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국어에 나타난 일본어의 언어적 간섭】

일본어투 문장 표현

정광 / 고려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서론

  1945년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된 이래 일본어가 국어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와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매우 활발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국어에 스며든 일본어 어휘에 대한 것이었고 일본어투의 문장 표현에 대한 것은 거의 없었다. 굳이 이에 대한 연구를 찾아본다면 1989년에 “일본 문화의 수용에 따른 여러 문제점”을 살펴보았던 “한국일본학회”의 ‘하계 학술 발표회’의 주제 토론회에서 부분적이나마 이 문제의 거론이 있었을 뿐이다. 이 발표회의 주제 발표자였던 송민(1989)은 국어에 들어온 일본적 외래어 문제를 폭 넓게 살펴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발표에서 “국어의 통사 층위에서 일어난 일본어의 수용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된 일이 없다.”(송민:1989/19)라고 하여 국어 구문에 끼친 일본어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이제까지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였으며 국어에 끼친 일본어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어휘 중심으로 이루어진 매우 편파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였다.
  국어에 끼친 일본어의 영향에 대하여 그동안 주로 어휘에 국한하여 연구가 진행된 것은 일본어에 기원을 둔 외래어가 언어학적 지식이 없는 문외한에게도 비교적 쉽게 감지될 수 있었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실제로 해방 이후 ‘왜색철폐(倭色撤廢)’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일본어 잔재(殘滓)의 일소(一掃)’ 운동 중에는 국수주의적 사고나 반일 사상에 가득찬 인사들에 의하여 매우 감정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없지는 않았다. 즉 일본어 어원의 외래어를 없애는 것이 한·일 양어의 과학적인 분석이나 문법적인 연구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비교적 잘 드러나는 어휘 표현에서 일본어로 보이는 외래어를 마구잡이로 추출하여 이 어휘들을 모두 일본어의 잔재라고 몰아붙인 사례가 없지 않았다. 특히 6·25동란 이후 배일 감정이 팽배했던 시절에 유행했던 국어 순화 운동은 국어에 숨어 있는 일본어의 잔재를 찾아 없애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으며 당면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왜색어’로 인정된 어휘를 사용했던 많은 문필가들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비애국자 내지는 친일파로 매도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아 생소했던 고유어의 어휘가 ‘왜색어’로 바뀌어 정화 대상이 됐는가 하면 반대로 많이 쓰여서 친숙한 어떤 일본어의 어휘는 우리의 고유어로 둔갑하여 국어 순화에서 그 사용이 권장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일본어의 잔재를 없애는 ‘국어 순화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없어진 일본어 외래어의 빈자리는 역시 영어나 서양어로부터 차용된 외래어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어의 영향 연구가 어휘 중심의 편향적이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비교 언어학적 편견이었다. 즉 두 언어의 접촉에서 차용이 가장 잘 일어나는 것이 어휘의 층위이고 문법 부문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이론이 작용한 것이다. 인도구라파제어의 비교 연구에서 얻어진 역사 비교 언어학의 중요한 이론 가운데는 두 언어가 접촉했을 때 어휘의 차용이 가장 손쉽게 일어나며 문법 요소나 통사 구조는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일본어 영향을 받기 이전의 근대 국어에 비하여 현대 국어의 문어에서 매우 다른 문장 구조와 관용적 표현이 생겼다는 사실을 많은 국어학자들이 간과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현대 국어 문어의 문장 구조와 관용적 표현에 대하여 두 언어의 영향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일본어투 문장의 진원

  국어에서 일본어투 문장 표현이 나타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근대 국어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 말엽에 간행된 일본어 교과서 “첩해신어”에는 “さてあてたいくたりてこそござれ”의 대역문으로 “어와아다이오시도쇠”가 있다(2권 2엽 앞면). 이 대역 구절의 ‘아다이’는 일본어 ‘あてたい’를 그대로 직역하여 생긴 일본어적 국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어 학습서의 대역문이라는 특수한 경우의 예이며 아무래도 국어 문장 구조의 전반적인 일본어 영향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 소위 ‘한일합방’으로 불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일본 침략 이후에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한민족의 억압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민족어의 훼손과 말살을 집요하게 시도하였다. 그리고 지배자의 언어로서 일본어는 이 땅에 군림하였으며 이 시기에 우리말은 본격적으로 일본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 1930년대 말에는 우리말의 훼손과 말살의 정책 시행이 절정에 다달았으며 국가 공용어로서 ‘국어’의 위치를 차지한 일본어는 더욱 비호되고 일개 민족의 언어인 ‘조선어’로 전락한 우리말은 일상적인 사용조차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에는 전쟁에 혈안이 되어 이성을 잃은 총독부가 언어에 이어서 우리의 성씨마저 일본어로 바꾸게 하는 민족 말살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우리의 작가와 논설가, 교육자들은 피할 수 없이 일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일본어의 기초 위에 우리말의 문어를 사용한 예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현대 문학의 성립에 그동안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 식민지 시대에 많은 작가들이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어로 문필 활동을 하다가 다시 우리말을 사용하여 작품을 쓴 예가 많았음을 밝혔다. 이러한 과정에서, 즉 일본어를 문어로 구사하던 작가가 후일에 우리말로 쓴 작품 속에서 국어 문어의 일본어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김윤식(1974)과 鴻農映二(1981) 등의 연구에 의하면 현대 문학을 시작한 많은 작가들이 처음에는 일본어로 작품을 쓴 경험이 있음을 보고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현대 문학을 일으킨 이광수(1892-?)는 14살 때에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2) 1905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상당한 기간으로 그곳에서 생활하였고 그의 처녀작은 일본어로 쓴 것이었다. 이광수는 광무학교(光武學校)에서 일진회(一進會) 간부의 유학 권고 강연을 듣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여 일본에 건너가기까지는 일본어가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일한 후 단기간에 일본어를 익혀서 다른 한국인 유학생의 통역을 담당할 정도가 되었으며 17세에 그의 최초의 작품인 ‘愛か(사랑인가)’를 일본어로 써서 1909년 “백금학보(白金學報)”에 실었다.
  한국 현대 문학의 비조로 알려진 이광수의 첫 작품은 일본어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는 후일 우리말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새로운 문학을 일으켰는데 아마도 우리말 작품의 문장 언어는 그가 젊은 시절에 학습하여 구사하던 일본어 구문을 모델로 하여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 속에 사용된 우리말의 어휘나 구문이 일본어의 영향과 간섭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 현대 문학 초창기에 활약한 문인들의 문장 언어는 일본어가 우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문장 수업과 문어의 교육 과정을 살펴보면 이 사실은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白川豊(1981)과 鴻農映二(1981)의 연구에 의하면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 현대 문학의 기초를 놓았던 최남선(1890-1957)의 경우도 문장 언어의 습득 과정은 비슷하다고 한다. 조숙했던 최남선은 6세에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그의 형인 최창선과 함께 장교동·관철동 일대의 서당을 전전하였으며 12세에 벌써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투고하였다. 서당을 그만두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한 것은 13세의 일로서 3개월만에 일본어를 모두 익혀서 “오사카아사히신분(大阪韓日新聞)”을 구독하였다고 한다. 15세에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갔으며 도쿄후리츠 다이이치중학교(東京府立 第一中學校)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현대적인 의미의 문학을 시작한 김동인도 위의 두 사람과 비슷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14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중학부에 편입하였고 후에 가와바다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다녔다. 그가 1919년 2월에 동경에서 주요한, 전영택, 최승만, 김환 등과 “창조(創造)”지를 발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 역시 “弱き者の悲しみ(약한 자의 슬픔)”이란 작품을 일본어로 발표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문장 언어는 모두 일본어의 교육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들이 구사한 우리말은 어휘뿐만 아니라 문장에 있어서도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이들은 모두 1920년대 우리 문단의 대표자들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문학작품은 많거나 적거나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1930년대에 활약한 작가 정비석, 이무영도 모두 일본 유학파이어서 일본어의 기초 위에 국어의 문장 언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에 태어난 정비석은 신의주에서 일본인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일본에 건너가 일시 히로시마의 중학에 다닌 일이 있고 동경에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文科)에 적을 두었다. 그는 기시산지(貴司三治)가 주간으로 있던 “분가쿠신분(文學新聞)” 주최의 신인 현상 작품 모집에 ‘朝鮮の子供から日本の子供へ(한국의 아이로부터 일본의 아이에게 )’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후일 국어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하여 별도로 한국어 학습을 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농민 문학자 카토다케오(如藤武雄)에게서 사사한 이무영(1908-1960)도 처음부터 일본어로 작가 수업을 하였다.
  시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지용(1903-?)도 조용만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재학 중에 일본어로 쓴 시를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긴다이후케이(近代風景)”에 투고하여 대단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1930년대 프로 문학의 시인으로서 활약하여 후일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많은 영향을 준 김용제도 “アカボシ農民夜學を守れ, 春のアリラン, 答へを得つ一牢獄の中から” 등의 시를 일본어로 썼으며 일본의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염상섭과 전영택, 현진건도 사정은 비슷하다. 15세에 일본에 갔던 염상섭(1897-1963)은 그의 ‘문학 소년 시대의 회상’에서 “이 시절 우리들이 받은 교육이 일본어를 통한 것이어서 일본 문화가 주입되었다. 이것은 합병 이후 고통스러운 운명이었지만 나는 소년기의 후반을 한국적인 것에서 떨어져 지낸 것이 더욱 불리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 이것은 소년 시대에 일본에서 교육을 받으며 일본어를 문장언어로 구사하던 이 시대의 작가들이 후일 국어로 작품을 쓸 때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전영택(1894-1968)도 18세가 된 1912년 동경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중학부에 편입한 후 고등학부에 진학하였고 대학에서는 문학부와 신학부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문장 언어는 우리말보다는 일본어의 구사력이 앞섰을 것이다. 그는 김동인의 “배따라기”와 유진오의 “마차”가 일본인 작가 쿠니기타 돗포(國木田獨步)의 “운메론샤(運命論者)”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처럼 전영택도 일본 작가의 작품과 유사한 작품이 적지 않다. 역시 한국 현대 문학의 태두로 알려진 현진건(1900-1943)도 12세에 동경 세조(成城) 중학에 입학하여 5년간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다만 그는 후일 중국에 건너가 상해(上海)의 호강대학(滬江大學)을 다녀서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교육 언어로 한 것이 다른 작가와 다르다.
  실제로 이 시대의 한국 작가들 가운데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작품 활동에 지장을 받는 일도 있었다. 상술한 정비석도 국어로 작품을 쓰기 위하여 홍명회의 “林巨正”를 텍스트로 하여 국어 문장 작법을 연습하였다고 하며 김동리도 잡지사에서 공모한 소설 작품 모집에 여러 번 응모하였으나 국어의 문장력이 없고 문법이 틀려서 낙선하였다고 한다.
  일본어의 토대 위에 국어 문장 언어를 습득하여 작품을 쓴 사실은 시인 이상(李箱), 즉 김해경(1910-1937)에 있어서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상이 다녔던 ‘경성공업고등학교(京城工業高等學校)’는 거의 일본인 교사에 의하여 일본어로 교육이 진행되었고 과제물도 일본어로 써야 했고 교재는 영어로 된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의 것이었으며 시험에서도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우리말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3). 따라서 17세의 나이에 이 학교에 입학한 이상은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학교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이상은 일본 시인의 작품에 접하게 되고 그 작품을 통하여 작가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일본어로 작성되었고 우리말로 된 작품도 그 초고(草稿)는 일본어로 썼다고 한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이들 작품의 국어가 일본어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상이 문필 활동을 하던 시대는 일본어를 쓰거나 국어를 쓰거나 관계없었던 때였다. 오히려 이 시대는 일본어로 쓴 작품들이 보다 권위가 있었고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작품을 고쳐 쓴 것은 민족적 자각이 이들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들은 오히려 일본어로 작품을 쓰면서 국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러한 환경에 있던 작가들의 일본어 침투도(浸透度)는 자국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올 정도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앞에 들은 작가들이 후대의 문학 작품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러나 비단 문학 작가들만이 이러한 형편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층들이 사용한 우리말 문장 언어가 일본어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어서 문어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은 문학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말 문장 언어 전반에 걸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6·25 동란 이후 영어의 영향까지 곁들여서 현대 국어의 문어는 근대 국어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차이는 우발적이거나 역사적 변천에 따른 자생적인 변화로 보기 어렵다. 현대 국어의 문어에서 주로 나타나는 독특하고 새로운 구조의 문장이나 관용구는 외국어의 학습이나 이중 언어 사용, 또는 번역 과정과 같은 언어 접촉을 통하여 상당한 간섭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식민지 시대에 있었던 문학 작품의 우리말과 같이 일본어의 문장 언어에 익숙한 작가들이 다시 이를 우리말로 바꾸어 기술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의 간섭을 받은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송민(1989)에서는 이에 대하여 “현대 국어에 나타나는 통사 층위의 차용은 역시 대부분의 영어와 일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근대 국어와 다른 현대 국어의 독특한 문장 구조라든지 관용적 표현은 일본어, 또는 영어가 적극적으로 간섭한 결과로 보았다.


3. 통사 구조상의 일본어 영향

  현대 국어의 통사 구조의 특징 중에는 근대 국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송민(1979)에서는 직접 화법의 간접 화법화, 단문의 복문화·포유문화, 서술구의 수식구화 등을 현대 국어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으로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 구조의 변화는 현대 국어가 일본어와 영어 문장 구문의 영향을 받은 때문으로 인식하였다. 필자는 본고에서 전술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일본어 구문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하며 우선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국어와 일본어는 교착적 문법 구조를 갖고 있어서 어순이나 단어의 곡용 및 활용의 문법 과정이 매우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문법 형태의 통사·의미 기능도 비슷해서 이들은 서로 교체가 가능할 정도다4). 이와 같이 형태적으로 유사한 두 언어가 접촉하였을 때, 특히 전술한 문학 작가들의 경우와 같이 하나의 언어가 상층 언어로 작용하였을 때에 상당한 간섭이 일어나고 어휘뿐만이 아니라 언어의 거의 모든 층위, 즉 문장 구조에서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 그 대표적인 몇 가지 예를 1920-30년대 소설에서 찾아본다.


        3.1. “-고 있다”(ている) 표현

(1) 그는 아내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있었다.(김동인의 “배따라기”에서)
  (1)’ 그는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2) 감독도 그들이 놀고 있는 것을 묵인할 뿐 아니라 때때로는 자기까지 섞여서 놀고 있었다.(김동인의 “감자”에서)
  (2)’ 감독도 그들이 노는 것을 묵인할 뿐 아니라 때때로는 자기까지 섞여서 놀았다.

(3) 어느덧 C의 팔은 비스듬히 춘심을 안고 있다.(현진건의 “墮落者”에서)
  (3)’ 어느덧 C의 팔은 비스듬히 춘심을 안았다.

(4) 어린 것을 꼭 안아가지고 웅크리고 떨고 있다.(전영택의 “하늘을 바로보는 여인”에서)
  (4)’어린 것을 꼭 안고 웅크리고 떨었다.
  이 예문 가운데 (1), (2), (3), (4)는 1920년대 소설에서 발췌한 예문이며 (1)’(2)’, (3)’, (4)’는 필자가 현대 국어로 고친 것이다. (1)의 서술어인 ‘기다리다’나 (2)의 서술어 ‘놀다’는 모두 「+지속성」의 의미자질을 가진 동사지만 동작의 진행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고 있다’를 붙이는 구문의 표현을 선택한 것이다. (1)과 (1)’, 그리고 (2)와 (2)’를 비교하면 (1)과 (2)의 ‘-고 있다’가 동작의 지속이나 진행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고 있다’의 구문을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1)의 예문은 일본어 “彼れは妻の歸りを待つていた”를 우리말로 직역한 것, 즉 일본어의 통사 구조에 우리말의 어휘를 삽입한 것으로 필자의 직관으로는 국어로서 적격한 문장(well formed sentence)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1)과 (2)의 예문과 같이 ‘동사「+지속성」 + -고 있다’ 표현은 오늘날의 국어 문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다음 (5), (6)과 같은 표현이 자주 쓰이게 되었다.
(5) 철수는 저 집에서 살고 있다.
  (5)’ 철수는 저 집에서 산다.

(6) 이들은 개혁이라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교수신문> 4월 18일자 13면)
  (6)’ 이들은 개혁이라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가졌다.
  藤井正(1966)에 의하면 일본어에서는 동사를 분류할 때에 ‘-ている’가 붙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제1종 상태 동사, 제2종 계속 동사, 제3종 순간 동사, 제4종 항상 ‘-ている’가 붙는 동사의 넷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즉 ① 동사 그 자체의 의미, ② ‘동사+-ている’의 의미, ③ ‘-ている’의 연결 여부 등의 세 가지 기준에 의하여 동사를 분류할 수 있으며 상태 동사는 상태의 불변화를 나타내는 동사이고 계속 동사는 상태의 일시적 변화를 나타내는 동사이며 순간 동사는 상태의 영속적 변화를 나타내는 동사, 그리고 제4종의 동사는 상태의 발단을 나타내는 동사로 정의하였다. 또 제1종 상태 동사는 ‘-ている’를 연결할 수 없는 것으로 동사의 어휘 의미가 시간을 초월한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며 제2종 계속 동사는 ‘-ている’를 붙일 수 있는 것으로 ‘-ている’를 붙이면 동작이 진행 중인 것을 나타낸다. 즉 어떤 시간 내에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동작이나 작용을 표시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住む-살다’, ‘持つ-가지다’ 등의 동사에 ‘-ている’를 붙여 ‘住んでいる, 持っている’의 표현이 되면 “살고 있다, 갖고 있다”와 같이 일정 시간 내에 그 행위가 계속됨을 나타낸다.
  그러나 국어에서 이러한 표현은 근대 시대까지, 즉 일본어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 국어의 “동사「+지속성」”에 “-고 있다”를 붙여 그 행위가 지속됨을 표현하는 것은 현대 국어에 들어와서의 일로서 일본어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읽고 있다, 쓰고 있다, 웃고 있다, 울고 있다, 보고 있다, 듣고 있다, 먹고 있다, 만나고 있다, 움직이고 있다” 등의 표현이 생겨났다. 일본어에서 “讀む(읽다), 書く(쓰다), 笑う(웃다), 泣く(울다), 見る(보다), 聞く(듣다), 食う(먹다), 縫う(만나다), 動く(움직이다)” 등은 계속 동사로서(金田一春彦:1976/10) ‘-ている’를 붙여 동작의 진행 중인 것을 나타내며 이러한 표현에 이끌려 국어에서도 위와 같은 표현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제3종 순간 동사는 ‘-ている’가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면 동작이나 작용이 끝나고 그 결과가 잔존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순간적으로 끝나고 마는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동사가 일으킨 동작이나 행위의 결과가 계속해서 잔존할 때에 이 구문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死ぬ(죽다), 結婚する(결혼하다)’에 ‘-ている’를 붙여 ‘死んでいる(죽었다), 結婚している(결혼했다)’ 등의 표현은 그 행위나 동작이 끝나고 그 결과가 계속됨을 나타낸다. 위의 예문 (3)과 (4)의 서술 동사 ‘안다, 떨다’는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어의 ‘振る, 抱く’에 ‘-ている’를 붙여 표현하는 ‘振っている, 抱いている’와 같은 어법에 이끌려 “떨고 있다, 안고 있다”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복녀는 목으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고꾸라져 있었다”(김동인 “감자”에서)의 ‘고꾸라지다’는 역시 순간 동사로서 이 예문에서는 ‘-어 있었다’를 결합하여 그 동작의 결과가 아직 잔존하고 있음을 나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죽어 있다, 도착해 있다, 이혼하고 있다, (병이) 낫고 있다” 등의 어색한 일본어 스타일의 표현이 가끔 사용된다.
  제4종의 동사는 시간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는 제1종의 동사와 비슷하지만 제1종 동사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면 제4종 동사는 어떤 상태를 포함하거나 띠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동사는 항상 ‘-ている’를 붙여 그런 상태에 있음을 표현하는데 “山が聳えている(산이 솟아 있다)”의 ‘聳える’가 바로 그런 동사다. 이 예문에서 동사 ‘聳える’의 의미는 “(하나의 산이 다른 산에 비하여) 높은 상태를 띠고 있다” 라고 볼 수 있다. 일본어의 ‘すぐれる, おもだつ, ずばぬける, ありふれる’ 등은 “すぐれている(우수하다), おもだっている(중심이 되다), ずばぬけている(빼어나다), ありふれている(흔하다)” 등과 같이 ‘-ている’를 붙여 사용한다. 국어에서는 상태 동사, 즉 형용사의 경우에 ‘-고 있다’를 붙여 상태의 지속을 나타내는 것은 일본어와 달리 아직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산이) 솟아 있다”에서와 같이 ‘솟아 있다’의 표현이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솟다’에 ‘-아 있다’를 붙여 상태 동사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2. “…있을 수 있다(有り得る), …있어야 할(有るべき), …한(던) 것이다(…たのである)”

  송민(1979/33)에서는 현대 국어의 통사 구조 중에 근대 국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적인 구문이 많음을 지적하고 “한편 현대 한국어의 ‘-있을 수 있다, -있어야 할, -한 것이다’와 같은 통사 구조도 일본어 ‘ariuru(有り得る), arubeki(有るべき), -tano de’aru(-たのである)의 번역 차용이 거의 분명하며…….”이라 하여 이러한 표현이 일본어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진 구문임을 밝히고 있다. 다음의 예문은 이러한 구문의 일반적인 사용 예를 보여 준다.
(7)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8) (아이들이) 보아야 할 책이다.
(9) (일본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위와 같은 표현은 현대 국어에서 많이 사용되는 구문이다. (7)의 예는 “(さまざまな狀況からみ て)それは有り得ることだ”와 같은 문장 구조로서 근대 국어에서는 이러한 문장 구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8)의 예는 “(子供の)讀むべき本だ”와 같은 구조로서 역시 근대국어에 없는 표현이며 (9)의 예는 “(日本語の影響を多く)受けたのである”와 같은 구조로서 현대 국어에는 많이 쓰이지만 그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문장 구조다5).

        3.3. 현대 국어의 피동과 일본어의 우케미(受身) 표현

  현대 국어에서는 전 시대의 우리말과 달리 피동형의 표현이 많다. 물론 이러한 구문은 영어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일본어의 우케미(受身) 표현에서 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 친구한테서 밤늦게 전화가 걸려 왔다.
  (10)' 친구가 밤늦게 전화를 걸었다.

(11) 도둑이 동네 사람한테 잡혔다.
  (11)’ 동네 사람들이 도둑을 잡았다.

(12) 전쟁이 독일에 의해 시작되었다.
  (12)' 독일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13) 월급에 수당이 가산된다.
  (13)' 월급에 수당을 가산한다.

(14) 머리를 얼음으로 식힌다.
  (14)' 머리가 얼음으로 식는다.
  ‘10-14’의 예는 “(전화를)걸다-걸리다, 잡다-잡히다, 시작하다-시작되다, 가산하다-가산되다, 식다-식히다”와 같이 동사의 ‘능동-피동’에서 피동형을 선택하여 표현한 것으로 현대 국어에서 ‘10-14’와 같은 능동적 표현에 비하여 많이 사용되는데 근대 국어에서는 이러한 표현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자신의 피해를 입은 경우, 즉 마이너스적인 경우에 우케미 표현을 쓴다6). 즉 국어의 경우 “아이가 옷을 더럽히다”와 같이 자신에게 손해가 일어난 표현은 일본어에서 “子供た服を汚される(아이에게 옷을 더럽혀지다)”와 같은 우케미 표현으로 말한다. 이 표현의 영향으로 현대 국어에서는 능동태의 문장보다 피동태의 표현이 일반화된 것 같다. 즉 (10)의 예는 “友だちた夜おそく電話をかけられた”라는 일본어의 우케미 표현을 국어에서는 피동형으로 나타냈으며 (11)의 예문은 일본어 “どろぼうは近所の人たちにつかまえられた”와 같은 표현으로서 역시 피동태로 우케미 표현과 같은 방법을 취하고 있다. (13)의 예문도 일본어의 우케미 표현인 “給料た手當が如えられる”의 구문을 피동형으로 표현하고 (14)의 예문은 “頭がこりで冷やされる”의 우케미 표현을 피동태로 나타낸 것이다.
  현대 국어에서 사동적인 표현이 늘어난 것도 일본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즉 “울다-울리다-울게 하다, 기다리다-기다리게 하다, 읽다-읽히다-읽게 하다, 마시다-마시게 하다”와 같이 동사의 ‘능동형-사역형’에서 사역형의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15) (철수가) 영이를 울렸다.
  (15)' (철수 때문에) 영이가 울었다.

(16)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기다리게 하였다.
  (16)' (학교에서 아이들을) 선생님이 기다렸다.

(17) (어머니가) 딸에게 책을 읽혔다.
  (17)' (어머니 때문에) 딸이 책을 읽었다.

(18) (친구가) 술을 마시게 했다.
(18)' (친구 때문에) 술을 마셨다.
  위의 예문에서 ‘(15)-(18)’와 같이 사역형의 구문이 ‘(15)'-(18)'’ 보다 널리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일본어에서 “泣かす(울다), 得たす(기다리다), 讀ます(읽다), 飮ます(마시다)-泣かせる(울리다), 待たせる(기다리게 하다), 讀ませる(읽히다), 飮ませる(마시게 하다)”와 같이 동사의 ‘능동-사역’의 표현에서 사역형을 선호하는 일본어의 구문 표현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3.4. 비인칭 대명사나 무정체의 명사가 주어로 쓰인 경우

  송민(1979)에서는 현대 국어의 통사 구조 중에서 근대 국어의 그것과 다른 예로 비인칭 대명사나 무정 명사가 주어의 위치에 올 수 있고 지시 대명사가 필요 이상으로 나타나며, 행동이나 상태가 사역적, 피동적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들고 있다. 행동이나 상태가 피동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예는 앞에서 살펴보았으나 현대 국어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통사 구조는 비인칭 대명사나 무정체의 명사를 가주어로 사용하여 표현하는 영어 표현의 영향이며 이 영향은 전술한 피동이나 사역형의 표현과 같이 일본어가 먼저 받아서 국어에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그 예를 송민(1979)에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9) 그것은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주어가 비인칭 대명사 ‘그것’)
(20) 그 길이 나를 끝없는 곳으로 이끌어 갔다(주어가 무정 명사 ‘길’)
(21) 서울의 기후는 부산의 그것보다도 춥다(필요 이상으로 나타나는 지시 대명사 ‘그것’)

        3.5. 영어 구문에 이끌린 일본어와 국어

  영어의 특정한 구문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사용되다가 그것이 그대로 국어에 유입된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영어의 ‘in behalf of’와 ‘be bound to’는 “-のたあに(-을 위하여)”와 “必ず - する(반드시 -를 하다)”로 번역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이탤릭체로 된 부분, 이하 같음)7).
(22) 그는 주의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22)' 彼は主義のために勇敢に戰った. (22)" he fought bravely in behalf of a cause.

(23)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23)' 人間は必ず死ぬ. (23)" Man is bound to die.
  이와 같이 영어 구문에 이끌려 국어와 일본어가 유사한 구문 표현을 갖는 예는 송민(1979)에서 “as soon as, -するやいなや, -하자마자”를 비롯한 10개의 예를 들었다. 영어에서 일본어로, 다시 국어로 전용된 구문의 예는 “for all the world(どうしても, 어떻게 해서든지), as for(-はどうかといえば, -는 어떤가 하면), put up with(-に耐える, -을/를 참다), make friends with(-と友だちになる, -와 친구가 되다), in oneself(そのもの自體は, 그 자체는), of oneself(自然に, 저절로)” 등과 같이 매우 많은 예를 찾을 수 있고 여기에 언급된 영어 구문과 그에 해당하는 국어와 일본어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24)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24)' 彼はどうしても學校へ行こうとしなかった.
    (24)" he would not go to school for all the world.

(25) 나는 어떤가 하면 아무런 불편도 없다.
  (25)' 私はどうかといえば何も不平はない.
    (25)" As for me, I have nothing to complain of.

(26) 미국에 있는 동안 잭과 친구가 되었다.
  (26)' アメリカにいた間に私はジャックと友だちになった.
    (26)" While in America, I made friends with jack.

(27) 이 물질 그 자체는 유독하지 않다.
  (27)' これらの物質はそのもの自體は有毒ではない.
    (27)" These substances are not poisonous in themselves.

(28) 문이 저절로 열렸다.
  (28)' 戶は自然に開いた.
    (28)" The door opened of itself.
  이러한 영어의 구문 표현은 일본어의 중계 없이 영어로부터 국어에 직수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20-30년대 현대 국어가 형성될 당시 영어를 비롯한 서양의 외국어가 일본어에 의해서 교육되었고 먼저 일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가 중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영어 구문의 일본어 대역으로부터 국어의 번역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예를 들어 1920-30년대 괴테의 “파우스트”는 최승만, 하태용, 조희순, 권환 등이 부분적이지만 번역한 것이 남아 있고 이들의 역문에는 일본어의 번역, 특히 일본인 작가 모리오가이(森鷗外)의 번역을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8). 즉 김승옥(1993)에 의하면 하태용의 번역은 모리오가이(森鷗外)의 번역을 참고하였으나 역문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Mein Busen fühlt sich jugendlich erschüttert
Vom Zauberhauch, der euren Zug umwittert.
“파우스트”의 ‘헌사(獻詞)’에서
  이에 대한 모리오가이(森鷗外)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汝達の列のめぐりに漂へる, 奇しき息に.(너희들 주위에 떠다니는, 영묘한 숨결에)
我胸は若やかに搖らるる心地す.(내 가슴은 젊고 싱싱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하태용의 번역은 “너희의 列을 둘러싼 魔物의 쉼으로 나의 가슴은 젊게도 흔들리듯”이었다. 하태용의 번역에서 ‘魔物의 쉼’은 森鷗外의 번역 “奇き息に(영묘한 숨결에)”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일본어의 번역을 참고하지 않고 독일어 원문으로부터 ‘Zauberhauch(마력적인 입김, 영묘한 숨결)’을 번역하였다면 하태용의 것과 같이 ‘쉼’으로 번역될 수는 없다. 이것은 김승옥(1993)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본어의 ‘息’을 ‘쉼’으로 오해한데서 생긴 잘못이다. 일본어의 ‘息’은 ‘숨결’과 ‘휴식’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4. 관용적 표현에서 일본어의 영향

  이상에서 문장 구조에서 나타나는 일본어의 영향을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0-30년대에 우리말은, 특히 문학 작품이나 지식인들의 글에서 일본어 문장 구조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일본어로 교육되었고 일본어로 습작을 한 다음에 이를 다시 국어로 치환하여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일본어 어투의 문장이 많이 나타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제3장에서는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국어 문장의 예를 단편적이지만 몇 개 고찰하였는데 실제로 일본어의 영향은 관용적 표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제 현대 국어의 관용적 표현에서 일본어 어투의 것을 찾아보기로 한다.
  앞에서 인용한 송민(1989)에서는 국어의 관용적 표현에 차용되거나 영향을 준 일본어 관용구로 “愛嬌が溢れる(애교가 넘친다)” 등 190여 개의 예를 찾아서 보여 주었다. 여기에서 보여 준 관용구들은 문법적 구조나 의미가 거의 합치된다는 점에서 일본어의 관용구가 국어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飽きるほど(akiruhodo)-배가 터질 만큼/터지도록”의 예는 일본어 ‘飽きる(싫증나다, 물리다)’를 ‘터질 만큼/터지도록’으로 치환한 것임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근대 국어에서 이러한 표현은 매우 일반적이었으므로 이러한 표현이 굳이 일본어 관용구를 차용했다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 같은 예로 “頭を橫に振る(머리를 옆으로 흔들다)”를 비롯하여 “いい人(좋은 사람), 怒りを解く(노여움을 풀다), 一言もない(말 한마디도 없다)”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근대 국어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연한 일치거나 한문 표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송민(1979/59-60)에서도 예를 들은 관용구가 모두 일본어에서 차용된 것으로는 보지 않았고 한문이나 서양어에 기원을 둔 것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실제 “會を持つ(회의를 갖다), 心の目で見る(마음의 눈으로 보다)” 등이 영어의 “have a meeting, see in one’s mind”의 직역으로 보아 서양어에 기원을 둔 관용구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현대 일본어는 서양어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개화 시대에 쏟아져 들어온 서양의 문물과 사상은 종래 일본어로서는 좀처럼 그 표현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새로운 문물을 표현할 새로운 어휘가 다량으로 만들어졌다. 소위 ‘文明語’라고 명명된 이 어휘들은 한자어로 조어되었고 이 한자로 만들어진 문명어는 개화기의 신문명의 수입과 더불어 한국에도 그대로 유입되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개화기의 신문명어들은 그 시대에 존재했던 기존의 한자어와 별도의 어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점차 기존의 한자 어휘를 흡수하여 신문명어의 어휘 체계로 일원화되었다. 예를 들면 종래 한자어로 존재하던 “회국(回國), 복무(服務), 장처(長處), 거년(去年), 초본(抄本), 필업(畢嶪), 지도(遲到)” 등의 한자 어휘가 각각 “귀국(歸國), 근무(勤務), 장점(長點), 작년(昨年), 사본(寫本), 졸업(卒業), 지각(遲刻)” 등의 일제 문명어에 흡수되어 그 사용이 정지되었다.
  일본어가 서양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어휘만이 아니다. 관용어 표현도 서양어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예를 들면 우리말의 “침묵은 금이다.”는 일본어 “沈黙は金た”에서 온 것이고 이 警句는 다시 서양어, 그중에서 프랑스 어를 예로 든다면 “(La parole est d’argent) le silence est d’or”와 관계가 있을 것이고 이것은 라틴 어와 희랍어에 소급될 것이다. 일본어의 문명어에서 수입된 ‘낙뢰(落雷)’도 영어의 “falling of thunder”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국어와 일본어에 공동으로 쓰이는 관용구로서 긴장되거나 급박한 상황을 표현하는 ‘숨을 멈추다(息を詰める)’는 서양어, 영어로 예를 들면 “to hold the breath”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일본어 어원의 국어 관용구를 살펴본다면 의외로 그 수효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일본의 “平家物語”와 “會我物語”에 그 표현이 보이는 ‘犬死にをする(개죽음을 하다)’는 현대 국어 이전에 그 표현이 보이지 않으므로 일단은 일본어 관용구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9). 그러나 여타의 것은 그 관용구의 어원이 한문이나 서양어, 그리고 우연한 일치 등을 충분히 살펴본 다음에야 일본어의 관용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가 밝혀질 것이다.


5. 결어(結語)

  이상 일본어투의 문장 표현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고찰하였다. 먼저 현대 국어의 문어에 일본어투가 많이 나타날 수 있는 두 언어의 접촉 과정을 살펴보면서 대부분의 현대 문학 초기 작가들이 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문어에 있어서의 이중 언어 사용자였음을 지적하였다. 실제로 1920-30년대에 우리의 현대 문학은 이러한 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후대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때의 많은 작가들은 젊은 시절의 습작 연습을 통하여 일본어의 구문을 익혔으며 그러한 문어의 학습은 일본어를 기본 문장어로 하고 우리말의 문어는 그에 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가 후일에 우리말로 바꾸어 작품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그들이 사용하는 국어 구문에 일본어 구문의 영향이 매우 많았음을 예를 들어 고찰하였다. 실제로 이들의 작품 가운데는 일본어 구문의 영향과 관용구가 차용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1920-30년대 우리의 소설 작품 속에서 일본어 구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예로서는 첫째 ‘-고 있다, -고 있었다’의 표현을 들었다. 국어에서 동작이나 상태가 지속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동사에 ‘-고 있다. -고 있었다’를 붙여 동작의 진행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표현이 실제로 현대 국어에서도 증가하고 있다. 국어에서는 동작이나 상태의 계속을 나타내는 경우에 대체로 과거형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국어의 과거 시상 표시에 쓰이는 ‘-았/었-’이 존재를 나타내는 ‘있-(有, 在)’, 또는 그의 고형인 ‘이시-’에서 발달한 것임으로 「+지속성」의 의미 자질을 가진 ‘살다’와 같은 동사에 이 과거 시상 형태를 붙여 “살았다”와 같이 동작이나 상태의 지속을 표시할 수 있으므로 ‘고 있다, -고 있었다’를 붙여 “살고 있다, 살고 있었다”와 같은 표현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근대 국어 이전에는 이러한 표현이 별로 쓰이지 않았는데 현대 국어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현저하게 늘어났다고. 본고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일본어의 구문 ‘동사+ -ている’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 것이다.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국어의 구문 중에서 ‘-있을 수 있다, -있어야 할, -한(던) 것이다’의 표현이 있다. 이러한 구문은 일본어의 번역 차용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았고 그 실제적인 예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일본어 자동사의 우케미(受身) 표현에서 영향을 받아 피동형 표현의 문장이 현대 국어에서 많이 나타난 것으로 보았고 이것은 서양 언어의 영향이 일본어에도 있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현대 국어에 사역형 표현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일본어의 영향일 수 있다.
  현대 국어의 통사 구조 중에 근대 국어의 그것과 다른 예로 비인칭 대명사나 무정 명사가 주어에 올 수 있고 지시 대명사가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되는 현상을 들었다. 이러한 표현은 서양어의 번역문이나 서양 언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의 번역체 문장에서 많이 발견되므로 이것 역시 일본어의 영향으로 볼 수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서양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어의 관용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의 번역에 의한 국어 번역문의 문장 구조가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경우를 예를 들어 고찰하였고 이러한 예가 매우 많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관용적 표현에서 일본어의 영향도 적지 않았으나 이들 가운데는 영어를 비롯한 서양어의 영향을 받은 것도 매우 많았음을 밝혔다. 단지 어떤 관용구가 일본어와 유사한 표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를 일본어 관용구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많은 사실들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 방면에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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