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피진 중국어1)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황종인 / 한국 외국어대학교 독일어학과 교수


  표결에서 반이 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은 명백한 기준이오, 칠 할은 못할 결정이 없는 다수가 된다. 우리말 사전에 실린 낱말의 칠 할이 한자말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말이 중국어의 방언의 하나라는 판단을 할 수 있는 명백한 근거다. 그러나 진실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사석에서 일상적인 화제로 이야기할 때 쓰는 낱말의 삼 할 이상이 한자말이 되지는 않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의 입말은 분명히 중국어와 다른, 독립된 언어다.
  그러나 신문의 어휘는 구 할 이상이 한자말이다. 문법적인 부분이 떨어져 나간 기사 제목은 한자말만으로 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토박이말이 안 쓰이지는 않지만 예컨대 어쩌다가 선박 대신에 배가 쓰일 때는 이것이 따옴표 속에 갇혀 있어야 하며, 아직도 남아 있는 작은 땅이름은 속칭 까치고개 같이 양해를 구하는 낱말의 인도를 받아야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신문에 쓰이는 것은 분명히 중국어의 변종이다. 이것은 본국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외국어이니 피진 말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어라고 부르는 하나의 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말을 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세기, 새로 다가오는 셋째 천년대에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현실을 찬찬히 뜯어 보고 문제를 찾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서울말과 “한문국어”

  똑같이 사람의 말이지만, 입말과 글말은 많이 다르다. 입말은 고을마다 틀리고 또 끊임없이 변하지만, 글말은 나라 안에서 두루 쓰이고,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글말은 입말보다 품위가 더 높고 어휘가 더 풍부하고 문법이 더 엄격하다. 이러한 특성들에 힘입어 글말은 교육받은 계층의 일상 언어로 되고, 교육의 일반화와 함께 오늘날의 나라말이 된 것이다.
  입말은 저절로 자라는 들풀과 같지만 글말은 사람의 손이 가지 않으면 죽어 버리는 온실의 꽃과 같다. 사람은 자연에서 나왔건만 자연이 아니며, 사람의 모든 것은 가꾸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말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은 가까운 이웃과의 낮은 수준의 의사 소통을 위한 입말을 가꾸어 좀더 먼 이웃과의 좀더 높은 수준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하는 글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시인, 학자, 정치인 등 나라의 엘리트는 글말 가꾸기에 앞장서 왔다. 원래 입말과 글말은 뿌리가 같고, 그 사이에는 교류가 끊기지 않는 것이다. 입말에서 글말로는 끊임없이 신선한 피가 흘러 들어가고, 글말은 입말의 품위를 끌어올리고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 문법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다.
  옛날 로마 제국의 글말이오 나라말인 라틴은 얼마나 잘 가꾸어졌던지, 나라가 망하고 천 년이 지나도록 유럽 전체의 나라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긴 세월동안 라틴은 각 지역의 고을말과의 교류가 끊겨서, 교육받은 일부 계층의 글말로만 쓰였고, 나라 전체에서 두루 통용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 초반에 나라말과 고을말 사이의 이러한 틈을 없애기 위해서 정부와 정신적인 엘리트가 힘을 합쳐 과감히 라틴을 버리고 그때 파리 지역의 입말을 새로운 나라말로 가꾸기 시작해서 백여 년 후에는 프랑스말이 라틴을 능가하는 완벽한 글말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는 글말을 제대로 가꾸어 본 일이 없다. 한자밖에는 글자가 따로 없던 시절에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한글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중국 글말인 한문이 나라말로 너무나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입말을 품위 있고 표현이 풍부한 글말로 가꾸어 세울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백 년 전 개화기에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이용할 힘이 쌓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서울말을 비롯한 이 땅의 입말들은 천 년 이상을 한문과 나란히 쓰여 오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최근까지 웬만큼 튼튼한 체질을 유지해 왔으며, 한글이 만들어지고부터 글말로서의 전통도 꾸준히 이어 왔다. 만약 백 년 전에 서울말을 토대로 하여 16세기 프랑스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나라말 가꾸기를 시작했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쯤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부럽지 않은 언어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한문을 대신해서 공문서에 쓰이기 시작한 국한문 혼용체는 한문과 서울말의 트기로서, 어휘가 기본적으로 한문의 그것이오, 문법적인 부분들만 서울말로 되어 있어서 우리말보다는 한문에 더 가깝다. 이 “한문국어”가 종이에 써 놓고 보면 한자와 가나를 섞어 쓴 일본어와 거의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이른바 개화가 일본화로 끝나면서 말과 글도 일본화했기 때문이다.
  

2. 어휘의 네 가지 원칙

  두 낱말은 첫째: 뜻이 다르면 소리도 달라야 하고, 둘째: 뜻이 같으면 소리도 같아야 한다. 이것이 어휘를 구성하는 원칙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첫째를 구별의 원칙이라 하고 둘째를 경제의 원칙이라 한다. 구별의 원칙이 없는 어휘를 가리켜 모자란다 하고 경제의 원칙이 없는 어휘를 가리켜 넘친다고 한다. 한문국어의 고질은 소리 같은 말이 많다는 데 있다. 구별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자를 쓰지만, 그것은 눈으로 읽을 때만 효과를 볼 수 있는 미봉책이다. 뜻이 같은 말도 너무 많다. 구매, 구입, 매입이 구별 없이 쓰이고 공격 밖에도 가격이 있고, 피격을 당하다에서는 피격공격의 뜻이다. 계승 승계, 운명 명운, 수련 연수,…… 경제의 원칙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낱말에는 홑과 겹이 있다. 홑말에는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지만 겹말의 뜻은 그 조각들의 뜻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겹말의 이러한 장점은 그것이 자주 쓰이는, 살아 있는 조각들로 만들어졌어야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이론적으로 겹말이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은 그것을 몰라보고 그 뜻을 우유 (=소젖), 양말 (=서양버선) 같은 홑말의 경우처럼 외워야 한다.
  어휘를 평가할 때 셋째로 중요한 것은 조직성의 원칙이다. 어휘가 조직적이 되기 위해서는 홑말이 적고 겹말이 많아야 한다. 조직적이 아닌 어휘는 그 속의 낱말 하나하나를 따로 배워야 하지만 조직적인 어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낱말을 웬만큼 알면 일생에 처음 들어 보는 낱말도 사전을 안 찾고도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휘에서 넷째로 중요한 것은 합리성의 원칙이다. 한 낱말밭을 이루는 낱말의 수는 한 생산라인에 들어가는 일꾼의 수와 같아서,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안되는 것이다. 공장에서 놀고먹는 이가 생길까 보아서 “합리화”를 외우고 다니는 이들은 좁은 낱말밭에 너무 많은 낱말이 들어 찬 것이 합리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쉽게 알아들을 것이다.
  한문국어의 어휘에서는 합리적인 구석을 찾아 보기 힘든다. 예컨데 열다, 닫다로 충분한 낱말밭에 개교, 개관, 개국, 개문, 개설, 개소, 개업, 개원, 개장, 개점, 개정, 개청, 개회, 그리고 다시 폐교, 폐관, 폐국,…… 등이 빼곡이 들어차서 질서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수해피해, 냉해피해 같은 꼴사나운 말을 보면 우리는 수해, 냉해 같은 뜻이 좁은 낱말들을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다시 비, 추위 같은 이미 있는 낱말과 똑같이 넓은 뜻으로 쓰는 것이다.
  구별의 원칙은 낱말이 생겨 날 수 있게 하고, 경제성, 조직성, 합리성의 원칙은 사람이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고 어휘를 습득해서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문국어의 어휘는 이 네 원칙을 모조리 깨고 있다. 이런 말이 논리의 전개와 의사의 소통을 위한 공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3. 틀리지 않을 수 없는 한문국어

  이런 말을 완벽하게 배울 사람이 없다. 말 실수가 만연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사로운 언어 생활은 문제 삼지 말자. 공적인 문건에, 몇백 년 뒤의 사람들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출판물 안에 틀린 말이 너무나 많다. 말단 공무원, 높은 자리의 공직자, 언론인, 작가는 물론, 이 말의 연구와 교육을 직업으로 하는 언어학자들까지 말이 틀리지 않는 이가 없다.
“본인은 본 법인 임원간에 공익법인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2조 각 항의 규정에 의한 특수관계자의 범위에 해당하지 아니하며, 이후 해당됨이 발견될 때에는 임원취임 승인취소 등 여하한 행정조치에도 아무런 이의가 없음을 이에 각서합니다.”
  이것은 내가 새로 만들어지는 법인의 이사로 취임하는 것을 승인받기 위해서 서울시 밑의 어느 기관에 내야 했던 특수관계부존재각서라는 이름의 문건이다. 뜻이 통하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반듯한 문안을 새로 만들어 내자고 했으나, 동료 이사들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굽히고 말았다. 법적인 행위이니 규정대로 하지 않으면 일만 그르친다는 것이었다.
“닭갈비를 뜻하는 鷄肋이란 말은 먹기에는 맛이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는 뜻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다. 後漢書에 적혀 있는 말이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이를 연상케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옛 성현들의 통찰력을 새삼 엿보게 된다.”
  이것은 지지난해 신문에서 본 글의 머릿부분인데, 찬찬히 뜯어보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조선일보 1994. 2. 21, ‘만물상’). 닭의 갈비를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것은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뜯을 만큼 살이 붙어 있지 않아서이다. 鷄肋은 단순히 닭갈비를 뜻하는 외국어다. 짧은 글에서 외국어의 낱말을 풀이할 필요가 있는가? 닭갈비는 고사성어도 아니고 옛날의 성현과도 관계가 없으며, 닭의 갈비가 먹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 무슨 통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2)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교육이라는 의미가 크게 부각되고 있고,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도 날로 커가고 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높은 교육열과 이에 편승한 과열 입시경쟁이 그 한 단면을 잘 보여 준다.”
  이것은 1996년 1월 27일 한국일보에 실린 한 고교생의 글의 머릿부분이다. “우리 나라 교육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주제로 전국의 학생들이 보낸 모의 논술고사 답안들 가운데서 놀랍게도 최우수작으로 뽑힌 것인데, 자세히 뜯어보지 않아도 틀린 데가 너무 많다. 교육이라는은 아마도 교육의의 잘못인 듯 하다. 그것의 비중이 날로 커 간다고 한 것은 그와 비교될 수 있는 다른 무엇의 비중이 날로 작아진다는 뜻이니 사실과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입시경쟁이 교육열에 편승했다고 쓴 것도 매우 어색하다. 교육열과 입시경쟁이 그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했지만 이 그가 가리킬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이 글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의 제도들이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이상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말이 안 된다. 점수로 바꾸면 하나는 30점, 또하나는 100점에 해당하는 표현이 아닌가? 입시제도가 1년이 멀다하고 자주 바뀐다고 불평하고 있으나 지나친 과장이다. 전체로 보아 신문의 사설에서보다도 한자말이 많이 나타난다. 입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막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하다.
“近者 筆者가 山岳運動에서 ‘山岳의 淨化’를 强調해 온 것이 드디어 自然保護의 重責을 지고 만 것이다.…… 本稿는 바로 그 一端으로서, 李朝初期에 設置한 蠶室과 養蠶을 爲한 桑木栽植에서 意外의 事件이 벌어지고 民弊의 痼疾化의 事實을 밝히려 한다.”
  이것은 심악 이숭녕 선생이 박 정권 말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시절에 발표한 글의 머릿부분이다. 이 글이 그 一端이라고 했지만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또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는 벌어지는 의외의 사건과로 고쳐 써야 뜻이 통한다. 또, 요즈음, , 이 글, 누에치기, 뽕나무재배 하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것을 아무도 모르는, 어려운 말을 쓴 것은 언어학자답지 않은 선택이다.
  

4. 정신적인 기형아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입말과 글말, 고을말과 나라말 사이의 교류는 흔히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주로 글말이 입말에 영향을 주고, 그 반대의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다. 근래에 한문국어가 교육과 행정과 각종 매체를 통하여 국민의 언어 생활을 파고들어 입말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자유당 시절에만 해도 사람들이 낯 씻고 밥 먹고 일 가던 것이 이제는 세수하고 식사하고 출근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엊그제까지 힘겹게 버티어 온 작은 땅이름들도 사단지, 칠단지, 한양 일차, 우성 삼차 같은 메마른 한문식 이름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입말의 뿌리는 튼튼하다. 오늘도 우리의 젖먹이들은 한자말이 거의 섞이지 않은 기초어휘를 배우면서 자란다. 아이가 젖먹이 때 배운 이말을 평생 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언어현실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가 젖이 떨어지기 무섭게 외국어를, 그것도 그렇게 어렵고 불편한 피진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뜻이 통하는 말과 앞뒤가 맞는 생각을 못하는 장애인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기초적인 셈말을 두 벌을 쓰면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이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옛날에는 일본어의 셈말이 두 벌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한 벌로 합쳐져서 四와 七은 새김으로 (일본말로) 읽고 그 나머지는 소리로 읽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일본어의 기초셈말은 , , , , , , 일곱, , , 과 같이 한 줄로 된 것이다. 예를 들어 43749는 네만삼천일곱백네십구가 되는 것이다.
  아이는 어느 나이가 되면 젖니가 빠지고 새로 튼튼한 이가 난다. 한국의 아이들은 이 나이에 젖먹이 때 배운 쉬운 낱말을 어려운 한자말로 갈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가 젖니와 함께 “젖말”도 갈아야 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한국뿐이 아닌가 한다. 아니, 가는 것이 아니라 젖말밖에 또 한 벌의 말이 생기는 것이다. 젖니가 안 빠지고 또 한 줄의 이가 덧난다고 생각해 보시라! 그런 기형아가 살아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일은 랄랄라 하나이고요, 이는 랄랄라 둘이고요,……”
  한동안 텔레비전의 유치원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아라비아 숫자를 손에 들고 춤을 추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젖먹잇적에 배운 하나, , ,…… 가지고는 달력이나 시계도 못 보아서 학교에 가기 전에 벌써 , , ,…… 하는 또 한 벌의 셈말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튼튼한 이들 둘레에 또 한 줄의 이를 덧심기 시작하는 잔인한 장면이 아닐까? 이런 사정을 알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5. 아직도 안 늦었다

  라인 강 서쪽의 갈리아 땅은 시저의 정복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중세에는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 족의 나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프랑스말은 갈리아말과 프랑크말의 요소가 많이 섞여 들어 크게 변질된 라틴말이다.
  16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언어현실은 인구의 구 할이 문맹인 오늘의 아이티의 그것과 비슷했다.3) 나라의 경영을 크게 개선하기 위해서는 라틴을 버리고 파리 지역의 입말을 가꾸어 나라말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1539년에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첫째(Françgois I)가 사법의 개혁에 관한 칙령을 내려 판결을 포함한 모든 소송 절차에서 라틴말과 방언의 사용을 금하고 프랑스말만을 쓰도록 하였다. 이로써 이 나라에서는 프랑스말이 라틴말을 밀어내고 어엿한 나랏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중·동부 유럽에서 중세 이래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쓰여 온 이디시(Jiddisch)는 어휘의 팔 할 가까이가 도이치말이어서, 언어학에서는 이것을 도이치말의 방언으로 보고 있다. 둘째 세계전쟁이 끝난 뒤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운 것은 대부분이 이디시를 쓰는 사람들이었지만, 오늘 이스라엘의 나라말인 새 헤브라이말은 그 동안 글로만 배워 온 옛 헤브라이말을 되살려 오늘의 필요에 맞게 손질한 것이다.4)
  이디시는 우리의 한문국어와 달리 젖먹이 때 배워 평생을 쓰는 정상적인 언어였으며, 글자도 13세기부터 순수하게 헤브라이 글자를 써 왔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나라말로 흠잡을 데가 조금도 없었다. 이것을 버리고 천 년 전의 조상의 말을 되살려 쓰기로 한 까닭은 분명히 감정적인 데 있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말이 이미 없어졌다면, 만약 우리의 한문국어가 유대의 이디시와 같이 젖먹이 때 배워 평생 쓰는 말이라면, 만약 우리가 이 말로만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이 말을 버리고 이미 죽어 글로만 남아 있는 옛 고려말을 되살려 새 고려말로 만들자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한문국어를 미련없이 버려야 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을 정신적인 기형아로 기르지 않기 위해서, 학생이 읽을 수 있는 교과서와 국민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신문과 세계인이 함께 읽는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정치가 더는 진흙 밭의 개싸움이 안 되고 우리의 나룻배들이 어처구니없게 가라앉지 않고 우리의 다리들, 빌딩들이 거짓말같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 옳은 말이지만 우리는 이미 그 때를 놓치고 만 것이 아닌가? 아니다. 사실은 이제 비로소 그 때가 온 것이다. 옛날에 못 한 것이 아쉽지만, 사실 그때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힘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 비로소 그럴 만한 힘을 쌓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세계적인 수출국으로 떠올랐고, 우리의 정치도 약진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남이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이사를 하면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만 볼 필요가 없다. 우리도 그런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프랑스, 이스라엘, 도이치의 말가꾸기에 박수만 보낼 것이 아니라 그들 못지 않게 훌륭한 말가꾸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6. 군살만 빼면 다시 뛸 수 있다

  그러면 젖먹이 때 배워 평생 쓸 수 있는 완벽한 나라말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외국의 성공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 이 일은 프랑스나 이스라엘에서처럼 반드시 나라가 주관해야 하며,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아무리 큰 수술도 꺼리지 않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가꾸기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도이치의 성공 사례도 살펴보아야 한다. 17세기 후반에 루이 열넷째(Louis XIV)의 프랑스로부터의 문화적 독립을 위한 운동의 한 고리로 출발해서 줄곧 배타적 애국주의 대중운동의 성격을 띄고 전개되어 온 도이치 말가꾸기의 원칙은 간단하고 효율적이었다. 같은 뜻이면 토박이말을 쓰고 토박이말이 없을 때는 외국어를 번역해서 씀으로써 들온말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순수하고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도이치말 어휘의 비밀은 바로 이 어원주의 원칙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말에서의 인종주의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젖먹이 때 배우는 낱말이라도 그것이 들온말로 판명되면 그날로 그 낱말은 사전에서 빠져 버리는 것이다.
  한문국어의 낱말들을 개별적으로 다듬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이제 젖말로 돌아가서 거기에 없는 낱말만 한문국어 또는 그 밖의 외국어에서 빌려 오는 방식으로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도이치 말가꾸기의 어원주의를 배워 올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사전에서 한자말의 비율이 삼 할 아래로 떨어지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크게 무리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일 할 밑으로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한자말은 대개가 혈액, 신체, 야간, 동계,…… 같이 토박이말에 빈대처럼 붙어 있거나 개교, 폐교, 개관, 폐관, 개국, 폐국,…… 등과 같이 어휘의 합리성만 떨어뜨리는 낱말들이어서 우리의 기억에 부담만 주기 때문이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이도 살을 빼면 다시 뛸 수 있듯이 우리말도 이런 군살을 빼면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좋은 말이 될 것이다.
  대형, 소형, 청색, 흑색, 하계, 동계, 내부, 외부, 구입, 판매,…… 이렇게 젖말과 뜻이 같은 것은 사전에서 다 빼 버려야 한다. 큰 사고, 작은 차, 푸른 금, 검은 선전,…… 이런 말이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해서 마침내 대형사고, 소형 차, 청색 선, 흑색 선전,…… 같은 품위 없는 말을 완전히 몰아내게 될 것이다.
  한자를 둘만 붙이면 새로운 낱말이 생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뜻이 드러나지 않는 홑말이다. 새 낱말이 필요할 때는 한자가 아니라 토박이말을 붙여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있는 한자말은 이런 방식으로 바꿔쳐야 한다. 가까운 앞날에 황해, 홍하, 녹림, 백악관, 청와대는 각각 누른 바다, 붉은 강, 푸른 숲, 하얀 집, 푸른 기와집으로 되고 계륵, 우유, 한우, 양궁,…… 이런 낱말들이 낮은 교육 수준의 표지로 되어 급속히 사라질 것이다. 금연은 안 피우기로 되고 무노동 무임금은 일 없이 돈 없기로 될 것이다.5)
  한자는 말만들기에 좋을 뿐 아니라 긴 낱말을 줄이기에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한자에 매달리는 이들이 높이 사는 이 “축약력”이야말로 낱말을 어렵게 배운 보람도 없이 다시 새것을 배울 것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원칙이다. 약력, 대선, 선대, 당정,…… 같은 준말은 없어져야 한다.
  셈말이 한 줄로 합쳐져야 한다. 하나에서 아흔아홉까지의 셈말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니 일에서 구십구까지의 한자 셈말은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 소나타Ⅱ, 엘리자베스Ⅰ, 헨리Ⅷ, 빅3, 사자회담, 십오차전은 각각 소나타 둘, 엘리자베스 첫째, 핸리 여덟째, 큰 셋, 넷의 만남, 열다섯번째 싸움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본 사람이 네만삼천일곱백네십구로,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사만삼천칠백사십구로 읽는 것은 앞으로 네만세천일곱백마흔아홉으로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의 “하면 된다”는 빈 말로 끝난 적이 없다. 우리는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이만 보아도 웃어 왔다. 열시 열분을 열시 십분이라고 하는 것이 그보다도 얼마나 더 우스운 일인가를 눈치채면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이것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은 한자말을 사전에서 지워비리는 것으로 끝날 수가 없다. 여러 경우에 쓰이는 인사말, 이야기하는 사람들끼리 쓰는 호칭, 인칭 대명사 등도 정비하고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자말을 끊으면 처음에는 담배를 끊는 것만큼이나 괴롭겠지만 어떤 고비만 넘기면 매우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이 일을 해 내고 뒤돌아 보면 우리가 이런 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잠식하다. 기생하다 같이 메마른 낱말은 갉아먹다, 빈대붙다 같이 생동감 있는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새발의 피, 식은 죽 먹기 같은 비유는 익살이 들어 있으면서 천박하지 않은 좋은 표현이다. 이런 입말의 표현들을 이용해서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이 욕을 안 하고 살 수 없으며, 웬만큼 품위 없는 말이 아니면, 그것이 문자화되어도 좋지 않을까? 놈, 년, 새끼 같은 낱말은 이제 글에서는 XX 또는 00 같은 식으로 감출 것이 아니라 그대로 풀어 놓아야 한다.
  한때 젊은 층에서 토끼다라는 동사가 유행했다. 토끼처럼 뛰어 달아나는 모양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해 주는 좋은 비유이지만, 품위 없는 새말로 평가되어 사전에 올라 보지도 못하고 다시 없어져 버렸다. 이런 말을 되살리고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살아 있는 영어를 배우자고 야단들이다. 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말도 살려서 쓰고 외국인에게도 살아 있는 우리말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말 가꾸는 방안을 뼈대만, 체계 없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체계적인, 구체적인 연구는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다. 언어학, 국어학 분야의 학자들만 아니라 말과 관계된 분야의 일꾼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