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사용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수용 태도


박 갑 천 / 서울신문 논설 위원

오늘의 우리는 급속하게 변천하는 국제화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촌이 1일생활권이 되다시피 한 세상인 것이다. 따라서 문물의 교환 또한 예 같지 않은 상황이다. 사람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언어가 거기에서 예외로 될 수 없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치는 물의 생리와 같다 할까. 눈이 돌게 바삐 굴러가는 이 국제화 시대에도 물론 그 이치에 변함은 없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문물을 내보내기보다는 받아들이는 쪽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외래어도 이 같은 문물의 유입에 따라 쓰게 된, 본적이 남의 나라가 되는 말이다. 이 외래어에 대해서는 국어의 순수성 유지라는 측면에서 배격하는 처지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쓰면 우리말이지 무슨 소리냐는 개방주의적인 처지도 있을 수는 있다. 그야 어쨌든 분명한 것은 외래어라는 것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그 외래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연히 제기되게 된다.

먼저 우리가 그것을 쓰는 데 있어서의 문제점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ㄱ) 흔히 논의되는 것이 외래어와 외국어의 한계점이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자면 우리의 고유어 아닌 말들은 모두 외래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라면 한문으로 이루어진 말들도 외래어이고, 또 우리가 고유어라고 생각하는 말 가운데도 따져보자면 외래어에서 출발된 것(예컨대 임금의 식사를 이르는 '수라'같은 말)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참으로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흔히 '외래어'라고 할 때는 영어를 포함한 유럽말이나 일본말을 가리키는 것이 통례로 된다. 그것들이 우리 언어 생활 속에 가장 많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글에서의 '외래어'도 그 통례에 따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외래어와 외국어의 한계는 여전히 몽롱해진다. 무엇이 외래어고 무엇이 외국어냐 하는 점이다.
    첫째, 지식의 차이에서 그 개념은 달라진다. 좀 배운 사람이 외국어 아닌 외래어로 생각하는 말을 덜 배운 사람은 외래어 아닌 외국어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종사하는 분야의 차이에서도 그 개념은 달라진다. 가령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이 생각하는 외래어와 대학에서 국어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생각하는 외래어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래서 무엇이 외래어고 무엇이 외국어냐 하는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느냐 하면, 다만 개념적으로 '남의 나라 말로서 우리말 속에 들어와 우리말로 쓰이는 것이 외래어 아니냐'고 하는 논자들이 뜻밖에 많기 때문이다. 이는 간단한 말 같지만 사용 문제·표기 문제에서 원천적인 혼선을 빚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래어는 되도록 덜 쓰고 되도록 우리말로 갈음하여 나가자고 말한다. 그래서 뭔가 불분명해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말은 외래어가 됐든 외국어가 됐든 하여간 남의 나라 말이면 되도록 우리 언어 생활에서 몰아내자는 뜻으로 일단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와 같은 말에는 반기를 드는 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남의 나라 말은 되도록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므로 그쪽에 서서 이 원고를 진행시켜 나가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지나치게 외래어를 많이 쓴다. 외래어라야 할 곳에서까지 억지로 우리말을 쓰려고 하는 태도가 어떻게 보면 국수주의 같은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하겠으나 식자들은 누누이 지적해 오듯이 상표에서 간판 등에 이르는 외래어 사용 경향을 보노라면 우리의 의식구조 그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가짜라도 외제라면 사족을 못쓰고 덤벼드는 의식구조와 맥락을 함께 한다고나 할까.
    쓰지 않을 수 없는 외래어는 분명히 있다. 우리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회의를 한다는데 '워싱턴'이나 '레이건' 같은 말을 안 쓴달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제과점의 간판이 반드시 '워싱턴'이어야 하느냐는 의문은 처져 남는다. 어쨌든, '지나치게' 쓰는 일만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재고해 볼 점도 물론 있다. 가령 일본의 조오리(草履)를 굳이 '일본 짚신'으로 하자는 따위 논의가 과연 옳으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다따미'는 '일본 돗자리', '게이샤'는 '일본 기생'...하는 식으로 한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비프스테이크'는 역시 '비프스테이크'이듯이 '사무라이'는 역시 '사무라이'인 것이다. 이런 논의 때문에 '자부동'→'방석', '키포인트'→'요점·핵심'으로 하자는 말까지도 한꺼번에 반발 요인이 되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 봐야겠다.
    어떤 나라 고유의 것과 일반적인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또 통념상 '일반화' 해버린 외래어로서 사실상 갈음말이 신통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국어화'를 생각한 나머지 '억지말'을 만들어 내는 일은 신중히 재고해야 할 대목 아닌가 한다.
(ㄷ) 이때까지는 사용 현실의 문제를 생각했지만, 그 표기 현실의 측면 또한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각까지도 그 표기 문제는 춘추전국시대의 양상을 띠고 있다. 표기가 제각기인 것은 첫째, 원칙이 있는 의도적인 표기 차이와 둘째, 원칙이 없이 제멋대로 쓰는 것으로 대별할 수 있겠지만, 원칙을 정하여 놓은 곳에서도 저마다의 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또 문제이다.
    크게는 한글학회(조선어학회)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 따른 표기와 국어 심의회가 정한 원칙에 따른 '편수 자료'의 표기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대체로 전자의 원칙에 좇은 신문도 신문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고 후자의 원칙에 좇은 일부 국어사전도 지엽적으로는 '자기 주장'의 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이다.
    이러한 현실을 없애고 통일된 표기를 하여 나가야겠다는 뜻에서 79년에 일단 마무리된 '4개 어문 관계 개정안'에서는 양자를 절충한 안이 이루어졌으나 10·26사태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확정안 공포'를 못 본 상태에서 표기의 혼란상은 날로 더해가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다. 그래서 교과서와 신문이 다르고 신문과 신문이 다르며 신문과 잡지가 다른 표기들을 하고 있다. 그도 저도 없는 무원칙의 일부 출판물까지 아울러 생각할 때 이래도 되겠느냐 하는 탄식은 절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앞으로 외래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인가.
    첫째, 대체·여과·선별 기능이 활성화해야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미 외래어로서 상당히 굳어진 말들을 우리말로 갈음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 온다. 그것은 그동안의 형편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외래(국)어는 보초도 없는 곳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히 들어왔었다. 그것을 뒤늦게야 '국어'로 갈음하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사실인즉 앞뒤가 뒤바뀐 일이었다. .
    '불도저'라는 힘 좋은 차가 있다. 산도 깎아내리고 강도 메우고 하는데 사람 몇십 명 몫을 척척 해낸다. 그런데 이 차를 어린이들은 '땅차'라고도 했다. 그것이다. 그 차를 들여올 때, '불도저' 아닌 '땅차'로 들여왔더라면 그 차를 부리는 사람들까지도 '땅차'라고 부를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건만 '불도저'로 되어버린 마당에서 '땅차'라고 하잔다면 당연히 일부의 거부반응도 따를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문물을 받아들이되,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따르는 말들을 먼저 우리말로 갈음하는 일부터 한다는 것은 그래서 일의 순서로 된다. 얼마 전 컴퓨터를 다루는 이가 그에 따르는 용어들을 우리말로 갈음하는 안을 내놓은 일도 있었지만, 일반화해 버린 다음에 서두르는 것보다는 사전에 그 구실을 하는 장치는 여러 모로 바람직스러운 것이다. 외래어로서 익숙해지기 전이라면 갈음된 우리말이 설사 어설픈 측면이 있더라도 밀고 나갈 수가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여건은 그렇지 못했으나 이제부터라도 그 같은 '보초'를 세워 나가는 일은 마땅히 서둘러야 한다. 그러고도 보초를 뚫고 '입국'한 말이나 이미 쓰이고 있는 말들에 대한 검토 또한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편, 상표나 상호를 정함에 있어서도 이 대체·여과·선별 기능을 거치도록 하는 조처를 취했으면 한다. 근자에 들어 지적되고 있는 '국적 불명어' 등, 우리의 국어순화 흐름에 위배되는 현상들이 적어도 더는 생겨나지 않게,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이미 나와 있는 것들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어지도록 하는 계도적인 조처가 마련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이 같은 구실을 맡는 기구는 상설되어 현실 속에 상당한 강제력을 동반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 상설 기구는 용어의 대체·여과·선별 기능과 함께 표기의 현실적인 지도도 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표기 원칙이 확정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나 표기의 원칙이 정해진다 해도 표기의 실제면에서 보면 명확하지 못한 데가 있는 법이다. 이를 위해 명확한 표기례를 제시할 수 있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국제화 시대에 있어 신문·방송 등의 언론 기관은 날마다 새로운 인명·지명들을 대하게 된다. 그 용어들을 언어 지리학적인 측면, 그리고 표기의 측면에서 제때에 제대로 자문하여 줄 수 있는 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럴 수 있을 때 같은 이름을 두고 석간과 조간, 신문과 방송이 다른 표기, 다른 발음을 해 오기도 한 폐단은 사라질 것이다. 국어 심의회 등과의 연계 아래 국어연구소가 이 같은 구실을 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오늘날까지 우리 국어 정책은 원칙면에서의 흔들흔들 갈팡질팡 외에도 현실면에서는 강력한 시행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결점으로 지적된다. 가령 간판이 어떻다느니, 상품 이름이 어떻다느니 혹은 어떤 대중매체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말이나 바르지 못한 경어법을 쓴다는 둥 잘못되었다는 소리만 높았지, 그 '소리'의 옳고 그름은 판단하여 그를 바로 잡으려는 과정은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물론 이는 외래어에 관한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앞으로는 외래어 문제를 포함한 국어 문제는 권위 있게 원칙과 방향이 결정되면서 강력한 시행의 길도 함께 찾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런 점에서 특히 언론 기관 쪽과의 긴밀한 협조·유대 관계가 요청된다. 그들은 날마다 국어를 국민 앞에서 씀으로써 은연중 계도적인 존재로 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광범위한 계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용면이나 표기면에서 같은 이야기로 된다. 그를 위하여 대체·여과·선별의 의지가 곁들인 표기례를 수록한 '외래어집'을 만들어 대중매체나 교육 기관 등에 보내면서 그를 준행토록 하는 강력한 조처를 후속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