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어원

'양말'과 '양철'

홍윤표(洪允杓) / 연세대학교

우리가 신고 다니는 '양말'이 한자에서 온 말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양말'을 고유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말'은 한자어다. 서양에서 버선과 비슷한 것이 들어오니까 버선을 뜻하는 '말(襪, 버선 말)'에 '양(洋)' 자를 붙여서 '양말(洋襪)'이라고 한 것이다. 버선과 양말이 이렇게 되어 어휘 분화를 겪게 되었다.
    '양철(洋鐵)'도 서양에서 들어온 '쇠'라고 하여 '철(鐵)'에 '양(洋)' 자를 붙인 것이다. 이것을 '서양철(西洋鐵)'이라고도 했는데, '양철'은 오늘날 그대로 남아 있지만, '서양철'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서양철'이 음운 변화를 일으켜 '생철'이 된 것 같은데, '서양'이 '생'으로 음운 변화를 일으킨 다른 예들을 발견할 수 없어서 확언하기 어렵다. 아니면 '생철'이 '생철(生鐵)'과 같은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서양에서 들어온 문물들에 처음 이름을 붙일 때 접두사인 '양-'이나 '서양(西洋)'을 붙였었는데, 어느 때에 '양'을 붙이고 어느 때에 '서양'을 붙였는지 그 규칙을 알 수 없다.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양(洋)'을 붙여 만든 단어들이 꽤 있다. 물 긷는 데 쓰이는 질그릇의 하나가 '동이'인데, 서양에서 이 동이와 비슷한 것이 들어오니까 여기에 '양' 자를 붙여 '양동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구리, 아연, 니켈 따위를 합금하여 만든 쇠'가 '양은'인데, 이것이 들어오니까 그 색깔이 '은'과 유사해서 '은'에 '양' 자를 붙여 '양은'이라고 하였다. '양재기'도 마찬가지다. '자기(瓷器)'에 '양' 자가 붙어서 '양자기'가 되고 여기에 i 모음 역행 동화가 이루어져 '양재기'가 되었다. '양회(洋灰)'는 '회(灰)'는 회인데 '서양에서 들여온 회'라는 뜻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보다는 '양회'가 더 많이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양회'란 단어의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양잿물'을 '서양에서 받아들인 잿물'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양재'에 '물'이 붙은 것인데 그 사이에 사이시옷이 들어간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서양에서 '소시지'가 들어오니까 '순대'에다가 '양' 자를 붙여 '양순대'라고 했었다. 소시지를 북한에서는 '고기순대'라고 하는데, 특히 '양순대'는 오늘날 다시 되살려 쓰고 싶은 단어이다. 지금 모 제약 회사 이름에 '양행(洋行)'이란 단어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한자 그대로 풀면 '서양에 다닌다'는 뜻이지만, 이 의미가 전이되어 19세기 말에 '양행'은 '무역(貿易)'과 동일한 의미가 되었던 것이다. '양행'이란 단어가 붙은 회사는 무역 회사였던 것이다. 지금은 그 뜻을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양-'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서 파생된 단어들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양궁(洋弓)', '양단(洋緞)', '양담배(洋--)', '양란(洋蘭)', '양배추(洋--)', '양버들(洋--)', '양복(洋服)', '양식(洋食)', '양옥(洋屋)', '양장(洋裝)', '양주(洋酒)', '양초(洋-)', '양코(洋-)', '양파(洋-)', '양화점(洋靴店)' 등.
    그렇다면 '양'이 붙은 단어들은 언제 발생하였으며, 또 어떠한 단어들에서 먼저 나타났을까? 18세기 말까지 간행된 어휘 자료집에서는 이러한 예들이 검색되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편찬된 어휘 자료집에는 접두사 '양-'이 붙은 단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가장 먼저 나타난 단어는 '양금(洋琴)'으로 보인다. '서양 거문고'란 뜻의 '양금'은 이른 시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19세기에 편찬된 "광재물보(廣才物譜)"에 '洋琴'을 한글로 '양금'이라 풀이하고 다시 한문으로 "出西洋國 以銅絲爲絃(서양에서 온 것인데, 구리 실로 줄을 만들었다.)"이라 하고 있다. 이 단어는 19세기 말의 거의 모든 어휘 자료집에 다 등장한다. '양주(洋酒)', '양복(洋服)', '양초(洋燭)', '양단(洋緞)', '양약(洋藥)', '양장(洋裝)' 등도 이미 19세기 말에는 우리 국어 속에 들어온 단어들이다. 19세기 말에는 '구두'란 일본어가 들어오기 이전이어서 이때에는 이 '구두'를 '양혜(洋鞋)'라고 하였고, '주사'라는 단어가 들어오기 이전이어서, 주삿바늘을 '양침(洋針)' 또는 '서양 침(西洋針)'이라고 하였다. '담배'라는 단어 이전에는 '남초(南草)'가 쓰이었는데, 19세기 말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담배를 '양초(洋草)'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각 문헌에 나타났던 '양'이 붙은 단어들을 몇 개씩 보이도록 한다.

(1) 양금(洋琴), 양단(洋緞), 양뎐(洋氈), 양도(洋刀), 양물(洋物), 양셔(洋書), 양션(洋船), 양인(洋人), 양침(洋針), 양텰(洋鐵), 양학(洋學) 등. <"한불자전"(1880)에서>
(2) 양관(洋館), 양국(洋國), 양금(洋琴), 양료리(洋料理), 양복(洋服), 양셔(洋書), 양션(洋船), 양약(洋藥), 양어(洋 語), 양은젼 (洋銀錢), 양의(洋醫), 양인(洋人), 양졔(洋製), 양쥬(洋酒), 양초[<洋燭], 양총(洋銃), 양칼[洋刀], 양학(洋學), 양혜(洋鞋) 등. <"국한회어"(1895)에서>
(3) 양국(洋國), 양금(洋琴), 양단(洋緞), 양도(洋刀), 양등(洋燈), 양료리(洋料理), 양물(洋物), 양복(洋服), 양사(洋 紗), 양(洋 絲), 양샹(洋商), 양셔(洋書), 양션(洋船), 양약(洋藥), 양어(洋語), 양은젼(洋銀錢), 양의(洋醫), 양인(洋人), 양젼(洋氈), 양졔 (洋製), 양죵(洋種), 양쥬(洋酒), 양초(洋草), 양총(洋銃), 양쵸[<洋燭], 양침(洋針), 양텰(洋鐵), 양포(洋布), 양학(洋學), 양항 (洋行), 양항라(洋亢羅), 양회(洋灰) 등. <"한영자전"(1897)에서>

접미사는 언어 외적인 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지만, 접두사는 문화적인 면의 영향을 받아 새로이 생성되기도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양-(洋)'과 '호-(胡)'를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당(唐)'이나 '왜(倭)'처럼 접두사인 성격을 가지는 한자어도 이들과 속성이 유사하다. 이러한 말들이 붙어서 파생된 단어들은 이웃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접촉하여 만들어진 단어들인 것이다.

(4) 호-(胡): 호고추, 호두 [<胡桃], 호떡, 호밀, 호박, 호배추, 호추[<胡椒], 호콩 등.
(5) 당(唐): 당나귀, 당닭, 당면(唐麵), 당수(唐手) 등.
(6) 왜(倭): 왜간장(倭-醬), 왜감자, 왜철쭉, 왜콩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