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표기법과 나의 의견

신형욱 /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교육과 교수


1. 이끄는 말

  꾸준한 국어 정화 운동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사실 외래어는 우리가 외국어에서 우리말 속으로 들여와 사용하는 낱말들로, 공시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말의 일부인 것이다. 국어 정화 운동은 모든 외래어를 배격하자는 운동이 아니라,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우리 일상 언어 생활에 불필요한 외래어를 적합한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하자는 운동이다.
  
  주지하다시피 언어기호(낱말)는 소리와 내용이라는 두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외래어의 사용은 단순히 낯선 소리의 도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 즉 새로운 개념의 수용인 것이다. 외국의 문화 업적이나, 기술 성과가 국내에 소개되면,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우리말을 찾게 되고, 이것이 용이하지 않을 때 그에 해당하는 외국어의 낱말을 도입하는 것은 편리한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외래어를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 적절한 것이었는가에 있다.
  
  기호의 내용과 소리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고, 자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새로운 개념을 외래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Saussure 1967:17 이하). 그러나 언어는 개별 요소들의 우연한 혼재가 아니라, 대립과 변별 기능을 바탕으로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요소들로 구성된 기호 체계이다(Saussure 1967:152 이하). 이 언어의 체계성이 언어 습득 및 학습, 그리고 언어 사용을 가능한한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좋은 언어란 공시적 관점에서 볼 때 일정한 틀 속에서 인식과 의사소통의 매체로서의 기능을 원만히 수행하는 기호 체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외래어가 사용되거나, 기존의 음운 체계를 파괴하는 외래어가 남용되면, 언어 구조가 불필요하게 복잡해져서 그 올바른 사용까지도 위협을 받게 된다. 따라서 외래어 표기법은 순 우리말 표기법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자율에 맡길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부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외래어 표기법을 개정 발표한 바 있다(국어연구소 1987:13 이하). 동시에 여러 학자들이 외래어 표기 방식을 제안한 바 있으며(Nellen 1990:164 이하), 실제로는 다양한 표기법들이 뒤섞여 사용되어 오고 있다. 그것은 외래어 표기법이 단순한 기준에 의해서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복합적인 문제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외래어 표기법의 본래 의미와 목적을 살펴보고, 이 본래 의미와 목적에서 외래어 표기법 제정 원칙들을 도출해 내보고자 한다. 또한 도출된 원칙을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적용해 보면, 그 장단점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보완할 수 있는 제안들도 가능해질 것이다.
  

2. 외래어 표기의 필요성과 원칙

        2.1. 표기법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과도 공유할 수 있다. 언어의 일차적 표현 형식은 말소리이다. 말소리는 음운이라는 의미를 구별하는 기능을 하는 최소 단위가 서로 어우러져서 구성된다. 그러나 말소리는 원칙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1) 이 말소리의 한계성을 인간은 글자를 통해서 극복하였다. 글자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의 생각도 읽을 수 있고,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의견도 전해 들을 수 있다.
  언어기호가 내용과 소리(형식)의 두 측면으로 되어있으므로 글자 표기는 내용이나 소리에 의거하여 실현될 수 있다. 한자는 내용 단위에 의거한 표기 방식(표의 문자)이며, 알파벳, 한글, 가나 등은 소리 단위에 의거한 표기 방식(표음 문자)이다. 물론 알파벳과 한글은 낱낱의 음소를 표기하는 음소 문자이고, 일본의 가나는 음절 단위를 표기하는 음절 문자이다.2) 한자의 수는 5만이 넘는다고 하지만, 이를 구성하는 기본 글자는 214개이다. 영어나 한국어에도 수많은 낱말이 있지만 이를 표기하는 기본 글자의 수는 30개를 넘지 않는다. 이처럼 제한된 숫자로 이론상 무한한 대상을 표기하기 위해서는 표기가 내용이나 소리 형태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각은 정리되어 개념화되고, 비슷한 생각들은 하나의 개념으로 분류되며, 기존 개념과 다른 생각들은 다른 개념으로 구분되어 정리된다. 이 정리된 대표 개념을 문자로 고정시킨다. 표음문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말소리를 물리적 현상으로 관찰하는 음성학의 차원에서 보면 음운론의 차원에서보다 그 형태가 훨씬 더 다양하다.3) 그러므로 표음문자는 무수한 음성을 특정한 음소로 분류하고 유형화하여, 이를 표기의 대상으로 삼는다(Meinhold/Stock 1982:56). 즉 표기는 언어 구성 요소의 유형화와 그 단순화 과정을 의미한다.

개념 개념단위 글자
말소리 음소 글자
유형화 단순화
도식 1: 단순화 및 유형화의 과정으로서의 언어와 표기
  
  표기는 단순히 말소리를 옮겨 적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소리의 뜻이 잘 드러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표기법은 음소뿐만 아니라 형태소와의 연관성도 고려해서 한 형태소는 항상 동일한 형태로 표기되도록 규정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표기와 발음이 서로 달라지는 경우가 생긴다(이은정 1988: 239 이하 참조). 음소 결합 방식에 따라 발음은 달라지지만 뜻을 지니는 최소 단위인 형태소를 일관성 있게 표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낱말들은 실제 발음과 달리 표기된다.
  
길가 [길까] 식물 [싱물] 낯, 낫, 낮 [낟]

  결론적으로 표기는 말소리라는 청각 영상을 글자라는 시각 형태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런데, 말소리는 글자에 비해서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으므로, 표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사회적 약속인 것처럼, 표기 역시 해당 언어 공동체에서 공동의 법칙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일정한 소리가 일정한 글자로 표기되고, 표기된 글자가 일정한 소리로 재현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각 언어 공동체마다 올바른 표기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2.2. 외래어 표기법의 필요성

  현대 언어 생활에서 외래어 사용은 거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그것은 활발한 외국과의 문화교류뿐만 아니라, 정보 교환의 신속화에도 그 이유가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용어들을 즉시 순수한 우리말로 옮기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 수용된 외국의 낱말도 필요에 따라서는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순 우리말로 대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4) 그러나 상당수의 외래어는 그 지시적 의미 때문이라기 보다는 연상적, 또는 내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원래 뜻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로 전용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5) 따라서 외래어의 사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말 어휘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수용된 외래어가 잘 통용되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발음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외래어가 우리말 속에 널리 퍼지게 되면, 그 발음은 비교적 우리말의 음운 체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외래어 사용자의 해당 외국어에 대한 지식의 정도가 원래 발음과의 차이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발음은 우리말에서도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낯선 말소리의 표기는 사람마다 그 청각 인식에 따라서 다를 수 있으므로 통일적인 표기를 위해서는 이를 규정해야 한다. 이 규정에 가장 우선적인 기준은 그 표기법이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에게 편리하고, 수긍이 가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외래어 표기는 우리말의 음운 및 글자 체계로 소화되어야 한다. 외래어 표기가 우리말의 음운 및 표기 체계에 따라서 이뤄져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외래어는 외국어의 낱말이 아니고, 외국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낱말이다.
2) 우리말은 우리 나라 사람 모두가 쉽고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3) 언어기호는 자의적 성격을 가지므로 반드시 외래어의 원음을 그대로 표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4) 표기는 항상 발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발음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우리말식 외래어 표기법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원음을 중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외국의 사람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들이 그 예이다. 고유 명사란 일반 명사와는 달리 소리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대상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므로, 표기에 있어서도 원래의 말소리를 그대로 담을 수 있어야 그 대상에 대한 올바른 표기가 된다. 이 경우에는 표기의 간편성에 앞서 원음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가 부각된다. 이런 이유에서 교육부 편수자료에는 외국의 인명과 지명이 상세히 예시되어 있다(국어연구소 1987).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외래어가 도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외래어 표기법의 대상은 현재 우리말에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외국의 인명, 지명, 그리고 앞으로 우리말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어의 낱말들 모두를 포함한다. 이 경우 우리 글로 표기된 예를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말소리를 어떻게 표기할지는 결코 쉽지만은 않다. 이러한 이유에서 간단하고, 체계적인 외래어 표기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2.3.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할 때는 우선 그 표기법이 우리 언어 생활에 미치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그에 따르는 개별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선 표기법은 우리말 사용자 모두를 위한 것이며,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다. 이런 관점에서 외래어 표기 원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압축해 볼 수 있다.
  
  첫째, 외래어는 원음에 충실하게 표기하되, 우리의 음운 및 문자 체계를 고려해야 한다.
  외래어는 가급적이면 그 원래 소리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 위해서 각 언어의 음운 체계와 우리말의 음운 체계가 직접 비교되어야 한다.6) 그러나 우리말은 대부분의 언어들과 상당히 다른 음운 체계를 갖고 있으므로 원음주의 원칙은 기본 원칙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외래어의 사용자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일반 사람 모두이다. 따라서 외래어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발음하고 적을 수 있어야 한다. 생소한 외래어도 많은 차용어가 그랬듯이 시간에 따라서 점차 우리말답게 변화할 것이다. 외래어의 특수한 발음을 위해서 새로운 문자나 표기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다.7) 새로운 표기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음을 발음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언어의 일차적 표현 방식은 말소리이며, 글자는 이를 기록하는 보조 수단이므로 우리말에 없는 소리를 표기하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그림자를 그리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언어 생활의 변화에 따라 어떤 특정 발음이 새로 우리말 속에 정착된다면, 이를 위한 글자도 자연스럽게 도입될 것이다. 새로운 문자를 도입하여 외국어의 원음을 발음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외래어 표기나 발음이 아니고, 외국어를 우리말 사용자들에게 강요하는 결과이다.
  
  둘째, 외래어 표기법은 체계적이어야 한다.
  표기법은 일단 정해지면 그 수정 및 개정에 많은 혼란과 비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외래어의 수용은 지속될 것이며, 특히 외국의 인명과 지명 등은 기존의 외래어에 없는 새로운 소리를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외래어 표기법은 이미 들어온 외래어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들어올 수 있는 외래어도 포함하는 체계적 표기법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일단 제정된 외래어 표기법은 수정을 거듭해서는 안 된다. 독일에서는 1902년에 제정된 정서법이 오늘날까지 통용되어 왔으나, 지난 1996년 7월 1일 새로운 정서법을 공포한 바 있다. 새 정서법은 1998년 7월 31일까지 2년간의 홍보기간을 거치게 되어 있고, 실제 문자 생활에 구속력을 갖는 것은 2005년 8월 1일부터이다. 즉 7년간의 경과 기간을 두고 있다. 정서법 개정이 대단히 힘든 일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외래어 표기법의 포괄적 체계성을 고려하여 한국 어문 규정집(국립국어연구원 1995)의 외래어 표기법에도 아직 외래어로 간주할 수 없는 낱말들이 예로 제시되어 있다.
  
영. setback, chipmunk.
독. Vater, verarbeiten, läuten.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외래어 표기법은 동시에 외국어 우리말 표기법이기도 하다.
  
  셋째, 외래어 표기법은 서로 다른 소리를 가급적 구분해서 표기할 수 있는 변별력을 가져야 한다.
  언어기호는 소리나 글자 모두 상호 대립을 통해서 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외국어에서 서로 다른 표현 형식을 띤 낱말들은 우리말에서도 서로 구별되도록 표기하여야 한다. 그러나 외래어의 두 소리가 우리말에서 구별되지 않는 경우에 이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 pile 파일 : file 파일 독. Werk 베르크 : Berg 베르크

  그러나 우리말에 구별되는 소리가 있을 때는 이를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독일어의 는 길고 닫혀진 [eː]와 짧고 열린 [ɛ]로 발음된다. 우리말의 <에>와 <애>의 대립에 독일어의 두 발음의 대립이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특별히 표기법상의 문제를 동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변별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현실음과 다른 소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지나친 노력이다. 이현복(1979:42)은 한국인의 음성 언어 감각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도 [f]와 [p]를 분리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fi, fe, fa…/에 <휘, 훼, 화…>를 제안하고 있다.9) 그러나 이 두 음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조음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음성학적으로 <휘, 훼, 화…>가 우리말의 표기 중에서 /fi, fe, fa…/에 가장 가깝다고 할지라도, 일반인들은 다르게 느끼고 있다. 외국어 학습에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f]를 [p]와 혼동하고 있으며, 결코 [h]과 혼동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반인의 청각에는 두 소리가 비슷하게 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래어 표기는 모두가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음 표기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두 개의 소리가 근접해 있을 때, 선택은 일반인의 청각에 따라야 한다. 표기는 유일한 방법만이 존재하는 진리가 아니고 사용자들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미 친숙하게 된 외래어는 기존의 표기 방식을 존중한다.
  낱말은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개별적 특성을 지닌 것도 있다.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어 그 소리나 표기가 자연스럽게 고정된 외래어는 원칙을 내세워 수정하지 않는다. 특히 원지음이 알려지기 전에 제3국을 통해서 전해진 인명, 지명(예:Caesar 시저, Hague 헤이그)이나, 중국 및 일본의 지명 가운데 한자음으로 표기하고 발음해 온 것(예:東京 도쿄, 동경, 臺灣 타이완, 대만)들이 이에 해당한다. 또 이미 그 어원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말화 된 낱말(차용어)들에 대해서도 원음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tobacco 담배 white shirts 와이셔츠

  결론적으로, 외래어 표기는 우리말 표기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여러 가지 표기가 가능할 경우에는 표기의 변별성, 체계성, 간결성 등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3. 현행 외래어 표기법

  문화체육부가 1995년 3월 16일 고시한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아래와 같은 ‘표기의 기본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국립국어연구원 1995:117).
  
제1항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
제2항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제4장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5장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제1항의 규정은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외래어를 우리말의 일부로 보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표기와 발음과의 관계를 잘 고려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제2항의 규정은 그 뜻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외래어의 1음운10)을 우리말의 한 개 글자로 적는다.
2) 외래어의 1음운은 우리말의 한 가지 기호로만 적는다.

  1)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의미한다.
  
/p/ → ㅍ
/b/ → ㅂ
……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자음이 자음 앞 또는 어말에서 모음 ‘ㅡ’ 또는 ‘ㅣ’를 동반하므로 이 원칙은 많은 곳에서 파기되고 있다.
  
/p/ → 프 (영. stamp 스탬프)
/t/ → 치 (영. switch 스위치)
……

  2)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i/ → 이 (영. ink 잉크, hint 힌트)
/e/ → 에 (영. episode 에피소드, helm 헬름)

  그러나 대부분의 자음은 모음 앞과 자음 앞에서 달리 표기된다.
  

/t/11)

ㅌ (영. time 타임) (모음 앞에서) 
ㅅ (영. cat 캣) (짧은 모음 다음에서)
트 (영. apt 앱트) (자음 다음의 어말에서)

  따라서 제2항의 규정은 ‘원칙적으로’라는 제한을 담고 있긴 하지만, 지향하는 목표 설정에 불과할 뿐, 사실 큰 규제 사항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를 역으로 살펴보면 여러 음성이 한 글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ㄷ: d, ð 외: φ, œ
   ㄹ: l, r 에: e, ɛ
   ㅂ: b, v 아: a, ɑ
   ㅅ: s, Ɵ 오: o, ɔ
   ㅈ: z, ʒ, dz, ʤ, 어: ʌ, ə
   ㅊ: ts, ʧ
   ㅍ: p, f
   ㅎ: h, ç, x

  제3항의 규정은 우리말의 발음 규칙을 적용하여 이를 그대로 표기에 옮기도록 한 것이다. 이는 외래어의 경우에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각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혀 적는다”(이은정 1988:17)는 우리말 어법에는 위배되는 규정이다. 이은정(1988:301이하)은 우리말에서는 ‘잎이’가 [이피], ‘잎으로’가 [이프로]로 발음되지만, 외래어의 경우에는 “‘book’을 ‘붘’으로도 표기할 수 있지만 ‘붘이’ [부키], ‘붘을’ [부클]이라 하지 않고 ‘북이’ [부기], ‘북을’ [부글]이라 하는 것이 보통”이라며 ‘book’을 ‘붘으로 표기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말 속에서 실현되는 발음을 따른 것이다.
  /t/의 경우에는 발음 규칙상 <ㄷ>으로 적어야 하지만 <ㅅ>을 사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racket’에 모음이 뒤따르면 ‘라켓이’ [라케시], ‘라켓을’ [라케슬]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표기에 있어서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히기 보다는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고자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은정은 표준 발음법을 설명하는 곳에서 ‘ㅅ, ㅈ, ㅊ, ㅌ’ 등을 모두 [ㅅ]으로 발음하는 것은 국어 교육에서 발음 지도가 결여된 데에 그 주된 원인이 있다고 하고, 이 현상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이은정 1988:256).
  원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외래어 자체를 문제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외래어가 포함된 어절을 표기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외래어 다음에 모음이 잇따라 나올 경우에 실현되는 소리를 근거로 외래어 자체의 표기법으로 삼은 것이다.
  
  제4항의 규정은 표기의 간결성을 위해서 된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외국어의 무성 파열음을 모두 우리말 격음으로 적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과 같은 언어에서는 무성 파열음 /p, t, k/가 우리말의 된소리와 유사하게 발음되지만 이를 고려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원음주의를 포기하고, 표기 체계의 통일성을 중시한 결과이다. 이은정(1988:302 이하)은 언어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격음으로 통일해서 표기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 4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같은 무성 파열음을 언어에 따라 달리 적는다면 규정이 대단히 번거러워질 뿐만 아니라 일관성이 없게 된다.
  2) 한 언어의 발음을 다른 언어의 표기 체계에 따라 적을 때, 정확한 발음 전사는 어차피 불가능한 것으로, 비슷하게 밖에 전사되지 않는다.
  3) 우리말에서는 된소리가 격음에 비하여 그 기능 부담량이 훨씬 적다.
  4) 외래어에 된소리 표기를 허용하면 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뽜, 쀼, 뛔, 꼐’ 등과 같은 음절들을 써야 하게 되며, 인쇄 작업에도 많는 지장을 초래한다.
  
  그러나 위의 주장들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우선 간결한 규칙을 만들기 위해서 표기의 가능성를 제한하는 것은 원음주의 원칙에 위배된다. 로망스 어군에서 사용되는 무성 파열음 /p, t, k/는 우리말 된소리와 매우 흡사하다. 또한 기능 부담량의 많고 적음은 그 소리의 사용에 제약이 따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말에는 아주 많은 된소리가 사용되고 있어서 오히려 부드러운 발음 사용 운동이 전개될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표기에 인쇄상의 어려움이 따른다는 말은 컴퓨터 문서 작성 시대에 더이상 비판력을 갖지 못한다. 비판의 예로 든 음절들을 격음으로 대체해 보아도(퐈, 퓨, 풰, 폐) 순 우리말에서 자주 사용하는 음절들은 아니다.12) 현행 표기법에서도 생소한 음절을 허용하고 있다.
  
  제5항의 규정은 언어의 관습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외래어 표기법 제정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혼란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외래어들은 개별적으로 사정해서 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1-4항의 규정들은 아직 그 형태가 확정되지 못했거나, 앞으로 새로 들어올 외래어들을 체계적으로 통일성있게 표기하기 위한 것이고, 제5항은 이미 정착된 외래어를 위한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기본 원칙을 보면,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원음주의보다는 현실성과 간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5가지 기본 원칙 이외에도 각 언어별 특성을 고려한 ‘표기 세칙’이 규정되어 있다. 표기 세칙은 영어의 경우를 상술하고, 기타 외국어의 경우는 영어와 다른 것만을 추가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각 언어마다의 특성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원음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표기 세칙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다양한 원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절 영어의 표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원음주의 원칙이다.
  유성 파열음과 무성 파열음을 모두 ‘으’를 붙여 적는다면, 이 두 종류의 소리는 달리 표기된다. 그런데 짧은 모음 다음에 오는 무성 파열음을 받침으로 적도록 한 것은 허용 범위 내에서 원음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다.
  
   영. bet [bet] 벳 영. bed [bed] 베드
   영. dock [dɔk] 독 영. dog [dɔg] 도그

  그러나, 이중모음이나 장모음 다음의 무성 파열음은 ‘으’를 붙여 적는다.
  
영. part [paːt] 파트 영. make [meik] 메이크

  이런 원음주의 원칙은 제3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음에 접근하기 위해서 [ʃ]를 ‘시, 샤, 섀, 셔, 쇼, 슈’ 등으로, [ʒ]는 <지>, <ㅈ> 등으로 적도록 하였다.
  
   영. sheriff [ʃerif] 셰리프 영. shank [ʃæŋk] 섕크
   영. mirage [miraːʒ] 미라지 영. vision [viʒən] 비전

  원음주의는 제6항 2)의 “어중의 [l]이 모음 앞에 오거나, 모음이 따르지 않는 비음 ([m], [n]) 앞에 올 때에는 ‘ㄹㄹ’로 적는다”라는 규정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 slide [slaid] 슬라이드 영. film [film] 필름

  그러나, 비음 ([m], [n]) 뒤의 [l]은 ‘ㄹ’로만 적는다:
  
영. Hamlet [hæmlit] 햄릿 영. Hanley [henli] 헨리

  이 경우는 우리말 표기법상 ‘ㄹㄹ’이 올 수 없으며, 발음도 표기대로 나지 않는다.13)

   햄릿 [햄닏] 핸리 [헨니]

  둘째, 표기의 간결성을 위한 원칙이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장모음의 장음은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제7항).
  
  영. team [tiːm] 팀 영. route [ruːt] 루트

  또한 “중모음은 각 단모음의 음가를 살려서 적되, [ou]는 ‘오’로, [auə]는 ‘아워’로 적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제8항).
  
  영. boat [bout] 보트 영. tower [tauə] 타워

  우리말에서 분명히 실현되지 않아서 간단한 표기를 채택한 경우도 있다.
  
   영. vision [viʒən] 비전 (← 비젼)

  셋째, 형태소 보존 원칙이다.
  제10항에 “복합어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말이 단독으로 쓰일 때의 표기대로 적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때문에 어두의 [l]음이 복합어에서 원음에 더욱 가깝게 표기될 수 있는 가능성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영. headlight [hedlait] 헤드라이트 (헤들라이트)
독. Vaterland [faːtɒlant] 파터란드 (파털란트)

  영어의 ‘headlight’는 ‘헤들라이트’로 적어야 [l]음에 가깝게 발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복합어의 구성 요소인 head(헤드)와 light(라이트)의 각각의 표기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음주의를 포기한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표기 세칙에서도 외래어 표기를 우리말 표기 체계 내에서 간결하고 체계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제1절의 ‘영어의 표기’에 뒤이어, 독일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및 중국어의 표기에 관한 세칙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각 언어마다의 특성을 고려한 특별 규칙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독일어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영어의 표기와 다른 점이 드러난다.
  가장 큰 차이는 독일어의 모든 무성 파열음을 ‘으’를 붙여서 적도록 한 것이다.
   “제2항 어말의 파열음은 ‘으’를 붙여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독. Rostock [rɔstɔk] 로스토크 독. Stadt [ʃtat] 슈타트

  위 단어들은 영어의 경우처럼 표기하면 <로스톡>, <슈탓>이 될 것이다. 실제로 같은 소리가 달리 적히는 경우가 있다.
  
   영. dock [dɔk] 독 독. Dock [dɔk] 도크
   영. net [net] 넷 독. nett [nɛt] 네트

  어말 파열음의 음절화로 1음절어인 Stadt가 3음절로, 1음절인 Dock, nett가 2음절로 표기되고 있다. 우리말보다 훨씬 복잡한 독일어의 음절 구조가14) 정확한 표기를 어렵게 하고 있는데, 여기에 무성 파열음을 모든 경우에 ‘으’와 함께 적게 되면 원음과의 차이는 그만큼 더 커지게 된다.
  
  [ʃ]의 경우도 영어의 경우와는 다르다. 어말에서 <시>가 아니라 <슈>로 적도록 하고 있다.
  
영. flash [flæʃ] 플래시 독. Mensch [mɛnʃ] 멘슈 

  그러나 영어와 독일어를 달리 적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독일어의 표기”에 언급된 불필요한 규정들이다. 제1항에 [r]음에 대한 자세한 규정을 한 것은 원음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말의 [r]와 ‘-er [ər]’는 ‘어’로 적는다”라는 규정은 현대 독일어를 올바로 구사하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규정이다. 표기 세칙에 언급된 예들 속에 있는 는 모두 [ɐ]로 발음된다(Duden 1990 참조). 만약 독일어 글자표기 , 를 외래어 표기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외래어 표기의 기준이 외국어의 글자인지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표기의 기준이 철자인 경우는 제3항과 제5항에서도 발견된다.
  “제3항 철자 ‘berg’, ‘burg’는 ‘베르크’, ‘부르크’로 통일해서 적는다”
  “제5항 [ɔy]로 발음되는 äu, eu는 ‘오이’로 적는다.”
  이은정(1988)의 해설에는 ‘하이델베르히’, ‘함부르히’라고 하지 않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bɛrç]와 [-burç]는 독일어에서 사투리로 규정되고 있는 발음으로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특별히 언급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y], [φ] 앞에서는 ‘ㅅ’으로 적는다고 하였는데,15) 여기에 [i]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독. Schüler [ʃyːlɒ] 쉴러 독. Schiller [ʃilɒ] 실러
;
  그러나 부분적인 오해에도 불구하고 위의 독일어의 표기 규칙들은 원음에 가까운 표기를 위한 것이다.
  

3.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제안

  앞에서 외래어 표기법의 기본 원칙들을 제시하였고, 현행 표기법을 분석하였다. 현행 표기법이 우리말 표기법의 체계성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것은 타당한 결정이라고 본다. 우리말과 글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외국어이고, 외래어는 우리말의 체계 속에 수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간결성을 내세워 지나치게 표기를 단순화하고 있다. 이에 몇 가지 중요한 사례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로 한다.
  
  첫째, 된소리 표기는 허용되어야 한다.
  된소리는 우리말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음가이며, 표기상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것을 간결성을 이유로 외래어에서만 모두 격음화 처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영어의 [s]는 <ㅆ>으로 표기되어야 하고, 로망스 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에서 온 외래어 표기에는 <ㄲ, ㄸ, ㅃ, ㅆ> 등을 사용해야 한다.
  
에. casa blanca 까싸 블랑까 프. pardon 빠르동

  실제로 우리는 많은 된소리 발음과 표기를 우리 일상 생활에서 듣고 볼 수 있다.
  
까르뜨니트, 꼼빠니야 (이상 의류 상표)
쏘나타, 무쏘 (이상 자동차 상표)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서 적으면서도 실제 발음은 된소리가 보통인 경우도 있다.
  
영. center <센터> → [쎈터] 프. Pompidou <퐁피두> → [뽕삐두]
영. source <소스> → [쏘스] 프. Camus <카뮈> → [까뮈]

  누구나 다 잘 아는 개념인 ‘뽀빠이’를 [포파이]이라고 발음하거나, <포파이>로 적게 되면 왠지 맥이 빠져 버린 뽀빠이가 될 것 같다.
  
  된소리 표기가 허용되면, [tʃ]와 [ts] 발음도 서로 구분하여 표기할 수 있다.
  
영. catch [ketʃ] 케치
독. Katze [katsə] 카체 → 카쩨 (된소리) → 캍쩨 (받침)
독. deutsch [dɔytʃ] 도이치
독. Zeit [tsait] 차이트 → 짜이트

  둘째, 받침 표기가 다양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빗, 빚, 빛>이라고 적고, 모두 [빋]으로 발음한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소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며, 그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말이 붙어 오면 받침이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래어의 경우에는 연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대표음으로 적도록 하고 있다.
  
영. gap 갭
영. book 북

  이 예들은 각각 <갶, 붘>으로 적으면 원래 낱말의 형태와 유사해진다. 또 대표음 [ㄷ]을 <ㅅ>으로 적도록 한 것은 연속된 발음의 경우를 고려한 것이지만, 표기의 기본은 낱말 자체가 되어야 한다.
  
영. internet 인터넷 → 인터넽
영. cat 캣 → 캩

  기본 원칙에서도 1음운은 1기호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므로, 영어의 /p, t, k/는 언제나 <ㅍ, ㅌ, ㅋ>으로 일관성 있게 적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외래어에 연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외래어의 특성상 무성 파열음의 경우 연음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래어의 특성이 유지되어 그만큼 소리의 음절 내부 결집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짧은 모음 다음에 오는 어말 무성 파열음과, 짧은 모음과 유음([l, r]) 및 비음 ([m, n])을 제외한 자음 사이에 오는 파열음은 받침으로 적어야 한다.
  특히 독일어와 같이 여러 개의 자음이 한 음절을 이루는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무성 파열음을 받침으로 적어서 불필요하게 음절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받침은 원음의 표기를 살린다.
  
독. Herbst [hɛrpst] 헤르프스트 → 헤릎스트
독. Heidelberg [haidlbærk] 하이델베르크 → 하이델베릌

  유성 파열음도 짧은 모음 다음의 어말에 오거나, 짧은 모음과 자음 사이에 오면 받침으로 적는 것이 합리적이다.
  
영. zigzag [zigzæg] 지그재그 → 직잭
영. lobster [lɔbstɒ] 로브스터 → 롭스터

  그러나 유성 파열음 다음에 유음이나 비음이 오는 경우에는 우리말 발음 법칙상 원음을 살릴 수 없으므로 ‘으’를 붙여야 한다.
  
영. signal [signəl] 시그널 → * 식널 [싱널] 

  넷째, 장단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모음의 장단이 의미를 구별하는 기능을 할 때, 이를 구분해서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어의 경우 장단의 대립이 없어져서, 서로 다른 많은 낱말들이 똑같이 표기될 것이다.
  
/i/ : /iː/ → 이: Mitte 미테, Miete 미테
/ʏ/: /yː/ → 위: füllen 퓔렌, fühlen 퓔렌
/u/: /uː/ → 우: Rum 룸, Ruhm 룸
/ɛ/: /eː/ → 에: Bett 베트, Beet 베트
/œ/: /φː/ → 외: Hölle 횔레, Höhle 횔레
/ɔ/: /oː/ → 오: Moll 몰, Mol 몰
/a/: /ɑː/ → 아: Bann 반, Bahn 반 (Rausch/Rausch 1991:25 참조)

  이처럼 한 언어 체계의 근간이 되는 변별 자질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표기의 의미를 상실하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말의 장단이나 강세 규칙은 영어나 독일어와 다르기 때문에 낱말의 소리를 아주 생소하게 반영할 수 있다.
  
영. meeting [miːtiŋ] 미팅 영. party [pɑːti] 파티

  즉 영어의 원음에서는 첫음절이 장모음인데, 우리말 표기를 그대로 읽으면 두 번째 음절을 장모음으로 발음하게 된다(이현복 1979:49).
  
  장단음의 구별은 다음 방법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다.
  
1) 장모음을 음절로 표시하는 방법
  독. Miete 미이테 영. party 파아티
2) 장모음 다음에 ‘-’를 적는 방법
  독. Beet 베-트 (→베엩) 영. meeting 미-팅
3) 단모음에 받침을 붙여서 촉음으로 만드는 방법
   독. spucken 슈풐켄 - spuken 슈푸켄
   독. bitten 빝텐 - bieten 비텐

  1)의 방법은 별도의 음절을 추가하게 되어 표기가 장황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영. New York 뉴욕 →뉴우요오크 독. Sohn 존 → 조온

  2)의 방법은 글자가 아닌 부호를 도입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1)의 방법보다는 원음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 독일어의 ‘Ofen ([oːfn])’을 <오오펜>으로 표기하면, 음절 구조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두번째 <오>에 강세가 오게되어 지속적인 긴장된 장모음 [oː]와는 다른 소리가 된다.
  3)의 방법은 새로운 음절을 추가하는 것도 아니고, 단모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단모음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다. 이 방법의 단점은 장모음 다음에 유음 (l, r)이나, 비음 (m, n)이 올 경우에는 변별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독. füllen [fylən] 퓔렌 - fühlen [fyːlən] 퓔렌
독. Bann [ban] 반 - Bahn [baːn] 반

  외래어의 단모음은 사실 촉급하게 발음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원래 표기에서도 자음 중복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단모음에 다음 자음을 받침으로 붙여서 적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영. apple 애플 → 앺플 영. mattress 매트리스 → 맽트리스
영. sickness 시크니스 → 앀크니스 독. Schotte 쇼테 → 숕테

  이 3가지 방법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3)의 방법을 원칙으로 하고, 1) 또는 2)의 방법을 보조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섯째, 열린 모음과 닫힌 모음은 구별하여 적어야 한다.
  독일어에서는 /eː/와 /ɛ/, /oː/와 /ɔ/, /φː/와 /œ/가 장단뿐만 아니라 입의 열림의 정도에 따라서도 구분된다. 우리말에서도 독일어의 경우처럼 명백하지는 않지만 열림의 정도에 따라 <에>와 <애>, <외>와 <왜>가 구분되며, <오>와 <어>도 이와 비슷한 대립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말 체계에 있는 구분을 최대한 활용하면, 원음에 접근할 수 있고, 또 변별력도 얻을 수 있다.
  
독. wen [veːn] 밴 → 벤 독. wenn [vɛn] 밴
독. Höhle [hoːlə] 횔레 독. Hölle [hœlə] 횔레 → 홸레
독. Sohn [zoːn] 존 독. Sonne [zɔnə] 조네 → *저네
  
  그러나, /oː/와 /ɔ/를 구별하기 위해서 /ɔ/를 <어>로 적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 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는 이미 외래어 표기에서 여러 음에 대응되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대응은 변별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또한 /ɔ/와 /어/는 그 음 자체로 볼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말에서 약화된 모음 /ə/를 ‘으’로 적자는 Nellen (1990:177)의 제안도 변별력 상실의 문제로 수용할 수 없다.
  
독. Bote [boːtə] 보테 → * 보트
독. Boot [boːt] 보트 → * 보트

  여섯째, 이중모음은 모두 살려야 한다.
  영어의 표기 제8항에는 중모음 ([ai, au, ei, ɔi, ou, auə])는 각 단모음의 음가를 살려서 적되, [ou]는 <오>로, [auə]는 <아워>로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영. boat [bout] 보트 → 보우트
영. tower [tauə] 타워 → 타우어

  <아우어>로 적어야 할 것을 <아워>로 적는 것은 우리말 준말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으나, <오우>로 적어야 할 것을 <오>로 적는 것은 문제가 된다. 영어에서는 [ɔː]와 [ou]가 서로 변별 작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 low [lou] 로 영. law [lɔː] 로

  그러므로 일관성있게 모든 이중모음은 원음 그대로 적도록 하는 것이 좋다. 독일어의 무성 파열음은 음절을 늘여서 적고, 이 경우에는 음절을 줄여서 적으려고 하는 것도 일관성이 없다.
  
  일곱째, 원음을 살리기 위해서 “어중의 [l]이 모음 앞에 오거나, 모음이 따르지 않는 비음([m], [n]) 앞에 올 때에는 ‘ㄹㄹ’로 적는다”(영어의 표기 제6항 2.)라는 규정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그런데, 복합어의 경우에 그 구성 낱말들이 단독으로 쓰일 때처럼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어서(국립국어연구원 1995:149) <ㄹㄹ>표기가 가능한 곳에서도 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영. headlight [hedlait] 헤드라이트 → 헤들라이트  

  이것은 각 구성 낱말 형태소의 본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순 우리말에도 발음상의 이유로 사이시옷을 표기하도록 허용하고 있다(이은정 1988:82 이하).
  
나무 + 가지 →  나뭇가지
전세 + 집 →  전셋집

  그러므로 두 기근어를 연결해 주면서 생겨나는 [l]음 표기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해서 <ㄹ>을 첨가하는 것은 우리말 표기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또한 독일어처럼 복합어가 발달된 경우에는 복합어 구성 요소들 사이에 <ㄹ>을 첨가함으로써, 많은 장소에서 원음에 접근할 수 있다.
  
독. Verlag [fɛɒlaːk] 페어라크 → 페얼라크 ([l]음 표기) → 페얼랔 (받침 원음 표기)
독. Vaterland [faːtɒlant] 파터란트 → 파털란트 ([l]음 표기)

  끝으로, 어말의 [ʃ]는 ‘슈’보다는 ‘시’나 ‘쉬’에 더 가까운 소리이고, 표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독. Mensch [mɛnʃ] 멘슈 → 멘시/멘쉬 (슈→시/쉬) → 맨시/맨쉬 (열린 모음 표기)


4. 맺는 말

  지금까지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였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간결성과 체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의 한글 자모만을 사용하고, 각 언어별 특징은 최소한만 인정하고 있다. 이는 외래어 표기법이 일반 국민을 위한 것이므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표기의 간결성을 위해서 구별이 가능한 표기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표기는 표기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소리를 구분하여 적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표기의 복잡성은 일차적으로 말소리의 구조에 달린 것이다. 이를 인위적으로 간결화하는 것은 결국에는 말소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외래어의 원음을 사실대로 적는다고 하여도 우리 글에 없는 새로운 글자를 도입하거나, 변별력을 위해서 서로 다른 소리를 대응시키는 것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표기법은 일반 언어 사용자를 위한 것이지, 이론적인 학술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언어 사용 습관을 감안하지 않은 음성학적 접근도 삼가야 한다. 표기가 발음을 따라가는 것이지, 역으로 발음의 시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들을 고찰해 볼 때,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올바른 기본틀 위에 놓여 있으나, 부분적인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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