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의 表意性에 대하여


李 翊 燮 / (서울대 교수, 國語學)

1.

한글이 字母 文字이면서 글자 하나하나에 동등한 자격을 주어 一列로 풀어쓰기를 하지 않고 音節 단위로 合字하여 쓰는 이른바 모아쓰기 방식은, 비록 한글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한글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한글이 세계 여러 文字 중에서 어떤 個性을 인정받는다면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 모아쓰기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는 한글의 字形의 독창성과 과학성 및 조직성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이 모아쓰기 방식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것이 漢字, 또는 주변의 어떤 文字의 영향이리라는 추측, 그리고 특이한 방식이라는 지적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 본격적인 논의는 아니었으며, 더구나 이 방식이 우리 문자 생활에 어떤 利點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기이하리만치 입들을 다물고 있었다.(1)
    일찍이 최현배 선생은 「글자의 혁명」(1947)에서 예외적으로 한글의 모아쓰기에 대해 상당히 긴 논의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논의는 모아쓰기의 단점만 확대하여 모아쓰기 방식은 버리고 字母 하나씩을一列로 풀어쓸 것을 主唱하는 것이었다.
    「글자의 혁명」에서의 이 主唱은 그 후 거의 아무런 反警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글자의 혁명」에서의 모아쓰기 방식에 대한 비난은 다시 擧論할 가치조차 없는 허황한 주장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 立論은 수긍이 가지만 오랫동안 익혀 온 모아쓰기 방식을 쉽게 버릴 수는 없으니 불편하지만 現行대로 그 방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러니 그 장단점을 굳이 들출 것이 없다는 것일까.
    필자는 「글자의 혁명」에서의 주장 정도로 모아쓰기의 基盤이 흔들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아쓰기의 단점이 과장된 이 주장 이래로 이에 대한 反論이 없이 지금껏 있었다는 것은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이 小稿에서는 주로 「글자의 혁명」에서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간략히 밝혀 보고자 한다.

2.

글자의 혁명에서 모아쓰기의 단점으로 지적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는 '풀어쓰기'란 용어를 쓰지 않고 '가로씨기'(이를 앞으로 '가로쓰기'로 바꾸어 쓰겠다)라 하여 橫書와 풀어쓰기를 함께 묶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그리하여 가로쓰기의 장점을 논하는 자리에서 縱書의 단점과 모아쓰기의 단점이 뒤섞여 나온다. 우리로서는 그중 모아쓰기의 단점만 골라 보아야 할 것이다.
    모아쓰기의 첫째 단점으로 지적된 것은 모아쓰기는 그 筆順이 무원칙적이라는 것이다. '가, 네,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 굴'등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각, 뇌, 닭, 꽝' 등은 그 두 가지 순서가 뒤섞여서 쓰임으로써 그 쓰는 순서에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漢字의 영향으로서 글자의 모양을 억지로 정사각형에 넣으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시대 안목이 그렇게 만든"것으로 "세종 임금께서 오늘에 다시 오신다면 당연히 가로씨기를 주장하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p.115)라고 하면서 '각, 뇌, 닭' 등의 筆順이 上下, 左右 등 어느 한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은 일을 두고 "참 기괴하기 짝이 없나니"(p.114)라고도 하였다.
    우리로서는 이런 정도의 일이 왜 이처럼 過大히 是非의 대상이 되었는지 이해키 어렵다. 한 字母씩 풀어써도 'ㄹ' 字며 'ㅍ' 字며 'ㅔ' 字며, 또 로마字의 H 字도 上下, 左右로 왔다갔다 하도록 된다. 전혀 문제 삼을 일이 아닌 것을 '참 기괴하기 짝이 없다'고까지 한 것은 정말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지적된 것은 活字의 數다. 활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생기는 불편으로 「글자의 혁명」은 공장 면적이 커야 하는 점, 採字, 植字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점, 그로써 인쇄 비용이 많이 들어 책의 출판이 늦어지고 책값이 비싸지고 그만큼 독서 인구를 줄이는 점, 인쇄에 誤字가 많아지는 점,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리노 타이프와 같은 利器를 사용할 수 없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글자의 혁명」에서 풀어쓰기를 주창한 부분 중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부분이 이 부분일 것이다. 모아쓰기가 활자의 數를 많게 하고 그것이 문자 생활의 스피드化와 기계化에 沮害 요인이 된다는 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뒤에서 언급되듯이 우리는 이것이 文字의 기능의 한 面, 그것도 덜 중요한 한쪽 面(읽는 쪽이 아닌 쓰는 쪽)만 過大히 확대하고 다른 한 面은 소홀히 본 데에서 얻어진 결론이라 판단한다.
    다음으로 지적된 것은, 풀어쓰기는 表音文字의 表意文字化가 "가장 완전히 되어서"(p.121) 글의 의미 파악이 빨리 되는 이익이 있음에 반해 모아쓰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를 퍽 당혹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所論에는 몇 가지 혼란이 보인다. 먼저 北較의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 그것이다. 풀어쓰기로써 表意文字化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풀어쓰기는 단어 단위로 띄어쓰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그 유일한 이유로 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종래 우리 맞춤법이 모아쓰기를 하면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그러한 表意文字化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예로 들고 있다(p.121). 마치 모아쓰기는 띄어쓰기가 불가능한 듯한 論調인 것이다. 큰 혼란이 아닐 수 없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모아쓰기 탓이 아님이 분명한데 '가나다라'를 붙여 씀으로써 그것을 띄어 읽을 경우가 8가지나 되며 '가나다라마'의 경우에는 16가지나 된다는 것을, 일일이 그 가능한 組合의 실례를 들어 보이면서까지 논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徒勞인지 이해키 어렵다.
    더구나「글자의 혁명」도 곧이어 모아쓰기에서도 단어 단위의 띄어쓰기가 가능함을 말한다(p.123). 그러나 풀어쓰기 때보다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독립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 단어를 한 덩어리로 풀어쓸 때 보다는 表意化에 不利하다는 所論을 편다.
여기가 필자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풀어쓰기의 利點이 문어 언어의 表意性을 높이는 데 있고, 모아쓰기가 그 점에서 풀어쓰기보다 不利한 방식이라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필자와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반대의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무엇이냐 하면 어떤 表記法이 指向해야 할 방향을 表意化에 두고 있는 점은 필자와 같은 입장인데 모아쓰기가 풀어쓰기보다 表意化에 不利하다는 판단은 필자의 판단과는 반대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3.

表記法(맞춤법 또는 正書法)이 어떠해야 하느냐, 어떻게 만들어져야 가장 理想的이냐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관점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非機能論者(prefunctionalist)的인 입장과 機能論者(functionalist)的인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2)
    前者는 표기법은 되도록 表音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문자 내지 표기법은 소리 언어(spoken language)를 위해 있고 그 代用物로서만 가치를 가진다는 思考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우리가 문자 언어(written language)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때는 그 문자 언어를 일단 소리 언어로 바꾸어야 하며 따라서 표기법은 소리 언어의 발음의 반영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機能論者들은 문자 언어의 獨自性을 강조한다. 처음 글을 배울 단계에서는 문자 언어를 소리 언어로 바꾸는 과정을 밟지만 읽기에 숙달된 다음부터는 문자 언어를 통해 직접, 즉 그 문자 언어를 소리 언어로 바꾸는 과정을 밟는 일 없이 문자 언어에서 직접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重視하며 그로써 문자 언어가 반드시 소리 언어의 代用物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의미 파악에 有利하다면, 다시 말하면 독서 능률에 도움을 준다면 '충실한 表音'에서 과감히 벗어날 수 있다는, 아니 벗어나야만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영어의 네 同音語 right-rite-wright-write의 네 다른 스펠링은 일찍부터 이들의 환영을 받았다. 동일한 발음[rait]가 주변 文脈의 도움 없이 직접 눈으로 들어와 주는 이들, 表音에 불충실하기 이를 데 없는 표기가 환영받는다는 것은 非機能論者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필자는 이 機能論者들의 연구가 우리 學界에 좀더 널리 소개되고 그에 대한 논의도 좀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한 생각에서 그동안 小稿도 발표한 바 있지만(3) 맞춤법에 관한 관심은 조금도 줄지 않으면서 그 視角이 좀처럼 이 방면으로 돌려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표기법이 철저히 소리 언어에 충실하려면 이른바 '1音素 1字'(one letter per phoneme)의(4) 원리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이 원리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타당성이 없다. 그럼에도 이 '1音素 1字'의 원리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것이 표기법의 理想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널리 깔려 있는 듯하다.     '1音素 1字'의 원리는 文字를 만들 때의 원리, 또는 文字 體系 자체의 원리로서는 훌륭한 것이지만 표기법의 원리로서는 결코 적절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원리는 주로 Saussure, Bloomfield 및 Bloomfield 추종자 등의 構造 言語學者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 이들은 문자 언어에만 매달려 있던 19세기의 歷史 言語學에 대한 반동으로 소리 언어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크게 앞세운 나머지 문자 언어란 소리 언어의 다른 한 모습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었고 그로써 문자 언어에 대한 19세기까지의 지나친 존경심과 優待를 허물어뜨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이번에는 문자 언어를 너무 格下시킨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더구나 미국 학자들은 그때까지 문자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던 아메리칸 인디언의 언어를 文字化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表音 爲主의 표기법 원리에 매력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나 그 이후에나 1音素 1字의 원리가 어느 언어의 표기법에 實用된 일은 없다. 그 원리의 정신으로 영어 표기법을 고치려고 결성되었던 모임도(6) 아무 일도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다. 이론은 어떻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바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문헌 중에서 이 미국 구조 언어학자들의 허망한 이론을 이론적으로 반박하는 글은 별로 없었다. 이것이 우리 학계가 너무 오래 이 이론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던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거기다가 李基文 著「國語 表記法의 歷史的 考祭」(1963)이 Pike의 1音素 1字의 원리를 좋은 이론인 것으로 평가하고 그로써 15세기의 국어 표기법이 현행 표기법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한 일은 우리 학계에 적지 않은 惡影響을 끼쳤다고 판단된다. 이 방면의 이론을 직접 접할 기회가 적던 우리 학계에 이 斯界의 권위자의 이러한 소개와 평가는 어쩔 수 없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인데 그 영향이 우리로서는 惡影響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잘못된 방향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李基文 교수도 그 이후 생각이 바꾸었거니와 20세기 초의 특수 상황에서 한 때 움텄던 表音 爲主의 표기법 이론에 계속 매달리는 것은 우리 학계의 한 後進性의 노출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독서 생활을 조금만 정밀히 들여다보면, 문자 언어가 소리 언어로 환원되지 않고서도 의미 전달을 바로 해 주는 힘이 있음은 쉽게 발견된다. 과거 영어나 독일어를 배워 본 사람이면 그쪽의 소리 언어를 제대로 모르고도 많은 지식을 原書를 통하여 습득한 일을 다 잘 경험하였을 것이다. 발음을 엉뚱하게 알고 있었으면서도 글의 내용은 바로 아는 경우가 허다히 있었던 것이다.
    漢文을 배우는 미국 학생들이 漢字音은 바로 모르면서 그 의미는 바로 아는 事例가 연구 보고된 바 있다.(7) 그리고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도 문자 언어가 소리 언어의 代用物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모로 경험하고 있다. 문자 언어가 참으로 소리 언어로 쉽게 환원되기만 하면 그 기능을 다 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절므니' 대신 '젊으니'를 쓰며 또 이것을 다시 '젊은이'와 구별하여 쓰겠는가. white house 와 White House도 그 효과가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는 쓰는 것이다. right-rite-wright-write도 마찬가지인데 눈에서 구별되는 어떤 조처가 이들의 뜻의 구별에 어떤 효과를 낸다는 것은 문자 언어의 기능이 단순히 소리 언어로 환원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표기법은 의미 파악에 有利하다면 表音에 불충실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바로 하고, 이제 멀쩡히 좋은 우리 맞춤법을 前近代的인 思考를 앞세워 뒷걸음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표기법 내지 문자 언어의 기능을 올바로 인식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4.

「글자의 혁명」에서 추구한 방향은 적어도 表音 爲主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음절 단위의 모아쓰기를 단어 단위의 풀어쓰기로 고침으로써 表音文字의 表意文字化를 도모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비록 구체적인 내용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그 추구 방향만은 機能論者들의 그것과 같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표기법이 表意化를 추구하여야 한다는 정신에서는 「글자의 혁명」은 우리와 반대 입장에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풀어쓰기 주장에 찬동할 수 없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로서는 풀어쓰기가 表意化에 더 유리한 방식이라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의 혁명」은 풀어쓰기의 利點으로 'ㅇ' 字를 줄일 수 있음과 동시에 받침의 문제가 해결됨을 들면서, '같으니, 걸음'으로 써야 할지 '가트니, 거름'으로 써야 할지의 문제를 덜고 'ㄱㅏㅌㅡㄴㅣ'나 'ㄱㅓㄹㅡㅁ'으로 표기하면 되는 것이 "적잖은 效益"(p.125)이라 말한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적잖이' 편파적인 視角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效益의 방향을 쓰는 쪽에서만 찾았다는 것이 그 하나다. 'ㅇ' 字가 하나 더 있고 '같으니'로 써도 읽기에는 불편이 없다. 'ㄱㅏㅌㅡㄴㅣ'라고 쓰는 것이 읽기에 더 큰 效益을 준다는 근거를 대기는 어려울 것이다. 後述하겠지만 우리는 표기법이란 쓰기에 편리하기보다는 읽기에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점에서 우리는 'ㄱㅏㅌㅡㄴㅣ'가 '같으니'보다 더 效益을 주는 표기법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음으로 '같으니'의 '같-'이 하나의 形態素, 즉 하나의 意味 單位라는 사실을 「글자의 혁명」은 너무 輕視하고 'ㄱㅏㅌㅡㄴㅣ'가 單語 단위라는 점만 중요시한다. 屈折, 즉 語尾 變化가 극도로 복잡한 국어의 경우 語幹 語尾를 분간하지 않고 'ㄱㅏㅌㅏㅅㅓ, ㄱㅏㅌㅡㅁㅕㄴ, ㄱㅏㅌㄱㅗ, ㄱㅏㅌㄷㅓㄹㅏ'로 풀어 쓸 경우 이들이 한 단어의 活用形이라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에 비해 '같아서, 같으면, 같고, 같더라'는 얼마나 더 큰 效益을 주는가. '같-'이란 모아쓰기 하나가 마치 漢字 한 字와 비슷한 表意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表音文字의 表意文字化를 추구하면서 '같으니'를 비난하고 'ㄱㅏㅌㅡㄴㅣ'를 옹호한 일을 우리로서는 이해키 어렵다.
    「글자의 혁명」도 모아쓰기가 '열매, 웃음' 등에서는 語源을 밝혀 줌으로써 表意化에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反論을 豫見하고는 있다. 그러나 "일리가 없지 아니하겠지만"이라든가 "어원 아는 것이 반드시 얼른 우리 귀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또 우리의 읽기는 반드시 어원적 파악을 소용하는 것도 아니다"(p.124) 등의 표현에서 보듯 이 反論의 정당성을 되도록 부정하려 애쓰고 있다.
    이러한 정신이라면 풀어쓰기가 실현되지 못하는 단계에서라면 '높이, 넓이, 같이' 대신 '노피, 널비, 가티'를 주장해야 할 것이며, 活用에서도 '같으니, 같아서' 대신 '가트니, 가타서'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모아쓰기 단계에서는 그 利點을 바로 인식하여 形態素 단위로 語幹을 밝히고, 語源을 밝혀 표기하려 하면서(8) 풀어쓰기를 주장하기 위해 그 利點을 갑자기 부정하려 하는 것은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Henderson의 Orthography and Word Recognition in Reading(1982)은 表音文字(音素文字)가 表意文字(單語文字)보다 더 앞선, 더 우수하고 편리한 문자라는 通念이 잘못된 것임을 여러모로 지적하고 특히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표기법이 表意的이어야 할 정당성과 그 利點을 다각도로 논의한 大著인데 우리 한글의 모아쓰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9) '달, 닭'과 같은 한글의 모아쓰기는 표음문자로써 표의문자처럼 읽힐 수 있도록 한 훌륭한 方案임을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모아쓰기는 한국어와 같이 복잡한 음절 구조를 가진 언어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특히 '닭'과 같이 쌍받침이 있는 경우에는 한 字(모아쓰기 된 한 字)가 한 형태소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표의문자(단어 문자)에 매우 가까운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p.53).
    국어의 많은 단어가 漢字語이며, 따라서 각 음절이 비록 한글로 쓰인 경우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한 형태소를 대표한다. 이 점에서 가령 '부모'나 '등산'이나 '음악' 등이 'ㅂㅜㅁㅗ, ㄷㅡㅇㅅㅏㄴ, ㅡㅁㅏㄱ'보다 더 좋은 표기법임이 분명하다. 단어 단위 이전에 형태소 단위를 한 단위로 묶어 표기하는 일이 우리의 언어 의식과 잘 부합하고 그만큼 의미 파악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世宗 때에 모아쓰기를 고안해 낸 것이 漢字에서의 (거기에 더하여 주변 국가의 문자에서의) 영향에서였을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漢字의 音을 다는 경우 漢字 한 字에 한글도 한 字로 對當시키고자 한 發想은 매우 자연스러웠다고 할 것이며 漢字와 한글을 倂用하는 경우에도 모아쓰기 방식은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父母, 登山, 音樂'처럼 漢字로 표기될 때도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모아 쓰기가 더없이 적절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漢字 表記와의 관련성보다 대개 한 字, 즉 한 音節이 형태소 하나인 漢字語의 경우 모아쓰기로 된 한 字가 바로 그 형태소를 대표함으로써 의미 파악에 便益을 준다는 점을 重視한다. 漢字語가 수없이 많은 국어의 현실에서 이 문제는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닐 것이다.
    모아쓰기는 순수한 국어를 위해서도 풀어쓰기보다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국어가 添加語(膠着語)라는 사실을 모아쓰기를 논할 때 늘 결부시켜 생각한다. 풀어쓰기를 단어 단위로 함으로써 表意性을 높인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 效用性에 의문을 품고 있다. 가령 '젊다'를 'ㅈㅓㄹㅁㄷㅏ'로 풀어서 단어 단위로 고정시킨다고 하자. 절대로 한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ㅈㅓㄹㅁㅓㅅㅓ, ㅈㅓㄹㅁㄷㅓㄹㅏ, ㅈㅓㄹㅁㄱㅗ, ㅈㅓㄹㅁㅈㅣㅛ, ㅈㅓㄹㅁㄴㅔ…' 등으로 끝없이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어 단위로 고정시켜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시킨다는 것이 뜻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젊어서, 젊더라, 젊고, 젊지요, 젊네'로 표기하면, '젊-'이란 한 字가 거의 表意文字的인 기능을 함으로써 이들이 한 단어의 활용형이라는 것이 훨씬 쉽게 드러난다. 바로 모아쓰기의 혜택인 것이다.
    물론 풀어쓰기에도 'ㅈㅓㄹㅁ'이란 모습으로 위의 활용형들이 한 단어의 활용형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ㅈㅓㄹㅁ'은 '젊'만큼 個別性이 없고 그만큼 表意性이 약하다. 'ㅈㅓㄹㅁ-ㅓㅅㅓ'처럼 하이픈을 사이에 두어 그 個別性을 높이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그래 보아야 모아쓰기만 效用도 없지만 그보다도 어간과 어미 사이에 하이픈을 두고, 또는 복합어의 구성 요소 사이에 하이픈을 두는 일은 우리 맞춤법을 그야말로 어렵고 복잡한 맞춤법으로 만들 것이다.
    '젊-'처럼 받침이 둘인 '늙-, 앉-, 읽-, 핥-, 훑-, 없-, 깎-, 섞-' 등은 바로 이 단어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어서 表意文字와 거의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表意文字와는 달리 그 발음을 몰라 어려움을 겪은 일이 없다. 이들의 발음을 알기 위해 玉篇이나 사전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발음은 쉽게 알 수 있어 읽기 좋고 그러면서도 그 의미의 전달은 表意文字만큼 선명히 해 준다면 여기에서 더 좋은 표기법이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받침이 하나인 경우에도 '알-, 웃-, 좋-, 썩-, 먹-, 죽-, 믿-, 춥-, 잡-, 덮-, 갚-, 맡-' 등을 보면 매우 선명히 한 형태소를 드러내 준다. 받침이 없는 '뛰-, 쉬-, 쬐-, 빼-, 보-, 차-' 등도 'ㄸㅜㅣㄱㅗ, ㅂㅗㅁㅕㄴ' 등에서보다 '뛰고, 보면' 등에서 형태소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일에 有利함이 분명하다.(10) 二音節이나 그 이상의 語幹은 앞의 一音節 語幹 때보다는 모아쓰기의 效能이 높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싱겁다, 바쁘다, 부르다' 등에서도 풀어쓰기 때가 이들의 여러 활용형을, 가령 '싱겁고, 싱겁지, 싱겁더라, 싱거워서, 싱거우니' 등의 모아쓰기 때보다 더 잘 드러내 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ㅅㅣㅇㄱㅓㅂㄱㅗ, ㅅㅣㅇㄱㅓㅂㅈㅣ, ㅅㅣㅇㄱㅓㅜㄴㅣ'보다는 역시 '싱겁고, 싱겁지, 싱거우니'가 동일 단어의 활용형임을 역시 더 잘 드러내 보인다고 판단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用言을 예로 들어 語尾 變化가 다양하게 발달하여 있는 국어에서 단어 단위로 띄어쓰기를 함으로써 表意性을 높인다는 「글자의 혁명」에서의 의도가 매우 관념적임을 살펴보았다. 단어 단위 이전에 語幹과 같은 형태소를 같은 모습으로 표기할 필요성이 국어의 경우 높고 이를 모아쓰기가 잘 遂行해 준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다.
    국어의 助詞를 語尾와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여 '名詞+助詞'를 語尾 變化로 다루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글자의 혁명」에서도 助詞는 名詞와 띄어서 썼다. 그러나 助詞가 語尾보다는 分離性이 강하지만 맞춤법에서 이를 띄어서 써야 할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된다. 국어의 助詞는 영어의 前置詞보다는 分離性이 대단히 약하기 때문이다. 현행 맞춤법에서 助詞를 윗말에 붙여서 쓰라고 한 것은 이러한 성질을 고려한 것일 것이다.
    助詞를 名詞에 붙여 쓰는 경우라면 앞에서 用語에 대해 말한 내용은 體言의 경우에도 대개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즉 '앞이, 앞으로, 앞에서, 앞도'가 'ㅏㅍㅣ, ㅏㅍㅡㄹㅗ, ㅏㅍㅔㅅㅓ, ㅏㅍㄷㅗ'보다 쉽게 이들이 모두 '앞'의 助詞 결합형임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助詞를 띄어 쓰는 경우에도 우리는, 특히 '값, 흙, 닭, 넋, 밖' 등 쌍받침을 가진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꽃, 낮, 낯, 팥, 콩, 꾀, 죄, 쥐, 코' 등 一音節語인 때는 모아쓰기가 풀어쓰기보다 表意化에 有利하다고 믿는다. 한 단위로 묶는다는 效能이 풀어져 있기보다는 묶여져 있는 데서 더 크게 발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效能은 '꽃밭, 나팔꽃, 꽃잎, 진흙, 흙덩이, 땅콩, 콩팥, 낮잠, 한낮' 등의 복합어에서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多音節語이지만 그 구성 요소에 一音節語가 있는 경우 前述한 漢字語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아쓰기가 그 구성 요소와의 有緣性을 풀어쓰기보다 더 잘 드러내 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用言에서와 마찬가지로 '얼굴, 저고리, 맨드라미' 등 多音節語에서는 모아쓰기의 表意化 效能이 一音節 때보다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으로 더 考究해 보아야 할 문제지만 '얼굴'이 'ㅓㄹㄱㅜㄹ'보다 表意性을 낮춘다고 판단할 근거는 아직 대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글자의 혁명」에서는 '얼굴'로 모아쓰기를 하면 '얼'과 '굴'을 일단 분리해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한 단어로 읽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모아쓰기에는 확실히 그러한 점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얼굴'을 한 단어로 읽으려 할 때 音節 단위의 모아쓰기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앞으로 좋은 실험 대상이라 생각한다.
    'computer'와 '컴퓨터'를 비교하면 모아쓰기가 더 좋은 표기 방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한 이유는 '컴'이니 '터' 등이 어떤 형태소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보다 'ㅋㅓㅁㅍㅠㅌㅓ'가 더 表意性이 높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무엇 때문일까. 하나는 풀어쓰기에 익숙하지 않아 後者가 前者보다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글 字母의 字形이 모아쓰기에 적절하기에 만들어져 풀어쓰기에는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글 字母가 풀어쓰기에 적절치 않다는 현실도 모아쓰기를 옹호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자의 혁명」은 그 부적절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한글 字母를 로마字와 비슷한 字形으로 바꾸었다. 'ㅅ' 字를 w 字처럼 'ㅡ' 字를 u 字처럼, 'ㅓ' 字를 q 字처럼, 'ㅏ' 字를 h 字처럼 바꾼 것이 그 일례다. 그러나 固有한 한글의 모습까지 파괴하면서까지 풀어쓰기를 추구하여야 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다고 필자는 믿는다. 한글을 위해 일생을 몸바치신 외솔 선생이 왜 우리의 가장 값진 遺産인 한글을 그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간직하려고 하지 않고 과감히 오랫동안의 傳統을 파괴하려고 했는지 필자로서는 늘 이 문제가 기이하게 느껴진다. 기능이 뒤떨어지더라도 한글의 固有性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물며 모아쓰기가 국어의 표기에 더 적절하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모아쓰기가 漢字語의 경우에나 語尾 變化가 많은 단어의 경우, 그중에서도 특히 一音節 형태소를 나타내는 경우 매우 적절한 방식임을 논하였다. 한 字가 한 형태소를 늘 固有한 모습으로 표기해 줄 수 있다면 표기법에서 추구하는 表意性의 획득에 더 바랄 것이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다.
    표기법이 表意性을 추구하여야 할 정당성은 이제 부인될래야 부인될 수 없을 것이다. 모아쓰기가 表意化에 정확히 얼마만큼의 效用을 나타내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직 아무런 구체적 연구를 못해 본 상태에 있다. 다만 印象的으로, 그리고 理論上으로 모아쓰기가 풀어쓰기보다 表意性 획득에 有利하리라는 생각을 피력하였을 뿐이며, 적어도 모아쓰기 문제 내지 표기법에 관한 논의가 表意化와 관련되어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하였다.
    앞으로 국어에 一音節 형태소와 多音節 형태소가 어떤 비율로 어느 쪽이 많은지도 조사하여 이 논의의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며, 多音節 형태소의 경우에는 과연 풀어쓰기가 모아쓰기보다 表意化에 유리한지에 대해서도 실험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5.

끝으로 모아쓰기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언급코자 한다. 「글자의 혁명」에서 모아쓰기가 活字의 數를 많게 하고 그로써 인쇄와 기계화에 불편을 끼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필자는 다른 小稿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인쇄와 기계화의 불편은 지나치게 강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계화의 문제, 가령 打字器의 문제는「글자의 혁명」이 쓰일 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 이후 쉽게 해결되었고 더구나 근래 컴퓨터의 발달로 이 문제는 이제 전혀 염려거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인쇄의 문제도 각도를 달리하여 생각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글은 또 글자는 쓰이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읽히기 위해 있다. 편지라면 한 사람이 쓰고 한 사람 (많아야 서너 사람)이 읽게 되므로 이 경우에는 쓰이는 비중과 읽히는 비중이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이나 잡지, 또는 교과서나 소설을 생각해 보라. 인쇄하는 사람은 많아야 수십 명일터인데 읽는 사람은 수만 명, 많으면 수백만 명일 수 있다.
    여기에서 표기법이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느냐는 明白해진다. 인쇄에 편리하도록 만들어 인쇄(채자, 조판 등)에 종사하는 사람 1인에게 10의 이익을 주었다고 하여도 책 한 권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총계는 200∼300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인쇄에 불편하더라도 독서 능률에 좋은 표기법을 만들어 한 독자에게 신문 한 장, 또는 책 한 권 읽는 데 1의 이익을 주었다면 그 이익의 총계는 1만일 수도 있고 100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활자가 많아지고 인쇄에 시간과 경비가 더 드는 일은 이 엄청난 이익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投資에 불과하다.
    現行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있다. 이들의 視點은 늘 받아쓰기에 있거나(11) 인쇄에 있다. 필자는 이 視點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읽기에 어렵지 않은 한, 읽어서 뜻을 알기에 어렵지 않은 한 우리 맞춤법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 글을 읽으면서 그 맞춤법이 읽기 어렵고 뜻을 파악하기에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모아쓰기 역시 이 점에서 어렵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그와는 반대로 여러모로 쉽고 많은 便益을 주는, 특히 국어를 표기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方案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世宗이 다 잘하고 모아쓰기 한 가지를 잘못한 듯이 평가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世宗이 여러 가지 다 잘하였지만 특히 모아쓰기 하나를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따라서 필자는 世宗이 오늘날 다시 태어나도 서슴없이 모아쓰기 방식을 채택하리라고 믿고 있다.

<참 고 문 헌>

李基文(1983). 國語 表記法의 歷史的 考察 (韓國硏究院)
-------(外)(1971). 韓國 語文의 諸問題(一志社)
李翊燮(1971). 文字의 機能과 表記法의 理想(金亨奎博士頌壽紀念論叢)
-------(1977). 思考面에서 본 文字 言語의 機能 (語學硏究 13-2)
최현배(1947). 글자의 혁명 (문교부)
Henderson, L. (1982). Orthography and Word Recognition in Reading(New York: Academic Press)
Vachek,J. (1973). Written Language (The Hague: Monton)
-------(1976). Selected Writings in English and General Linguistics (The Hague: Mou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