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논쟁 특집

제2의 공용어는 없다

김수연(金壽淵) / 문화관광부 국어정책과장

최근 제주도를 국제 자유 도시로 건설하는 대안 가운데 영어를 공용어화하는 방안이 구체화되면서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찬·반 논란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영어 공용어화에 관련된 찬·반론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로서 영어를 하는 것과 공용어로서 영어를 하는 것의 차이점을 혼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언어 정책임에도 영어를 잘하는 수단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어를 공용어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영어 좀 잘 하자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일반 국민이나 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하면 찬성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공용어화를 찬성하는 이들은 이러한 여론 결과를 가지고 그들의 의견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영어 공용어화의 개념을 바로 알고 공용어가 될 경우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반응이 정반대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공용어라고 하면 국가가 공적으로 의사를 표명하거나 받아들이고자 할 때 공식적이거나 강제적으로 쓰도록 강요하는 언어를 말한다. 즉 영어가 공용어로 채택되면 우리가 공식적으로 써야 하는 말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 고시, 학교 교육, 법원의 재판 등에서 영어로 서비스 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영어로 서비스를 해야 하고 국가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즉 언어생활에 있어 영어가 외국어가 아니라 당당한 우리의 공식 언어로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 산업체에는 산업 연수생으로 초청되어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있는데 이들에게 국적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외국인으로서 근로자의 지위와 당당한 우리 국민으로서 근로자의 지위가 다르다는 것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그러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를 알아보자.
    첫째, 우리말의 소멸을 자초하고 이를 가속화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영어의 위력이 점점 커짐에 따라 소수 언어는 점차 빠른 속도로 소멸하고 있다. 유네스코 연감 보고서에 따르면 현존하는 3천여 언어 중에서 90% 이상이 향후 100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우리말은 위축되고 소멸 시기를 앞당기게 될 것은 자명하다.
    둘째, 영어는 상류어가 되고 우리말은 하류어가 되어 모어를 바탕으로 한 문화 창달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말은 민족 정신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영어로 인해 우리말이 위축되고 퇴보되어 소멸된 후에는 필연적으로 영어권 국가로 전락하게 되어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또한 언어와 민족의 존립은 운명을 같이하는데 우리말을 잃어버리게 되면 종국에는 민족의 존립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셋째, 영어 구사력이 능통한 국민과 그렇지 못한 국민들 사이에 새로운 계층이 생겨 국민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위화감이 국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어를 배우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과 정력의 낭비는 결국 국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넷째, 우리가 중국 대륙에 연접해 있으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우리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말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다는 것은 5천 년 동안 면면히 지켜 온 소중한 문화유산인 우리말을 버리고 외국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결과가 되어 민족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

공용어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알지 못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 공용어화가 국제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는 경제적 논리 하나만을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국제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주장에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영어 공용어화와 국가 경쟁력 간의 상관관계를 따지기 전에 복수(複數)의 공용어를 채택하는 역사성과 당위성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구 상에는 190여 나라가 있지만 단일 언어 국가가 그들 스스로 외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만약에 있다면 이것은 식민지의 유산이며 우리도 일제 때 일본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복수의 공용어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태생적으로 다민족 언어를 가진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는 복수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나라로서 스위스, 벨기에, 캐나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역사성과 당위성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공용어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성공 사례로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드는데 이들 국가가 국제화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여건과 국제 상권을 형성하는 제반 입지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두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것은 국제 도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유산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필리핀, 인도 등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도 후진국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한 일부에서는 인도가 정보 기술(IT) 분야에 고급 인력을 많이 배출한 것은 영어 구사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인도가 정보 기술 분야의 전문 인력을 많이 배출한 것은 정부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정보 기술 분야의 산업을 차세대 주력 산업으로 키운다는 전략 하에 국가의 최우선 육성 산업으로 지정하여 집중 투자해 온 성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영어 때문에 우수한 정부 기술 분야의 전문 인력을 많이 배출하였다면 다른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텐데 다른 분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영어와 정보 기술 분야의 전문 인력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음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영어 공용어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어 구사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 공용어화가 영어 구사력을 향상시킨다는 논리는 검증된 바가 없다. 영어 구사력을 높이는 일은 결국 교육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영어 공용어화를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현재 우리 국민의 영어 구사력으로는 현실적으로 영어 공용어화를 실행하기 어려우므로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을 때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는 이가 있는바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공용어 채택 여부는 언어 정책에서 결정하여야 할 사항이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환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서는 안 되는 당위성의 출발은 언어 주권과 민족의 존속을 유지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주권을 가진 단일 언어 국가가 외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한다는 것은 언어 주권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권 국가가 스스로 외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예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공용어는 자국민의 의사소통을 위하여 채택하는 것인데 우리의 경우 우리말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도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다는 것은 국제적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영어 구사력이 아무리 성숙되어도 우리의 국권이 보존되어 있고 우리말이 생활 언어로 통용되고 있는 한 외국어를 제2 공용어로 채택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채택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미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서 영어가 보편적인 공용어로 인식되고 있지만 다른 언어도 인정하는 다언어 정책을 시행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영어를 단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러한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
    미국이 왜 언어 정책을 바꾸는가? 그 답은 공화당 출신 위스콘신 주 하원 의원인 토비 로스가 제출한 ‘공용어 법안’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제출한 법안에서 “영어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 구실을 해 왔다.”라고 전제하면서 미국의 정신을 심어 주기 위해서는 영어를 단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하였다. 언어는 민족혼을 담는 그릇이고 사람의 사고를 형성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사용을 허용함으로써 미국의 정신을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영어를 생활 언어로 사용하면 영어식 사고를 하게 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면 한국식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는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다. 부모가 한국 사람이지만 영어만 사용하는 자녀의 사고방식은 미국식이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자녀는 한국식 사고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현지 동포들의 체험담에서 언어의 역할과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 자기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영어를 단일 공용어로 채택하기를 주장하는 마당에 우리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언어 정책은 경제적 논리와 가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경제적 가치가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말에 손상을 준다면 그 정책은 피해야 하는 것이 언어 정책이다. 우리에겐 제2 공용어란 없다. 오직 한국어만이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