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발달사상에서 본 한글


박 병 채 / (고려대 교수, 국어학)

1.

언어라고 하면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포괄한다. 그러나 문자 언어의 기원은 음성 언어와의 관련 아래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음성 언어가 음향적 체계로서 그때그때의 청각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면 문자 언어라고 하는 기호는 음성 언어와는 관계없이 도형 체계로서의 시각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생한 것이다.
    인류는 일찍이 어떤 제 뜻을 남에게 전달하거나 또는 남에게서 어떤 뜻을 전달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왔고 그 결과 극히 원시적이기는 하나 어떤 기호 양식을 만들어 불완전하나마 의사소통을 꾀하여 왔다. 실제로 역사 시대에 들어오면 맺은 새끼줄(結繩)을 가지고 뜻을 전달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남북아메리카를 비롯 한국 중국 일본 티벳 및 유럽 등 세계 각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승 양식의 대표적인 예는 16세기 스페인인이 침입하기까지 남미 페루에 거주한 원주민 잉카족이 사용하고 있던 기프스(guipus)와 잉글랜드 중부지방 주민들이 사용하였다는 봉력(棒曆)이라는 역문자(曆文字)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도 양서(梁書) 신라전에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기어 신표를 삼았다(無文字 刻木爲信)"는 기록도 위의 봉력과 비슷한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호 양식은 원시적이고 관습적인 것으로 설명이 없이는 알 수 없고 한번 설명의 줄이 끊기면 이를 이해할 수 없는 극히 제한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인류는 다시 이 원시 기호 단계에서 한발 전진하여 회화 즉 그림에 의한 기호의 전달 형식을 창안하였다. 이 그림에 의한 전달 형식은 누구든 쉽게 사용할 수 있고 그 뜻도 아무 예비지식이 없이도 그 대상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림과 말 사이에는 아무 관련성도 없이 서로 단독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다. 이 회화 기호의 대표적인 예는 캐나다의 스페리아호 부근의 벼랑 암석에 그려진 그림으로 이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추장 마이앵강의 원정 공훈을 새긴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남 남해 이동면 양하리 금산 서남 능산의 화강암반에 새겨진 선각(線刻) 그림도 이와 비슷한 회화 기호의 하나이다. 물론 이 회화 기호의 뜻은 모두가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분히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표현 방법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원시 기호나 회화 기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문자와는 전연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의 기호 전달 형식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독립된 문자 서법을 창조하는 젖줄이 되었다는 면에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2.

위에서 말한 단순한 회화 기호는 다시 전진하여 서법에 사용되는 기호로 발전하여 회화 문자(picturical writing)와 표의 문자(dieogram)가 발달하였다. 회화 문자는 그리는 대상이 단독 기호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 회화 문자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흔히 있는 자연물이면 세계의 어느 곳이든 비슷한 방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유사한 분석과 추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회화 문자가 회화 기호와 다른 점은 회화 기호가 대상을 그리는데 그림이 복합적이고 구상적인데 반하여 회화 문자는 대상을 하나하나 드러내는 단독 기호이고 그림은 추상적인 데 있다. 회화 기호인 마이앵강의 원정을 그린 그림을 보면 카누를 그리고 그 배 위에 아홉 개의 종선이 보인다. 이는 카누 속에 사람이 아홉 명 타고 있었다는 뜻인데 카누와 사람과 아홉이라는 사물과 대상을 복합적인 하나의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카누와 사람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회화 문자라면 카누와 사람을 분리하여 카누는 어느 경우든 카누로 사람은 언제나 사람으로 단독 기호화하여 서법상 보편화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회화 문자의 발달은 서법을 전제한 기호 기능을 수행하는 크나큰 변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회화 문자의 추상성은 뒤로 내려올수록 더더욱 추상화되어 애초의 유사성을 분간 못할 만큼 애매하게 변하고 있다. 이는 회화 문자가 개별적인 단독 기호로서 보편화되고 임의로 선획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회화 문자와 관련하여 회화 문자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별종의 기호인 표의 문자가 발달하였다. 표의 문자는 회화 문자로서는 직접 표현할 수 없는 사상이나 성질 또는 행동 때로는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물체 등을 다양하게 나타내는 기호이다. 회화 문자가 단순한 자연의 모방이라고 한다면 표의 문자는 그 창시자의 발명력을 필요로 하는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회화 문자와 관련하여 발달된 표의 문자에는 중국의 한자와 이집트 문자가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중국 한자는 지금까지 계속 표의 문자로 유지되어 온 반면 이집트 문자는 표의 문자에서 표음 문자식으로 개조되면서 현재 표음 문자로 변혁되어 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외에 고대의 표의 문자로는 기원전의 스메르 문자나 아쓰가도 문자 등이 있으나 이들은 설형 문자(cuneiform writing)로 알려져 있는 문자이며 상형적 회화 문자에서 발전한 점은 중국의 한자나 이집트 문자와 같다.

3.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기호나 문자는 말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또한 그런 기호나 문자의 자료들도 말과는 아무 연줄 없이 발생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원시 기호나 회화 기호, 또는 회화 문자나 표의 문자의 기호를 알려고 할 때, 구태여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혜지는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던 기호와 말을 연줄 지워 기호를 가지고 제가 말하는 음과 일치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에서 창출된 것이 바로 표음 문자의 출현이고 이 표음 문자의 출현은 문자의 기능을 완전히 변혁시키고 말았다.
    표음 문자(phonogram)를 창조한 인류의 발상은 극히 합리적인 사고의 진전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하나의 물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우리말 '나무'는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어의 경우 '→木'에 대응하는 회화 문자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또 하나는 영어의 경우 tree에 대응하는 실제 말에 의하여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의 표현 형식은 물론 처음에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인류의 혜지는 점차 회화 문자 '木'은 자기들이 내는 음이 바로 '나무'라고 하는 자연물을 뜻할 뿐 아니라 영어의 tree라고 하는 말을 실제로 입으로 낼 때의 음도 아울러 나타낸다고 하는 합리적 생각에 미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tree라고 하는 말하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곳에서도 tree라고 하는 말을 소리낼 때의 음도 나타내기 위하여 회화 문자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은 표음 문자 창조 과정의 발상과 원칙은 어느 곳에서나 일치한다. 그러나 회화 문자를 응용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는 말에 따라 지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한자나 이집트 문자가 근원적으로는 회화 문자와 맺어진 음가를 띄고 있는 것이지만 중국어는 단음절어이기 때문에 중국의 표음 문자는 단음절의 음가를 가지는 반면 이집트어는 다음절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절의 표음 문자를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어의 이른바 표음·표의의 합성어인 형성 문자(形聲文字)에서 예를 들면 '方'자는 '네모(四角)'란 뜻의 'fāng'이라는 표음 문자다. 이 '方'은 물론 옛 회화 문자에서 변천한 것이다. 이 표음 문자 '方 fāng'에 편(扁)인 '土·言' 등을 보태어 '坊·訪' 등을 전개하여 '方→네모'라고 하는 뜻과 구별한다. 즉 '坊'은 편이 땅(土)이므로 양쪽의 합성 기호는 '장소' 또는 '통로(通路)'를 뜻한다. 그리고 '訪'은 편이 '말(言)'이므로 양쪽의 합성 기호는 '물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方 fāng'이란 표음으로 동일하게 발음하면서 그 뜻은 편을 따라 '方→네모, 坊→장소·토로, 訪→물음'이라고 하는 관념과 맺어져 있는 말임을 독자에게 생각하도록 암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표의 문자의 범주에 드는 현용 한자도 어느 시기에는 표음 문자의 단계를 거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집트 문자를 보면 은 '입'을 나타내는 회화 문자인데 이에 대응하는 말은 'r'이였다. 이 기호 'r'이 표음 문자로 사용되면서 'r'이라고 하는 단음절의 음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r'은 이집트 말에서는 원칙적으로 모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불편이 있었기 때문에 'r'은 'ro'라고 하는 단음절로 발음되었다. 또한 ¿는 '듣는다'는 표의 문자이며 기호는 귀를 나타낸다. 이에 대응하는 이집트 말은 'śam'이므로 이것이 표음 문자로 사용되자 자연히 이 음절의 'śam'으로 굳어진 것이다.
    말이란 음절마다 나눌 수 있으며 음절은 발음할 수 있는 말의 최소 단위가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초기의 이집트 문자의 표음식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의 기호가 단어 전체의 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의 기호가 다음절까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음 방식의 불편을 깨달은 인류는 그 후 다시 각 음절을 개별적인 표음 기호로 나타내는 체계인 음절 문자(syllabic writing) 형식으로 개량하게 된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설형 문자와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는 이런 단음절 표음 문자 방식의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cv), 또는 모음(v)만으로 발음되는 개음절 언어인 일본의 가나(假名) 글자도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음절 문자는 그 이전의 문자에 비하면 확실히 편리한 문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글자의 떼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불필요한 모음을 동반하게 되어 어색할 뿐 아니라 기호의 수도 많아 불경제적인 점이 없지 않은게 사실이다. 실례로 현재 쓰이고 있는 알파벳 방식의 at,ak,ap,ta,ka,pa란 음절을 쓰려면 a,t,k,p 네 개의 기호만 가지면 충분하다. 그러나 음절 문자라면 그 수대로 여섯 개의 기호가 필요하다. 이런 수적 번잡성을 극복하게 된 것이 현재 쓰고 있는 알파벳식의 자음과 모음의 분리였다. 이는 기호 하나하나가 하나의 자음 또는 하나의 모음을 나타내는 이른바 음소 문자·단음 문자로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음소 문자·단음 문자의 창안은 음절 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발전한 것으로 인류가 그들의 합리적 선택에 의하여 진화시킨 세계 문자사상 최고의 성과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 서구의 알파벳은 몇 단계의 진화 과정을 거친 것임을 알 수 있고 긴 역사를 통하여 부단한 노력으로 이룩된 인류 문화의 빼어난 유산임이 분명하다.

4.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세계 문자 발달사상 최고 성과라 할 수 있는 알파벳 방식의 음소 문자 체계(alphabetic writing system)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글이 1443년 서구의 알파벳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음소 문자로서 창제된 이래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실용적인 문자로서 민족 문화 창조의 연모가 되고 있는 소치는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겨레도 '刻本爲信'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자 발달사상 원시 기호의 첫 단계도 경험하였고, 남해 이동면 양하리 금산서남 능선의 암반에 새겨진 선각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회화 기호의 둘째 단계도 경험하였다. 그리고 회화 기호에서 이를 추상화 선획화하여 일찍이 회화 문자나 표의 문자로 유도하지는 못했을망정 중국 한자를 빌어다가 그 음과 새김 그리고 선획을 이용하여 구결·향찰·이두를 창안하여 우리말을 표기하기에 노력하면서 보편적인 문자 체계를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문자 체계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하는 진통을 겪다가 그동안 쌓아올린 겨레의 혜지는 드디어 3,4단계를 뛰어 넘어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음소 문자 한글을 창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문화적 저력의 현현이요, 우리 문화사상 가장 빛나고 값진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한글이 갖는 독창성과 과학성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한글의 독창성으로는 재래의 문자 형상과는 전연 다른 쓰고 배우기에 편리한 실용적인 자모를 생성함으로써 우리말의 모든 언술을 기술할 수 있는 음소 단위의 문자 체계를 확립하였다는 데 있다. 오늘날 문자 발달사상에서 가장 편이한 문자가 음소 문자임을 생각할 때 한글의 실용성과 편리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글 자모의 형상에 대하여는 종래 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이설이 제기되어 왔고, 1940년 한글 창제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가 빛을 보아 한글 창제의 당사자들이 소상히 밝힌 대로 발음 기관 상형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도 꾸준히 다른 문자의 모방설이 제기되고 있다. 원래 한글 자형의 모방설은 세종에게 올린 최만리의 상소문에서 세종이 한글의 근원에 대하여 언급한 "한글은 모두 옛 문자를 본뜬 것이지 새 문자가 아니다(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는 말을 받아 "글자 모양은 비록 옛 전자를 본뜬 것이라고 하겠지만 용음합자는 옛 전자에 어긋나고 있다(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盡反於古)"고 한 최만리의 '字倣古之篆文'과 정인지가 훈민정음 서문에서 "꼴을 본뜨되 문자가 옛 전자와 비슷하다(象形而字倣古篆)"고 한 '字倣古篆'이란 기록에서 한글의 '古篆起源說'이 주장되면서 여러 설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글 창제에 직접 관여한 당사자들이 밝힌 대로 한글 자형은 근원적으로 조음 작용에 관여하는 발음 기관을 상형하고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명백하다는 사실과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어느 다른 나라 문자와도 그 기원을 찾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글이라고 해서 문자사상 돌연변이적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떠한 과학적 발상이든 단계적인 발전을 거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글 자모의 형상을 창출함에 있어서도 고래로 접해 온 한자의 옛 글자나 몽고 문자·파스파 문자·만주 문자 멀리는 산스크리트 문자 등에 대한 선획 관념이 종합적으로 검토되고 참고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은 이들 문자와는 전연 다른 방향에서 극도로 추상화된 선획으로 자모를 분리하여 음소 문자를 창출한 것은 고도의 문자 의식이 발로된 독창적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한글이 갖는 과학성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것은 첫째 자형의 독창적인 상형성, 둘째 자모의 생성 조직의 체계성을 들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에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는 각각 그 꼴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正音三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라 하여 한글을 창제함에 있어 자형의 상형 원리를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자음 17자 중 조음 위치에 따른 발음 기관의 다섯 부위를 상형하여 다섯 개의 상형 문자와 모음 11자 중 하늘·땅·사람 삼재(三才)를 상형하여 세 개의 상형 문자를 만들어 한글의 기본적 자형을 독창적으로 확립하였다. 자음에서 어금니에서 나는 소리는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꼴을 본떠 로, 혀에서 나는 소리는 혀가 윗잇몸에 닿는 꼴을 본떠 로, 입술에서 나는 소리는 입의 꼴을 본떠 로, 이에서 나는 소리는 이의 꼴을 본떠 로,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는 목구멍의 꼴을 본떠 로 자형을 상형하였다. 이와 같은 다섯 자음을 확정하고 다시 모음의 창출에서는 조음 기관인 혀가 오그라드는 후설 모음은 둥근 하늘을 본떠 로 조음 기관인 혀가 오그라드는 중설 모음은 평평한 땅을 본떠 로, 조음 기관인 혀가 오그라들지 않는 전설 모음은 서 있는 사람을 본떠 로 세 모음의 자형을 상형하였다. 그러므로 한글 28자의 자모가 모두 따로따로 상형 문자로 만들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각기 조음 부위에 따라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자모만을 발음 기관의 꼴을 본따 자형을 창출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글이 표음 문자로서 소리의 산출 기관인 발음 기관을 상형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글의 기원 해명에 중요한 뜻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알려진 어느 문자에서도 발음 기관을 상형한 문자를 찾아볼 수 없다는 면에서 한글은 다른 어느 나라 문자와도 기원상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발음 기관을 상형한 자모 8자는 앞으로 많은 표층 구조를 생성할 수 있는 심층 구조를 근원적으로 창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 상형 자모 8자는 동일 계열음을 생성하는 본이 되어 가획과 배합의 원리 아래 생성 조직화되어 확장되었다. 자음의 조직에서 아음 계열은 ㄱ→ㅋ(ㆁ), 설음 계열은 ㄴ→ㄷ→ㅌ, 순음 계열은 ㅁ→ㅂ→ㅍ, 치음 계열은 ㅅ→ㅈ→ㅊ, 후음 계열은 ㅇ→ㆆ→ㅎ 등 한 획씩을 더하는 방법으로 확장하여 생성된 자음 조직을 시각적으로도 쉬 알 수 있다. 반설음 ㄹ, 반치음 ㅿ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 모음의 조직에서도 후설 계열은 ㅣ+ㆍ→ , ㆍ+ㅡ→ , 중설 계열은 ㆍ+ㅣ→ㆎ→ , ㅡ+ㆍ→ 등 자음의 가획 생성 조직과는 달리 기본 상형자 ㆍㅡㅣ를 배합하는 배합 생성 조직으로 모음 체계를 확립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글 자형의 생성 조직 전개 과정은 매우 정교하고 생산적인 면에서 주목해야 하며 문자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겨레의 독창적이며 과학적인 문화유산으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다.

5.

문자는 기호 기능으로서 쉬 익히고 쉬 쓸 수 있고 말을 자유자재로 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한글은 문자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조직임을 거론하였거니와 우리의 실제 문자 생활에서 한글이 갖는 기호 기능은 어떠한가를 보면 한글 창제 당시 이미 당사자의 한 사람인 정인지가 훈민정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스물여덟 자로서 굴러 바뀜이 끝이 없어 간단하고도 요긴하고 정묘하고도 통하는 까닭에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지 않아도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 못되어 배울 수 있다(以二十八字 而轉換無窮 簡而要精而通 故智者不終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라 하였고 다시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라도 다 얻어 쓸 수 있다(雖風聲鶴淚 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고 한 것은 한글이 갖는 문자의 기능을 웅변해 주는 말이며 미래를 투시한 놀랄만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현재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터에 한글이 갖는 기호 기능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