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정책


김 하 수 / 연 세 대

1. 앞머리
    국어정책론을 논하기에 앞서 일단 이 영역의 성격과 개념을 소홀히 넘어갈 수는 없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해 온 몇몇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국어정책을 '정책'이라는 어휘의 의미에 종속시켜 '오로지 정부와 관공서에 의하여 의도되고 시행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1) 이러한 국어정책론은 대개 상식의 선에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곧 국가 정책을 통하여 언어 문제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결정하고 사회적 조치를 취하는 것 정도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2)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적용한다면 기실 국가 기관이나 그 산하 연구 조직에서 간행한 각종 연구 보고서만이 이 영역의 주연이 될 수밖에 없는 희극이 벌어진다. 더구나 식민지 경험을 쉽게 씻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언어정책론적 성과를 한낱 소수민족 내부의 문제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시각은 사실 '정책(政策)'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의 '政'에 지나치게 얽매인 축자적 의식이거나, '정책'이란 국가 기관 외에는 아무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금역(禁域)으로 여기는 국가 중심적 의식의 소치가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 국가 기관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그리고 그 정책은 법적 근거에 의한 것이고, 각종 법적 근거는 입법적 활동의 소산이다. 또 입법 활동은 일정한 사회적 운동성을 띠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회적 운동성을 가진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사회 내부의 구성 요소 간의 문제 의식, 이해관계, 전통, 타협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국어정책'을 정부와 관공서의 전유물로 해석하는 관점은 언어의 사회적 현상을 국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 다룰 '국어정책론'은 한국에서의 언어 정책 일반을 그 바탕으로 삼아 특히 한국어에 대한 사회적 움직임을 학술적 행위를 통하여 반영해 낸 것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국가와 언어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그 둘의 관계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해 왔느냐에 의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과 같은 곳에서는 국가가 언어 문제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민간 기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독립 후 국가 내부의 통합에 골몰해야 하는 대개의 신생국은 국가가 국가 엘리트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경우는 국가의 개입이 초기에는 그리 강하지 않았으나 뒤에 갈수록 점점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 규범(국가)에 대하여
    앞에서 예를 든 국가주의적 언어관에 서 있는 이들의 '국어정책론'은 대부분 언어 규범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본의든 아니든 규범은 곧 국가적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거의 걸러지지 않은 상태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 국어학계에서 아직도 '과연 규범은 국가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본격적으로 던져지지 않은 것 자체가 학문의 후진성 내지는 국가의존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한 사회의 규범은 기본적으로 그 구성원들 간의 상호행위에서 비롯한다. 이 상호행위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타협의 소산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일정한 '지켜야 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과는 의사소통 상에 일정한 대립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두 사람의 상호행위 속에서 다른 한 쪽이 그 방언을 적어도 받아들이게 되거나 아니면 방언 사용자가 더욱 공통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는 것, 즉 이것을 제도화시킨 결과가 바로 '표준어'이다. 다시 말해서 '표준어'는 국가가 만들어서 요구하니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회적 운동의 배경 속에서 국가가 그러한 언어의 제도화에 간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3)
    2000년도의 국어정책론 연구의 대부분에서는 아쉽게도 이와 같은 '국어정책론'을 원론적으로 다룬 글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국가주의적 규범 의식을 그대로 인정한 채 그것을 널리 가르치려는 교본의 성격을 지니 것, 혹은 그 규범 가운데 일부 조항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현행 언어 규범을 교육적으로 더욱 정교화하려는 노력을 평가절하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바탕으로 하여 띄어쓰기와 맞춤법의 용례를 풍부하게 모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 띄어쓰기·맞춤법』(이한 엮음)과, 초중고 교과서의 용례에서 항목들을 훑어 낸 『바른 띄어쓰기 맞춤법』(원영섭 엮음)은 유난히 그 노고가 돋보인다. 『바른 띄어쓰기 맞춤법』의 성과는 비록 앞서 펴낸 『용례집』(1993)의 증보판 성격을 띠고는 있으나, 그 많은 교과서의 용례들을 거의 다 망라하는 등, 그 분량의 방대함으로 보아 사실상 새로운 노력의 산물로 쳐도 무리가 없다. 이러한 일을 직접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일이 웬만한 논문 몇 편 쓰는 것보다 엄청나게 지난한 작업임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비교적 학습자들에게 간결하고 친숙한 예를 들어 가며 쓴 교육용 저술로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이의도)이 나온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책이 과거에도 꽤 많이 출간되었지만, 이런 교육용 책은 시시때때로 자주 나옴으로써 시류에 따른 잘못이라든지 오해 등을 풀어 줄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흐름은 약간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차피 규범 문제만큼은, 더구나 교육용일 경우에는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나온 『우리말 바로 쓰기』(이수열)도 지난해의 한 성과이다. 이것은 앞에 든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의 것보다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저자의 노력과 고생의 흔적이 두드러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각이 훨씬 보수적이어서 부분부분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서술이 매우 무미건조하여서 학습자들이 친숙하게 읽기에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일단 교사용으로는 손색이 없는 저술이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의 작업으로 『띄어쓰기 편람 개발 연구』(이승구 외)와 『교과서 문장 실태 연구 3』(국립국어연구원)의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둘 다 띄어쓰기의 교육적 측면에 대한 고찰을 한 것으로 우리의 교육용 텍스트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띄어쓰기에 대한 규정 해석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하는 점도 잘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지난 해'를 띄어쓸 것인지 붙여 쓸 것이지를 『띄어쓰기 편람 개발 연구』에서는 띄어쓰는 것이 좋겠다는 연구진의 의견이 있는 반면에, 『교과서 문장 실태 연구 3』에서는 합성어이니 붙여써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굳이 어느 편의 의견이 옳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좀 더 폭 넓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이것은 합성어다 아니다를 외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논거 자체를 쟁점화시키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상은 언어 규범을 널리 알리고 가르치기 위한 저술을 열거하였지만, 좀 이론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본다면 언어 규범의 갖가지 변종을 수집하고 역사 자료로서의 언어 규범을 규명하는 작업이야말로 언어정책론의 가장 중요한 밑동을 이룬다 하겠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학계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료집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북한 및 재외교민의 철자법 집성』(고영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저술을 통하여 북한의 『조선어 신철자법』과 『조선어 철자법』, 그리고 『조선말 규범집』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조선어 신철자법』은 그 희귀성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김두봉의 음운 이론의 정수를, 비록 맞춤법에서의 현실화에는 실패한 것일지라도, 꼼꼼히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더 나아가 1930년대에 연해주 일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고려 문전』 역시 우리 언어 규범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선사한다.
    넓은 범위의 규범 문제의 하나로 볼 수 있는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문제가 몇 해 전에 세간을 들끓게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개정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2000. 7. 7. 고시)」이 나타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더욱 정밀한 방법'을 찾아 헤맨다. 지금까지 이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았던 가장 큰 까닭은 논쟁의 의제를 잘못 선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툭 하면 벌어지는 전자법이다 전사법이다 하는 개념 논쟁을 중심으로는 문제 해결을 제대로 꾀할 수 없다. 언어 현실의 문제가 국어학적인 음운론 차원의 대결로는 항상 엇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개념과 정밀한 분석'이 아닌 '분명한 자세'이다. 이론적 체계의 깔끔함보다 실제 사용 과정에서의 효율성이 더 분명히 보장되지 않으면 어떠한 표기법도 직립보행이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로마자 표기법이 네 발로 기다시피 했던 까닭은 분석 방법이나 기술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논의의 의제 설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서문」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참으로 오래 되고 진정한 관점과 태도가 절실하다.
    현실보다 논쟁에 얽매인 원론보다 현실에 바탕을 둔 묵묵한 결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국교열기자협회가 펴낸 『한국어 로마자 표기 사전』이다. 『세계지명사전』의 별책으로 나왔는데, 지명 및 문화재명 등 8,000여 항목에 이르는 로마자 표기를 꼼꼼히 달아 놓았다.
    규범의 논의 속에서 함께 논하기가 조금은 거북하지만 일단 이 부분에서 언급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 『옥외 광고물 외래어 표기 실태 조사 연구』(한국국어교육연구회, 문화관광부 연구 보고서)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과연 이 결과물을 규범과 관련된 부분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적잖은 고민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옥외 광고물이란 한 사회의 경제 활동, 인간의 욕구와 소비 행태,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언어적 의식조작(manipulation) 등이 매우 활발하게 드러나는 간단치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윤을 더욱 크게 하기 위하여 소비자의 욕구를 더욱 자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욕의 자극은 의장(design)과 광고를 통하여 가장 쉽게 달성된다. 바로 여기에서 언어는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윤 추구를 위하여 상품 판매 장소에 소비자를 끌어들이는데, 상호와 업소명이 이 기능을 상당 부분 대행한다. 그리고 여기에 갖가지 언어적 선언이 행해진다. 이 보고서에 실린 방대한 조사 결과는 바로 이 소비자들을 향한 언어적 선언을 집대성한 것이다.
    상인들이라고 해서 언어의 올바르고, 정확하고, 질서 있는 언어 사용을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탈규범적 현상은 근본적으로는 언어의 규범보다도 이윤에 더 비중을 두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이윤의 문제와도 관계없이 본의 아니게 규범에서 이탈한 표기를 쓰는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의도적인 일탈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 보고서의 아쉬움은 옥외 광고물의 표기를 오로지 '규범'이라는 안경을 통해서만 살피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시각이라면 규범 일탈은 자연스럽게 규범에 대한 무지로 해석하게 되며, 결국에는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만 보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 엄청나게 발품을 판 결과물을 들여다보자. '회토랑, 국시, 아바이' 등의 상호나 업소명에서는 매우 자유분방한 조어 현상을 볼 수 있다. 형태소를 초월하고, 어원론적 근거와 한계를 넘나든다. 이것이 바로 경제 활동의 세계이다. 간판의 언어를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로 나누고, 탈규범적인 요소를 잡아내고, 더구나 국어 교육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하는 등은 매우 허무한 작업이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의 규범과 표준어,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 등이 우리의 활발한 경제 활동을 감싸 안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그 원인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미래지향적이고, 학술적인 동시에 이론의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이다.
    이 보고서의 가치는 그 철학의 빈곤을 차치하고, 매우 광범위한 지역을 꾀부리지 않고 성실히 답사하여, 풍부한 자료를 모아 놓았다는 데에 있다. 언젠가 더 나은 안목으로 언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국면이 되면 요긴하게 쓰여질 날이 올 것이다.

3. 공용어 정책에 대하여
    공용어 문제는 근간 국민의 정부와 분리하여 논의할 수 없는 극히 국가 정책적 사안이다. 광복 이후 끊임없이 교체를 거듭해 온 한국 정부는 대개 일상적으로는 언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별로 없다가 종종 불의의 개입을 해 온 전력들이 있다. 이승만 정권 때의 '한글 맞춤법 간소화'가 그 첫 번째이고, 뒤이어 박정희 정권 때의 '학교문법 용어 통일'과 '한글 전용 정책', 전두환 정권 때의 '국어연구소(국립국어연구원의 전신) 설립', 노태우 정권 때의 '한글 맞춤법 개정' 등이 그것이다. 물론 '한글 맞춤법 개정'은 이미 그 전의 '국어연구소' 설립과 깊은 관계에 있으므로 개별 정권과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스스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무섭게 공용 문서에서의 국한문 혼용을 선언한다. 이는 외환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계의 수용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던 정부가 내세운 거의 첫 번째 정치적 선언이었고, 그 선언은 그 이전까지 잘했든 못했든 그 동안 유지해 오던 민족주의적 언어 정책에서의 대탈출을 뜻하는 것이었다.(4) 그 정책의 기조야 어쨌든 이는 국어학계에 적잖은 논쟁을, 오래간만에 사회적 반향을 얻는 학술적 논쟁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폭 넓게 여러 문제점들을 소소하게 잘 지적한 "공용어론과 언어 정책"(민현식, 『이중언어학』 17호)과 "한국인의 언어생활과 공용어 문제"(박갑수, 『이중언어학』 17호)를 제외하고는 깊은 문제 인식을 기초로 한 논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전자는 영어 공용어화에 관한 문제를 언어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사회, 문화 등의 넓은 영역에서 다루려는 시도를 보여 하나의 성과로 평가한다. 후자는 공용어에 관한 역사적 소견을 덧붙임으로서 이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결론 부분은 약간 당위론에 흐른 감이 적지 않다. 그 외에 다른 국어학 이론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뜨거운 논쟁에 뛰어들지 못한 것은 짐작컨대 국어학 전공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모태 신앙적인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당위론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더 이상 쟁점을 개발해 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만일 우리 국어학의 학문적 두께가 더욱 두터웠다면, 차제에 국가와 언어의 관계, 언어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 국내의 외국어 교육의 문제 등을 더욱 더 쟁점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그냥 지내 보낸 셈이다.

4. 한국어 교육에 대하여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이 학문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오랜 동안 한국어 교육이란 국어학도들의 아르바이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학문적인 체계나 이론적인 뒷받침이 불안정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까지도 한국어 교육 종사자를 전문적으로 기르는 고등교육 기관은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나 근간에 일부 교육대학원과 대학의 학부 과정에 강좌와 학위 과정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학문적 관심사의 고조로 말미암은 면도 있으나, 다른 면에서는 정책적인 지원 강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한국어 교육은 교수법적인 기술이지 학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던 사람들도 새로 싹트는 학문과 인력 시장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어학도의 눈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문법을 '철저히' 가르치고, 어휘력을 '풍부하게' 하고, 발음을 '잘 훈련'시킨다면, 그게 바로 한국어 교육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자신감을 쉽게 드러낸다.
    물론 한국어 교육이 한국어 문법 지식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교육과 삶의 문제에 더욱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실로 복잡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이기까지도 하다. 따라서 한국어 교육은 사회언어학적인 문제 의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화용적 현상과의 대결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언어의 내적 구조의 해명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이미 그 누구도 외국어를 배우느라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국어학도들이 그러한 안일한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이 자기의 삶을 걸고 진지하게 외국어를 배워 본 일이 없는 탓이 아닌가 한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이 학문적인 틀에서 논의되려면 그 자체의 이론적 고유성, 그리고 다른 학문 영역들과의 연계(학제적 연계)를 이루어 주는 철학적 틀, 곧 패러다임의 제시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단 한번도 없었다. 일부 영어 교육에서의 패러다임 차용 정도가 수준을 유지하는 정도였고, 거의 다 애국주의적 접근에 의지하여 감상주의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학문 바탕이 허약한 편이다.
    최근에 문화관광부의 지원 아래 한국어세계화추진위원회가 이루어 낸 일련의 기초 작업들은 그러한 고민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보기 드문 장기적 연구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단편적인 연구와는 달리 교재, 사전, 교사 양성, 보급 시스템 등 매우 폭 넓은 시야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다. 또 연구 참여자들의 수도 많은 편이고, 특히 그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연구 참여자들의 욕심이 작용한 듯한 전반적인 팽창주의적인 과제 확장은 여러 군데 구체적인 부분에서 문제점을 노정하였다. 앞으로 부문별 과제가 참여자들의 대오를 흐트러뜨림 없이 어떻게 전체적인 통합성을 가지게 하느냐 하는 점이 이 사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5)
    『외국인 학습자를 위한 초급 한국어 사전 개발』(배주채, 문화관광부 연구 보고서)은 한국어 교육을 위하여 무척 시급한 자료이다. 매우 시의적절한 작업이기는 하나 워낙 반가운 나머지(?) 좀 비판적인 문제 제기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연구자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의 제기를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올림말 선정 문제이다. 세 교육기관의 교재에서 1000단어 선정이라는 말은 사실 사전 편찬의 첫걸음을 지키지 않았다는 자기 고백이다.
    두 번째 문제로 형태적인 1000단어가 의미상으로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 보고서의 올림말 '아저씨'는 타인을 부를 때 쓰는 경우만 설명하였는데, 또 하나 중요한 인간 관계 및 혈연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 '바꾸다' 역시 전화를 바꿔 달라는 말은 있으나, 돈이나 딴 물건을 바꾸는 의미 항목이 빠져 버렸다. 물론 이 사전은 어디까지나 '초급용'이다. 따라서 초급용 사전은 그럴 수도 있다는 평가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시 첫 번째 문제로 되돌아간다. 사전 편찬의 첫걸음 문제 말이다. 결국은 순환 논리에 빠지게 된다.
    세 번째 문제는 아마도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이 사전의 명칭이 왜 '외국인 학습자를 위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성인인 외국인 학습자를 위한 것과 어린이를 위한 아주 간략하고 유용한 것과는 구별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사전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는 아무리 훑어보아도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간소하게 엮었다는 것밖에는.
    예를 들어 한국어의 의존명사는 외국인들에게는 무척 당황스러운 문법 범주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안내 표지판 없이는 '그런 것은 가르치는 교사가 메워 주어야 한다'는 정도로 발뺌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든 이것도 첫 시작이라고 보자. 아마 첫 시작 치고 이 정도의 문제밖에 없는 것이 또한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5. 국립국어연구원의 성과와 위상에 대하여
    1990년에 설립된 국립국어연구원이 열 살을 맞은 데에 즈음하여 비록 길지 않은 자취나마 정책론적인 측면에서 논의를 빠뜨리고 지나쳐 버릴 수는 없다. 이 기관의 연혁과 지나온 길은 자체에서 엮은 『국립국어연구원 10년사』에 실려 있다. 더구나 그 기관의 산파 역할을 했던 사람들, 직책을 맡아 일했던 사람들의 글이 곁들어 있어서 그 동안의 애환과 역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국립국어연구원의 10년 역사는 지나간 100년의 언어정책사의 한 부분이다. 왕조 시절의 끝 무렵부터 시작된 비교적 근대적인 국어 의식은 지석영, 주시경을 필두로 하여 한국의 언어정책사의 첫 시작을 계몽주의로 장식하였고, 식민지 시대에 들어가서 이극로, 최현배, 정열모로 이어지는 민족 운동으로서의 언어정책론이 활발해졌었다. 광복 이후의 한국 사회는 자연스레 운동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안정된 제도로서의 학문을 요구하게 되었고, 분단으로 말미암아 갈라진 북쪽에서는 이념으로서의 학문을 요구하게 되었다.
    안정된 제도로서의 학문은 역시 안정된 교육을 받은 집단에게 좋은 기회를 주게 되어 광복 이후의 국어학의 흐름은 과거의 운동으로서의 학문과 무관했거나, 설사 관여했다 하더라도 이 이상 그에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논자들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또 현직의 전문가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앞머리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지나간 100년은 왕조 말기, 식민지 시대, 건국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시대, 산업화 시대, 국제화 시대 등의 그야말로 숨가눌 새 없는 격동의 시대를 엮어 냈다.
    국립국어연구원이 지나간 10년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의 100년을 바라본다면 이러한 역사에 대한 문제 의식이 필수불가결하다. 걱정되는 점은 『국립국어연구원 10년사』에는 이러한 문제 의식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아기자기한 일화의 수집이 아니다. 현재의 주소를 파악해야 하고 미래를 향한 나침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역사를 서술하고 편찬하는 것이다. 적어도 '국립'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내려면 지나간 100년 간의 정통성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 분단 상황에서의 언어정책은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등에 대한 한 올의 관심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한다. 물론 이 기관 종사자들의 개인적 성실성의 문제이거나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국어학계의 총체적인 문제점이 '국립 기관'의 모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국립 연구 기관'을 여러 '관청' 가운데 하나로 보기 쉽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지난해에 국립국어연구원이 해낸 일은 무척 많다. 또 그 사업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국어 순화, 로마자 표기, 남북한간의 언어 문제, 문자 코드 문제, 사전 편찬 지침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 내용의 구성 또한 탄탄한 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귀한 업적을 훑어보면서도 떨칠 수 없는 허전함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이 많은 연구 성과가 우리의 언어 생활에 어떤 발전을 가져왔는가 하는 물음, 왜 이 성과들과 일반 대중은 서로 따로 놀고 있는가 하는 속상함,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업적의 생산자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언어 정책은 대중에게서 유리될 수밖에 없는 엘리트끼리의 잔치로 왜곡되어 있다. 이 점이 국립국어연구원이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할 기본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운동으로서의 국어 연구를 모멸해 왔고, 고고한 제도로서의 학문을 추구해 온 집단이 갑자기 대중성을 지녀야 할 국가 기관을 운영할 때에는 이와 같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의 손길만이 아니라 교육 현장의 교사들, 언론 관계자들, 각종 문화 사업 관계자들을 망라하여 대중의 언어 생활에 뛰어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 언어에 대한 한, 그것도 언어 규범에 관한 한 국립 기관이 모두 다 해야 한다는 의욕도 이제는 개선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모든 언어 문제를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자세로 대하지 말고, 각 연구 기관과 운동 단체, 그리고 교육 기관 들을 서로 밀접히 연계해 주는 조정자(coordinator)의 구실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마치 무슨 업적 심사를 받는 사람처럼 무언가의 결과물 생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국립 기관으로의 성격에도 잘 맞지 않고, 요즘의 국가 업무 행태와도 거리가 너무 멀다. 자칫 선단식 연구 기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사실 내용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문화 기초 용어』(국립국어연구원) 정도의 간행물을 국립 기관이 냈다는 것은 문제를 보는 시각이 상당히 협소하다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국립국어연구원은 '국어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을 위하여 교재용으로 쓸 수 있게 만든 책 두 권이 나왔다. 하나는 『국어문화학교(국어반)』(국립국어연구원)이고, 다른 것은 『국어문화학교(번역반)』(국립국어연구원)이다.
    국어반용 교재는 20여 개의 주제에 따라 필수적인 지식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역시 맞춤법을 위시한 각종 언어 규범에 대한 것이 그 대부분을 이룬다. 언어 규범을 망라했다는 점에서는 편집 수준을 좋게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그 난이도와 수준 차가 들쭉날쭉하다. 교재의 내용이 고르지 않다는 것은 그에 대한 교육과정이 불투명하다는 뜻이다. 국어 교사, 비국어과 교사, 기타 강습소 교사 혹은 언어와 관련된 교정직 같은 직종 종사자 등에 따라 무언가 갈피를 잡을 수 있는 교육과정의 확정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좀 어중간하다. 만일 전문적인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굳이 이러한 책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보다 수준 높은 전문 서적으로 직접 강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 아쉬운 것은 각 주제의 집필자가 과연 그 분야의 전문가들인가 하는 점도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만든다.
    번역반용 교재는 무척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앞의 책보다는 필진의 전문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도대체 교육과정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궁금하다. 이 책으로 번역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와 문제점 등을 깨닫기는 무척 좋으나 이런 걸 가르쳐서 번역 이론가를 길러 내려는 것인지, 외국어 교육의 보조 교재인지, 아니면 번역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를 주는 것인지 그 교육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번역의 실무를 익히면서 경계해야 할 여러 사례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번역하는 과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실무 번역"(원영희) 정도이다. 뒤에 덧붙인 각종 표기법의 내용은 이 책의 성격을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내용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번역'이라는 중심 주제에서는 벗어난다는 말이다.
    방향을 돌려 국어 순화 문제를 살펴 본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하려면 사실 '순화'라는 말에서부터 쟁점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러나 지면의 제한성을 생각하면 모든 쟁점을 하염없이 길게 끌고 나갈 수도 없다. 일단 여기서의 순화는 '토착 한국어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한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지난해에 낸 『국어순화 자료집』은 문화재, 언론, 전기 전자, 금융 경제, 농업, 지하철 운전, 정보 통신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용어들을 뽑아, 그 순화 어휘를 제시한 것이다.
    어휘 순화 작업을 직접 경험해 보면 그게 그리 순탄한 일이 아니다. 우선 좋은 착상이 쉽게 떠오르지도 않고, 처음에는 그럴 듯하던 것이 막상 써 보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또 자신의 눈에는 좋게 보이는데 남들에게는 제대로 평가를 못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문 용어의 경우는 비교적 주도적인 사용자 집단의 동의를 얻기도 상대적으로 쉽고, 통용의 범위도 쉽게 펼칠 수 있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용어 순화 작업은 일정한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다.
    단지 욕심을 더 내자면 국립국어연구원이 이러한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면서 이 성과에 대한 검증 작업 역시 게을리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여러 기관에서 추진해 온 이 성과에 어느 부분이 성공적이었고, 어느 부분이 실패하였는가에 대한 냉정한 성찰을 어디서도 제대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만일 실패의 비율이 높다면 방향을 어서 바꾸든지 해야지, 한쪽에서는 계속 사라지기만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새말만 자꾸 만들어 낸다면 그렇게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자료집을 들여다보면 로펌(→법률회사), 러브 콜(→손짓), 섹스어필(→성적매력) 등의 순화대상 어휘가 아직도 훨씬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6. 남북한의 언어 문제
    남북한의 언어 문제를 공식적인 논의에 담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초기에는 다분히 호기심에 어려, 북한 어휘의 특이한 점, 독특한 낱말 등에 관심을 보이다가 북한에서의 독특한 이론적 업적이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언어의 이질화 문제는 다소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논의라고 하는 것이 차차 드러났고, 몇 가지 규범의 차이 어휘의 차이 등이 남아 있는 비교적 순수한 의미의 언어 문제로 확인된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부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구태의연한 이질화론이 세간에 그대로 떠돌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전문가들에게 남은 과제는 양측의 언어 정책 문제로서 앞으로의 통일을 위하여 어떠한 규범의 통일이나 어휘의 공동화가 필요하겠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무척 아쉬운 것은 남북한의 언어 문제에 대한 초기의 열기와 관심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틈틈이 그리고 종종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도 초기의 논의에서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쟁점들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지난해의 성과들을 살펴보면 우선 한글학회에서 나온 『교육 한글』 13집에 몇 가지 짤막한 논의들이 보인다. 안타깝게도 전반적으로 과거의 논의를 반복하거나 그리 전문적이라고 할 만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 "남북한 언어의 발음 차이에 관하여"(이현복)는 북한의 언어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소홀히 하고 있는 억양, 리듬 문제들을 다루어서 이 분야의 논의를 비교적 살찌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 단계에서는 이러한 발음의 차이가 의사소통에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키는지 하는, 더 나아간 논의가 이어졌으면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데 실린 "남북한 한글맞춤법"(김계곤)은 대부분의 논의가 이미 거론되었던 맞춤법의 차이를 열거하고 있으나 결론 부분에 가서는 좀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곧 남북한의 맞춤법 통일을 위한 제언에서 1933년의 '통일안'으로 돌아가지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본다면 다분히 복고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도 있고, 남북의 문제만큼은 어떤 궁여지책이라도 효용만 있으면 깊이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는 이때에 이렇게 색다른 방안이나마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론거리의 하나로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는 인정할 만하다.
    역시 같은 데 실린 "남북한 표준말의 차이와 공동 표준말 가꾸기"(조재수)는 여기에 실린 글 가운데 상당한 고민을 엿보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은 근본적으로 표준어와 문화어의 차이를 민족어의 부담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풍부한 자원으로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여느 논객과는 시각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 글의 내용에 옳고 그른 것이 있든 없든 간에 바로 이러한 시각의 발전과 진전이 우리의 남북한 언어 문제 논의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에서 낸 『어문연구』 28권 2호에 실린 "국어의 남북통일을 위한 과제"(홍종선)는 전반적으로 이렇다 할 쟁점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단지 결론 부분에서 남북 문제의 대안으로 양측에 복수 표준을 제시한 것은 적어도 그 시각만큼은 진일보한 점이라고 본다. 그 외에도 『민족 문화 연구』 33호에 실린 "국어의 '토' 문법에 관한 남북한 언어 대비"(최호철)는 사실상 남북한 언어 문제에 대한 언어정책적 논의라기보다는 문법 이론에 관한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하여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편찬한 『북한 주민이 모르는 남한 어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 나온 『남북 한자어 어떻게 다른가』와 『북한주민이 모르는 남한 외래어 조사』의 후속편이다. 남북한의 언어 차이에 관하여 더욱 더 정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작업을 해 냈다는 점에서 일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우선 이 자료의 제보자 문제이다. 단 한 사람의 제보를 통하여 북한 주민 전체의 언어 능력 혹은 언어 지식을 짚어 본다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다. 한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국가 기관의 작업이라면 훨씬 광범위한 제보자를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불만은 그 내용을 보면서도 점점 더 증폭된다. 물론 제보자가 오다가다 만난 '아무나'가 아니라 북한에서 다년간 교육과 연구 활동에 종사하던 사람인 만큼 북한 주민의 언어 생활을 단정적으로 판단할 만한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방언 조사의 초보 경험자라도 제주도의 한 지식인을 조사하여 '제주 방언에서는 ......'이라는 문제제기를 할 만한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제주도보다 엄청나게 넓고 다양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일반적인 북한 주민은 제보자보다 모르는 어휘가 훨씬 많을 것이다.
    언어 실태를 과학적으로 조사하려면 제보자 집단의 사회적 위상, 교육 정도, 직업의 의사소통성 등을 살펴야 하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 온 시점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남한 어휘 이해도의 차이를 검증하는 비교 연구가 선행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 그러나 이런 것은 너무도 시시한 상식일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과연 이 책은 왜 출간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책이 북한에서 나왔다면 일리가 있다고 보겠지만 이 책이 남한의 학술 연구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일반인들의 교양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의 머리말에 나와 있듯이 남북한 정상의 만남에 즈음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북한에서 쓰는 말 가운데 남한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말들을 조사하거나 북한 어휘 가운데 우리가 잘 모르거나 오해하기 쉬운 것을 조사했더라면 더 쓸모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음으로써 마치 이 책은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언어 생활 그리고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에서의 언어 현상에 얼마나 적응하기 어려운가 하는 목적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7. 국어의 정보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문화관광부가 중심이 되어 추진해 온 '21세기 세종 계획'은 지난해에도 몇 가지 열매를 거두어 들였다. 우선 『21세기 세종 계획 한민족 언어 정보화』(이태영(연구책임자))는 데이터베이스를 포함한 검색 시스템(외래어 및 방언)과 남북한 언어 비교 사전의 틀을 제시하였다. 아직 기본적인 자료에 따른 작업이니 만큼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나 표준 발음에 대한 사항 등 몇 가지 아쉬움을 접을 수밖에 없지만 일단 앞으로의 보완과 확대 작업에 기대를 건다.
    마찬가지로 『국어 기초자료 구축 분과 및 특수자료구축 분과의 보고서』(서상규(연구 책임자))는 모든 언어 정보화 사업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말뭉치 구성 작업의 결과를 보여 준다. 기초 작업은 기초이기 때문에 손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겠으나, 또한 기초이기 때문에 더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에 부딪치기 쉽다. 이 보고서의 입말에 대한 부분과 북한 쪽의 말뭉치가 순수한 생말뭉치와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훗날에도 다시 한번 보충 작업을 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같은 연구 사업의 또 다른 분야인 『전자사전 개발』(홍재성)은 일반 국민을 위한 도구 개발이라는 취지의 세종 21 계획이 내 놓을 가장 구체적인 산물이다. 여러 연구 보고서 가운데의 하나로 남지 말고 속히 국어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의 실질적인 효율을 높이는 단계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것이며, 기술적인 문제를 발전시켜 데스크톱이나 노트북만이 아닌 휴대전화나 PDA 등을 통해서도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 깊이깊이 침투할 수 있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충분한 전문 지식이 없을 경우에는 도대체 무얼 하자는 것인지 얼른 파악하기 간단치 않은 일이 또 다른 구석에서 진행되어 온 결과가 드러났다. 바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수행한 『비표준문자등록센터 사업 보고서』이다. 사실 언어의 세계에는 표준화된 부분보다 비표준적인 요소가 실제로 더 많이 존재한다. 언어의 체계는 한편으로는 무너져 내리는 부분이 있으면서, 다른 면에서는 재구조화되는 면이 늘상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비체계적인 것, 비표준적인 것,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것 들이 나타난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조잡해 보이는 것들이 의사소통의 구실을 적절히 잘 해낸다는 것이다. 친구와 한잔하고 싶을 때에 '소주'라는 말보다 '쏘주'라는 말이 더 감칠맛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체계 혹은 표준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에서는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다.
    종종 방언 조사에서 느끼듯이 비표준적인 것을 조사하는 일은 피곤해지기 쉽다. 용도도 불분명하다. 오류도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언어 전반적인 기호 체계를 꿈꾸는 사람들이나 언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일감들이다. 세종 21 계획에서 각종 규범 요소의 검색 시스템이 고도의 정밀도를 자랑한다면, 이 비표준문자 등록 사업은 세종 21 계획을 매우 기름지게 하는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세종 21 계획과는 별도의 사업이지만 사실상 함께 동반하고 있는 또 다른 것으로서 연세대학교 언어정보개발연구원의 연구 보고서 『국어정보화 연구인력 양성』(이민행(책임 연구))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언어 정보화 사업은 물적 기반의 생산 못지 않게 인적 기반의 공고화가 더욱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의 연구 인력 양성 프로그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일단 시작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매우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포교가 시작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여러 주제를 개괄적으로 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미흡한 토양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겠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이 보고서에 실린 외국의 프로그램 사례가 훨씬 더 매력 있게 보였다는 점은 우리의 언어 정보 관련 인력 양성이 이 이상 구호만 외치면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자기 반성을 피할 수 없게 한다.

8. 새로운 과제 의식에 대하여
    보통 이미 쟁점과 논의의 대상이 된 의제는 일종의 관성을 가지고 담론의 중심에 서기 쉽다. 반대로 그러한 중에서 또 다른 성격의 의제를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의 산물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언어정책적 포석을 둔 중요한 자취가 눈을 끈다. 다름이 아닌 '한글 글꼴'에 관한 논의들이다.
    글꼴 문제에 관한 산물 가운데 매우 의미 있게 생각되는 것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한글글꼴용어사전』이다. 한글 글꼴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아직 일천한 가운데 하나의 전문 사전이 출현했다는 것은 필경 어려운 역경을 헤치고 극성스레 일을 추진한, 보이지 않는 일꾼이 있었음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글꼴이라는 논의의 대상은 언어학적이면서도 기술공학적이고, 또한 미학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분야에는 불가피하게 여러 분야 사람들의 공동 노력이 끈질기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글글꼴용어사전』은 바로 이러한 학제적 노력이 분명히 돋보인다. 돋보이다 못해 그 영역간의 어설픈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부위마다 아직 서투른 요소들이 생경하게 드러난다. 설명하는 문체 등이 아직 그리 깔끔하지 않고, 각 항목의 설명자가 제각각인 듯한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첫 작품은 이러한 평가가 결코 욕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많은 항목에서 설명 자체가 자세하지 않아 익숙지 않은 분야에서 온 용어의 경우에는 일어도 구체적으로 실체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용어 사전의 위상을 든든하게 만드는 것이 이 문제와 관련된 『정보화 시대와 한글 글꼴 개발』(홍윤표)이다. 용어 사전이 글꼴 문제를 일반성 있게 다루었다고 할 것 같으면 『정보화 시대와 한글 글꼴 개발』은 왜 한글 글꼴이냐 하는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물음에 답변을 준다. 여기에서는 한글 글꼴 문제를 전반적이고도 개괄적으로 설명해 준다. 보통 국어학에서 문자를 언어의 반영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글꼴은 언어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심리, 정서, 기능, 그리고 색채와 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그널을 담으려 한다는 점에서, 또 더 나아가 경제적 유통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미의 사회적 도구라는 점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00 한글 글꼴 개발 현황"(박병천·한문희, 『글꼴 2000』 한국글꼴개발원))은 지난해 국내에서 개발된 165종의 글꼴 개발 현황을 회사별로 보고함으로써 우리의 언어정책은 언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산업임을 보여 주고 있다. 또 "한글 스크린 폰트 개발에 관한 연구"(이기성, 『글꼴 2000』 한국글꼴개발원)) 역시 한글 폰트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지난날 한글 폰트의 입력 용량에 대한 논쟁을 지나 이제는 출력 용량의 문제로 넘어가는 발전 양상을 증언하고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작업으로 한국과학기술원 전문용어언어공학연구센터에서 문화관광부에 제출한 『전문용어센터 운영-전문용어 표준화를 위한 기반조성-』을 들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첫째로 전문 용어 표준화를 위한 기초 작업을 위하여 전문 용어에 대한 국어학적 검증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을 통하여 언어 규범, 조어 등의 분석을 하면서 해당 학회의 표준안 심의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전문 용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등 3개 언어의 대응 목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포지엄, ISO 활동 등의 국제적 연계 활동을 통하여 전문 용어의 일반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병행한다.
    지금까지 전문 용어라 하는 것은 주로 특정 분야 내부의 전문적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학술적 담론의 전반적인 공통성과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특정 분야 내부의 것만이 아닌 분야간 의사소통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시민 사회의 전반적인, 그리고 동시대적인 발전을 이룩해 온 서구 사회의 경우에는 비교적 전문 용어의 보편성의 기반이 잘 이루어져 있음에 반하여 식민지적 관계에서 분야별로 들쭉날쭉하게 발전해 온 한국 사회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야간 의사소통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곧 전문 용어의 공통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단순히 학술적 담론을 원활히 하자는 편리성의 문제가 아닌 근본적인 사회 발전의 모델을 확정하고 공고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전문 용어에 대한 이 같은 작업은 아직 그 같은 결실의 수준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나 일정한 방향 감각을 지닌 연구 사업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근간의 전자 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의 눈을 끄는 새로운 논의가 있다. 바로 통신 언어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편으로는 언어 문제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문제에 접근하려면 먼저 언어 이론의 문제와 언어를 보는 가치 및 태도의 문제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언어 이론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통신 언어는 근본적으로는 입말 처리에 관한 문제로 풀어 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글자를 이용하여 언어를 기호화하는 과정은 전반적으로 글말 중심이다. 또 글말은 원론적으로 언어 규범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언어 규범을 중심으로 한 글말의 표기 방식을 통하여 입말의 표기를 본다면 그 현상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다. 물론 통신 언어에서의 제반 현상이 반드시 입말의 문제만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특이한 부호라든지 과장된 발음 표기 등도 따로 거론할 수 있겠으나 그런 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입말에서 나타나는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설사 이 문제를 문법론적으로 접근한다 하여도 규범 일탈이라는 시각보다는 입말에서의 형태음소 변동의 문제와 형태소 융합 등이 얼마나 자유롭게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로 전환해 볼 필요가 있다. 곧 입말에서 자유롭게 일어나는 언어 변이형 생산이 글말의 체계 속에서 어떠한 의사소통 현상을 유발하느냐 하는 것이 이론가로서 문제를 보는 정석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다른 접근 방식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에 대한 가치와 태도, 곧 다시 말해서 언어 규범과 교육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전문적인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도 일부 문제점이 거론되고는 있지만 대개는 각종 보도 매체들에 의해 문제 제기가 많이 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현재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통신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언어 생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사사로운 언어는 그 나름대로의 자유가 필요하다.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사용은 그 대화 참여자들끼리 결정할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언론을 비롯하여 이런 통신 언어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반응을 일삼는 태도는 좀 문제가 있다. 차라리 보도 매체의 언어 문제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든 규범과 교육의 문제는 남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사로운 언어라 하더라도 공적인 영역에 노출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자기'라든지 '오빠'라든지 하는 말은 얼마든지 사용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현상이 일일연속극 따위에 등장하게 되면 이것은 사사로운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 당연히 규범과 교육의 문제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비교적 광범위하게 다룬 작업이 『바람직한 통신 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 연구』(이정복, 문화관광부 연구 보고서)이다. 통신 언어를 직접 접촉할 수 없는 다른 연구자들에게 자료 제공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유용한 소재들을 많이 담고 있다. 무언가의 문제점을 지적하라면, 전반적인 논의는 일관성 있게 언어 문제로 한정하고 있으면서 결론에 가서는 좀 급하다 싶게 교육 문제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신 언어 문제를 교육과 더 나아가 윤리적 문제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적 연구 결과가 동반해야 누구든지 수긍할 만한 교육적 대안이라 할 것이다. 어린이에게 장난감 총을 사 주면 폭력적이 된다고 외치면 그 교육적 정열은 높이 살 수 있지만 과연 그가 과학적인 이론에 바탕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문가인가 하는 물음에는 편안한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슷한 주제는 "사이버 시대의 언어 생활"(최호철)에서도 다루어진다. 그러나 매우 거시적으로 접근한 것에 비해 결론이 무척 허전하다. 막연히 내린 '교육적 대책 마련 시급'이라는 결론은 일종의 도피에 불과하다.

9. 학위 논문들에 대하여
    기성 전문가들의 연구 동향을 검토하면서 새롭게 동학의 길을 걷게 되는 사람들의 글을 본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혹 그 내용과 수준이 미흡하고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하더라도 미래의 동료들이라는 시각 속에서 되도록 발전을 기대해 보는 면으로 평가해 본다. 거론하는 순서는 저자 이름의 가나다순을 따른다.
    <초등교과서의 한자 실태와 빈도수 연구-한문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김영신, 영남대 교육학 석사)는 꽤 실증적인 작업을 통하여 초등학교 한자 교육의 개선과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한자어와 한자의 구별이 잘 안되거나 개념이 모호한 맥락이 자주 발견되어 그 논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약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북한 문화어의 성립과 전개>(김원진, 연세대 석사)는 북한의 언어정책을 매우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글이다. 이 논문의 특유한 면은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논의해 온 이질화 문제, 민족주의 문제, 주체 사상 문제(반외세) 등에서 훨씬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넓은 시각에서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 가운데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현상으로 파악했다. 새롭게 성장하는 새 세대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새로운 전망이다.
    <현대국어 어문 표기론 연구-한글 전용을 위한 해결책->(김혁철, 공주대 석사)은 아직 지난날의 하고많던 논의들을 폭 넓게 반복한 정도의 의미만을 보여 준다. 한글 전용에 대한 논의가 시들해진 것은 그것이 함의하는 근본 의미가 소실되어서가 아니라 더 넓은 차원의 의제 설정 기능을 잃어버린 탓이라고 볼 때에 이렇게 반복적인 논의보다는 새로운 의제를 모색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북한 인민학교 국어 교과서 어휘의 계량적 고찰>(남인영, 전남대 석사)은 북한의 초등교육과정에서 사용된 어휘 빈도를 조사한 것으로 그 기초 작업에 대한 집중을 높이 평가한다. 사실 이러한 기초 작업이 빠진 채 남북 언어의 이질화니 통일의 전망이 어떠니 하고 논쟁하는 것은 퍽 허망한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교육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조사가 뒤따랐으면 한다.
    <고등학생의 어문 규정 활용 실태 연구>(박선희, 충남대 교육학 석사)는 언어 규범에 교육학적인 접근을 시도했을 때 보일 수 있는 색다른 연구 결과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설문 조사를 통한 연구는 진정한 의미의 경험적 연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설문 결과에서 보여 준 양적인 현상을 얼마나 질적으로 제대로 해석해 내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구조와 형태소 분석의 이용'과 '음성적 일반화의 이용'이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좀 더 구체적이고, 사용이 가능하게 분석 결과를 설명했으면 한다.
    <남·북한 한자음의 차이와 통일 방안에 대한 연구>(박현주, 울산대 석사)는 양적으로는 남다른 노력이 깃든 결과물이다.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남북한의 한자음에 대한 규범화는 거의 대부분 공통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사항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장 일상적인 어휘 중에는 浚渫(준설/준첩), 歪曲(왜곡/외곡), 使嗾(사주/사촉), 拔萃(발췌/발취) 등을 들 수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독음법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무려 컴퓨터로 입력이 가능한 10,666자를 대상으로 삼아 그 가운데 서로 소릿값이 다르게 매겨진 1284자에 대한 표준화의 시도한 것이다. 여간 해서는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그러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이러한 기초 훈련 없이 서투른 이론 논쟁에 들어서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앞으로 이러한 연구의 후속물을 기대하며 한 가지 의문을 던져 보고 싶다. 이 글에서는 남북한의 통일음을 설정하기 위하여 한자음의 정통성과 합리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정통성에 대한 기준을 중국 운서인 『광운』의 중고음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논지의 글을 볼 때마다 드는 하나의 의문이 있다. 우선 만일 한자어가 이미 한국어화된 우리말의 일부이라면, 굳이 중국 고전 운서에 따를 필요 없이 그것 역시 현대 한국어의 표준형은 '현대 사회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 발음'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야 한자어가 우리 말이다 아니면 (순화 대상의) 중국말이다 하는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주관적 논리에 정통성과 합리성을 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따라서 한자음에 대한 연구는 일종의 대조음운학적인 시각을 유지하되, 한자어의 발음 문제는 어디까지나 국어음운론적 테두리를 지키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남북한 어문 규범 비교 연구-한글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 표준 발음법을 중심으로->(정옥룡, 홍익대 교육학 석사)는 두 어문 규범에 대한 착실한 섭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남북한 언어 문제에 대한 숱한 그간의 연구 결과를 거의 다 무시한 듯이 초연하게 기존의 논의를 되풀이하고 있는 점이 무척 아쉽다. 결론에서 내린 통일 대안 역시 기존의 논의에서 더 나아갔다기보다는 적지 않은 퇴행이 엿보인다. 비슷한 점에서 <한글 맞춤법의 문제점에 대한 연구>(최연화, 충남대 교육학 석사)도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기존 연구를 섭렵하고 나서 자신의 비판적인 칼을 갈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한 양상-호칭어의 대조를 중심으로->(최창욱, 경남대 교육학 석사)는 문제를 보는 관점과 이를 드러내는 주요 개념들을 좀 더 정밀화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분명히 방언적 차이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마치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 문제인 것처럼 논지를 펼쳐 나간 것은 좀 더 정리가 되어야 할 부분이다. 서울말과 제주말의 차이는 방언의 문제이지 이질화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연구>(한수경, 한림대 석사)는 매우 현실적인 쟁점을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글이다. 전반적으로 (필자는 일정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고는 있지만) 음절 위주의 로마자 표기법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 대문자를 이용한 음절 표시를 주장한다는 점 등에서 보면 이의재의 논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10. 맺는 말
    한 해의 학문적 동향을 일정한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어도 전체의 흐름은 다 담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마지막 부분을 추스른다. 앞머리에서 언급했다시피 국어정책론은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정책 문제'에서 온갖 논의를 출발할 수밖에 없다. 정책 문제에서 출발하지면 당연히 언어 문제 외의 사항에서 느끼는 다양한 문제 의식이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국어정책론의 대부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따가운 비판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문제 의식의 빈곤이라는 점이다. 문제 의식의 빈곤은 철학의 빈곤에서 싹튼다. 그리고 철학의 빈곤은 학자의 무사안일에서 비롯한다.
    공용어, 로마자 표기, 한국어 교육, 남북한 문제 등에서 잡문 쓰듯이, 고민 없이, 붓 가는 대로 쓸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어 한다는 하나의 공감(sympathy)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공감은 사회적 참여를 불러올 것이고, 이러한 참여의 틀 안에서 진행하는 연구야말로 진정한 정책론의 뼈대를 이루게 할 것이다.
    둘째로 감성의 극복 문제이다. 남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슬로건이 주는 감성에 빠지고, 한국어 교육을 논할 때는 '국위선양'이라는 구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규범 문제를 논의하면서는 '개탄' 중심으로 문제를 보지 말자. 정책론이 진정한 의미의 학문이 되려면 이 모든 감성적 요소가 동시에 그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뿐이다.
    셋째로 일반 국어학의 시각을 극복해야 한다. 본문에서 언급한 많은 연구물들은 당사자의 개인적 노고에도 불구하고 국어학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저지른 문제들이 대단히 많다. 예를 들어 정책론에서의 언어 규범 문제는 '문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규범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문제 의식이 더욱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현 단계의 국어정책론은 자체의 고유한 쟁점 개발이 불충분한 상태라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허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필자들이 그런 가운데서 급박하게 터져 나오는 사회적 문제에 그때그때 다급하게 단편적인 답변을 해 나가기에 바쁘기만 하다. 언어 정책에 대한 일반성 있는 논의, 여기에서 더 나아간 한국어라는 특수한 한 개별언어의 사회적 문제, 그리고 이것을 다룰 때 각 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핵심 개념의 발견, 그 핵심 개념에 대한 각 부문에서의 논점 개발, 각 논점들에 대한 통합적 논의 등으로 흘러 나가는 학술 담론의 흐름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국어정책론의 끝마무리를 대변하는 자아비판이자 동학들에 대한 관전평이다. 우리의 국어정책론이란 국어학자들의 시사 단평 정도에 그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끝으로 이 동향 보고에서 빼어 버린 부분이 있다. 양적으로는 무려 반이 넘는 정도를 차지한 한글과 한자 사용에 대한 논쟁이다. 두루 알다시피 이것은 아주 오래된 논쟁이다. 오래된 논쟁일수록 더욱 더 발효되어 진국의 논쟁을 보여 주어야 할텐데 그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이 부분을 빼어 버린 까닭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대부분이 지나간 50~60년대의 화법에서 거의 진화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 주었다는 말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