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명의 생성 발달



도수희/충남대학교 명예교수



1

'성씨'(姓氏)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상서요전』(尙書堯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평장백성'(平章百姓)이란 문구에서 '백성'(百姓)을 처음 발견하기 때문이다. 약 3000여 년 전의 기록인 이 '姓'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사람이 태어나다"(姓 人所生也)란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姓'자의 글자 구조가 '女+生→姓'과 같이 결합되어 있으니 "여자가 아기를 낳다"란 뜻으로 다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통지』(通志)는 "姓은 여자를, 氏는 남자를 호칭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각각 다른 뜻으로 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氏는 귀인(貴人)에게만 쓰였을 뿐, 천한 사람에게는 쓰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姓은 혼인한 여자에게만 있고 미혼여자는 '성'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과 '씨'가 다른 뜻으로 분리되어 사용되다가 하, 은, 주(夏殷周)의 세 나라 이후부터 그 의미가 하나로 통합되어 '성씨'(姓氏)와 같이 단일개념으로 통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氏는 본래에 공덕(功德)을 높이고, 기력(伎力)을 천박하게 여기게 하기 위하여 관직 혹은 직업에 따라서 붙였기 때문에 氏名을 들으면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아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선(善)을 권장하는 자료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말에서 姓氏의 생성과 발달은 어떠하였던가. 특히 한(漢)나라 이후 대륙문화의 영향권에 들어 있던 우리나라의 姓氏는 어떤 영향을 받아 생성하였던 것인가. 그 발생의 배경과 발달과정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이름의 발생과 발달의 문제도 고찰키로 하겠다.

2

학자에 따라서는 한(韓)씨가 三韓(馬韓, 辰韓, 弁韓)의 韓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믿기 어려운 견해라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성씨의 생성시기와 그 배경이 중국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성씨의 생성은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야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고 봄이 오히려 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최초의 성씨는 부여왕의 성명인 해부루(解夫婁)와 해모수(解慕漱)의 해(解)씨이다. 이 '해'씨는 보다 후대인 고구려의 시조성인 고(高)씨를 건너뛰어 제2대 유리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지 쓰이었다. 그리고 이 解씨는 백제의 왕족인 해루(解婁), 해구(解仇), 해충(解忠)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박(朴)씨,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의 고(高)씨, 가라 시조인 김수로(金首露)의 김(金)씨이다. 백제시조는 성씨는 없고 이름만 '온조'(溫祚)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신라의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와 김알지(金閼智)에서 김(金)씨와 석(昔)씨를 다시 추가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성씨들은 모두가 임금의 성이며 또한 모두가 해당 성씨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리고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란 의미에서 解씨라 하였고,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란 나라 이름에서 高자를 따다 성을 삼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박혁거세(朴赫居世)는 박처럼 생긴 큰 알에서 태어났는고로 朴씨라 하였고, 김수로(金首露)는 금알(金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金씨라 하였다. 김알지(金閼智)도 금궤(金櫃)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역시 金씨가 되었다. 석탈해(昔脫解)는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가 바닷가로 떠밀려 오는 것을 까치가 짖음의 신호로 한 노파에게 알려 주었다하여 까치작(鵲)자의 앞부분인 '昔'을 떼어다가 성씨를 삼았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위와 같이 한국의 성씨는 나라를 세운 시조나 왕으로부터 비롯되어 내내 왕족이나 그 후예들에게만 쓰여 왔을 뿐이다. 그러나 평민들은 그나마 이름만 있었을 뿐 성씨는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과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고대 네 나라의 초기에 박(朴), 석(昔), 김(金), 고(高)씨가 실제로 있었던 것인가. 이런 의구심은, 이 사실을 전하여 준 두 역사책이 비교적 후대인 서기 1145년과 1285년에 저작되었는지라 후대에 만들어 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좀체로 해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서기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문에 추모왕(鄒牟王), 유리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왕명은 적었으면서도 왕실의 성씨를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그 당시에는 왕실에도 성씨가 없었던지, 있었다 하더라도 성씨를 중국처럼 즐겨 쓰지 않았기 때문임을 암시하는 증거라 하겠다. 신라의 경우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네 개의 진흥왕국경순수비(서기 561∼568년)와 경주남산신성비문(서기 591년)에 사람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어느 이름에도 성씨가 없다. 냉수리비(冷水里碑)(서기 443년)에 21인의 이름과,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서기 524년)에 35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역시 이름만 있을 뿐 성씨는 없다. 삼국시대의 거도(居道), 솔거(率居), 흑치상지(黑齒常之), 녹진(祿眞), 밀우(密友) 등도 성씨없이 이름만 적혀 있다. 이 또한 성씨가 없었거나 적극적으로 쓰이지 않은 증거라 하겠다. 그렇다면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李, 崔, 孫, 鄭, 裵, 薛' 등 6성을 내렸다는 기사는 후일의 어느 땐가의 조작일 가능성이 짙다 하겠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명에 어느 성씨도 쓰인 사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 흥덕왕(興德王 서기 828년)때의 장보고(張保皐[高])의 본 이름은 활보(弓福[巴])인데 『삼국사기』는 그의 고향과 조상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성씨를 중국에서 지어 주었다. 그에게 성씨를 물었을 때 없다고 하니까 마침 중국 성씨 중에서 '弓'변의 한자를 찾다보니 '張'자가 선택되었고, '福'을 한자음을 빌어 중국식으로 적다 보니 보고(保皐)가 되었다. 만일 그에게 성씨가 있었다면 중국에서 새삼스럽게 성을 張씨로 지어 주었을 리 만무하다. 고구려의 바보 온달(서기 559-590년) 역시 성씨가 없다. 이는 상당히 후대에 이르러 한국의 성씨가 대부분 이렇게 발생한 사실을 알게 하는 암시라 하겠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이 박, 석, 김, 설씨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성씨를 모르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왕족의 후예 이외에는 성씨가 없었기 때문에 밝힐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백제의 경우도 국내 역사서와 『일본서기』에는 왕명만 있고 성씨는 없다. 다만 중국의 역사서에만 제17대 아신왕(阿莘王)때부터 여(餘)씨 혹은 부여(扶餘)씨로 이름 앞에 나타날 뿐이다. 이로 보면 평소에 성씨가 활발하게 쓰이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이렇듯 중국의 역사서에만 성씨가 나타남은 성씨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중국식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의 주인공 온달을 고씨(高氏)에게 장가보낸다는 기사가 있고, 최치원(崔致遠 서기 857년-?)과 천개소문(泉蓋蘇文)의 성씨가 확인되니 아마도 미약하나마 삼국시대 말기쯤에는 성씨가 민간인에게도 서서히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의 원효(元曉) 대사의 '元曉'도 이름이 아니라 고유어 '설'(정월 초하루)씨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의 아들의 성명인 설총(薛聰)에서 '설'씨를 발견할 수 있다. 元曉는 곧 원단(元旦)이란 뜻이기 때문에 고유어 '설'과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에는 한글이 없었으니 할 수 없이 元曉라 적고 반드시 '설' 대사라 불렀을 것이다. 원효 대사는 신라말기의 사람으로서 당나라에 가려다 포기하고 국내에만 있었기 때문에 고유어 성씨인 '설'을 썼던 반면에, 당나라에 오래 유학한 최치원(崔致遠)과 장보고(張保皐)는 한자어 성씨를 썼던 것이라 하겠다. 장보고의 張씨는 당나라식으로 지어진 성씨임을 위에서 설명하였고, 崔씨 또한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그의 세계(世系)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역시 당나라식 성씨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렇게 국내의 고유성과는 다르게 성씨가 생성되기도 하였던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유명인물인 천개소문(泉蓋蘇文)도 성씨가 천(泉)씨이다. 『삼국사기』열전에서 泉이 그의 성씨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들이 천남생(泉男生), 천남건(泉男建), 천남산(泉男産)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그의 성씨가 '이리'로 적혀 있다. 이것은 泉에 대한 고구려어 '얼'(於乙)과 일치한다. 따라서 고유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泉으로 적고 '얼'씨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성명을 적기는 한자로 표기하였으되 부르기는 반드시 고유어로 호칭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조상들의 고유어 수호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왕족에게만 성씨가 있었고, 국민들은 성씨가 없다가 거의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성씨가 생성되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에 이르면서 보다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3

신라 시조의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 적고 블구내(弗矩內)라 불렀다. 赫은 '발거'이며 居는 '발거'의 '거'를 표기한 음차자이다. 따라서 赫居는 '발거'로 풀어 읽을 수 있고 그래야 신라사람들이 부르던 이름 '블구'와 비슷한 해독이 된다. 이 '블구∼발거'는 光明을 뜻하는 신라말이다. 다음은 '內:世'의 대응에서 世는 '누리'이니 '내'(內)가 누리의 변한 어형 '뉘'를 음차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요컨대 赫居世는 '발거뉘∼발거누리'이다. 이 발거누리에서 '누리'만 떼어내어 지은 이름이 신라 제3대의 누리니사금(儒理尼師今)이다. 제14대의 왕명도 누리(儒禮)인데 『삼국유사』는 이 누리니사금을 世里智王이라 달리 적기도 하였다. 여기 世里는 '세리'로 음독하면 말이 안되니 반드시 '누리'로 읽으라는 뜻으로 리(里)를 받쳐 적었다. 이 표기법은 赫居의 居가 '혁거'로 읽지 말고 반드시 '발거'로 풀어 읽으라는 부호로 赫을 居로 받쳐 적은 경우와 같다. 이 누리(世里)로 인하여 우리는 儒理가 '누리'임을 확신하게 된다. 만일 제19대 눌지마리한(訥紙麻立干)의 '눌'이 말모음 탈락으로 인하여 '누리>눌'로 변화한 것이라면 '누리'란 이름이 하나 더 추가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에서는 적어도 '누리'란 이름은 시조로부터 4대에 걸쳐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고구려의 제2대 왕명인 유리명왕(琉璃明王)의 琉璃 또한 '누리'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까지 누리(世)가 초기 왕명의 소재로 쓰인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만일 앞의 琉璃가 고유어 '누리'를 적은 것이라면 바로 뒤의 '明'도 고유어로 해석하여야 마땅하다. 동일왕명을 앞부분만 고유어소로 부르고 뒷부분은 한자어로 읽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의 赫居가 광명(光明)의 뜻으로 풀리었으니 이것 역시 '발거'(明)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누리'가 신라 시조의 이름과 제3, 14, 19대왕의 이름에 박혀 있고 나아가 고구려의 제2대왕의 이름에까지 박혀있으니 '발거'(明) 역시 신라 시조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고구려의 왕명 속에도 들어 있음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또한 동명성왕(東明聖王)의 東明에서 東은 고유어 '새'로 훈독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동명(東明)은 '새발거'인 고유어로 추독하게 된다. 이후로 고구려에서는 문자명왕∼명치호왕(文咨明王∼明治好王), 신라에서는 신문왕의 이름인 정명왕∼명지왕(政明王∼明之王), 백제에서는 성명왕(聖明王)∼명농왕(明 王)과 같이 '발거'가 후대왕명 속에 박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소지왕(炤知王)을 비처(毗處)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비처'는 '炤, 光'을 뜻하며 신문왕의 아명은 일소(日炤)라 하였으니 역시 '날빛'에 해당한다. 그리고 백제 聖明王의 아들인 위덕왕의 이름이 창(昌)인데 이것도 '빛'을 소재로 한 이름이다.

   위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의 왕명은 초기부터 '밝음'[明], '빛'[光]과 '누리'[世]를 소재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혁거세(赫居世)=블구내(弗矩內)를 '발거누리∼블거누이'로 추독할 때 동명성왕(東明聖王)의 '東明'은 '새발거∼새블거'로, 유리명왕(琉璃明王)은 '누리발거∼누리블거'로 추독할 수 있다. 특히 '발거누리'와 '누리발거'의 어형을 비교하여 보자. 참여한 형태소들은 동일한데 순서만 앞뒤로 바뀐 차이를 보일 뿐이다. 이렇게 참여의 순서만 차이가 있을 뿐 이름을 형성하고 있는 형태소와 그 어의는 거의 완벽하리만큼 동일하다. 이런 동질성이 신라의 시조와 제3, 14, 19대왕과 고구려의 시조와 제2대왕의 이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기본 어휘의 분포가 얼마나 더 있는지를 발견하는 작업이 우리가 앞으로 추구하여야 할 긴요한 과제이다.
   고구려 시조의 아명은 주몽(朱蒙)이다. 그 의미는 '명사수'란 뜻이다. 그가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백제 시조 온조(溫祚)의 형 이름은 '비류'(沸流)이다. 이 이름은 비류수(沸流水), 비류천(沸流川), 비류곡(沸流谷), 비류국(沸流國)의 沸流에서 유래한 작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무령왕이 일본의 축자각라도(筑紫各羅島)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백제사람들이 사마(斯麻)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사마는 백제어로 섬(島)이란 뜻이라 풀이하였다. 마치 고마(熊)가 변하여 '곰'이 되었듯이 사마(島)가 변하여 오늘날의 '섬'(島)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섬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이름을 '사마'(변하여 '섬')라 지었음이 독특하다.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의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다. 우리의 고유문자가 없어 어쩔수 없이 한자로 적기는 하였지만 호칭은 신라말, 즉 고유어로 불렀을 것이다. 그 고유어가 무엇이겠는가. 옛말로는 '금, 은, 동, 수은'(金, 銀, 銅, 水銀) 등의 쇠붙이를 통틀어서 '쇠'라 불렀다. 그런데 '사(舍):금(金)'이 대응하고 있으니 '金'을 고유어 '쇠'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輪'은 어떻게 고유어로 풀 수 있을까. 신라 초기에 소벌도리(蘇伐都利)란 이름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 이 이름은 소벌공(蘇伐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도리=公'이다. 이 '돌이'는 꿈돌이, 호돌이, 꾀돌이와 같이 오늘까지 남아서 쓰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위의 '輪'을 돌다(바퀴가)의 새김으로 푼다면 舍輪=金輪은 '쇠돌이'가 된다. 오늘날 흔하게 호칭되는 '쇠돌이'의 연원이 신라 초기까지 소급함을 알 수 있다.
   인명에 접미하는 존칭어미로 '부'(夫)와 '지'(智)가 있었다. 거칠부(居漆夫), 이사부(異斯夫), 심맥부(深麥夫=麥宗), 상부(相夫), 활보(弓巴 弓福)의 '보 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 부'는 '바보, 뚱보, 울보, 웃음보, 놀부, 흥부' 등과 같이 현대국어에까지 이어져 쓰이고 있다. 또한 알지(閼智), 내지(乃智), 모심지(牟心智) 등과 같이 '지'(智)가 쓰였다. 이것은 오늘날에 '걸어지, 거지, 이치, 저치'의 '지, 치'로 쓰이고 있다. 이 '부'와 '지'는 좌부지(坐夫智), 일부지(一夫智), 절부지(折夫智) 등과 같이 '부지'로 결합되어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부'(智夫)와 같이 순서가 바뀌어 쓰인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고대 삼국의 왕명에서 이름을 중복하여 쓴 경우가 있다. 신라의 제2대와 제14대가 동일한 '누리왕'이다. 이 '누리'는 시조 발거누리왕과도 부분적으로 겹친다. 고구려의 왕명 중에는 제3대 대해주류(大解朱留)와 제17대 소해주류(小解朱留)가 大 小만 제거하면 동일명이다. 그리고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과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이 비슷한 이름이다.
   백제의 왕명도 제4대 개루왕과 제21대 근개루왕, 제5대 초고왕과 제13대 근초고왕, 제6대 구수왕과 제14대 근구수왕이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왕명이 이처럼 중복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성들의 이름도 동일명이 중복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백제의 제2, 3, 4대 왕명 다루(多婁), 기루(己婁), 개루(蓋婁)에서 '루'가 거듭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인명인 해부루(解夫婁), 모두루(牟頭婁), 해애루(解愛婁), 삽시루( 矢婁)와 신라 허루(許婁)등에서의 '루'와 동일한 것으로 볼 때 돌림자가 아닌가 의심하여 본다. 이와 비슷한 이름들이 백제의 귀족 이름에서 우수(優壽), 우두(優頭), 우복(優福), 우영(優永)과 같이 중복되어 쓰인 '우'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처럼 중복 쓰인 형태소가 혹시 돌림자가 아니었나 의심이 가는 것이다.
   신라는 고유명의 이름을 6세기 말엽까지 사용하였다. 진흥왕의 이름이 심맥부(深麥夫)∼삼맥종(三麥宗)(서기 540∼575년)이라 불렸고, 진지왕의 이름이 쇠돌이(사륜[舍輪]∼금륜[金輪])이며 그 형의 이름은 동륜(銅輪∼東輪)이었다. 선덕여왕(서기 632∼646년)의 이름은 덕만(德曼)이었고 그 동생 진덕여왕(서기 647∼653년)의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이렇게 고유어로 호칭되던 왕명이 한자어로 바뀐 것은 태종무열왕 부자의 이름인 金春秋와 金法敏부터인 듯하다.
   고구려의 왕명도 거의 말기까지 고유 이름으로 불렸으며, 백제는 제23대 삼근왕(三斤王)까지는 아명(兒名)을 그대로 왕명(王名)으로 썼다. 제24대부터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이 모대(牟大)로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왕명이 이렇게 고유이름으로 불리었으니 백성들의 이름은 더 말할나위없이 고유어 이름으로 짓고 불렀을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참 고 문 헌

* 이홍직(1954). [백제인명고]. 논문집 『인문사회과학』 제1집. 서울대학교.
* 도수희(1992). [백제의 왕명 인명에 관한 연구(Ⅰ)]. 『백제논총』 제3집. (Ⅱ1996) 백제논총 제 5집.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도수희(1994). [漢城시대 백제의 건국과 국명 및 초기의 왕명].
* 『백제논총』 제4집.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도수희(1994). [삼국사기의 국어사 자료와 관련된 몇 문제]. 『백제어연구Ⅲ』.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도수희(1996). [삼국사기의 고유어에 관한 연구]. 『동양학』 제26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