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문자의 최소가지차이(最小可知差異)

김민수(金敏洙)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글은 정녕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 문자이나, 자형은 자연도태(自然淘汰)를 거쳐서 잘 연마된 로마자에 비하면 매끄럽지 못하다. 여울에서 수천 년 갈리고 닦여 동글동글해진 조약돌에 비하면 마치 모나고 거친 돌조각과도 같다는 뜻이다. 특히, 1980년대 컴퓨터 발달과 PC의 보급으로 한글 자형의 개발이 급속히 다채로워졌으나, 그 연조가 옅은 탓인지 자형이 세련되게 잘 닦였다고 하기 어렵지 않은가 한다. 그 중요한 이유는 한글이 인위적 창조로 논리화된 조직적 구제 체계에서 연유한다고 하겠다.

속담에 ‘어 해 다르고, 아 해 다르다(『東言解』 於異阿異: 乍分機微, 便有羞殊)’는 말이 있다. 이것은 가령 ‘거멓다’의 ‘어’와 ‘가맣다’의 ‘아’의 발음이 미소한 차이라도, 주는 느낌은 크게 다르다는 뜻이다. 동시에, 안쪽에 점을 찍은 ‘어’와 우측에 점을 찍은 ‘아’는 발음의 차이를 구별하는 문자상의 식별, 심리학에서 말하는 변별역(辨別 ) 즉, 최소가지차이(just noticeable difference, 약 jnd)에 해당하는 구별도 있다는 뜻이다. 이 차이는 문자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자소(grapheme)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글의 미소한 차이는 인공적 조직화의 특징인 반면에, 문자로서의 식별을 어렵게 하는 장애의 요인이기도 하다. 가령, ‘기계틀/기계를’, ‘괴한/피한’ 등은 혼동되기 쉽고, ‘뺍(니다)’, ‘쐤(다)’, ‘쬈(다)’ 등은 한 글자에 무릇 5∼7자가 몰려 획이 너무 빽빽하다. 이 문자적 특성은 한글에서 너무 굵은 고딕체가 금기(禁忌)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각종 표지, 활자체나 자형의 개발, 순간적인 자막 등에서 굵은 획, 얽힌 흘림체가 금물인데, 이런 금기를 무시하고 선호하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단번에 읽어야 할 자막의 형태는 선명하고 정확해야 한다. 한때 방송사에서 자문할 기회에 자막의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바로잡기 위하여 교정을 거치도록 거듭 제안했었다.

그러나, 이즈음도 종종 잘못된 자막이 나타나고, 어떤 것은 긴 글인데 너무 빨리 없어지고, 어떤 것은 짧은 글인데 길게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수많은 전국적 시청자 눈에 틀린 국어 규범(規範)을 날마다 고취하고 자막을 독파하느라고 시신경이 수없이 긴장되게 하는 공해가 얼마나 큰가를 헤아리기 바란다.

‘훈민정음’은 세계의 문화재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한글을 진실로 애호한다면, 장점을 들어 자랑하기보다 단점을 속속들이 들추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자막을 교정해야 하겠다고 했으나, 실상은 교정을 거치지 않아도 다 옳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대학을 나오고도 제 국어 규범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규범 쪽에 준수되지 않는 결함을 문책해야 한다. 논리는 정연하다. 교육 받은 누구나 옳게 쓰게 되는 수준으로 규정이 개선되고, 원활하게 허용의 폭도 넓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