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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의 시 “석양(夕陽)”
김옥순(金玉順) 국립국어원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 돗보기다/ 대모체 돗보기다/로이도 돗보기다/ 영감들은 유리창같은 눈을 번득이며/ 투박한 북관(北關) 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짐승같이들 사러졌다
(‘석양(夕陽)’, 『삼천리문학』 2호, 1938. 4.)

  백석(白石, 1912〜1963, 본명: 기행[夔行])은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나고 자라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계초 방응모 장학금을 받아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외국의 언어와 문화를 접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부끄럽거나 미개하거나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국적인 풍물을 대하는 민속학자나 문화인류학자처럼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흥미로워 함을 알 수 있다. 말하는 이는 이렇게 다소 기묘한 태도(고향 사람들을 낯설게 보는)로 대상과 장소와 시간을 그리고 있다.

· 시간: 장날
· 장소: 북관(함경도)의 거리
· 대상: 영감들〉영감들 얼굴〉코 모양〉코에 걸친 학실 모양
  얼굴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제유(연결된 일부분으로 전체를 암시하는 비유, 提喩, synecdoche)로 잘 쓰인다. 그 사람을 비유하는 것으로 손이나 다리를 꼽지 않고 얼굴을 꼽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살아있는 은유”를 쓴 조지 레이코프의 말처럼 그 이유는 얼굴이 가진 대표성이다. 부분이라고 해서 다 제유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북관(함경도의 다른 이름)의 거리를 활보하는 영감들의 대표적 특징을 얼굴에서 잡아내고 있다. 말상(말처럼 긴 얼굴), 범상(호랑이처럼 몹시 사납고 무서운 얼굴), 쪽제비상(쪽제비처럼 다소 품격이 떨어지는 얼굴)으로 나누어 본다. 그 얼굴 가운데에서도 코 모양을 개발코(개발처럼 뭉툭하게 생긴 코 내지는 넙죽한 코), 안장코(말의 안장처럼 콧등이 잘룩하게 생긴 코), 질병코(거칠고 투박한 오지병처럼 생긴 코)로 구분한다. 이렇게 북관의 영감들은 다른 얼굴형과 다른 코 모양을 하고 있지만 공통점도 있다. 즉 학실(돋보기의 평북 방언, 특히 다리 가운데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안경)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학실의 디자인도 각각 다르다. 돌체 돋보기(석영 유리로 안경테를 만든 돋보기), 대모체 돋보기(바다거북의 등껍데기로 안경테를 만든 돋보기), 로이도 돋보기(미국의 희극배우 헤롤드 로이드가 끼었던 안경) 등을 각각 꼈다. 이런 묘사·관찰은 시 속의 말하는 이 나름대로 진지한 관찰이지만 한편으로 웃음과 장난끼마저도 느낄 수 있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말하는 이의 관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쇠리쇠리한(눈부신)’ 저녁 해에 그들의 안경이 반사되면서 영감들의 눈은 (도시 건물의) 유리창으로 비유된다. 건물의 유리창이 석양에 빛을 받아 반쩍거리는 모습과 안경의 유리가 번득거리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다시 말상, 범상, 족제비상의 모습을 한 영감들이 투박한 함경도 말로 떠들어대며 위협적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마치 한판 싸움을 끝낸 한 무리의 맹수들이 원시림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사나운 짐승같이“라고 비유한다.
  여기서 약간 비유의 불균형이 느껴지는데, 북관 태생 영감님들의 생김새는 원시적이고 우락부락한 데다 투박한 북관 말을 쓰는 것이 마치 사나운 짐승 같다고 했다. 그 영감님들의 코 위에는 한결같이 근·현대적인 갖가지 형태의 안경들이 걸쳐 있다는 점에서 그 불균형은 흥미롭기도 하다. 이렇게 야성의 사나운 짐승의 모습을 한 함경도 영감님들의 안경 낀 모습과 석양에 반사되는 건물 유리창의 모습ㅇ 동시에 느껴진다는 점에서 현대와 야성의 흔적이 느껴지는 이상한 결합을 비유를 통해 적확하게 꼬집어내고 있다. 어떤 진화된 민족도 다 야성에 뿌리를 두고 있듯이 1930년대의 근·현대적인 북관 영감님들이 시장 나들이를 하는 모습에서 말타고 맹수들을 쫓던 사이베리아, 요동 반도를 장악했던 사냥꾼 조상의 모습, 우리 민족의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뿌리가 현대에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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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