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공용어 논쟁에 부쳐

김세중 / 국립국어연구원

지난 7월 한 달 동안 조선일보에는 영어를 우리나라의 공용어로 하자는 한 소설가의 제안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찬성 의견의 요점은 오늘날 영어가 세계 공통어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우리말을 고집하지 말고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몇몇 지식인이 논쟁에 참여하여 찬반 의견을 내놓았으며 그 신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찬성과 반대 투표를 실시한 결과 투표에 응한 38,000명 중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데 찬성한 사람이 45.1%, 반대한 사람이 54.9%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조사 결과는 매우 뜻밖이다. 무려 45%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것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과연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용어란 무엇인지,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의견을 표시하였는지 의심이 간다.
   공용어(公用語)는 국어사전에 이렇게 뜻풀이되어 있다.

공용어
① 국내에서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경우, 국가나 공공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하나 또는 복수의 언어.
② 국제 회의에서 그것을 쓰기로 결정된 언어. 영어, 불어 따위.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했을 때의 공용어는 ①번 뜻의 공용어이다. ①번 뜻의 공용어의 정의를 곰곰이 따져 보면, ‘국내에서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전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용어란 한 나라에서 여러가지 언어가 쓰이고 있을 경우,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공용어’란 여러 언어가 쓰이는 나라에 적용되는 말

세계적으로 한 나라에서 한 언어만 쓰이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가 한 나라에 여러 민족이 살고 있으며, 지배적인 민족이 있다 해도 소수 민족이 몇쯤은 있다. 그리고 대개 소수 민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몇 십, 몇 백 개의 언어가 쓰이는 나라가 수두룩하다.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96개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살고 있고 142개 언어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국가에서 공식적인 언어를 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용어를 지정해 놓지 않으면 국가가 통치될 수 없다. 각 민족, 부족들이 자기 언어를 쓰더라도 국가의 법령이나 규칙은 공용어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아시아에서는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경우가 있다. 인도에서는 원래 영어가 쓰이지 않았다. 대신 힌디어를 비롯한 수많은 인도 토착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후 영어가 인도 대륙의 공용어가 되었다. 20세기에 미국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도 그렇다. 이들 나라들이 독립한 후에도 영어는 공용어로 남아서 공통의 의사소통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공용어란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지역에서 공적인 의사소통의 도구로 이용되는 언어임을 보았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단일 민족 국가요, 단일 언어 국가이다. 결국 한국은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공용어란 말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언어를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꾸자고 하는 것과 같다.


영어를 공용어를 하자는것은 국어를 버리자는 것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영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 나라는 원래부터 그 나라의 언어가 영어이거나 식민 지배 등의 경험으로 국민 대다수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나라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영어를 자유자재로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영어를 공용어로 하겠다면 온 국민에게 외국어로서의 영어가 아닌, 국어로서의 영어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 국민이 영어를 국어로 익히도록 하는 것은 엄청난 언어 개혁인데 그것은 식민 지배 상태라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자주 독립 국가에서 스스로 제 언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국어로 채택하는 일은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혹자는 한국어를 완전히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는 개인적인 친교 생활에서 쓰고 영어는 공식적인 상황에서 쓰자는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몰라도 한국어만을 쓰는 우리 국민이 새로운 언어인 영어를 완벽하게 익히려면 실로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이 들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몇 년 사이에 접하는 언어는 지적인 능력과 관계 없이 누구나 완벽하게 배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란 지극히 어렵다. 오랜 세월이 걸릴 뿐 아니라 유아 시절에 언어를 배울 때처럼 완벽하게 익히지도 못한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들은 새 언어를 익히는 데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 예상될 뿐 아니라 생업에 바쁜 국민들에게 새 언어를 익히도록 강요하는 것은 국가가 할 도리가 아닌 것이다.


언어는 겨레의 얼과 정신이 담겨 있는 문화 유산

더 많은 국민이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요 우리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공적인 언어를 아예 영어로 하자는 것은 도를 넘어선 지나친 주장이다. 외국과의 접촉이 잦아 영어를 자주 쓸 사람들에게는 영어 교육을 더욱 강화해야겠지만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는 다수 국민들에게까지 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쓰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영어가 압도적인 공통의 의사소통 수단인 미국에서조차 소수 민족의 언어는 보호, 장려하고 있다. 하물며 한국에서 스스로 제 언어 대신에 영어를 쓰자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은 아니요,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며 겨레의 얼과 정신이 담겨 있는 문화 유산이다. 이 문화 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우리 세대가 진 의무이다. 이 의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