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어원]

'바쁘다'의 어원

홍 윤 표(洪允杓) / 연세대학교
  

  ‘바쁘다’는 그 뜻이 여러 가지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①일이 많거나 또는 서둘러서 해야 할 일로 딴 겨를이 없다 ②몹시 급하다 ③(주로 ‘-기(가)바쁘게’의 구성으로 쓰여) 어떤 행동이 끝나자마자 곧의 뜻을 나타낸다 ④(북) 힘에 부치거나 참기가 어렵다”의 네 가지 뜻이 있다. ④는 주로 북한과 중국에서 쓰이는 뜻이다. ‘요즈음 놀기 바쁘다’란 말을 들은 남한 사람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지만, 북한 사람이나 중국의 우리 동포들은 ‘노는 일이 힘들다’는 뜻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일에 열중하니 힘들다’라고 해석되어서 남한에서는 그 단어의 바쁜 상태를, 북한에서는 바쁜 결과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바쁘다’의 ‘바쁘-’는 언뜻 보아 더 이상 분석이 되지 않을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숨이)가쁘다, 기쁘다, 나쁘다, 미쁘다, 어여쁘다, 예쁘다 ’ 등을 연상하면 어기에 접미사 ‘-쁘 ’가 통합된 것으로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접미사는 ‘ -쁘’가 아니라 ‘ -브’였다. 어기의 말음에 ‘ㅅ’ 등이 있어서 ‘ㅅ-브다’가 ‘-쁘다’로 된 것이다. 그러니 ‘바쁘다’는 ‘밧-’에 ‘-브다’가 붙어서 ‘밧브다’가 되었고, 이것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바쁘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것이다.

世間앳 밧디 아니니르디 아니씨오<월인석보(1459년)> 이우즐 사괴면 밧븐 제 이셔도 서르 구완리라<정속언해(1518년)> 바망(忙)<유합(1700년)> 밧제 이 약 업거든 병 업  믈에 머기라 <언해두창집요(1608년)>
  그렇다면 ‘밧-’은 무엇일까? ‘밧-’은 원래는 ‘밫-’이었다. ‘바차, 바시니’ 등으로 활용하였지만, 주로 ‘바차’ 형으로 사용되었다. ‘밫다’는 여기에 대응되는 한자가 ‘忙’이어서 ‘밫다’는 ‘바빠하다’란 뜻이었다. 그래서 ‘바차’는 오늘날의 ‘바쁘게 하여, 바빠서’의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간 ‘밫-’에 자음으로 시작되는 어미의 사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東南門 노니샤매 늘그니 病보시고  내시니 西北門 노니샤매 주그니 比丘僧을 보시고 더욱 바시니<월인천강지곡(1447년)> 셔방님 바차 유무 보답장노라<순천김씨언간(1565년)> 바차 말오 저야 공부 드려 다으게 라(不要忙)<번역박통사(1517년)> ‘안직  디 말라 바차 므슴 다’(且休上馬 忙麽)<번역박통사(1517년)>
  ‘밫다’는 15세기와 16세기 문헌에 등장하지만, 17세기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16세기 자료인 『번역박통사』(1517년)의 ‘바차 말오’와 ‘바차 므슴 다’가 『박통사언해』(1677년)에는 각각 ‘밧바 므섯리오’와 ‘밧바 말고’로 바뀌어 나타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즉 ‘바차’가 ‘밧바’로 변한 것이다. 이 ‘밫다’의 어간 ‘밫-’에 접미사 ‘- /-브’가 연결되면 ‘밫-’은 ‘밧-’으로표기되어 ‘밧다/밧브다’로 쓰이었다. 이것이 어중에서 된소리로 되어 ‘바다/바다’(또는 ‘밧다/밧다’)로 표기되고 현대 국어에 와서 이것이 ‘바쁘다’가 된 것이다. 물론 15세기와 16세기에 ‘밫다’와 ‘밧다/밧브다’는 동시에 사용되었다. ‘밫다’의 뜻이나 ‘밧다/밧브다’의 뜻이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 ‘밫다 ’가 오래 전부터 쓰이었는데, ‘밧 다/밧브다’가 만들어진 이후 그 세력이 약해져 17세기에 그 자리를 ‘밧다’에 넘겨 준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 다/-브다’접미사가 붙은 어기들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도 있지만, 이미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숨이) 가쁘다’는 ‘- + -브 + -다’로 분석되는데, 이것은 15세기에 ‘다/브다’로 나타난다 ‘힘들이다, 애쓰다란 뜻의 ‘다’는 ‘가, ’ 등으로 쓰이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쁘다’도 ‘- + -브 + -다’로 분석되는데, 이것은 ‘깃브다’로 표기되었다. ‘다’(기뻐하다)도 ‘깃거, 깃글’ 등으로 쓰이었는데 이 단어는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미쁘다’도 ‘믿- + -브 + -다’로 분석되는데, ‘믿다’는 15세기는 물론이고 지금도 활발히 사용되는 단어다. 그러나 ‘어여쁘다’는 ‘어엿- + -브 + -다’로 분석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15세기에도 ‘어엿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쁘다 ’ 역시 15세기에 ‘낟다’로 나타나기 때문에, ‘낟- + /-브 + -다’로 분석할수 있을 것 같지만, 같은 뜻을 가진 ‘낟다’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단어가 단일어로 생겨나면, 그 이후에 약간의 의미가 가감되거나 또는 변화된 파생어가 만들어지고 그 결과로 두 단어의 보이지 않는 싸움은 치열한 것으로 보인다. 뜻이 같아지면 둘 중에 하나는 사라지는 운명에 놓이고 조금의 의미 차이라도 생기면 둘이 사이좋게 생명을 유지하는 단어의 생태를 보면 신비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