지금의 廣穚)에서 詩會를 자주 가졌는데, 이 때에 池錫永 그리고 漢語譯官 출신의 雲草 玄檃 등과도 사귀었다. 池錫永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漢學者로 출발하여 洋醫學을 공부하면서 한편 語文 整理에 깊은 관심을 보인 開化波이었고, 玄檃은 나중에 國文 硏究所의 위원 朝鮮 總督府의 「朝鮮語辭典」(1902)의 편찬·심사위원 그리고 朝鮮 總督府의 普通學校用 諺文 綴字法의 위원 등을 지냈던 사람이다. 이러한 人脈의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도 實學 時代의 語文에 대한 관심의 맥락이 開化期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筆者에게 주어진 과제는 開化期의 語文 政策과 表記法의 統一 運動에 대하여 서술하는 것이다. 外勢에 의한 開放과 그 改革 그리고 外勢로 빚어진 國權 喪失로부터 인식된 自主獨立 思想은 泰西의 새로운 敎育 制度를 받아들이고 敎育에 의한 광범위한 知識 위에 國權을 지키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에 자연히 새로운 시대에 알맞은 語文 政策이 수립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開化期의 語文 政策의 수립에는 兪吉濬을 비롯한 池錫永 李能和 周時經 등과 같은 많은 開化的 人物들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請託의 성격과 범위에 맞추어 開化期의 語文 政策과 表記法統一의 여러 문제들을 서술하되, 이 두 가지가 서로 관련 있는 것이지만 편의상 두 면을 나누어서 전개시키고자 한다.*

2. 高宗의 言語 政策과 國漢文 混用體
    泰西의 文物이 특히 18세기 후기로부터 차츰 확대·수용되는 가운데 또다시 泰西 文物의 영향 속에 明治維新을 먼저 겪은 일본의 영향이 1876년 開港 이래로 커지면서 급기야는 親日的인 金弘集 內閣에 의한 甲午改革이 1894년에 단행되기에 이르렀다.
    甲午改革에 이르기까지의 開港期에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가 外國人들에 의한 學校의 설립이었는 바, 묄렌도르프(Möllendort)와 핼리팍스(Hallifax)의 英語學校, 吉模(Gilmore) 房巨(Bunker) 轄甫(Hulbert)를 교사로 초빙하여 주로 英語를 가르쳤던 育英 公院(Roya School, 1886) 및 培材 學堂(1885) 儆信 學院(1885) 梨花 學堂(1886) 등등이 그 예들이 된다. 이어서 日語 學堂(1891) 官立 漢城 師範 學校(1895)와 外國語 學校(1895) 外에 小學校까지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1899년에는 漢城 中學校가 설립되어 이른바 韓日合倂 이전에 이미 수십 개의 함께 中學校가 있게 되었다.
    泰西 體裁의 새로운 敎育 機關의 출현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社會 變化였을 터인데, 가장 기본적인 교육 문제의 하나가 역시 語文 敎育이었을 것이다. 外國人 宣敎師들은 그들의 傳敎를 위하여 聖書 및 기타 宗敎書들을 번역·출판하였고 또 辭典과 文法書를 출간하였었는데, 傳敎에 필요한 宗敎書의 번역은 國文을 純用하였던 것이 일반적이었고, 辭典들은 모두 그네들의 言語로 된 對譯辭典들이었으며, 文法書들도 대체로 그네들의 言語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傳敎의 목적 이외에 그네들의 言語 敎育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한국인들을 위해 辭典이나 文法書를 지었다면 마땅히 韓國語로 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開港期를 전후한 우리나라의 文字 生活은 대체로 어떠했는가? 漢文만으로 쓴 漢文 純用體 이외에, 佛家·儒家의 經書들의 諺解文에서 볼 수 있는 懸音 國漢文 混用體, 龍飛御天歌의 國文 歌辭에서 비롯되어 많은 詩歌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순수한 國漢文 混用體, 그리고 綸音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漢文 純用體와 國文 純用體를 각각 독립시킨 國漢文 兩分體, 끝으로 國文 小說이나 「잠샹즙요」(1886) 등의 農書에서 볼 수 있는 國文 純用體 등이 著述 目的에 따라 가려 쓰이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閔妃의 嗜好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던 道敎 系統의 明星敎의 經書들을 기본적으로는 國漢文 兩分體를 주로 썼던 것이다. 이전에 비하여 이 國漢文 兩分體 나아가서 國文 純用體가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던 시대가 19세기 후반이었는데 이러한 시대에 漢文에 바탕이 없는 宗敎書들을 泰西人들이 번역함에 國文 純用體를 택하게 되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上下貴賤은 물론이고 兒女子들에게까지 傳敎하려는 그들이 國文 純用體를 택했음은 더욱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四民必知」의 '셔문'은 國文 純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각건 즁국 글로는 모든 사이 니 알며 널니 볼수가 없고 대한 언문은 본국 글 더러 션와 셩과 남녀가 널니 보고 알기 쉬우나 슬프다 대한 언문이 즁국 글에 비교야 크게 요긴것만은 사들이 긴 줄노 아지 아니고 도로혀 업수이 녁이니 엇지 석지 아니리오

開港 이후의 이러한 사정 속에서 高宗은 특히 金弘集 내각은 甲午改革을 단행하면서 새로운 語文 政策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4년 7월 9일에는 '議定存案第一'로서

 凡國內外公私文字遇有外國國名地名人名日常用歐文者優以國文繙譯施行事 

를 公布하였고, 이어서 7월 12일에는 '銓考局條例'를 공포하여 普通試驗에

 國文漢文寫字算術內國政略外國事情內務外事俱發策 

에서와 같이 國文이 시험 과목으로 벌써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7월 19일에는 官制 改革으로 議政府의 學務衙門에 編輯局을 두어서 그 곳에서는

 編輯局 掌國文綴字各國文飜譯及敎科書編輯等事參議一員圭事四員 

과 같이 國文 綴字 國文 飜譯 敎科書 編輯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語文 政策의 기초를 일단 세우게 되었다. 즉 國文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했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21일에는 구체적인 政府 次元의 施行令으로

 法律勅 總以國文爲本漢文附譯惑混用國漢文 

이라는 公文式을 勅令 第一 號의 第十四 條로 발표하게 되었는 바,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당시의 語文 生活을 고려해서 議政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勅令은 이듬해인 1895년 5월 8일에 가서는

 法律勅令은다國文으로本을삼고漢譯을附하며或國漢文을混用 

으로 다시 公布하면서도 바로 勅令의 표기처럼 國漢文 混用體를 택하고 國文으로 本을 삼는 國文 純用體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1894년 1월 21일의 勅令에 나타난 高宗의 語文 政策의 轉換은 그 해의 12월 12일에 이른바 洪範 十四 條를 포함하여 淸國으로부터의 自主獨立을 선언하고 새로운 여러 改革을 제시한 大君主 展謁宗廟誓告文(대군쥬게셔 죵묘에젼알시고셔야고신 글월) 자체로써 "國文으로本을삼고漢譯을附며或國漢文을混用"이란 勅令에 충실히 따르게 되었는데, 이 誓告文이 바로 國文 純用 漢文 純用 및 國漢文 混用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여기 각각 일부씩만을 예로 보인다.

(國文) 오쟉. 쥬고. 독립미. 이예. 국가를. 굿게홈일.
(漢文) 惟自主獨立洒厥鞏固我國家
(國漢文) 惟自主獨立이 洒厥我國家를鞏固케지라

위의 이른바 國漢文 混用體는 龍飛御天歌의 國文 歌辭나 杜詩諺解의 諺解文의 그것과는 달리 懸吐式의 '國文句解體'인 것이다. 이튿날인 12월 13일에 이와 관련되어 내려진 高宗의 綸音도 誓告文과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는 '신하와 셩에게 반포라'고 하였던 그 당시까지의 綸音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면서 國漢文 混用體를 追加한 것이다. 일부의 漢文本을 제외하면 흔히 綸音은 漢文을 아는 '신하'는 물론이고 國文만을 아는 '셩'에게까지 알리기 위해서 國文本과 漢文本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다. 너의무셩이. 실로오쟉. 나라의근본이니. 쥬홈도. 오쟉. 셩이며 독립홈도. 오쟉. 셩이라. 인군이. 비록. 쥬코져나. 셩이. 아니면. 어의지며. 나라가. 비록. 독립코져나. 셩이. 아니면. 누로. 더브러리오.

圈點으로 띄어쓰기를 대신한 이 標識 方式은 위의 綸音에 바로 앞서 발표된 高宗의 딴 論音들인 '어졔 유대쇼신료급즁외민인등쳑샤륜음'(1881)과 '어졔 유팔도사도기로인민등륜음'(1882)에서는 보이지 않았었다 (띄어쓰기에 대해서는 後述 참조).
    이상과 같은 高宗의 語文 政策은 1895년 3월 25일의 法官 養成 新規程(勅令 第四十九 號)에 法官 養成所의 入學試驗 科目으로 '國文作文'을 부여하게 하였고 이어서 漢城 師範 學校 本科 및 速成科의 學科目과 試驗 科目에도 (官報 7월 24일) 그리고 巡檢 採用에도 (「巡檢採用規則」 官報 8월8일) 부여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成均館 經學科의 學科目으로 '三經西書及其諺解綱目宋元明史井本國史作文'을 부여하게 했던 것이다(官報 7월 19일). 이 때에 반포된 小學校令에 이어서 8월 15일에는 '小學校別大綱'에서 小學科 尋常科에서의 國語·國文의 교육 내용을 구체화시켰다.

尋常科에近易適切事物에就며平易게談話고其言語練習야國文의 讀法書法綴法을知케고次第로國文의短文과近易漢文交文을授고漸進기從야讀書作文의敎授學問을分別讀書國文과近易漢文交文과 日用書類等을授이可홈
    讀書와作文을授時에 單語短句短文等을書取케고 或改作야國文使用法과 語句의用法에熟게이可홈

이리하여 小學校의 교육에 있어서도 國漢文 混用體를 익히도록 하였는 바, 그것은 國文 使用法을 익히고 나아가서 國漢文 混用體도 익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高宗의 語文 政策은 당시에 學部에서 간행한 敎科書들이 國漢文 混用體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몇몇 예를 보이면

國民小學讀本(1895, p.1) 우리大朝鮮은 亞細亞洲中의 一王國이라
小學讀本(1895, p.7) 天下에事와物이處實이잇스니
新訂尋常小學(卷一 1896, p.23) 우리朝鮮은。眞實노。조흔나라이라。

와 같이 國漢文 混用體로 쓰였는데, 일본인 補佐員 高見龜와 麻川宋次郞까지 편집에 참여한 「新訂尋常小學」의 序에서

學者ᅵ전혀漢文만常用야古學아니라時勢혜아려國文을參互야今도學야智識을널일것시니......萬國의文法과時務의適用者依據야或物名으로譬喩며或書圖로形容야國文을常用은여러兒孩들을위션닷기쉽고이오漸次漢文으로 進階야敎育거시니......

라 하여 일단 國漢文 混用體를 언급하고 있는데, 다만 小學校用 敎科書를 고려하여 國文의 常用으로부터 시작하여 漢文으로 進階하여 교육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敎科書에서의 國漢文 混用體의 사용은 결국 國文을 本으로 삼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고 公私文書에 흔히 적용된 "或國漢文을 混用"에 그친 것이다. 이 당시에 獨立新聞을 비롯한 몇몇 경우에 國文 純用을 주장했던 사실로부터 현실적으로는 朝와 野 사이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高宗의 실제적인 語文 政策에 따른 이러한 國漢文 混用體의 사용은 차츰 확대되어 韓日 合倂까지의 開化期의 대표적인 文體로 굳어져 갔다. 開化期에 주로 國文 純用體로(때로 國漢文 兩分體로도) 번역·출판되었던 「신약젼서」들이 1906년에는 역시 聖書 飜譯 委員會에서 國漢文 混用體로 된 「新約全書」를 출판한 사실이 위의 사실을 증명해 준다.
    李能和는 그의 「國文一定意見書」(1907)는 바로 이런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만일

일개인      

일분      
萬一가, 업스면, 나라에一個人이, 업셔셔, 나라의一分힘이 減니

國文縣音의 國漢文 混用體를 써서 漢字의 讀解에 도움을 주도록 하는 이 방법은 이미 朝鮮 時代의 많은 諺解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漢字 敎習書들은 물론이고 童蒙들을 위한 것들이 이 방식을 써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兪吉濬의 「勞動夜學讀本」(1908)에서는

사람 하날 신령
人은 天과 地 사이에 가장 靈니라

와 같이 일본의 訓讀 表記와 같은 방식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를 읽을 경우에는 國漢文 混用體로 읽는 것이 아니라

이르키   닥그

 修  며 少은 老은 手이

의 예들이 일러주듯이 訓讀하는 것이다. 일본에 留學했던 兪吉濬에게는 이런 訓讀 表記가 자연스러웠을는지 모른다. 그는 "小學 敎育에 對한 意見"(皇城新聞 1908.6.10)에서 小學 校科書의 편찬은 國文을 專主함이 可하지만 漢字를 廢止함은 未解하는 바로 "國漢字를 交用야 訓讀 法을 取면 可거니와'와 같이 주장했던 것이다. 역시 일본에 유학한 바 있는 李人稙의 萬歲報에 실린 小說 短篇이나 「血의 淚」가 訓讀 表記를 처음에 따랐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로 역시 同軌를 달린 것이다. 이 訓讀表記는 이미 1885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행된 「마가의 젼 복음셔 언」에서 쓰인 바 있는데,

요하네쓰

약

황츙   

드을
져 約翰는 駱駝의 털을입고허리의가쥭를고먹는것슨蝗蟲과  野 蜜이러라

와 같이 兪吉濬·李人稙의 경우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이 訓讀文을 읽을 때에는 李人稙의 "國文으로만 보고 漢文으로 보지 말으시오"라고 한 언급대로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일본의 영향으로 잠시 등장했던 이 訓讀 表記體는 우리의 表記法史에서 보면 특이한 것으로 곧 살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高宗의 語文 政策에 따른 開化期 國漢文 混用體의 확립을 보아왔다. 甲午改革 당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語文 政策의 수립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甲午改革에 대하여 學部大臣 申箕善 같은 이는 反對 上疎文을 올리면서 그 속에서 漢文을 廢止하고 國文을 사용하려 함에 반대한 바 있는데, 당시로서는 高宗의 語文 政策에는 波瀾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今에我朝鮮이獨立後에政府도一新야社會萬事萬物을去舊就新애國民의新面目을爲야國文專用의訓令을頒布條에各各多少의波瀾을激야一時의童謠催고今에至기家國實際에何를標準야方針을立지新舊間에迷야一定方向을不整者ᅵ多多도다(申海永, "漢文字와 國文字의 損益如何"「獨立協會會報」16, 1897)

3. 文字 體系와 表記法에 대한 論議
    開化期에 있어서의 國漢文 混用體의 확립과 國文 純用體의 확대는 그것이 朝鮮 時代 특히 實學 時代의 傳統을 이어받은 것이든 아니면 外勢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간에 당시의 언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文字 體系와 表記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學部編輯局이 綴法까지 담당하기에 이르렀던 점이 바로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泰西의 여러 언어들로부터 받은 開港 이후의 강력한 영향은 우선 띄어쓰기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國漢文 混用體 특히 國文 純用體의 사용은 古典 小說의 경우 띄어쓰기 없이도 가능했던 것이 사실인데, 이는 국어의 膠着語的인 形態論的 特性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讀書의 편의를 위해서 單語 또는 語節別로의 띄어쓰기를 泰西文에서처럼 國文 純用體의 경우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開化期의 띄어쓰기는 크게 두 가지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高宗의 誓告文이나 綸音의 國文 純用體에서 볼 수 있었던 방식으로 대체로 語節 단위로 각각의 境界에다 點을 찍는 것이었다. 朝鮮 時代에도 이미 쓰였던 이 방식은 國漢文 混用體에는 덜 쓰였는데, 國漢文 混用體는 많은 경우 語彙 形態素들을 漢字로 적었기에 큰 불편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語節 단위로 기계적으로 點을 찍었던 이 띄어쓰기의 방식은 일정한 문법적 단위 예컨대 句와 節을 右圈點과 中圈點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던 「訓民正音」의 경우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圈點 標識法이 周時經의 「말의 소리」(1914)에서 더욱 분석적으로 쓰였음을 잘 알려진 일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띄어쓰기 방식은 현대 맞춤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空白으로 境界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國文을 專主했던 「獨立新聞」이다. 또 그 체제을 따른 「獨立 協會 會報」의 國文體 論說들 「일신문」「죠션 크리스도인 회보」「대한신문」「구셰신문」 등이 있고 敎科書의 일부분도 있다.
    띄어쓰기의 필요성을 주장한 글로서는 「독립신문」의 創刊辭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국문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건 다름이 아니라 쳣 말마를 이지 아니고 그져 줄줄 려 쓰 에 글가 우희 부터지 아 부터지 몰나셔 몃번 일거 본 후에야 글가 어 부터지 비로소 알고 일그니 국문으로 쓴 편지 쟝을 보자면 한문으로 쓴 것보다 더듸 보고  그나마 국문을 자조 아니 쓰고로 셔툴어셔 잘 못봄이라

國漢文 混用體 특히 國文 純用體에서 語節을 단위로 하여 띄어 쓰고서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는 境界의 表示가 語彙 形態素와 文法 形態素 즉 語幹과 語尾 사이의 그것이다. 이 경계에 대한 인식은 膠着語的인 構造에 대한 인식으로 멀리는 吏讀의 사용에서 이미 반영되어 開化期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인데, 이 경계의 한 방법이 分綴 表記로 대신하는 것이다. 결국 받침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미 周時經은 그의 국문론에서 體言과 助辭 사이의 경계에서의 分綴 表記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이거시~이것이~이것시'의 세 표기에서 連綴의 '이거시'와 重綴의 '이것시'는 다 文法으로는 대단한 失手라고 하고서, '일홈된 말'(名詞)과 '그 일홈된 말 밋헤 드러가 토'(助詞)와의 "경계들을 다 올케 차자" '먹(墨)으로, 손(手)에, 발(足)은, 맘(心)이, 밥(飯)을, 붓(筆)에'와 같이 써야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用言의 경우에 모두 依存 形態素들인 語幹과 語尾를 分綴시켜 표기해야 한다는 언급은 없었다. 실제로도 體言 曲用의 경우에 비해 用言 活用의 경우에는 分綴과 連綴의 混記가 좀더 심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用言 活用의 경우에 좀더 철저히 分綴 表記를 周時經이 꾀했던 것은 形態素들을 철저히 분석했던 그의 後期의 일이다. 그의 「대한국어문법」(1906)에 따르면 '맡아도'가 '法'으로서 '원톄와 본음과 법식'에 옳은 것이고 '마타도 맛하도 맛타도'는 '俗'으로 그르다는 것이다. 요컨대 境界를 찾아 本音으로 표기할 것을 주장한 셈인데, 이들 문제는 결국 終聲 表記의 문제를 이르는 것으로, 實學 時代로부터 開化期에까지 가장 깊은 관심거리의 하나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주시경의 國文 同式法의 핵심이 되었던 것으로 「訓民正音」에서의 終聲復用初聲에 근거했던 것이다. 本音 위주의 表記는 「訓民正音」에서 한 가능성으로만 제시되었고 「龍飛御天歌」나 「月印千江之曲」에 반영되었던 방식이지만(cf. 주시경 「國語文典音學」(1908) pp.58~59), 15세기의 대부분의 문제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체로 分綴을 하지 않고서 '八字可足用'을 따랐던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主題는 후에 國文 硏究所의 중요한 課題의 하나가 되었다.
    開化期에서 제기된 表記法上의 또 하나의 문제로는 高低·長短의 表記에 관한 것이 있다. 池錫永은 그의 「국문론」(1896)에서 國文의 사용을 論하면서 國文으로만 보면 분간하기 어려운 '動(움즉일동)'과 '棟(들동)', '棄(버릴기)'와 '列(버릴열)', '擧(들거)'와 '野(들야)'들을 點을 찍어 분간하는 것이 國文에 제일 요긴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新訂國文」(1905)에도 반영되었고 다시 長短의 구별과 함께 그의「言文」(1909)에 반영되어 실제로도 표기까지 하였다. 예컨대 語音에 높게 行用하는 漢字에는 둥근 點으로 標하고 語音이 길게 되는 데는 둥근 圈點으로 標한다는 것이다. 柳僖는 이미 그의 「諺文志」에서 平··去聲들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의 「韓語文典」( Grammaire corēenne1881)에서는 '밤(夜) 밤(票)' 같은 예들을 통해 音長의 音韻論的 機能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의 문제도 國文 硏究所의 한 主題가 되었다.
    改革의 물결 속에서 1890년대에 제기된 또 하나의 문제로 이른바 가로쓰기(橫書)가 있었는 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泰西文의 영향이었다. 가로쓰기가 실제로 실행된 최초의 것으로 池錫永의 「言文」(1909)을 들기도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縱書보다는 橫書가 편리하다는 주장은 일찍이 周時經의 「국문론」(1896)에서 볼 수 있었다.

올은 편에셔 시쟉 야 외인 편으로 써 나갈 것 면 글시를 쓰 손에 먹도 뭇을더러 몬져 쓴 글시 줄은 손에 가리여서 보이지 아니 니 몬져 쓴 글 줄들을 보지 못면 그 다음에 써 나려 가 글 줄이 혹 빗드러 질가 염려도 되고 몬져 쓴 글시 줄들의 을 각 야 가며  압 줄을 써 나려 가기가 어려오니 글시을 외인 편으로 브터 올은 편으로 써 나려 가것이 우 편리 겠더라

이러한 周時經의 주장은 그 후에 國文 硏究所의 論議에서 아예 가로 풀어 쓰기로 발전하여 "우리나라가 밝고곱다"를 "ㅜㄹㅣ ㄴㅏㄹㅏ ㄱㅏ ㅂㅏㄹㄱㄱㅗ ㄱㅗㅂ ㄷㅏ"로 가로로 풀어써 보였던 것이다. 「말의 소리」(1914)에서는 字體까지 바꾸어서 "ㅜㄹㅣ ㄱㅐㄹ ㅐㅣ ㄱㅏ ㄹㅗ ㅆㅐ ㄴㅐㄴ ㅣㄱㅎㅣㅁ(우리 글의 가로쓰는 익힘)"의 실제 예문을 보였던 일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이 풀어쓰기가 아니고 단순히 가로로 쓰는 가로쓰기는 「言文」보다 14년이나 앞섰던 「國漢會語」(表紙 書名은 '國漢會話'(1895) 幹·坤)에서 이미 실행되었었다. 이 책은 筆寫本인데 國文으로 쓰여진 標題語에 漢字語·漢文句로 풀이한 對譯辭典의 성격을 지니는 國語辭典이다. 비록 國漢辭典이지만 어느 정도로는 현대적인 辭典 體裁를 갖춘 최초의 것이다. 이 辭典의 國文解는 圭殿司長을 지냈던 李準榮이 담당하였고, 漢文釋은 前 承文院 副正字 鄭玹, 記錄은 前 圭事 李琪榮, 編輯은 李明善, 그리고 校訂은 姜璡熙가 각각 담당하였다. 그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國漢會語」의 一部>

「國漢會語」가 가로쓰기를 택하였고 外國의 것을 模倣한 사실은 그 序文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편의상 띄어쓰기로 바꾼다).

在今 聖德이 重興하사 四隣이 講和하온則 語音에 否唯을 審하고아 情誼에 親疎을 照홀지니 不得己 通譯할 機栝을 設한 後에 可할 덧한 故로 孤陋한 聞見과 鄙野한 言譜을 敢忘하옵고 方言을 竊述호 國文으로 語之柄을 建하며 漢文으로 語之義을 釋하고 兩文經界處엔 墨細圈으로 間隙에 點하야 眠標을 立하고 字行은 從左達右하며 簡次는 自下徹上하야 外國冊規을 倣하고 音響第次는 結音이 起音을 回應하야 國文의 隔八相生한 本例을 踵하고 兩文의 淸濁은 類類이 注合하야 經緯을 條定고 萬言을 叢集하야 國漢會語 一部을 著編하오니 ꦎ罪則 極知하오나 交隣通譯하난 方엔 萬一之助가 庶或하올덧.

이렇게 從左達右하여 가로쓰기를 행한 이 책에서 '乾'의 끝에 地名·國名을 漢字語로 제시하고서 英語로 對譯시킨 부분이 있는데 역시 가로쓰기를 하였던 것이다. 몇몇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亞西洲 Asia 阿非利洲 Africa, ns
毆羅洲 Europe 亞美利可洲 America, ns
阿西洲 Oceania 高麗 Corea, ns
波里島 Polynesia 日本 Japan, ese

外國冊規를 倣하였다고 하였는데, 현재로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사전을 참고로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까지 나왔던 韓語―外國語의 對譯辭典들로서 파리 外邦 宣敎會의 「韓佛字典」(1880) 코스트(G. Coste)의 「韓佛辭典」(1880) 그리고 언더우드(H.G. Underwood)의 「韓英字典」(1890) 게일(J.S. Gale)의 「韓英字典」 (1890)들은 標題項의 排列順序를 대체로 아야어여으이오요우유...... ㅎㄱ(ㅺ)ㅋㅁㄴㆁㅂ(ㅽ)ㅍㄹㅅ(ㅆ) ㄷ(ㅼ)ㅌㅈ(ㄵ)ᄎ'로 잡았었는데, 「國漢會語」는 현대의 國語辭典들에 가깝게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과궈 ......'와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로 하였다.
    辭典은 語釋의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도 標準語 맞춤법 등의 기능도 가지기 때문에 文字 生活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國漢會語」가 비록 출판은 되지 못했지만 이러한 가로쓰기로 된 辭典이 당시에 쓰여졌다는 것은 가로쓰기에 대한 당시의 깊은 관심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 辭典의 表紙 書名이 「國漢會話」라 된 것은 當時의 四隣講和에 따른 通譯上의 一助에 그 動機가 있었기 때문이다. 朝鮮光文會에서 周時經을 비롯한 몇 사람이 편찬한 순순한 國語辭典인 「말모이」도 가로쓰기를 행하였었다.
    開化期의 가장 대표적인 語文 關係의 著書로 리봉운의 「國文整理」(1897)를 들고 있는데, 그 序文에서 辭典 편찬의 필요성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國文局에서 그의 「國文玉篇」(1897)이 간행되었다고도 하나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새로이 國文을 정리하려 한 「國文整理」는 '모 규식, 쟝음 반졀 규식, 단음 반졀 규식, 외이 침 규식, 언어 쟝단 규식, 문법론, 문법말 규식, 탁음 규식, 어토 규식,  언문 규식'의 목록을 지니고 있는데, 그 내용 가운데는 'ㆆ. ㆁ ㅿ'의 音價라든가 五音(牙舌脣齒後)과 淸濁의 分類, 長短音의 구별 등의 音學的 내용이 있고, 長短音을 구별하는 表記 '제몸침'(各自並書, ㄲ ㄸ ㅃ ㅆ ㅉ)의 사용, 日本語 淸濁音의 區別 表記 등의 文字 體系에 관련된 내용이 있으며, 그리고 言文一致에 관련된 表記法의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언문은 본 말을 위야 내인 글이니 말로 쓰거시 올흐니"와 같이 완전한 言文一致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리봉운에게는 '이거, 이러니'가 문법말 규식의 예가 되었고, '이거슨, 이러허니' 등은 속담 규식의 예가 되었던 것이다. 「國文整理」는 "금쟈에 셔찰 왕복 국문 쓰 법이 일뎡 규식이 업셔......"라고 한 언급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새로운 正書法의 마련을 위하여 國文을 整理하려 했던 것이다.
    開化期의 새로운 敎育 制度의 改革과 國漢文 混用體·國文 純用體의 확대는 자연히 새로운 文字 體系를 확립하면서 表記法을 통일하는 또는 正書法을 확립하는 과제가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1894년 이래의 改革에 따라 學部의 編輯局에서 國文 綴字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語文論者들의 집중된 연구 없이 敎科書들을 편집하였기에 池錫永 李能和 같은 開化的인 敎育界 人士가 각각 「新訂國文」과 「國文一定意見書」를 學部에 제출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에 자극되어 이러한 國文의 整理·硏究를 위하여 學部에서는 國文硏究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池錫永은 1902년 1일 14일부터 周時經을 맞아 자주 國文에 관하여 논의를 하곤 했는데(주시경 「대한국어문법」 (1906) 31-32葉), 주시경은 '國文式'을 짓고 國文 同式會를 조직하는 등 國文 同式法(즉 한글 맞춤법)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어 國文 講義인 「대한국어문법」(1906)을 내놓기도 하였고 이미 이의 내용을 尙洞 靑年 學院의 國語 講習所에서 敎授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주시경의 끈질긴 노력도 國文 硏究所의 官設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國文 硏究所는 1907년 7월 8일에 學部 大臣 李載崐의 請議로 閣議를 거쳐 內閣 總理 大臣과 學部 大臣이 上奏蒙裁하여 學部 안에 開設하게 되었는 바, 國文의 原理 沿革 現在 行用 將來 發展 등의 方法을 硏究·討議하면서 1909년 12월까지 대체로 그 정리를 끝냈던 것이다. 이는 統監府 時代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1907년 7월 12일에 임명된 위원에는 尹致旿(委員長 學務局長), 張憲植 (編輯局長), 李能和(官立 漢城 法語學校長), 玄檃(正三品), 權輔相(內部 書記官), 周時經 이외에 日本人 上村正己(學部 事務官, 이듬해는 秘書課長 代辯)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위원들은 周時經을 제외하면 모두 官職에 있었던 사람들로 이 연구소의 성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玄檃은 1860년에 태어나 만 20세에 增廣試에 合格하여 漢語譯官을 지내면서 姜偉와 交分을 맺었던 사람으로, 總督府 時代에는 「朝鮮語辭典」의 편찬과 普通學校用 諺文 綴字法의 제정에 委員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國文 硏究所가 설립된 지 한 달이 좀 넘은 8월 19일에는 學部 編輯局長의 更迭로 局長인 魚允迪이 위원이 되었는 바, 編輯局長이 學務局長과 함께 當然職委員이었다면 나아가서 國文 硏究所는 開化期의 學部 編輯局이 國文 綴字를 담당했던 사실과 역사적인 脈絡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國文 硏究所는 統監府의 철저한 감시 속에 있었던 것이다.

<國文硏究所委員選定照會> <李億委員解免請議書>

委員會는 9월 16일에 開會되기 시작하였고, 9월 20일에는 李鍾一(正三品), 李億(正三品), 尹敦求(六品), 宋綺用(前 敎官), 柳苾根(九品)이 "國文에 嫺熟와 適合資格이기" 위원으로 선정되어 23일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池錫永이 이듬해(1908) 1월 21일에, 그리고 李敏應이 6월 4일에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末期에는 또다시 日本人 隅部一男(學部 主事)을 書記로 임명하여 '保護 政策'에 발맞추었다. 玄檃 李鍾一, 柳苾根, 李億 등은 中途에 請願 辭任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2월 28일의 報告書에 등장하는 위원은 周時經 ·魚允迪·李能和·池錫永·權輔相·宋綺用·尹敦求와 李敏應(幹事)이었으며 위원장은 그대로 尹致旿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열성을 보였던 위원은 말할 것도 없이 周時經이었다. 그리고 魚允迪·李能和·池錫永도 비교적 열심이었다.

國文 硏究所는 모두 23回의 토의를 가졌는데, 1908년 말까지의 會議에서 나온 騰寫物들을 年代順으로 묶어 놓은 「國文硏究案」, 1909년 3월에 그 동안의 硏究案 參互硏究案 議案 등을 최종적으로 다시 정리해서 集大成한 個人別의 「國文硏究」 그리고 1909년 마지막으로 議決하여 12월 28일에 學部 大臣에게 보고한 「國文硏究議定案」 등을 남겨 놓았다. 위의 議定案에서는 10개의 主題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議決하였다.

一. 國文의淵源과字體多發音의沿革
    檀君 時代로부터 訓民正音에 이르기까지의 文字 使用의 역사를 요약하여 國文의 淵源을 말하고 있다. 字體는 象形而字倣古篆을 따랐고, 그것을 正體·俗體·草體로 三分하였다. 이어서 文字 體系의 歷史를 언급하였다. 發音에서는 'ㆍ'字의 音이 "一字와 近似되 國語音으로는 成音키 難거늘 今俗에는 訛誤야 ᅡ字 發音과 混疊"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字體及發音의 沿革은 或國語音에 無을 因며 或發音의 相似을 因며 或書寫上에 便宜을 因며 或成音에 難을 因야 或減除或廢止或混疊에 至니라"고 하였음.
二. 初聲中ㆁㆆㅿㅱㅸㆄㅹ八字의復用當否
    이들 初聲字를 復用함은 不當하나 備考로 存留시켜 先聖의 精義를 欽惟하고 文學 硏究 材料에 이바지하게 함.
三. 初聲의ㄲㄸㅃㅆㅉㆅ六字幷書의書法一定
    이 同字並書로 一定하되 ㆅ의 復用함은 否當함(李···尹 위원의 주장을 따름. 權·池 위원은 된시옷을 주장하고, 魚 위원은 양쪽 다 無妨하다 하였음)
四. 中聲·字廢止〓字刱製의當否
    ꁏ字의 刱製는 否當하고 ㆍ字의 廢止도 否當함(魚··周 위원의 의견에 따름. 池 위원의 이 주장에 李··應 위원이 찬동하였고, 李··尹 위원은 다 否當하다 하였음)
五. 終聲의ㄷㅅ二字用法及ㅈㅊㅋㅌㅍㅎ六字도終聲에通用當否
    初聲諸子를 原則에 따라 단연 通用함이 正當함(위원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였으나 魚···尹 위원의 의견에 따름)
六. 字母의七音과淸濁의區別如何
    牙音(ㆁㄱ, ㅋ, ㄲ) 舌音(ㄴㄷㄹ, ㅌ, ㄸ) 脣音(ㅁㅂ, ㅍ, ㅃ) 齒音(ㅅㅈ, ㅊ, ㅆㅉ) 喉音(ㅎ)의 五音으로만 구별하고 淸音·激音·濁音의 三種으로만 定함.
七. 四聲票의用否及國語音의高低法
    四聲票는 不用하고 高低 즉 長短音의 二種으로만 定하되 長音은 字의 左肩에 一點을 加하여 票함(意見 差가 심하였음).
八. 字母의音讀一定
이응 ㄱ기윽 ㄴ니은 ㄷ디읃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읏 ㅈ지읒 ㅎ히읗 ㅋ키읔 ㅌ티읕 ㅍ피읖 ㅊ치읓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 ㆍ
九. 字順行順의 一定
    字順은 윗항에서 주어진 순서로 하되 行順은 中聲으로 우선하고 初聲의 字順대로 排行함(意見 差가 있었음).
十. 綴字法
    綴字法은 맞춤법이 아니라 字의 構成法을 뜻하는데, 「訓民正音」의 例義대로 仍爲綴用할 것으로 一定함.
    이상의 十題 중에서 二··四는 새로운 文字 體系의 확립을 위한 것이고 五와 七은 맞춤법에 관한 것이며 끝으로 十은 用字法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주어진 대부분의 課題들은 이미 實學 時代로부터 開化期의 前半期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던 것들이다. 이는 곧 近代 國語의 表記法이 지니고 있던 문제점들인 것이었다. 國文 硏究所에서 이와 같이 議決한 案이 學部에 제시되었지만 그것은 곧 施行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이듬해 韓日 合邦으로 새로운 植民 政策 속에 묻혀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國文 硏究所의 최종 議定案을 보면 編輯局長인 魚允迪의 견해와 주장이 많이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李基文 「開化期의 國文硏究」p.111). 開化期의 初期로부터 國文 綴字 문제와 敎科書 편집 등을 담당해 왔던 곳이 바로 編輯局이었다. 實務陣의 책임자의 견해와 주장이 많이 받아들여진 점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듯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면도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1905년 日本에 의하여 統監府가 설치되면서 學部에는 日本人 參事官 밑에 위원회를 두어 學部 敎科用 圖書의 편찬에 착수, 이듬해에 普通學校用 敎科書들이 발간되기 시작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學部에 설치된 國文 硏究所의 위원으로 바로 日本人 參事官 上村正己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번도 報告書를 제출한 바가 없다. 愛國啓蒙的인 民族主義者들인 周時經·李鍾一 등을 監視했어야 할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國文 硏究所의 硏究는 議定案을 내놓은 結末을 보았지만 그것의 實行은 볼 수가 없었다. 1909년에는 이미 學部에서 많은 敎科書를 간행하였는 바 修身書(4종) 國語讀本(8종) 日語讀本(8종) 漢文讀本(4종) 理科書 (日文 2종) 圖書監本(4종) 習字帖(4종) 算術書(敎師用 4종) 등이 있었고 日本語의 교육도 크게 강화되어 國語와 같은 時間 數가 배정되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國文 硏究所의 議定案이 바로 적용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4. 結論
    甲午改革에 따라 나온 高宗의 語文 政策은 公私文書 敎科書 各種入試에 반영되어 國漢文 混用體를 확립 시켜 주었고 나아가서 國文 純用體의 사용을 확대시켜 주었다. 이로부터 開化期에는 實學 時代의 語文 課題들을 이어받으면서 外來的인 것의 영향도 입어 새로운 文字體를 확립하려는 노력과 통일된 表記法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보이게 되었다. 띄어쓰기 가로쓰기 새로운 辭典 樣式 등은 새로운 과제들이었다.
    日本의 植民 統治가 노골화되었던 統監府 時代에 日本人의 監視 속에 學部에 설립된 國文 硏究所는 官說의 성격을 지녔지만 당시까지의 제기되었던 語文 問題들을 集大成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인 역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1910년 이른바 韓日 合倂이 이루어짐에 따라 朝鮮 總督府는 새로운 植民 政策을 진행시키기 위해 朝鮮 舊慣 制度 調査 事業을 광범위하게 펼치면서 「朝鮮語辭典」의 편찬을 계획·착수·진행하였고 또 普通學校 敎科書의 편찬을 위한 諺文 綴字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植民 通治를 위한 語文 作業에 國文 硏究所의 위원 중에서 魚允迪 玄檃 등의 統監府 時代의 官職者들이 계속 관여하게 되었다. 비록 둘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朝鮮 總督府는 國文 硏究所의 討議 內容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1930년 3回案에 이른 諺文 綴字法은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유사한 것이었는데, 주시경의 영향을 깊이 받은 權悳奎, 崔鉉培 등이 綴字法 制定에 참여한 결과이었을 것이다.
    1910년을 前後해서 잃어진 國權 回復을 위하여 愛國啓蒙的인 語文民族主義가 두드러진 현상을 보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의 國語觀은 民族的인 이데올로기에 따른 것이었다. 民族·社會·國家는 地域· 血緣·言語의 三位一體로서의 共同體로서 自立하면서 딴 모든 것과는 各異·各殊하다는 것이며, 言語가 그 民族·社會·國家의 興亡盛衰를 左右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理言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갖도록 교육하여 富强한 自主獨立國을 이루기를 바랐고 통일된 語文을 통해 國民團合을 고취하려 했다. 이러한 國語觀은 19세기의 팽배한 民族主義에 걸맞은 것으로 明治維新을 겪은 日本에서도 있었고 泰西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周時經, 申釆浩, 朴殷植, 李鍾一 등이 이러한 國語觀을 지녔던 당시의 대표적인 人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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