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滿 韓人 同胞들의 民族 主體性과 母國語 사랑
筆者의 中國 東北(滿洲)行 路程은 홍콩에서 廣州까지는 船便으로, 廣州에서 北京까지는 비행기로, 北京에서는 列車로 華北 平野를 지나 天津·唐山·山海關·瀋陽·撫順을 거쳐 우선 古林驛에 내렸다.
驛 광장의 많은 人波 中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려 왔을 때, 무엇보다도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그중 쪽지는 한 안노인을 발견하고 앞으로 다가가서 반가이 인사를 하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한국이 어디냐고 되물었을 때, 나는 순간 가슴이 섬뜩하였다. 혹 北韓 관계 노인을 잘못 만난 것이 아닌가 하는 긴장감에서였다. 나는 비록 思想 體制가 다른 中共 대륙의 南北 縱斷 약 一萬 三千 里를 여행하면서도 中國人을 만나는 것은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同胞를 만날까 겁이 났다. 異域 땅에서 내 同胞를 만날까 두려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보다 큰 悲劇이 있을까? 나는 分斷 祖國에 사는 현실의 비극을 어느 때보다도 이번 中國 大陸을 여행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이렇게 긴장감 속에 다니다가 "한국이 어디냐?"고 되묻는 동포를 만났으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노인의 소박한 얼굴 주름살에서 조금도 정치적인 빛이 보이지 않아,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여러분이 말하는 南朝鮮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 순간 노인은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갑다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홍콩을 통해서 돌아왔다니까 희한하다는 말씀을 연속하며, "오래 사니까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하시며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同胞 할머니의 말씨가 慶尙道 억양으로 들리어, 고향을 물으니, 나는 이곳 滿洲에서 태어났다며, 연세는 61세라고 하셨다. 나는 오히려 그 노인이 희한해서 여기서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한국말이 이처럼 유창하시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노인의 대답은 엉뚱하게 "나는 중국말을 잘 못 해요" 하셨다. 그 이유를 여쭈어 보니, 어려서부터 한국 사람들과 같이 자랐는데 어디서 중국말을 배우느냐는 것이다.
筆者는 이번 滿洲에 가서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東北三省(遼寧省·吉林省·黑龍江省)에 우리 同胞들이 약 180萬이 살고 있는데, 몇 百戶씩 集團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滿洲에서도 우리말의 方言 地域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곧 豆滿江 건너는 咸鏡道 方言 地域, 鴨綠江 건너는 平安道 方言 地域을 이루고 있고, 훨씬 北方으로는 抗日 時代에 集團 移住한 同胞들에 의하여 慶尙道 方言 地域, 全羅道 方言 地域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敎育을 받지 못한 同胞들은 굳이 中國語를 배울 必要도 쓸 必要도 없다.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筆者도 忠淸道 사람이지만, 滿洲에 사는 忠淸道 출신들은 各 方言이 뒤섞여 본래의 忠淸道 方言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 同胞 할머니는 대뜸 내게 "왜 같은 동포끼리 방송에 그렇게 서로 헐뜯고 싸웁니까? 창피해요" 하시며 주름진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나는 참으로 충격을 받았다. '韓國'이라는 말도 모를 정도로 무식하신 할머니가, 더구나 滿洲에서 태어나신 분이 얼마나 同胞끼리 헐뜯고 싸우는 것이 가슴 아팠으면 처음 만난 筆者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書籍을 통해서 배운 것보다도 그 무식하신(?) 同胞 할머니에게서 民族이 무엇이고 同胞가 무엇인가를 절실히 느꼈다.
滿洲에 사는 우리 同胞들은 투철한 民族精神과 뜨거운 同胞愛로써 하나로 뭉쳐 살고 있다. 美國이나 日本에 살고 있는 僑胞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世界 어느 지역보다도 滿洲에 많은 僑胞들이 살고 있지만 政治的인 문제로 分派되어 있지 않고, 오직 朝鮮族(滿洲에서 朝鮮族의 稱號는 北韓과 연관한 政治的인 것이 아니라, 近世 朝鮮으로부터 이어지는 歷史的인 稱號로서 사용되는 것이다.)으로서 일치단결하여, 우리의 固有 風俗을 지키며 살고 있다.
中國 속에 살면서도 우리 同胞끼리는 한마디의 中國語도 섞어서 말하지 않고, 우리말로 對話하는 철저한 民族主體性에는 감격을 넘어 肅然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滿洲의 조그만 地名까지도 모두 韓國 漢字音으로 바꾸어 말할 정도다. 例를 들면 '투먼(圖們)', '안투(安圖)'라 말하지 않고 '도문','안도'라고 칭한다.
종래 우리는 華僑들이 이 땅에 오래 살면서도 철저히 中國語를 지키고 사용한다고 칭찬하면서, 우리 韓國人들은 他國에 가 살면, 後世에게 제 나라 말을 傳授하지 않고, 當代에 잊어버린다고 꼬집어 왔으나, 滿洲에서는 우리 同胞들이 華僑 이상으로 철저히 母國語를 保存하고 사용함을 目睹한 筆者로서는 어느 일부의 현상 때문에 제 民族을 卑下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우리 同胞들은 남의 나라에 少數 民族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劣等感은커녕 오히려 優越感을 가지고 살고 있다. 中國 속에는 55種의 異質 民族이 살고 있는데, 180萬의 우리 朝鮮族 同胞는 敎字上으로 13位에 속하지만 他民族들로부터 '朝鮮族은 가장 優秀한 民族, 가장 勤勉한 民族'으로 公認을 받고 있다.
筆者가 이곳에 가기 몇 個月 前에 吉林省에서 少數 民族을 대상으로 珠算 大會가 열렸는데, 우리 同胞가 一等을 했고, 近來 中共에서 醫師 70여 명이 日本에 가서 硏修를 받고 돌아갈 때 博士 學位를 6名 받았는데, 그 중 5名이 우리 同胞였고, 開放 政策 이전, 中共 全域에서 벼농사의 最多 收穫을 낸 곳이 吉林省의 우리 同胞 마을이었다고 한다. 또한 運動競技를 해도 가장 優秀한 成績을 發揮하기 때문에, 이처럼 滿洲에서 우리 同胞들이 一等 民族으로서 優待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곳 小學校 과정은 五 年制인데, 中國 속에 있으면서도 一切 中國語를 가르치지 않고 순전히 우리말, 우리글로 교육하고 있다. 中學校 과정부터 中國語 科目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교과서는 역시 한글을 專用하고 있다.
統計에 의하면, 小學校가 1398個校, 中學校가 265個校가 있다. 大學은 吉林省 延吉市에 있는 延邊大學(1949年 設立)을 위시해서 延邊農學院(1958年 延邊大學으로부터 獨立), 延邊醫學院(역시 1958年 延邊大學으로부터 獨立), 延邊師範學院·延邊敎育學院(中國에서 學院은 單科大學을 稱한다.) 등이 있다.
그중 延邊大學을 간단히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 語言 文學系(中國에서는 言語를 語言이라 하고, 系는 科를 稱한다), 中國 語言 文學系·歷史系·政治系·外語系·物理系·化學系·體育系 등 9個 學科가 있고 大學院 課程으로는 朝鮮 語言學, 朝鮮 文學, 朝鮮 歷史 등 8個 學科가 있다. 校地는 약 15,000餘 坪에 校舍 面積은 42,000평방미터이며, 圖書館의 藏書는 40餘萬 卷이다. 1980年의 통계로는 學生 數가 1,561人(그 중 漢·滿·蒙·回族 學生이 28%)·大學院生이 20人·#數生(現職 中學校 敎師들의 硏修)이 2,500餘 人이다. 全 敎職員은 765人으로 그중 敎講師가 364人인데 敎授 1人, 副敎授 20人·講師 203人·助敎 71人·敎員 698人이다. 延邊大學에서 발행하는 刊行物로는 延邊大 學報·東方 哲學 硏究·漢語 學習·朝鮮 語文 硏究 등이 있고, 各科에서 硏究 發行한 書籍으로는 現代 朝鮮語·朝鮮 歷史·朝鮮 方言學·外國 文學史·語言學 槪論·文學 槪論 등 20餘 種이 있다.
우리 同胞들로 組織된 學會로는 1981年에 創立한 中國 朝鮮語學會를 비롯하여 延邊 朝鮮族 自治州 言語 歷史 硏究所·延邊 朝鮮族 自治州 民俗學會·延邊 朝鮮族 自治 文聯·延邊 文學 藝術 工作者 聯合會·中國 作家 協會 延邊 分會 등이 있다.
新聞으로는 한글로 發行하는 延邊 日報·黑龍江 日報·遼寧 日報 등이 있고, 우리말 放送으로는 延邊 人民 廣播電台·黑龍江 人民 廣播電台가 있다.
筆者는 吉林驛에서 약 4時間 동안 列車를 타고 哈爾濱 쪽으로 가다가 舒蘭縣 水曲驛에 내려서 水曲小學을 訪問하였다. 이곳은 自治州 內에 속하지 않는데도 역시 우리말 우리글로만 敎育하고 있었다. 學校 看板도 한글로 되어 있고, 敎室 內의 환경 정리도 漢字를 한 자도 쓰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되어 있음에 신기하면서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小學校에서 쓰는「조선어문」이란 敎科書 10卷의 內容을 살펴보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始終一貫 漢字는 한자도 쓰지 않았으며 共産主義를 注入하려는 글은 보이지 않았으나, 오히려 抗日 精神의 글이 많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綴字法은 頭音法則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北韓의 어떠한 指示에 의하여 敎科書를 編纂하는 것으로 잠시 誤解하였으나, 中學校用「조선어문」 敎科書 內容을 보고 전연 北韓과 政治的 關係없이 延邊 敎育 出版社에서 獨自的으로 敎科書를 發刊하여 使用함을 알았다. 곧 中學校 敎科書에는 各 筆者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데, 3學年用에 이미 1951年에 故人이 된 조기천의 時 '白頭山'의 일부가 실린 것을 제외하고는 全然 北韓 作家들의 글이 실려 있지 않았다. 또한 우리 南韓 作家들의 글도 없었다. 그러나, 沈淸傳·토끼전·民謠 등의 우리의 古典은 실려 있고, 現代文은 대부분 中共 作家들의 글을 번역하여 실었다. 外國 作家의 글로는 1學年用에 소련의 오스브롭스키가 쓴 '생명의 의의'('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일부), 2學年用에 프랑스의 도데가 쓴 '마지막 수업'과 日本의 고바야시 다키지가 쓴 '어미니'('당 생활자'의 일부), 3學年用에는 소련의 파제예브가 쓴 '적군 사령부를 불사르다'('청년 근위대'의 일부)와 독일의 하이네 時 '시레시아의 방직공'이 실려 있다. 中學校用 敎科書에는 小學校用과는 달리 共産主義를 注入하려는 글도 실려 있고, 6.25動亂에 參戰했던 中共軍의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교과서에 쓰인 語彙 中에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전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例를 들면, '료해하다', '답복하다', '수개하다' 등은 中國語를 그대로 우리 漢字音으로 바꾸어 써서 생소하게 느껴졌고, '딱친구', '골채 논마 쌀을랑은', '뻐아리광지 흰 저고리', '동심결', '이미 불성모양이 된', '나팜탄이 뜨락에서 터졌다' 등은 그 뜻을 알기 어려웠다.
農村의 家屋들은 거의 草家로, 우리나라 農村의 20餘 年 前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높은 통나무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는 오히려 故鄕에 돌아온 듯한 감회에 젖게 하였다.
中共에서는 開放 政策이후 集團 農場 制度를 폐지하고, 현재는 一家口當 토지를 약 3,000坪 정도 분배하여, 각자 농사를 지어 稅金만 내고, 나머지는 모두 個人 所得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土地가 個人 所有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賣買가 不可能하므로 자연적으로 移住할 수 없다고 한다. 同胞들은 韓國에서 土地가 個人 所有로 되어 있어 마음대로 팔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당연히 그래야 된다며 부러워했다.
食糧하고 남는 곡식은 정부에서 高價로 收買하기 때문에 滿洲의 우리 同胞들도 衣食住에는 걱정 없이 平和로운 生活을 하고 있다. 더욱이 한 家口當 家族 數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中共에서는 현재 家族計劃을 철저히 하고 있어서 都市에서는 아들 딸 구별 없이 하나만 出産하면 女子가 무조건 病院에 가서 不姙手術을 하고, 農村에서는 노동력을 위하여 둘까지만 許容하기 때문이다.
滿洲에 사는 우리 同胞들이 비록 自治州에 살고 있지만, 실은 國籍이 모두 中國으로 되어 있다. 同胞들의 말에 의하면, 萬里長城 以北에 사는 우리 同胞들은 國籍이 모두 中國으로 되어 있고, 以南에 北京이나 南京 등지에 사는 우리 同胞들은 아직도 그 國籍이 北韓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國交 관계상 北韓으로 한 것이요, 결코 모두 北韓을 지지해서 정한 것이 아니라 한다. 中共에서 이처럼 구별하여 정한 것은 과거 滿洲에 와 있던 우리 同胞들은 永住하기 위하여 온 移民으로 看做하고, 萬里長城 以南에 있는 우리 同胞들은 旅行 中 길이 막히어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看做했기 때문이란다.
또한 中共에서는 死後 處理도 철저하여 죽은 뒤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火葬하여 재를 뿌려 버리기 때문에 우리 同胞들도 이 政策에 따라 모두 墳墓를 保存할 수 없으므로 祖上 崇拜 思想이 희박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山野에 墳墓 하나 없어서 깨끗한 점도 없지 않았다.
開放 政策 이후는 우리 同胞들이 마음대로 放送을 듣기 때문에 有識人들은 故國의 實情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다. 우리 經濟가 北韓이나 中共보다 앞서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文化 革命 때는 韓國의 親戚에 書信 往來한 것까지도 罪가 되어 處罰을 받았다며 지난날의 고통을 회상하였다.
어디에서나 우리 同胞들은 한결같이 南北韓이 서로 放送으로 헐뜯고 있음을 창피한 일이라고 指摘하였다. 어떤 同胞는 北韓의 女性 放送員의 째지는 목소리로 헐뜯는 욕설의 放送은 아예 라디오를 꺼버린다고 하였다.
筆者는 同胞들의 순수한 愛國 衷情을 듣고, 이제 우리도 放送의 次元을 달리해야 되겠다고 느꼈다. 심지어 南韓의 '김삿갓' 프로로 헐뜯는 방송이라고 지적하는 소리를 듣고, 앞으로 우리의 放送은 北韓의 放送에 맞서서 效果를 거두기보다는 次元을 높여서 오직 同胞愛로써 열렬히 호소하는 放送을 할 때에 效果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筆者가 홍콩으로 돌아와, 우선 同胞들과 찍은 寫眞을 현상하여, 百餘 張을 보내 주고 歸國하였더니, 村長(마을 代表)에게서 感謝의 書信과 함께 時 한 편을 보내왔다. 비록 한 時代 지나 간 歌辭體의 글이지만 祖國을 憧憬하는 衷情은 나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하여 여기에 紹介한다.
滿洲에서 우리 同胞들을 만나, 처음에는 죄스럽게도 그분들을 경계하였으나, "北韓에서 오면 어떠하며, 南韓에서 오면 어떻습니까. 다 우리 同胞 아닙니까!"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보다도 感激해서 우리 南韓의 發展相을 자랑하다가 삼갔다. 왜냐하면 내가 지나치게 자랑하면, 그 逆作用으로 同胞 間에 分裂이 생길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發展相을 덜 알리더라도 한 뭉치로 살고 있는 우리 同胞들은 分裂시키고 싶지 않았다. 섬나라 日本에 살고 있는 우리 同胞들은 '民團'과 '朝總聯'으로 나누어져 그야말로 서로 헐뜯고 對立하고 있는데 대하여, 그 몇 배가 되는 우리 同胞들이 滿洲에서는 저렇게 한뭉치로 和合하여 思想과 體制를 초월해서 살고 있는 거룩한 모습을 볼 때 결코 우리 民族의 바탕에 흠이 있는 반 백련 얼마인가?(시 한 수)
| 무정세월 흘러흘러 반백년 타양살이, 부모형제 그리면서 반백년 살았건만, 고향길이 멀고멀어 반백년 걸리는가, 하나님께 물어보자 반백년 얼마인가. 남쪽하늘 바라보며 반백년 타양살이, 아들낳고 딸낳아서 반백년 살았건만, 고향친척 서로몰래 반백년 지났구나, 하나님께 물어보자 반백년 얼마인가. 손곱아서 해여보니 반백년 타양살이, 검은머리 백발되게 반백년 살았건만, 고향땅에 못간지도 반백년 되었구나, 하나님께 물어보자 반백년 얼마인가. 금수강산 리별하고 반백년 타향살이, 고향땅을 생각하며 반백년 살았으니, 닥쳐오는 좋은세월 반백년 소원풀리, 하나님께 물어보자 반백년 얼마인가. 吉林省 舒蘭縣 金基鎬 送 |
것이 아니라, 그 環境에서 오는 後天的인 副産物임을 느끼게 하였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넓은 땅에 살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平凡한 眞理도 깨달았다.
民族 統一의 순수한 싹이 오히려 滿洲에서 자라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같은 共産主義 國家에 살면서도 결코 北韓에 政治的으로 편중되어 있지 않고 오직 統一된 朝鮮族의 後裔로서 살고 있는 偉大한 民族의 참모습을 보았다. 뜨겁고 순수한 同胞愛는 思想도 政治 問題도 超越함을 보았다.
잃어버리고도 또한 祖國으로부터 까맣게 잊어버린 滿洲 땅에서 끈질기게 살고 있는 同胞들의 모습을 보고, 땅덩이는 王朝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民이 지킨다는 眞理를 깨달았으며, 王權은 時代마다 지나가지만, '民'은 永遠함을 目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