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표기법의 이해

영어 발음 망치는 외래어 표기법?

정희원(鄭稀元) / 국립국어연구원

얼마 전 신문에서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점을 지적한 어느 교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의 주장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잘못된 외래어 표기법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외국어 발음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즉 [p]와 [f] 소리를 똑같이 'ㅍ'으로 적거나, [l]과 [r] 소리를 똑같이 'ㄹ'로 적도록 하는 외래어 표기법 탓에 한국 사람들이 이 소리들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또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한글 자모를 약간씩 변형하여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예를 들어 [f]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ㅍㅎ' 같은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자는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이러한 지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주장이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발간된 책자에 보면 'ㅇㅂㅣ터민'이나 'ㅇㅍㅔ이스' 같은 표기형들이 눈에 띄는데, 'ㅇㅂ', 'ㅇㅍ' 등은 고유어를 적을 때에는 사용되지 않던 자모들로 [v]나 [f]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부호들이다. 그러나 외래어를 적기 위해 새로운 문자나 부호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1933년에 공포된 '한글 마춤법 통일안'에서부터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는 것을 표기의 기본 원칙으로 명시하고 있다.


외래어 표기를 위해 새로운 문자를 도입해선 안 돼

외래어를 원음에 가깝게 적기 위해 새로운 부호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외래어 표기법의 목적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다. 외래어 표기의 목적은, 외국어에서 비롯되었으나 국어 속에 들어와 우리 언어생활에 사용되는 말들을 통일된 방식으로 적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 발음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영어에서 [kɔ:fi]로 발음되는 단어를 '커피', '코피', '코오휘' 등 제각각으로 적지 말고 '커피'라는 한 가지 형태로 고정하여 적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어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 표준 표기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를 말할 때에도 그대로 발음하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외국인과 영어로 말을 할 경우에는 [kɔ:fi]의 영어 발음을 따로 익혀서 제대로 발음해야 할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외국어의 발음 표기를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실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만들어진 기호의 용도도 분명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말과는 다른 음운 체계를 가진 외국어의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새로운 문자나 부호를 만들어야 한다면, 세계 여러 언어들에서 사용되는 소리들을 적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호가 필요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영어만 두고 생각하더라도 [θ, ð, ʤ, ʧ] 등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복잡한 문자로 국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외래어 표기와 외국어 발음 교육은 무관해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그 나라 말의 문자와 소리 체계를 익히는 것이다. 영어를 배울 때에는 영어 알파벳과 그 소리를, 일본어를 배울 때에는 가나 문자와 그것이 나타내는 소리를 먼저 학습하지, 외국어를 한글로 적어 놓고 그대로 발음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의 외국어 발음에 문제가 있다면 외국어의 효과적인 발음 교육 방식과 관련한 논의를 해야지, 외래어 표기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