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座談>
國語 硏究의 어제와 오늘
- 때 :1985.9.9. (월) 오후 3:00
장 소:국어연구소 소장실
참석자:李熙昇(學術院 元老 會員)
李崇寧(學術院 元老 會員, 百濟文化硏究院長)
金亨奎(국어연구소 소장)
사 회:金亨奎
- 所長: 오늘 일부러 두 분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국어생활」 이번 호의 특집 기사인 '한글'과 관련하여 일제하에서의 선생들의 국어 연구와, 현재와 앞으로의 국어 연구의 방향 또는 그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자 해서입니다. 健齊 鄭寅承 선생도 오늘 모시려 했으나 몸이 불편하여 모시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선 一石 선생께서 국어학의 연구 동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李熙昇: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저는 시골서 漢文 공부를 하다가 新學問을 배우라는 父親의 권유로 12살에 서울에 올라와 官立 漢城外國語學校 英語部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던 중, 韓日合邦이 되던 해 10월에 3학년 2학기 중도에 불완전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京城高等普通學校(京畿中·高의 前身) 등의 몇몇 학교로 轉轉하다가, 中樞院 관리로 있다가 한일합방으로 실직하게 된 부친을 따라 고향인 京畿道 開豊郡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가 내 나이 열 여덟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시골에 묻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니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때 이웃에 마침 徽文義塾(徽文中·高의 前身)에 다니던 친척이 있어 그와 어울리며 그의 교과서도 보면서 지냈습니다. 하루는 「國語文法」이라는 프린트문을 발견하고 이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 가운데는, 周時經이 만든 이상한 用語(空氣:노, 物件:몬 등)들이 많이 섞여 있었으나 책은 설명을 보고, 또 모르는 것은 그 아이한테 물어 이해해 나갔습니다. 이때 나도 이것을 공부해야겠다는 영감을 받고, 다음 해에 음력설을 지내고 난 뒤 이웃에서 一金 2원을 취해 무작정 상경하였습니다.
- 所長: 그러니까 그때의 선생의 결심은 周時經의 문법책에 많은 자극을 받아 이루어지신 것이지요?
- 李熙昇: 네. 그렇지만 고생만 하고 며칠 뒤 尹 某 氏의 도움으로 金浦의 私立 小學校에 교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朝鮮總督府의 土地 調査局에서 근무하며 야간에 中東講習所(中東中·高의 前身)에 다니며 1년 정도 공부하던 중, 中東講習所를 경영하시던 崔奎東 선생을 만나 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로 직장을 그만두고 中央學校 3학년으로 편입하였습니다.
中央에 재학하던 동안 日人의 서점을 출입하면서 言語學에 관계 있는 책들을 사 모으며, 國語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言語學의 지식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國內에는 言語學을 가르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고 日本으로 유학가는 것은 당시의 나로서는 불가한 것이어서, 뜻을 斷念하고 그대로 졸업하여 京紡(京城紡織)에 취직하여 다니던 중 다행히 1924년 京城帝國大學이 생기고 또 그 안에 朝鮮語學及學校科라는 科가 들어 있어서 시험을 보아 1차는 실패하고 2차 년도인 1925년에 豫科에 입학하였으니 내 나이 동양식으로 30되던 해였습니다.
- 所長: 日帝 때 文化 政策을 한다고 해서 京城帝大를 세우고 또 朝鮮語學科, 朝鮮史學科를 만들었지요. 어쨌든 그 바람에 우리들이 그 분야를 전공하게 되고 이것이 해방 후에도 계속되게 되었지요. 그러면 心岳 선생께서 日帝 때 國語學을 연구하던 경위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 李崇寧: 제가 京城大學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日本人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요. 그래서 대학 豫科때 우리 문화는 우리가 한다는 기분에서 朝鮮語文學會를 결성하였지요. 당시 趙潤濟, 金台俊, 金在喆, 李在郁, 方鍾鉉 그리고 제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또 전공 선택에 있어 歷史, 文學, 語學 중에서 語學을 선택하였더니 一家에서 法學을 하지 않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일본놈 밑에서 도지사를 하면 조상이 화내십니다 했다가 어른들께 야단을 맞았지요.
그 당시 語文 分野에서는 잘못했든 잘했든 간에 이미 日本學者인 小倉進平이나 前間恭作의 업적이 두드러져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三一運動 이후 우리는 흥분만 했지 업적은 그들에게 뒤졌지요. 말하자면 그들이 벌써 주도권을 잡은 셈이지요. 우리의 경우 당시에 업적을 내는 사람이 安廓 정도였는데, 그 논문에서는 原典도 參老 文獻도 없어 비판도 하고 또 통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논문이 떨어지거든요.
그 무렵 六堂 崔南善의 東洋 文化는 白頭山에서 비롯한다는 不咸文化論이
등장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지만 그때에는 신문에서도 막 떠들고 굉장했었던 실정입니다. 自古로 文化란 사람이 모여야 일어나는 것인데, 그 춥고 깊은 산꼭대기에서 어떻게 사람이 모여 문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작고한 李홍주 씨가 구로다라는 東大 敎授를 만나러 갔을 때 그가 朝鮮에서 崔南善, 崔南善 한다는데 이 不咸文化論을 보고 안심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 所長: 科學적인 方法論을 日人에게 배운 것도 부인할 수 없겠군요.
- 李崇寧: 그러한 때 우리는 日本 또는 다른 外國의 것을 보고 시작했습니다. 金在喆은 韓國 演劇史, 金台俊은 漢文學史, 演劇등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 몇 사람, 즉 梁住東, 金台俊, 趙潤濟, 金在喆들을 빼면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빈약했던 것이지요.
저는 당시에 朝鮮語學會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綴字法 統一은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 문제에 몰려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위원회에서 결정을 하고 그것을 따르면 되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아카데믹한 우리의 언어 연구도 그만큼 급했던 것입니다.
- 所長: 저도 공감합니다.
一石 선생께서 일제 때 국어 연구를 하면서 가장 고난을 겪었던 것이 바로 朝鮮語學會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이 1942년 10월 1일에 생겼는데 선생께서 朝鮮語學會에 들어가서 옥고를 치르기까지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 李熙昇: 한글학회는 처음에는 朝鮮語硏究會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내 사립 중등학교에서 조선어를 담당한 선생님들끼리 서로 모여서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토론하면서 우리 자신의 실력을 배양하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차츰 커져 사무소도 구하게 되고 또 1년에 한번씩 토론회를 가졌지요.
저는 학생 때부터 다녔습니다. 학생이라 회원의
자격은 없고 청강 모양으로 다녔는데 나중에는 학생으로서도 발표했습니다. 1930년에 京城帝大를 졸업하면서 정식 회원이 되었고 동시에 幹事의 일을 맡았습니다.
1931년에 이 朝鮮語硏究會는 朝鮮語學會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당시 서울에서는 日人이 같은 이름인 朝鮮語硏究會라는 것을 세워 거기에서 「朝鮮語」라는 잡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잡지는 일인이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같은 서울에 朝鮮語硏究會가 둘이니, 편지 같은 것도 왔다 갔다 헛갈리는 등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日人더러 이름을 바꾸라고 할 수 없어 우리가 이름을 朝鮮語學會로 바꾸었지요.
나중 이야기지만 우리가 日警에 붙들려 문초를 받을 때 이 일로 아주 고생했지요. 그들이 뭐라고 하니 朝鮮語硏究라는 것이 朝鮮 獨立 運動의 일환이라는 것이어서, 朝鮮語 辭典을 편찬하는 것도 조선의 민족 의식을 앙양하여 최종 목적인 조선 독립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일을 上海 臨時政府의 지령에 의해서 한다고 그러면서, 임시정부와 연락을 할 때 잘못해서 비밀 서류 같은 것이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朝鮮語硏究會에 들어갈까봐 너희들이 이름을 고쳐 놓았다고 몰아치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모임에 저를 비롯해서 崔鉉培, 金允經, 李克魯 등 여러 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던 중 매달 모여서 토론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朝鮮語學會에서 모여서 조선어 교육을 체계 있게 과학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그 최종 목표를 朝鮮語 辭典 編纂에 두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綴字法 統一이 선행 요건에 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사전 편찬뿐 아니라 일상 언어 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 뒤에 標準語 査定을 하고 外來語 統一案도 지었습니다.
- 所長: 그러다가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군요.
- 李熙昇: 사실은 이렇습니다. 朝鮮語學會에서 사전을 편찬해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겨우 한두 사람 정도가 전적으로 붙어 語彙 수집을 하는 터라 사업이 지지 부진하였어요. 그런데 李克魯가 부지런히 다니면서 운동을 하여 직접 회원이 아닌 金度演, 金良洙, 徐珉濠 등과 일본 유학생,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고, 또 同鄕인 慶南 宜寧 사람인 李祐植을 설득하여 朝鮮語 辭典 편찬의 후원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정적 후원을 얻었으니 대대적으로 한 번 해 보아야 하겠다고 해서 朝鮮語 辭典 編纂 委員會를 조직하여, 有志하는 인사 105명을 發起人으로하고, 취지서를 鷺山 李殷相이 지어서 發會式을 하였습니다. 그때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는데 이것이 日警의 신경을 자극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하기 방학 중에 夏期 大學이라고 해서 各 地方에 다니면서 綴字法 統一案을 강의했는데, 이것이 3년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전 편찬 위원회를 대대적으로 發起한 후에 한뫼 李允宰가, 六堂 崔南善이 光文會 때 우리 말광(辭典)을 편찬하려 해서 金枓奉, 權悳奎가 그곳에서 어휘 수집 및 주석하는 일을 했는데, 육당이 재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어 유야무야되었으나 이제 우리가 사전을 편찬하게 되었으니 金枓奉을 데려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金枓奉은 周時經의 제1의 수제자로 당시 上海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李允宰를 상해에 보내 金枓奉을 만나 이야기하니, 그가 나는 여기서도 할 일이 있고 마침 국내에서 재정적 후원을 얻어 사전을 편찬하게 되었으니 잘되었다하면서 사양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권유를 하니까 그러면 여비나 변통해 주면 또 모르겠다고 해서 李允宰가 돌아와 여비를 마련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金枓奉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나중에 우리가 검거되었을 때 日警에 의해 드러나게 되어, 그들은 우리가 上海 臨時政府와 교섭하여 그들의 지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日警은 우리가 했던 朝鮮語 辭典 編纂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그 일에 治安維持法 제1조 (일본의 국체를 변경하려는 것)를 적용하였습니다.
- 所長: 일제하에서 우리말과 글이 당한 수난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다행히 우리가 광복을 맞게 되고 다시 국어를 연구한 지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국어 연구와 국어 정책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李崇寧: 그동안 많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런데 단편적인 이야기지만 요즈음 국어 교육의 생활화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이 대개 인사도 못하고 편지도 제대로 못 씁니다. 누가 喪中 問安의 말로 "미안해" 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어쨌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또 어른한테 글 쓰는 법과 같은 것도 국어 교육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어 교육이 너무 문학 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 所長: 그러니까 중·고등학교의 국어 교육에서 實生活에서 쓰이는 言語의 敎育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해방 후 變形 文法 등 서구적인 학문을 받아들여 우리 국어학이 발달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 계속 그런 쪽으로 가야하는지요?
- 李崇寧: 요즈음 우리 국어학은 美國式 構造 言語學 등 美國의 言語學 하나에만 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 모두들 現代國語만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지나치지 않은가 합니다. 미국의 언어학 이론은 그들의 歷史的인 배경이 거의 없으므로 인디언 언어 조사 등 共時的인 문제에 쏠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국식 언어학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만 전체 안목으로 보아서는 좀 폭넓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국어학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려면 歷史 言語學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우리 국어에 맞는 理論의 개발이 되야 합니다. 어쨌든 영어 하나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정이 되어야 합니다.
- 所長: 요사이 국어 교육에서 漢字를 기피하고 한글 위주로만 교육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어떻습니까?
- 李熙昇: 漢字 문제는 우리 민족 문화 및 우리 민족의 전체적인 발전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言語와 漢字를 떠나서 생활할 수 없습니다. 학문은 물론이지만 일상 생활에서 언어와 문자를 이용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와 문자를 가장 유효적절하게 이용해야만 문화 발전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우리 文字 生活에 있어 70년대부터 한글 전용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은 큰 과오를 범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문자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부호로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눈으로 보는 데 편리하도록 해야지요. 그러면 얼핏 보고서 그 의미를 순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로마자나 한글은 表音文字요 漢字는 表意文字이니 전부 漢字 一色으로 쓰자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는 표음문자이지만 綴字대로 발음이 안 되는 글자가 많습니다. 영국에서도 이전부터 철자법 개정을 하자는 운동이 있었으나 그것이 결국은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발음 안 되는 글자가 있음으로 해서 그들의 말이 表意化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right', 'rite', 'write'는 모두 발음이 같지만 그 표기를 달리함으로써 뜻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영어는 한글보다 표의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현대의 文字 理論은 表意化 추세에 있습니다. 略字가 그런 것인데 가령 'United Nations'를 간략히 'U.N.'으로 표기하여 그 뜻만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전통적으로 배워 온 漢字를 사용하여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전통문화의 기록이 漢字로 많이 되었으니 漢字가 필요합니다. 단 많은 漢字를 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선 1,600자 정도라도 사용하게 되면 또 그것들이 서로 결합되어 많은 말을 만드니 의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李崇寧: 伊藤博文이 신문을 보는데 몇 십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에서 漢字만 훑어 넘겨 중요 기사에 ○표를 하여 비서에게 넘기는데 그 훑어보는 시간이 불과 30초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글로만 써서는 그렇게 안되고 자세히 보아야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 李熙昇: 지금 우리 민족의 지상 명령이라면 어떻게 해서 우리 문화를 빨리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의 後進國에서 이제 中進國이 되었다고 하지만 先進國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선진국도 문화 발전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우리 문화의 발전 속도를 더욱 빨리 해야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말이 아니에요. 우선 요즈음 학교의 성적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나오는 學術 用語는 歐美의 外來語도 있지만 대개가 漢字 用語인데 이것을 죄 한글로 써서 보이니 가령 '抽象的'이니 '具象的'이니 '普遍妥當性'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학생들의 개념 파악이 뚜렷하지 못하고 어리벙벙합니다. 이런 교육을 하면 할수록 점차 선진국과 문화 수준의 격차가 커지게 됩니다.
日本에서도 전쟁에 패한 뒤에 漢字 亡國論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우리처럼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에 따라 우왕좌왕하지 않고, 敎育學者, 心理學者, 哲學者 등을 죄 모아서 日本에서 가나만을 써야하는가를 연구 검토하여 그 결과 制限된 漢字는 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當用 漢字(常用 漢字)를 만들어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요사이 국민학교에서 漢字를 가르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 학생들은 성적이 전부 좋습니다. 이를 학부형들이 알아서 가정 주부가 漢字 講習所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아이들에게 좀 가르쳐야 하겠다는 것이지요. 좌우간 그런 실정인데 여기서는 그저 文字 政策을 벼락치기로 하니, 國家之百年大計의 漢字 政策을 이리하니 참 딱합니다.
또 地政學的으로 東西로 日本과 中國이 漢字를 사용하고 있는데, 정가운데 있는 우리가 漢字 한 글자도 몰라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대는 국민끼리 자꾸 접촉하고 왔다갔다하고 또 그렇게 해서 문화가 발전하는 것인데 자꾸 장벽을 쌓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所長: 잘 알겠습니다. 선생들의 오늘 말씀 끝이 없겠습니다만 너무 무리가 될까 염려되는군요. 그러면 오늘은 이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