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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선임연구원)
  한 사회의 말은 그 사회 구성원이 가꾸어 왔으며, 또한 가꾸어 가고 있는 문화와 사상을 반영한다. 우리말에서 높임법, 특히 부름말(호칭어)과 가리킴말(지칭어)이 복잡하게 발달한 것은 윗사람을 공경하는 문화와 유교에 바탕을 둔 신분주의 전통이 어울려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부모’, ‘봉황’, ‘신사 숙녀 여러분!’과 같이 좋은 것은 주로 남자 쪽이 먼저 나오지만, ‘암수’, ‘연놈’과 같이 나쁜 것은 주로 여자 쪽이 먼저 나오는 것은 남녀를 차별해 온 우리 사회의 폐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만하다.
  대화 상대에게 자기 집을 가리킬 때에도 ‘우리 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용법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럴 때 쓰이는 ‘우리’를 “말하는 이가 자기보다 높지 아니한 사람을 상대하여 어떤 대상이 자기와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풀이하였다.
  우리말은 서술어가 문장의 끝에 오는 특성이 있는데, 이 때문인지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안다.”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닐까 싶다. 문장의 의미는 말하는 이의 생각을 풀이하는 구실을 하는 서술어에서 결정되는데, 이것이 가장 뒤에 나오는 언어에서는 당연히 끝까지 들어야 결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된 글에는 주로 두괄식이 많고, 국어로 된 글에는 주로 미괄식이 많은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다.
  위의 예들에서 보듯, 말은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거울이 항상 깨끗하지는 않다. 시간이 흐르면 흠집도 생기고, 바람에 실려 온 먼지도 끼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청소를 하고 수선을 할지라도 처음처럼 깨끗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말도 완벽하게 순수한 것은 없으며, 또한 완벽하게 순수한 말로 돌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때의 말로 이때의 사회를 비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 속에 스며든 잡스러운 것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 말은 결국 그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 말들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만 사라지는 데에 있지 않다. 사라진 말을 쓰던 언어 공동체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글쓴이는 우리말 다듬기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외국말을 우리말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에는 그 말에 배어 있는 외래의 문화와 사상도 함께 받아들인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충분히 우리말로 고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로 다듬어 내고, 그렇게 할 수 없는 부분에 한하여 외국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쓰게 되면 점차 우리말이 차지하던 영역이 좁아지게 되어, 우리말의 존재 자체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목이 긴 구두’를 가리키는 말은 ‘장화’이다. 그런데 명동 거리에서 목이 긴 구두를 신은 젊은 여성에게 “장화가 참 잘 어울리네요.”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 여성은 자기의 ‘부츠’가 ‘장화’처럼 촌스럽게 보였나 싶어 기분이 상할 것이다. 아니면 ‘장화’라고 말한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영한사전에서 ‘부츠(boots)’는 분명히 ‘장화’로 해석되어 있음에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미 도시의 젊은 여성들이 멋으로 신는 목이 긴 신발은 ‘부츠’가 되었고, 논일을 하러 갈 때 신는 목이 긴 신발은 ‘장화’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말 ‘장화’가 차지하던 영역이 좁아진 것이다.
  인사말에서도 외국어투가 점차 널리 쓰이고 있다. 인사말은 언어의 친교적 기능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즉, 낱말 하나하나에 뜻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사의 기능을 하게끔 오랜 역사를 거쳐서 언어 공동체가 관용으로 인정한 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의 인사말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어도 그에 대한 답을 따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에 처음 뵌 어른에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어디 가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어른은 그냥 “자네도 안녕한가?”라고만 답하면 될 뿐,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 가는지 꼬치꼬치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유의 말법이다. 그런데 요즘엔 “좋은 아침(입니다)”과 같은 인사말이 유행이다. 영어의 “굿 모닝(Good morning)”을 직역한 것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인사말 본연의 특성을 무시한 채 엉터리로 영어를 이해한 것이다. ‘굿 모닝’은 ‘안녕’ 또는 ‘안녕하세요’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억수가 내리는 날 아침에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네고 나서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보면 이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인사말인지 알 수 있다. 미국 사람들끼리는 그런 날에도 “굿 모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말에서 “좋은 아침”은 그렇지 않다. 우리말에서 “좋은 아침”은 말 그대로 ‘좋은 아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형의 인사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고, 고유의 인사말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나 하는 말처럼 여겨지는 세태가 안타깝다. “좋은 하루 되세요.”라든지,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라든지 하는 것들이 모두 외국어 인사말을 곧이곧대로 번역하여 세련된 말인 양 쓰고 있는 예이다.
  한 순간에 우리말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겠지만 이런 현상들이 점차 일반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말을 점점 홀대하게 될 것이고, 결국엔 우리말도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
  말은 사회 변화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지만, 말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온 국민의 애칭이 된 ‘붉은악마’라는 이름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금기시해 온 말과 생각의 영역을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간호원’을 ‘간호사’로 바꿔 부르게 되면서 ‘간호사’가 ‘의사’와 더불어 어엿한 의료의 주체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에서 보듯, 말의 힘은 우리가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크다. 말을 바꾸는 것은, 곧 사회를 바꾸는 일인 것이다.
  우리말 다듬기도 말을 바꾸는 일이며, 따라서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말 다듬기는 외국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와 정신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힘쓰는 일이 되어야 하며, 우리말이 현대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요즘 ‘핫팬츠(hot pants)’가 유행이다. 그런데 ‘핫(hot)’은 ‘성적인 흥분’을 뜻한다. 따라서 ‘핫팬츠’는 서구에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여 지어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쓰는 것은 현대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국립국어원에서 이를 ‘한뼘바지’로 다듬은 것은 평가할 만하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방향으로 우리말 다듬기가 진행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