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한글과 비슷한(?) 구자라트 문자

김광해(金光海) / 서울대학교

한글이 과연 세종에 의해서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그 전에도 한글의 모태가 되는 어떤 문자 체계가 존재했었느냐 하는 논의들이 심심치않게 제기되는 일이 있는데, 이 문제는 궁금하기 짝이 없는 만큼 지극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간 우리 나라 주변에서 발견되는 몇 종의 문자가 한글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 주장이나 방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었다. 그 하나는 소위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실려 있다고 하는 ‘가림토 문자’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여기저기서 발견된다고 하는 ‘신대문자(神代文字)’이다. 이런 문자들이 한글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확신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도 있어 견해가 대립된다. 이들이 과연 한글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된 것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이 밖에 또 하나, 한글과 모양이 비슷한 문자를 인도의 어떤 지방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가 몇 건 있었다. KBS 방송사업단 발행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1983)의 200쪽에는 “구자라트 문자는 한글과 모양이 닮은 것은 자음은 ㄱ,ㄴ,ㄷ,ㄹ,ㅁ,ㅅ,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다.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은 한글이 가림토 문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확신하는 글을 쓴 송호수(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광장, 1984, 1월호, p.154) 교수에 의하여 다시 인용되었다. 한편 모 일간지 1996년 3월 8일자 ‘아시아 10만 리, 인도 수라스트란 반도’라는 기행문에서는 “구자라트 주에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있었다. …… 한글 자모와 같은 모양, ㄴ, ㄷ, ㅌ, ㅇ, ㅁ, ㅂ, ㄹ, ㅓ, ㅗ, ㅣ……”, “비록 글자 몇 개의 모양은 산스크리트 어에서 차용해 왔을망정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그것을 우리 민족의 소리 빛깔에 맞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고 단정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글들에서 자극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한 방송에서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촬영한 내용을 인도 학자의 증언(?)과 더불어 보도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 보고들을 접하면서 전율하였다. ‘한글과 닮은 문자가 머나먼 인도 대륙에서 수억의 인구에 의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니……. 이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사건이다.’ 이것이 국어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의 본능적 육감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파장이 보통 엄청날 것이 아닌 만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확언을 하기가 어려웠다. 1997년 구정 휴가를 이용한 약 일주일간의 인도 방문은 이렇게 해서 결행되었다.
   인도의 뭄바이(옛날 이름 봄베이)에서 국내 비행기로 갈아타고 두 시간을 더 날아가는 곳에 구자라트 주의 수도인 아메다바드가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아닌 게 아니라 한글과 닮아 보이는 <그림 1>과 같은 문자들이 온 천지에 가득한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구자라트 주는 간디의 고향이기도 하였는데, 그가 일기를 쓸 때 사용한 문자도 바로 이 구자라트 문자였다.


<그림 1> 구자라트 문자의 모습






<그림 2> 구자라트 문자의 모음


정확하지는 않으나 발음을 대강 모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윗줄 순서대로 ‘어, 아, 이, 으, 우, w, ri’,
아랫줄 ‘에, 애, 오, 어우, 응어, 어허’. 한글처럼 모음과 자음이 자소(字素)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도착한 날로 힌디 어를 전공하는 학자를 만나 이 구자라트 문자를 읽는 법을 배우고, 문자의 기원에 대해서도 조사하였다. 이렇게 조사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둘씩 이 문자에 대하여 알게 되기 시작하자, 혹시나 이 문자가 우리 한글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는 간단하게 무너져 가기 시작하였다. 이 문자가 음소문자인 것은 틀림없고 일면 한글과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글처럼 자모가 결합하여 하나의 음절을 이루는 체계는 전혀 아니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한 덩어리 전체가 모음, 혹은 자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문자는 현재 인도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힌디 문자(데바나가리)와 모양이 기본적으로 같았으며, 따라서 문자의 기원도 결국은 산스크리트 문자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구자라트 문자들의 윗부분에다가 단어별로 줄을 죽죽 그으면 그것이 바로 힌디 문자였다. 그래서 힌디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이 구자라트 문자도 쉽게 읽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문자는 한글과 닮아 보이는 형태가 몇 개 있는 것이었을 뿐 구조상으로나 기원상으로 한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한글과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도 전적으로 우연일 뿐이었다. 따라서 송호수 교수가 앞에 적은 글 154쪽에서 한글과 구자라트 문자가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 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적은 것이나, 모 일간지의 기록은 전문적인 확인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무책임한 기록들이다. 또한 모 방송에서 인도의 학자라는 사람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이 문자가 한국으로 건너갔을 수 있다고 자랑스런 표정으로 증언(?)한 것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아전인수적 몽상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단 하루 만에 간단히 확인되었기 때문에, 원래 구자라트에서만 일주일 가량 머물며 조사를 하기로 했던 계획을 바꾸어 나머지 기간에는 인도 내륙을 여행하였다. 필자가 구자라트 문자와 한글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떠났던 인도 여행은 이렇게 해서 ‘두 문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하나는 ‘중요한 판단을 상식에만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둘은 ‘세계에서 한글은 여전히 독보적인 문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