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산업화와 글자꼴
김 진 평 / (서울여대, 산업 미술학)
Ⅰ. 머리말
현대는 대량 전달의 시대이다. 많은 양의 각종 정보가 인쇄 매체와 전파 매체 혹은 영상 매체를 타고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 매체 중 특히 시각에 의한 매체에서 정보 전달의 많은 부분이 글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글자의 효율적 사용이야말로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좌우한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글자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서도 용도에 따라 적절한 형태와 기능을 지닌 글자(여기서는 산업화된 글자)가 골고루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는 바로 글자의 산업화가 잘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 여러 민족의 고유 글자 중에서 아주 독특하고 과학적 글자인 한글을 만들어 사용한 지 이미 53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처럼 중요한 글자의 산업화에 있어서는 한자 문화권의 일본이나 알파벳 문화권의 여러 선진국들의 수준에 이르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그동안 한글의 어문학적 측면의 연구는 많은 진전이 있어 왔으나, 산업화에 따른 한글의 적응성이나 가독성 및 한글 활자체의 특성이나 인지도(認知度) 등 실제 산업화 단계에 필요한 글자꼴의 연구와 개발이 매우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글자 산업의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이러한 면에 눈을 돌려, 자국(自國)의 글자꼴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를 기초로 한 새로운 활자체의 개발을 통해 글자의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놓았다. 물론 한 나라의 어느 한 분야만이 유독 발전될 수는 없으며 글자 산업의 발전도 공업 기술과 산업 및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친 발전에 힘입는 것은 틀림없다. 선진국들의 글자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중반의 기간 동안, 우리는 글자 산업의 자생적(自生的) 기술 축적과 연구 개발이 불가능했던, 일제 침략과 6·25동란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를 보냈다.
비록 뒤늦기는 했으나, 우리도 산업화에 적합하고 기능적이며 가독성과 미적 수준이 높은 한글의 글자꼴에 대한 연구가 하루 빨리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기초로 새로운 활자체가 계속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산업 전반에 걸친 기술 혁신이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는 현대에 있어서 이러한 글자꼴의 연구와 개발은 더욱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발달된 공업 기술이나 하드웨어(hard ware)는 선진국에서 직접 도입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글자꼴에 관한 연구나 소프트웨어(soft ware)는 다른 나라에서 들여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한글의 산업화 과정과 그와 관련되는 글자꼴의 여러 특성들을 파악해 봄으로써 보다 바람직한 한글 산업화의 방안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Ⅱ. 한글의 산업화 과정
Ⅲ. 산업화의 글자꼴
한글의 산업화 과정에서 살펴본 바, 대체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활자와 사진 식자의 모든 운용 시스템이 한글의 적성과 우리의 글자 생활 패턴을 충분히 고려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기 보다는, 결국 이웃나라의 설비와 운용 시스템, 심지어 글자체의 이름까지(명조, 고딕, 나루 등……)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또한 활자 방식에서 사진 식자 방식으로 활자의 판짜기 방법이 점차 바뀌어 가는 경향이 있고, 사진 식자의 식자체 개발이 활자체보다는 쉬운 장점이 있음에도 대규모의 투자에 의한 독자적인 국내의 기술 축적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글자 산업화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대단히 안타까운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인쇄, 출판, 나아가서 문화 전반에 걸친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컴퓨터가 발달되어 정보 처리용 글자의 개발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으나 그 기본이 되는 활자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바탕이 이루어져 있지 못한 것도 이러한 낙후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한글의 산업화에서의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러한 활자 사진 식자 분야가 아니고 사무기기 분야에서의 수동 기계식 한글 타자기 발전 과정에서였다. 대표적인 타자기의 예에서 발견되듯이 타자기의 자판 배열을 단순하게 할수록 신속하고 능률적이 되지만 반면에 타자된 글자꼴은 일반에게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일반 사람들이 국민학교 이래로 배우고 읽어오던 한글의 글자꼴은 글자마다 비슷한 면적을 이루도록 균형을 잡은 활자나 사진 식자인데 반하여 타자기 글자꼴은 같은 크기의 닿자와 홀자를 모아씀에 따라 글자의 면적과 균형이 다르기 때문에 어색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업화된 글자꼴의 두 가지 유형이 제기되었는데, 활자, 사진 식자와 같이 소리마디별로 닿자, 홀자를 묶어서 균형을 만든 옹근 활자와 타자기와 같이 쪽자(닿자, 홀자)별로 나뉘어 그때그때 모아져서 글자를 이루는 모임 활자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산업화에 따른 문제점을 살펴본다.
먼저 옹근 활자의 형태로 활자체를 개발할 때, 이러한 글자꼴의 균형에 익숙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으나 개발해야 할 활자 수는 한글이 대략 2300자 정도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글자 생활에는 한자도 있고 그것도 상용 한자 1800자(1972년 2월)만 쓰이는 것이 아니므로 빈도가 낮게 쓰이는 한자 모두를 합치면 약 3600자가 갖추어져야 되므로 한글, 한자 합치면 5900자라는 엄청난 활자를 만들어야 비로소 1종류의 활자체가 개발된다. 대소문자 합해서 52자뿐인 영자 알파벳의 경우 다양한 활자체가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 것을 볼 때, 활자 수의 방대함이 한글 산업화의 가장 큰 어려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모임 활자의 원리를 응용하는 방법이 제기될 수 있다. 이때에 타자기 글자에서 보듯이 쪽자의 벌 수를 너무 단순하게 설정한다면 글자꼴에서 문제가 되므로 쪽자의 벌 수와 글자꼴의 문제를 조화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자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한자를 자주 사용하는 일본에서도 상용 한자 1,945자(1981년 10월 1일 확정) 안에서만 철저하게 사용하는 것을 볼 때 한자 사용에 대한 뚜렷한 원칙의 필요성이 느껴지게 된다. 영자 알파벳의 경우와 달리 우리와 같이 한자를 쓰는 일본 글자의 산업화의 경우에도 일본의 가나(假名) 142자와 한자 약 2,110자를 합쳐 약 2,250자로 활발하게 활자체가 개발되고 있다.
한글의 산업화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은 위에서 언급된 것 외의 많은 문제가 있으나, 이러한 배경을 요약하여 한글의 산업화를 바람직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관련 분야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거시적(巨視的)이며 미래지향적인 확고한 글자 정책이 세워져야 한다. 이러한 글자 정책은 나라에 국어 심의회와 같은 기구를 두어 한자 사용에 대한 원칙이나 한자 약자(略字)표기에 대한 원칙은 물론 한글의 외래어 표기나 각종 표기법 등, 현재의 글자 사용에 대한 원칙에서부터 궁극적으로 글자 사용을 더욱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검토, 반영, 시행토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공소의 각종 문서와 신문, 잡지 등 언론, 출판, 인쇄소와 일반 사회, 개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이를 준수하도록 하며, 또 학교 교육에 반영시킴으로써 더욱 복잡해져 가는 현대 정보사회 속의 글자 생활에 혼란을 주지 않고 점진적으로 합리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꼴에 대한 깊은 연구와 그에 따른 글자꼴의 설계와 글자체 개발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는 관련 학계(시각 디자인 분야, 전자 공학 분야, 서지학, 국어학 혹은 조형 심리학 분야 등)와 산업계(건축, 포장, 광고, 언론, 출판, 인쇄, 사무기기, 컴퓨터 회사 등)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연구 결과가 실제 산업화에 반영되어 기여할 수 있고, 산업화 과정의 글자꼴과 사람이 느끼는 반응에 대한 문제점이 다시 연구 대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자꼴 연구에서는 이론상으로 아무리 훌륭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연구의 결과가 산업화되어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증명이 되어야만 객관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자꼴에 대한 연구가 산업계와 공동으로 진행된다면 실질적인 성과가 기대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연구 대상에 한글은 물론 우리가 아직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글자꼴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제껏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연구 개발한 한자 활자를 사용해 왔다. 한자를 앞으로 사용할 수도, 사용 안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글자로 보아서, 역시 연구 대상으로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는 글자꼴로 백안시한다면, 당장 글자 생활에서 한자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여전히 한자에 관한 한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후진성을 면키 어렵게 될 것이다.
한글의 글자꼴에 대한 연구의 방향도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으나, 역시 산업화에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쪽자(닿자와 홀자)의 표준화와 그에 따른 글자꼴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산업화에 유리한 방향은 한글의 쪽자를 될수록 간단하게 표준화하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그 글자꼴은 일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가는 한글의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성격의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의 연구의 초점은 이러한 한글의 이원성(二元性)을 조화시키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며 어느 한 쪽 면을 부정하거나 무시해서는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원성의 어느 한 쪽 면도 모두 취약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한글의 글자꼴이 세로쓰기를 기본으로 만들어 졌으며 활자꼴이 정해질 때까지 세로로 씌어져 옴으로써 글자꼴이 진화되어 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 대한 타당성 있는 한글 글자꼴의 연구 결과들이 한글 산업화에 계속 적용된다면 이를 신중히 검토하여 한글 교육과 일반 글씨 생활에서도 반영시켜 나감으로써 점진적으로 글자꼴을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세 번째로, 새로 개발한 글자체는 저작권법(著作權法)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한다. 글자는 만인 공유(萬人共有)의 문화적 재산이다. 그러나 그 글자를 연구 개발하여 특정한 미적, 기능적 성격을 갖는 글자체를 만들어 내었을 때 그것은 저작물로서, 만든 사람의 작품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글자체의 소유권이 명확하게 인정되어 그에 응한 인세(印稅)가 반드시 지불됨으로써 매년 글자체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글자체에 대한 법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만들어 낸 글자체라도 하루아침에 복제되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보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정에서 글자체의 개발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Ⅳ. 맺는 말
한글의 산업화, 이는 우리에게 가장 필수적이면서도 아주 뒤떨어져 있는 당면 과제 중의 하나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한 분야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바람직한 성과를 이룰 수가 없다. 그 분야와 관련되는 모든 산업계와 학계의 노력이 모아져야 하며 그 위에 거시적인 나라의 정책이 앞설 때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한글의 산업화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한글의 산업화에 관련된 학계의 많은 연구와 관련 산업계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자체 개발이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문화적 교육적 측면의 확고한 국가의 글자 정책과, 연구 개발 의욕을 촉진할 수 있는 법적 보호 장치가 갖추어질 때에야 비로소 명실공히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 우리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