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성어를 찾아서

'도외시(度外視)'와 '백안시(白眼視)'

이준석(李浚碩) / 국립국어연구원

우리말에서 다른 이의 의견이나 존재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김으로 냉대할 때 '도외시(度外視)하다'와 '백안시(白眼視)하다'라는 말을 쓴다. '도외시'는 "현실을 도외시하다/그의 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처럼 대개는 '문제를 삼지 다'나 '무시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다음의 예문처럼 '업신여기다'의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다.

(1) 그는 소림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외시하기는커녕 자신의 처지로선 과람하다는 생각이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누군가를 홀대(忽待)하거나 무시하는 심리가 태도나 말투, 행동 등으로 표출되는 것을 '업신여김'이라고 할 때 '백안시하다'는 '업신여기다'는 뜻을 '도외시하다'보다 좀 더 강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2) ㄱ. 남들의 이런 백안시나 숙덕공론 때문에 괴로워하고 기를 못 펴는 건 누구보다도 종상이 내외였다. <박완서, "미망"에서>
ㄴ. 고향에 돌아와 사람들로부터 받은 백안시, 그리고 수모가 그녀의 가슴에 적개심으로 남아 있었다. <최일남의 "거룩한 응달"에서>
ㄷ.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지금껏 그 남자를 백안시하던 눈에 웃음을 띠게 되었다. <최명익의 "장삼이사"에서>

앞의 예문에서 보는 것처럼 약간의 의미 차이를 띤 채 우리말에서 쓰이고 있는 '도외시'나 '백안시'는 모두 중국 고전에 유래를 둔 말이다.
    '도외시'는 "후한서(後漢書)"의 '광무기(光武記)'에 나오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유수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멸한 후 부하들의 추대로 제위(帝位)에 올라, 한(漢)나라를 재흥(再興)하게 되었을 때 중원(中原)의 대부분은 그의 세력권이 되었다. 그러나 진(秦)에 웅거하는 외효(隗囂)와 촉(蜀)에 거점을 둔 공손술(公孫述)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 중신(重臣)들이 이 두 지역을 토벌할 것을 진언하자 유수는 뜻밖에도 "중원이 이미 평정(平定)되었으니 이제 법도의 밖으로 보라[度外視]."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들을 무시해도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므로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무시하다'나 '문제 삼지 않다'와 같은 현재의 의미는 황제의 법률이 적용되는 지역 밖으로 보겠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조금 다르게 쓰이는 말이라 하겠다.
    남을 업신여기거나 냉대할 때 사용하는 '백안시'는 "진서(晉書)"의 '완적전(阮籍傳)'에 나오는 완적(阮籍)의 태도에서 유래한 말이다. 완적은 중국 진(晉)나라 초기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무위 사상(無爲思想)을 좋아해서 죽림에서 청담(淸談)을 즐겼던 일곱 명의 선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당시의 지식인인 혜희(嵇喜)가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완적은 혜희가 평소 즐겨 담론(談論)하던 친구인 혜강(嵇康)의 형이었음에도 그를 백안시하며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다른 계통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백안시는 상대방을 똑바로 보거나, 눈동자를 치켜뜬 채 상대방을 보는 형상이다. 따스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백안시하게 되면 자연히 눈의 흰자위가 드러나게 된다. 반의어(反義語)가 청안시(靑眼視)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안시는 홀대와 업신여김이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라 하겠다.
    따스한 시선으로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홀대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우리말로 '데면데면하다'라는 단어와 '소 닭 보듯 하다'라는 속담(俗談)이 있다. "그 사람 왜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굴어."나 "날 소 닭 보듯 하잖아."는 상대방의 친밀하지 않은 태도로 인해 홀대(忽待)를 받는다고 느꼈을 때 토로(吐露)하는 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