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논쟁 특집


제주도 내 영어 공용어화 방안에 대한
국립국어연구원의 성명서


영어를 제주도에서 제2 공용어로 삼는 것은 제주 도민을 반(半) 외국인으로 만드는 일이며 언어로 대표되는 우리 문화의 지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영어를 제2 공용어로 채택하면 영어 구사 능력이 향상되고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영어를 하나의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양질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면 그에 따른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적소에 배치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어를 잘 쓰는 것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국가 정체성과 직결되며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고 겨레의 얼과 정신이 담긴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한때 중원(中原)을 차지하여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어 민족 자체가 거의 소멸해 버린 것은 바로 그들의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가까운 예로는 일제 강점기를 들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마음을 쓴 부분은 바로 우리나라 말과 글의 말살이었다. 이것은 언어라는 것이 바로 그 민족 얼의 핵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주도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만약 제주도에서 영어를 제2 공용어로 채택한다면 실제로 제주 도민은 더 이상 한국인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반 외국인 상태가 될 것이다. 지역 간 갈등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제주도의 이러한 이질화는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큰 상처를 줄 것이다. 또한 그렇지 않아도 영어 교육에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있는 현실에서 영어가 제주도에서 공용어로 채택된다면 영어 공부를 위해 아이들을 제주도로 유학 보내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사태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이 지역 발전을 돕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다른 곳에서도 지역 발전 명목으로 영어 보급에 앞장서게 될 것이고 영어 사용은 제주 외 지역에서도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주에서의 영어 공용어화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영어가 공용어화되어 가는 중간 단계가 될 것이다.

영어를 공용어화하는 과정에서 도민 사이에 언어에 따른 새로운 계층 질서와 위화감이 조성될 것이며 교육과 서류 처리 등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제주도에서 영어가 공용어로 채택될 경우 실질적으로 발생하는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주민들 사이의 위화감 조성과 정체성 상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엄청난 불편함이다. 영어를 제2 공용어로 채택하고자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외국인들이 제주도에 와서 관광을 하거나 생활을 할 때에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면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제주 도민들이 영어를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모국어처럼 사용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럴 경우 영어 사용 능력에 따라 도민 사이에는 일등 도민과 이등 도민이라는 계층이 생기게 될 것이고 실제 영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도민들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전체 제주 도민 사이에 씻을 수 없는 분열을 조장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일이며 장기적으로 제주도의 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기형적인 제주 문화를 형성하는 요인이 될 소지가 크다. 이뿐만 아니라 대다수 주민이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현실에서 이들을 정부가 원하는 수준의 영어 공용어 화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비가 지출될 것이고 초·중·고 학생뿐 아니라 유아에게까지 영어 교육이 확대될 경우 교육비뿐만 아니라 도민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상실을 막기 위한 비용의 지출까지 감당해야 한다. 이런 비용까지 감당하면서도 과연 영어를 공용어화해야 할지 심히 의심스럽다. 또 이러한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들여서 교육한 영어가 진정한 영어일까에 대해서도 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필리핀 일반 서민들의 영어 사용 실태를 보면 이런 우려가 현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영어에 서툰 부모와 공용어인 영어 사이에서 방황하던 아이들은 영어도 고유어인 타갈로그 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She not go. They not sleeping.”과 같은 튀기 영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영어를 모든 공문서에 병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당장 제주도 외 지역과의 소통에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고 이는 역시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출생 신고를 하고 호적을 작성하는 문제만 보더라도 제주도 내에서만 영어를 병기하는 까닭에 그 외 지역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 끊임없이 영어를 병기하고 삭제하는 일들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 관련된 서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동이 빈번한 현대 사회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상당한 혼란과 비용을 떠안고 가는 일이다.

공용어는 여러 언어가 한 나라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경우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국어만을 사용해 오고 있는 제주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려는 것은 공용어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공용어는 기본적으로 한 국가 내에서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경우, 국가나 공공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필리핀, 인도, 스위스, 캐나다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제주도에서 이미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그중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삼는다고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와 맞지 않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이 한국어가 이미 단일 언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영어를 새삼 제2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공용어의 개념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제주도 내 영어 공용어화 문제를 논하면서 싱가포르와 홍콩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 도시들과 제주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앞의 두 도시는 이미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거나 조차지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이미 영어와 그 외의 언어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고 당연히 공용어를 지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가진 적이 전혀 없는 곳이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영어를 공용어화한다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스스로 식민지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가 국제 자유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제반 시설 및 규정 등이 정비되어야 하는 것이지 전체 주민에게 영어 사용을 강요하는 영어 공용어화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제주도를 국제 자유 도시로 개발하는 것이 제주도가 고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외국 관광객이 선호하는 관광 명소 및 국제 모임의 개최지가 되는 것이라면 영어 공용어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라면 단순한 영어 전문 교육의 확대만으로 해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인들이 제주도에서 좋은 투자자로서 머물기를 원한다면 다양한 투자 상품의 개발이 더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가 전통과 유산을 보존하면서 국제 도시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을 때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제주도의 고유 문화를 잘 보존하길 바란다면 문화를 대표하는 언어는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주민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바람을 저버리는 일인 것이다. 또한 제주도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중국인과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을 고려하면 영어 공용어화는 더욱 설득력을 잃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