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서문가(訓民正音序文歌)'
제정(制定)에 부쳐
심재기(沈在箕, 국립국어연구원장)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립국어연구원 원장 심재기입니다.
 저희 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지난 1999년 9월 훈민정음 서문 108자에 곡을 붙여 만든 '훈민정음서문가'를 국민 여러분께 보급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데에 도움을 드리기 위하여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이 무엇인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훈민정음서문가를 제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1.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
 단군(檀君) 이래 반만년을 면면히 이어 내려온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던 시기를 한 군데만 짚어 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조선 왕조 의 세종 시절을 가리킬 것이고, 그중에서도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시기를 으뜸으로 손꼽을 것입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일은 그만큼 우리 민족 문화사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문화적 위업입니다. 신라 시대에 불국사 석굴암을 지어 낸 건축술이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고, 고려 시대 금속 활자의 개발이 놀랍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또 조선 시대 거북선의 축조 기술이 경탄할 만한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문화적 업적도 민족의 유일성을 보장하는 우리말을 담는 그릇, 곧 우리 문자인 훈민정음에 견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훈민정음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겠습니까? 그것이 지니고 있는 특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이러한 의문들을 한데 묶어 '창제 정신'이라는 말 속에 뭉뚱그려 넣고 그 내용을 차분하게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흔히, 위대한 문학 작품은 그러한 작품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환경과 그러한 작품을 창작한 특출한 천재가 만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 방법을 따르면, 훈민정음은 걸출했던 세종 대왕과 그의 치세 기간에 해당되는 15세기 전반기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시대 조건이 어우러진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세종 대왕 같은 영특한 임금이 없었다면 훈민정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요, 또 조선 왕조 초기, 왕국을 건설하고 50여 년을 경과한 시기가 아니었다면 훈민정음은 세상에 태어나는 시기를 늦추거나 혹은 영영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세종이라는 한 개인의 천재성과 그 천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 환경이 우연히 만난 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조물주가 베푼 특별한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세종 25년이라는 1440년대에 눈을 돌려 보기로 합시다.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운 지 28년이 지난 뒤에 네 번째 임금으로 등극한 세종 대왕은 그의 치세 기간이 우리 민족사에서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절호의 문화적 발흥기임을 간파하였던 것 같습니다. 고려 말기에 극도로 문란했던 나라 안의 경제 상황은 할아버지 태조 대왕과 아버지 태종 대왕 시절에 전제(田制) 개혁을 통하여 말끔히 정리되었고, 임금 자리를 놓고 피비린내 나는 골육 간의 싸움을 벌였던 것도 부왕 시절에 깨끗하게 잊히었습니다. 나라 밖으로는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중국 천하가 조선보다 한발 앞서 명나라를 세워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이 솟구치는 나라의 힘은 해안을 어지럽히는 왜구를 대마도까지 쫓아가 쳐부술 만큼 기세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육진을 새로 다져 둘 만큼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 새로운 문화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것이겠습니까? 세종 대왕이 새로운 문자 창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참으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종의 치세 기간을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의 시대사적 (時代史的)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상사적(思想史的) 관점이요, 둘째는 정치사적(政治史的) 관점이며, 셋째는 문화사적(文化史的) 관점입니다. 이 모든 관점에서 볼 때 훈민정음은 이 시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 조선은 유학(儒學)이 지향하는 이념을 그대로 국가 건설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습니다. 고려 말기에 불교를 지나치게 따름에 따라 빚어졌던 폐단을 씻어 내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는 데 있어서, 중국의 송나라 이래로 학문적 깊이를 굳건히 다진 성리학은 새 왕조의 건국 이념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새로 집대성한 유학의 3대 전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은 세종이 임금으로 즉위하던 1419년(중국에서 간행된 지 3년 뒤에 해당함)에 입수되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이 밤을 밝히며 연구하고 토론한 것은 바로 이들, 정교하게 발전한 유학의 이론서들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자 했던 주역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론을 이때에 집현전 학사들이 재검토하였고, 인간의 언어 현상과 결부하여 면밀히 연구하였습니다. 물론 이미 그 이론에 따라 중국에서 발전한 성운학(聲韻學)도 함께 검토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운학은 말소리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그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한자음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통용되는 표준 한자음이 어떤 것이며, 우리나라 한자음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말도 성운학적으로 해석하게 유도하였습니다. 한편, 유학이 치세의 최고 이념으로 하는 것은 예악(禮樂)이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나라의 백성이 일사불란한 질서를 지키며 서로 완전한 화합을 이루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禮)는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질서를 나타내는 말이고, 악(樂)은 음악으로 표현되는 것인데 그 바탕은 너와 나, 임금과 신하, 임금과 백성, 남편과 아내 등 서로 협조 관계를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는 경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예악 사상과 성운학의 결합은, 백성이 올바른 한자음을 배워 모든 백성이 표준 발음으로 말을 통일하고 서로 화합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습니다.
 둘째, 세종의 치세 기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국제 정세가 모처럼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후반기에는 원나라의 지배 밑에서 내정 간섭을 받았습니다. 원나라 공주를 역대 임금이 왕비로 맞이했어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굴욕적 외교 관계를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세종은 대외 관계에서 어떻게 민족 자주 노선을 확립할 것인가에 깊은 배려를 했을 것입니다. 명나라와의 관계도 명분상 사대(事大)를 하기는 하였으나 민족주의의 숨은 기치(旗幟)를 세우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적 자주성이 문자를 통하여 확립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미 중국의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은 그들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10세기에, 탕구트는 11세기에, 여진은 12세기에, 몽고는 13세기에, 월남은 14세기에 각기 자기 민족의 고유 문자를 만들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우리의 언어 실정에 맞는 문자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주적인 민족 국가의 체면에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국제 문자의 기능을 하는 한자를 일상생활이나 외교 관계에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고유한 문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과 문자가 없다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주변 국가들이 민족적 자주성을 선언하는 방편으로 고유 문자의 보유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세종이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안목이 높았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대외적인 정세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백성을 위해 어떤 조처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할 때에 백성의 문자, 즉 우리나라 언어 체계에 꼭 맞는 문자를 염두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컨대 민족주의와 민본주의의 표상으로서 고유 문자 훈민정음은 이 시기에 이르러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문자의 명칭에 '훈민(訓民)'이라는 표현을 명시한 점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훈민정음 서문에도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대다수의 일반 백성은 문자 생활, 문화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어린 백성(어리석은 백성)' 곧 우민(愚民)이었습니다. 나라의 힘이 백성의 저력(底力)에 기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세종으로서는 백성에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과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훈민'이란 용어는 현대의 개념으로 '국민 의식의 계발'을 뜻하는 것으로서 평이한 문자를 창제함으로써 그 실효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이미 국제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15세기 초엽에 그러한 국제화 사회에 적응하려면 당시 세계의 중심인 중국 명나라를 비롯하여 인근에 있는 다른 나라에 대하여서도 깊이 이해하고 서로 교통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려면 그들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었습니다. 언어를 아는 것이 그 문화를 이해하는 첫걸음임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있어서 ㉮우리말을 바르게 적고 ㉯중국의 표준 한자음도 바르게 적으며 우리나라 한자음도 정리하고 ㉰인근에 있는 다른 나라 말도 바르게 적어서 그 말을 배우는 데 길잡이가 된다면 하나의 문자가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석삼조의 이득을 가지게 될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여, 새로이 탄생할 문자는 한국 사람을 주인으로 하여 당시 동양의 언어 전체를 감싸는 국제 음성 기호의 구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훈민정음은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말을 완벽하게 적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표준음과 속음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훈민정음은 놀라우리만큼 완벽했습니다. 또한 중국어 이외에도 몽고어, 왜어, 여진어를 표기하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번역을 맡은 기구인 사역원(司譯院)이 모든 외국어 교과서를 훈민정음의 창제로 얼마나 간편하고도 효과적으로 편집할 수 있었는가는 거듭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은 사상적 학문적 시대 배경이 부추기고, 국제적 정치적 시대 상황이 요구하였으며, 사회적 문화적 요구가 모두 맞아떨어진 열매이었습니다. 또한 훈민정음에는 새로운 국가 질서와 국민의 화합을 염원하는 예악(禮樂)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민족적 자긍심을 발현하는 민족 자주의 정신이 들어 있고, 동시에 온 백성의 교양을 높이고 사회 참여 의식을 고취한다는 민본주의의 이상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계의 모든 언어를 표기함으로써 국제화 시대에 대처한다는 문화 의식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이상을 지니고 창제된 훈민정음이기는 하지만 세종 대왕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한 하나의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훈민정음으로 기존의 한자 문화, 한자 생활을 부정하고 폐기하려는 생각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훈민정음은 당시 문화적 특권을 누리는 양반 사회의 기존 질서와 기존 체제를 좀 더 완전하게 보존하고 도와주기 위한, 어디까지나 보조 문자로서만 그 존재 가치가 인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에 단 한 번도 한자 사용을 유보하고 훈민정음만으로 문자 생활을 영위하자고 하는 생각을, 혹은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확실해집니다.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간행되고 석보상절과 허다한 불경언해가 세상에 나왔지만, 그것은 한자와 공존하거나 한자를 우선시하는 범위 내의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은 19세기 말, 개화 계몽의 의식이 싹트고 새롭게 민족주의가 논의되기 시작하는 개화기가 되기까지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훈민정음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것만으로 문자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은, 훈민정음이 새 역사를 맞아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한글'로 고쳐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훈민'이라는 낡은 봉건적 국민 계몽의 기능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악 사상이라는 기본 이념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조명을 받고 더욱 확대 심화 된 개념으로 수용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민족주의와 민본주의의 이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5세기의 조선 왕조와 20세기의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서 있는 자리가 이미 다르듯이 한글도 이제는 세계 속의 한글로서 민족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민본주의만이 존재하는 민주 사회의 문자로서 한자가 지녔던 과거의 영광을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넘겨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전통 문화 유산이 대부분 한자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세종 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새로운 시각에서 한글을 국제적인 문화 문자로 끌어올리는 다각적인 노력뿐임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