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예절
허철구 국립국어연구원
우리의 호칭어·지칭어를 들여다보면 남녀에 따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동서들의 관계에서 남자들의 서열은 나이가 고려된다. 맏사위가 나이가 적으면 나이가 많은 둘째사위가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의 서열은 남자들의 서열에 따라 결정된다. 맏며느리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둘째며느리는 맏며느리를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 이것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까지 여겨질 만하다.
꽤 오래 전에 “종형제(從兄弟), 내·외종형제(內外從兄弟), 종자매(從姉妹)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이 무엇인가?” 하는 질의를 받은 적이 있다. 이것저것 찾아보아 답을 해 드리면서(그 내용은 1997년 국립국어연구원의 『가나다 전화 자료집』 수록), 가족 호칭에 담긴 남녀의 차이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종형제의 자녀는 ‘종질(녀)’ 또는 ‘당질(녀)’라는 것은 간단하다. 내종형제의 자녀는 ‘내종질(녀)’ 또는 ‘고종질(녀)’이다. 그러면 당연히 외종형제의 자녀는 ‘외종질(녀)’가 될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러한 말은 없다. 그리고 종자매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 역시 없다. 질문자는 ‘종생질(녀)’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으나, 그 말은 국립국어연구원의 어휘 검색 자료를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 누이의 자녀를 가리키는 ‘생질(녀)’에 유추하여 나온 말인 듯하나 정식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이, 그 상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통하여 맺는 내종형제의 자녀에 대한 관계말은 있으나, 어머니를 통하여 맺는 외종형제의 자녀에 대한 관계말이 없는 것은 남자 쪽의 계보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또 종형제의 자녀와 달리 종자매의 자녀에 대한 관계말이 없는 것도 역시 남녀에 따른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아버지의 외종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진외당숙’(아버지의 외가, 곧 진외가 쪽의 당숙뻘)이 있지만, 어머니의 외종형제를 가리키는 말은 없다. 논리적으로 어머니의 외가, 곧 외외가 쪽의 당숙뻘이므로 ‘외외당숙’라고 할 법도 하지만 그런 말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부계(父系)의 성(姓)을 이어받는 전통적인 가족 제도가 반영된 것이고, 불가피하게 남녀 어느 한쪽을 기준으로 세워야 하므로 수긍할 만한 점도 많다. 그러나 오늘날 처가 쪽의 왕래도 빈번하고, 남녀의 차별도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에 대해 다소의 불편과 불만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이모할머니’라는 말이 생겨 표준 화법으로 승격된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즉 아버지의 고모는 ‘대고모’ 또는 ‘왕고모’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이모에 대해서는 ‘대이모’니 ‘왕이모’니 하는 말이 없다. 할아버지의 계통과 할머니의 계통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요즘 아버지의 이모는 아버지의 고모 못지 않게 친밀한 사이이고, 따라서 호칭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생겨난 말이 ‘이모할머니’인 셈이다.
그러나 표준 화법에서조차 어머니의 고모 또는 이모를 위해서는 특별한 말을 정하지 못하였다. 『표준 화법 해설』(국립국어연구원, 1992)에서 단지 “말하는 사람이 여자일 경우에는 자신의 고모를 가리키는 특별한 지칭어가 없는 실정이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할 뿐, ‘미금 할머니’, ‘강릉 할머니’처럼 지역 이름으로 쓰도록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