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발음

‘노근리’의 발음

 

최혜원(崔惠媛) 국립국어연구원

육이오 당시 미군 비행기가 어떤 마을의 주민과 피난민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해서 한동안 나라가 떠들썩한 적이 있다. 일명 ‘노근리 미군 양민 학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연일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렸었다. 그런데 라디오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 사건을 보도할 때마다 충북 영동면 황간면의 ‘노근리(老斤里)’에 대한 발음이 제각각이었다. [노:근니]로 내보내는 방송이 있는가 하면, [노:글리]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말에서 ‘ㄴ’은 유음 ‘ㄹ’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바뀌는 현상이 있는데 이를 유음화(流音化)라고 한다. 이 유음화는 고유어와 한자어에 따라 달리 일어나는데, 고유어에서는 예외 없이 뒤에 오는 ‘ㄴ’이 앞에 오는 ‘ㄹ’의 영향을 받아 ‘ㄹ’로 바뀐다.(칼날[칼랄], 물난리[물랄리], 줄넘기[줄럼끼]) 한자어도 ‘ㄹ’ 앞에서나 뒤에서나 ‘ㄴ’이 ‘ㄹ’로 발음되는 것이 보통이다.(신라[실라], 난로[날:로], 말년[말련], 불능[불릉])그러나 한자어의 경우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항상 ‘ㄹㄹ’로 발음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한루[광:할루] 대관령[대:괄령] / 의견란[의:견난] 동원령[동:원녕]

앞의 두 예는 ‘ㄹㄹ’로 소리나지만, 뒤의 예는 ‘ㄴㄴ’으로 발음된다. 그렇다면 이 두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까? ‘광한루’나 ‘대관령’은 ‘광한+루’, ‘대관+령’과 같이 분석했을 때 ‘광한’이나 ‘대관’이 독립성이 없다. 그에 비해 ‘의견+란’, ‘동원+령’으로 분석되는 뒤의 두 단어에서 ‘의견’, ‘동원’은 독립적인 단어로 쓰인다. 이렇게 하나의 한자어를 두 부분으로 분석했을 때 독립성이 있으면 ‘ㄴ’으로 끝나는 앞의 말은 형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어 ‘ㄴㄴ’으로 발음하고, 독립성이 없으면 ‘ㄹㄹ’로 발음한다는 것이 현재 표준 발음법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근리’의 경우는 어떨까? ‘노근리’는 ‘노근’이라는 명칭 부분과 행정 구역 단위인 ‘리’로 분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앞의 ‘노근’이 이름으로서 독립성이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서울과 그 주변의 ‘당인리(唐人里)’, ‘일산리(一山里)’, ‘화전리(花田里)’가 [당일리], [일살리], [화절리]가 아니라 [당인니], [일산니], [화전니]로 발음되고 있고, 이 마을들이 도시의 명칭이 되거나 도시 안에서 새로운 행정 구역 명칭을 얻을 때 ‘당인’, ‘일산’, ‘화전’ 단독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리(里)’ 앞의 말들이 일정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노근리’의 표준 발음은 [노:근니]이다.
    그런데 ‘현리’와 같이 ‘리(里)’ 앞에 1음절의 한자어가 올 때에는 결론이 다르다. ‘용산구’, ‘종로구’ 지역을 ‘용산’, ‘종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구’, ‘남구’를 ‘중’, ‘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현리(縣里)’의 ‘현’은 독립성을 가질 수가 없기에 ‘현리’의 발음은 [혈:리]로 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