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표기


f를 'ㅍ/프'로 적는 이유

김세중 국립국어연구원

주로 미국에 사는 동포로부터 file은 ‘화일’로 적는 것이 영어에 훨씬 가까운데 ‘파일’이 뭐냐면서 외래어 표기법이 잘못되었다고 꾸짖는 편지가 자주 온다. 이런 생각은 실은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것이다. 과연 외래어 표기법은 잘못되었을까?
   외국어에는 국어에 없는 소리가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어와 비교해 보자.
   영어에는 마찰음이 여러가지 있는 반면에 국어에는 마찰음이 많지 않다.
   예컨대 f, v, θ, ð, z는 국어에 없는 마찰음이다. 이런 소리가 포함된 외국어 단어가 국어에 들어오면 국어에 있는 소리로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영어 fashion, file도 ‘패션, 파일’이 되거나 ‘홰션, 화일’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쓸 수는 없어

그런데 간혹 이를 거부하고 ', '과 같은 글자를 이용하여 ‘션, 일’이라고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 ’을 도입한다면 얼마나 많은 부호를 더 만들어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 ’ 등을 쓰자는 주장은 도무지 채택할 수가 없다.
   결국 ‘패션, 파일’이냐 ‘홰션, 화일’이냐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f를 ‘ㅍ’으로 할 것이냐, ‘ㅎ’으로 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물론 현행 「외래어 표기법」(1986)은 외국어에서 f 소리를 가진 외래어는 ‘ㅍ’으로 적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럼 f를 ‘ㅍ’으로 적는 것이 좋은지, ‘ㅎ’으로 적는 것이 좋은지를 비교해 보자. f를 ‘ㅍ’으로 적으면 불편한 점이 있다. fan이 ‘팬’이면 pan도 ‘팬’이니 서로 같아지는 것이다. f와 p로 구별되는 외국어 단어가 많은데, 외국어에서는 다른 단어가 국어에서는 동음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럼 f를 ‘ㅎ’으로 적으면 어떻게 될까? fight는 ‘화이트’가 된다. 그런데 white도 ‘화이트’니까 동음이의어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feel을 ‘휠’로 하자고 하지만 wheel도 ‘휠’이니 동음어가 되고 만다. 동음이의어는 어떻게 하든 생기게 되어 있다.
   f를 ‘ㅎ’으로 적으면 곤란해지는 이유는 실은 따로 있다. golf처럼 f가 어말에 오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골흐’나 ‘골후’라고 할 것인가? ‘파일’보다 ‘화일’이 영어 발음에 가깝다고 하지만 ‘골흐’나 ‘골후’가 ‘골프’보다 영어 발음에 가까울 것 같지는 않다. 그뿐이 아니다. 어말이 아니라 자음 앞에 f가 올 경우도 있는데 이 때도 f를 ‘ㅎ’으로 적기가 쉽지 않다. muffler를 ‘머훌러’라고 할 것인가? waffle도 ‘와훌’로 하고?


표기법은 단순할수록 지키기 좋아

물론 한 가지 방안이 있긴 하다. 모음 앞에서는 f를 ‘ㅎ’으로 하고 나머지 경우에서는 ‘프’로 적는 것이 그것이다. 즉 ‘화일’(모음 앞), ‘머플러’(자음 앞), ‘골프’(어말)로 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못할 것도 없겠지만 표기법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어느 경우에서나 ‘ㅍ/프’로 적는 것이 훨씬 낫다. 모음 앞에서만 f를 ‘ㅎ’으로 한다 해도 어차피 예외가 자꾸 생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coffee는 ‘커휘’라 할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