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국어에 나타난 일본어의 언어적 간섭】

조망-국어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

김광해 / 서울 대학교 사범 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1. 머리에

  국가의 불행한 역사가 남긴 앙금은 과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말끔히 가시는가? 특히 그 앙금이 언어에 관련된 것일 때, 그 앙금은 과연 말끔하게 청소를 해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한일 간의 불행했던 근대사의 과정을 통하여 일본은 우리의 말에도 엄청난 앙금을 남겼다.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의 앙금은 일본어라는 냄새가 현저하여 금새 눈에 뜨이는 것도 있고, 이것마저인가 할 정도로 전혀 그런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 것도 있다. 따라서 그 앙금 중에는 이미 청소가 되었거나 앞으로 청소하는 일이 가능한 것도 있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는 예도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말에 끼친 일본어의 영향을 크게 두 가닥으로 구분하여 조망한다.
  그 하나는 일본에서는 화어(和語)라고 부르는 말들, 즉 일본어의 고유어들이거나 그에 준하는 말들이 우리말에 들어온 경우이다. 한자로 적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훈독을 하고 있는 말들이 여기에 포함되며, 일본에서 먼저 창작된 뒤 우리말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는 숙어 표현들도 여기에서 다룬다. 이러한 일본어들은 그간 꾸준한 정화 작업을 통해서 많이 사라졌거나 잊혀져 가는 중에 있다.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도 근세 및 개화기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이 열심히 번역해 낸 일제 한자어들이다. 일본에서는 흔히 이를 역어(譯語)라고 부른다. 엄청난 양에 달하는 이러한 한자어들에 의해서 현대 국어의 어휘 체계의 특징 자체가 바뀌었다고 지적될 정도이다. 이 말들은 비록 만들어지기는 일본에서 만들어졌을지라도 한자를 성분으로 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은 아예 그것이 일본에서 번역되어 수입된 한자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전자와는 달리 저항감이 덜한 것들이다. 이 말들도 역시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꾸준히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유형은 양적으로 엄청날 뿐만 아니라 각 부문에 골고루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정화할 수 있는 뚜렷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2. 일본어의 간섭 과정

          가. 우리말과 일본어

  그 많은 일본어 또는 일제 한자어들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쉽게 우리말 속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정도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한일 두 나라는 언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반이 남다르다. 우선 양 언어는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언어들 중에서 서로를 가장 유사한 언어로 지목할 정도로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법 구조가 매우 비슷하여 어순이 대개 같으며, 명사, 동사의 굴절법도 유사하다. 이는 일본어가 우리말에 영향력을 미쳐 왔을 때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 준 훌륭한 배양토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언어는 양자의 구조적 특질들로 말미암아 한국어와 일본어가 만나게 될 경우 특히 한국어 사용자 쪽에서 일본어를 수용하는 일이 더 수월하게 되어 있다. 그 반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소 힘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로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말소리나 문법 부분에서 훨씬 복잡하다는 데 있다. 가령 자음, 모음의 개수에 있어서 한국어는 자음 19개, 단모음 8개(혹은 10개), 반모음 2개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일본어는 자음 13개, 단모음 5개, 반모음 2개를 사용한다. 또한 조사나 어미의 개수도 우리말 쪽이 현저하게 분화되어 있어서 그 수효가 많다. 이 같은 음소나 문법 요소들의 차이는 결국 일본인 쪽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한국인 쪽에서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의 언어적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일 양국에서 모두 과거부터 한자를 터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건은 주로 한자어 수입에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에서 먼저 번역된 한자어들이 때마침 개화를 맞아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던 신문물이나 신개념의 표현 수단으로서 별다른 저항감 없이 공급될 수가 있었다. 이는 비록 일본제라고는 하더라도 개화의 과정에 그 나름대로 기여한 점이 있다고 평가될 만하다. 함께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에서도 수많은 일제 한자어들을 수입해 들어간 것을 보더라도 한자를 알고 있었다는 환경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언어적 원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문화적 원인이다. 원래부터 물질 문명이나 문화 수준의 차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력한 쇄국 정책 같은 것으로도 눈가림하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 각종 신발명품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물질적 풍요는 일반인들에게 신기함과 안락함, 편리함, 풍요감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전파 및 유입을 강제력으로 막기가 힘들다. 외국어는 우선 이러한 선진적 발명품들이나 각종 문명의 이기와 함께 들어온다. 반드시 새로운 발명품 같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더라도 수준 높은 학술적, 철학적 신개념들도 술어와 함께 도입된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향상되고자 하는 욕구가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배움’ 또는 ‘공부’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 같은 노력은 권장할 만한 일일지언정 인위적으로 막을 일은 아니다. 실제로 개화기로 지칭되던 시절의 분위기는 바로 선진 문물을 하루라도 빨리 하나라도 더 많이 배우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진 문물에 대한 갈구의 분위기가 곧 우리나라의 개화기나 근대화 과정에서 일제 한자어, 또는 일본어들의 대량 도입을 인위적으로 가로막기 어려웠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선진 문명어의 수용 형상은 19세기 중엽 개화기의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일본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나아가 선진국 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며 현재도 여러 후발 국가들이 봉착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국어에 도입되는 외국어의 공급원이 바뀌어 일본어보다는 서구, 주로 미국어의 단어들을 대량 수용해 들이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또한 동일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어가 우리말에 퍼지게 된 이유의 하나로서 정치적인 원인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1910년의 한일 합방과 동시에 일인 관리들이 이 땅에 자리 잡게 되었고, 아직까지 일반인에게 일어 사용을 강요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각종 공문서들은 당연히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일본어만을 사용한 신문도 발행되었으며, 교육 기관들에서는 일본어로 교수 학습이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했던 것은 일제 말기에 시행한 우리말 말살 정책이었다. 이처럼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나라가 일본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일본어가 이 땅에서 활개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공간적 조건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 일본어의 간섭 약사

  일본어가 우리말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경과를 살펴보면 그 기간이 의외로 길다. 일본어가 우리말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역시 일제 강점기가 중심이 된다. 이 기간은 시간상으로는 35년이 되는데 이 기간만 하더라도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실제로 우리말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이 시작된 때부터 살펴본다면 그 기간은 비단 이 35년간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어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결정적인 계기를 지적해 본다면 역시 1876년(고종13년)에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이 될 것이다. 그 몇 년 뒤인 1881년에는 홍영식(洪英植),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조작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근대 문명을 시찰하게 하였으며, 같은 해에 김옥균(金玉均), 이듬해에는 박영효(朴泳孝) 같은 개화파 인물들이 일본의 문물을 배우기 위하여 도일하였다. 이들은 이때 이미 개화 인물 후쿠자와 (福澤諭吉)가 설립한 명치 학원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   일본어의 간섭은 이미 이때부터 개화기 지식인들의 왕래 과정을 통하여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한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어의 간섭이 극도화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 35년 동안이다. 한일합방과 더불어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을 일인화하기 위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분야가 일인들의 손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를 위해 일인들이 대량으로 한반도에 건너와 살게 되었다. 반대로 선진 지식을 익혀 출세를 꿈꾸는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일도 보편화되었다. 이때에는 이미 ‘국어’라고 하면 일본어를 뜻하는 것이었고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여야만 하는 공식 용어가 일본어였던 것이다.
  1931년의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1936년에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부임해 오는 것과 함께 한반도에서도 전시 체제가 운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시 비상 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38년에는 이른바 ‘신 교육령’이라는 것을 발하여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시간을 폐지하는 등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행하는 한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우리말 신문을 폐간시켰다. 1940년에는 이른바 창씨 개명을 강요하였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용어로서 일본어만을 강제적으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일본어, 또는 일제 한자어들이 우리의 생활 속 깊숙이 침투된 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1945년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다. 우리말 속의 일본어는 매우 수치스런 일제의 잔재 중의 하나로서 여겨지게 되었고, 따라서 그 정화 작업이 국어 순화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신세대들에 이르러서는 앞 세대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던 생활 속의 일본어들을 모르게 되었다. 이는 국어 순화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 반드시 성과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결과이다.
  이 기간에 들어서서도 주로 한자어로 된 학술 용어, 전문 술어들을 중심으로 일제 한자어의 영향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단어들은 일본어를 모르거나 그것만을 면밀히 조사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과연 이 말이 한자어인지를 알기 어려운 말들이 많다. 따라서 이러한 단어들에 대한 저항감도 실제로 고유 일본어들보다 덜하다고 볼 수가 있지만, 간단한 확인 작업만 거치면 역시 언젠가는 그 연원이 밝혀질 것이고, 그러고 나면 국어의 발전을 위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드는 잔재로서 여기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우리를 고뇌하게 만드는 과제로서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말에 일본어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일본과의 교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를 병자수호조약 무렵으로 잡는다면 현재까지 120여 년에 걸치는 장구한 세월이 된다. 이 기간은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로 보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간은 특히 동양의 국가들이 겪은 근대화 과정의 변화를 생각해 본다면 실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기간이 된다. 이 기간을 통하여 동양 각국은 문물, 제도는 물론 생활 풍습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것을 전범으로 하여 뒤따라가는 것을 나라의 ‘발전’이라고 간주하였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일찍이 스스로를 동양으로부터 벗어나서 서양화로 나아가자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슬로건을 내걸고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때에 신문명어의 번역 도입을 위하여 편리하게 사용된 것이 주로 한자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말의 한자어 부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사, 문명 사상의 흐름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말 현재까지도 변화가 없으며, 이러한 흐름은 당분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다. 사례 연구-김동인(金東仁)의 경우

  일본어 또는 일본어식 표현이 우리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주로 당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지식인들 가운데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하며 나아가 두고두고 후세까지 우리의 언어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소설가 김동인이 있다. 그는 특히 자신이 처음으로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 언어 문제로 얼마나 고충이 많았는지에 대해 상세한 언급을 남겨 놓았다. 그가 잡지 “창조”의 간행을 앞두고 당시(1918년 무렵)의 일을 회고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와 함께, 당시의 지식인들이 일본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 지식인의 경우를 사례 연구 삼아 살펴보기로 하자.
  동인은 언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고뇌를 많이 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 등에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쓴 소설은 우리말로 된 것이 아니고 일본문으로 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에 관한 동인의 술회를 보면 다음과 같다(김치홍 편저, 1984;432).
“일본서도 사마자키 도손(島崎藤村) 이하의 많은 문학가가 명치 학원 출신이라, 따라서 문학풍이 전통적으로 학생들에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는만치 3, 4학년쯤부터는 그 학년 학생끼리의 회람 잡지가 간행되고 있었다. 3학년 때에 나도 3학년 회람 잡지에 소설 한 편을 썼다. 지금은 다만 썼었다는 기억밖에 무슨 소리를 썼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일본문으로 쓴 소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처녀작이다.”2)
  여기서 우리는 1920년대의 청년 김동인이 이미 일본 말로 소설을 쓸 정도로 일본어에 익숙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많은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동인이 우리말로 된 소설을 처음으로 작정을 하는데,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김치홍 편저, 1984;434).
“더욱이 과거에 혼자에 머리 속으로 구상하던 소설들은 모두 일본말로 상상하던 것이라, 조선말로 글을 쓰려고 막상 책상에 대하니 앞이 딱 막힌다.
‘가정교사 강엘리자벳은 가리킴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나의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의 첫머리인데 거기 계속되는 둘째 구에서부터 벌써 막혀 버렸다. 순 ‘구어체’로 ‘과거사’로―이것은 기정 방침이라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가 아니고 ‘왔다’로 할 것은 예정의 방침이지만 거기 계속될 말이 ‘カノ女’인데 머리속 소설일 적에는 ‘カノ女’로 되었지만 조선말로 쓰자면 무엇이라 쓰나? 그 매번을 고유 명사(김 모면 김모, 엘리자벳이면 엘리자벳)로 쓰기는 여간 군잡스런 일이 아니고 조선말에 적당한 어휘는 없고……”
  이는 개명한 세계에 이미 깊숙이 빠져 들어간 한 지식인이 자신의 생각을 우리말로 표현해 보자고 마음은 먹었으나 막상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고자 하였을 때 어떠한 상황에 처하였던 것인지를 알려 주는 생생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이는 곧 당시의 우리말의 현황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암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이란 생각을 펼치는 수단일 터인데 1920년대를 전후한 우리말의 상황은 개화한 지식인의 개화된 생각들을 담아 펼쳐 내기 위한 도구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 처한 동인은 어떠한 방법으로 대처하였을까? 다음의 술회를 통해서 일본어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지식인들의 우리말 구사에 간섭 작용을 발휘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가 있다(김치홍 편저, 1984; 434).
“이 때에 있어서 ‘일본’과 ‘일본글’, ‘일본말’의 존재는 꽤 큰 편리를 주었다. 그 어법이며 문장 변화며 문법 변화가 조선어와 공통되는 데가 많은 일본어는 선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설을 쓰는 데 가장 먼저 봉착하여 -따라서 가장 먼저 고심하는 것이 용어였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를 조선 글로 쓰자니,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이는 ‘メツカシク’, ‘~ヲ感ジタ’, ‘~ニ違イナカッタ’, ‘~ヲ覺ェタ’ 같은 말을 ‘정답게’, ‘~을 느꼈다.’, ‘틀림(혹은 다름) 없었다’, ‘느끼(혹은 깨달)었다’ 등으로- 한 귀의 말에, 거기에 맞는 조선말을 얻기 위하여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막상 써 놓고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해서 다시 읽어 보고 따져 보고 다른 말로 바꾸어 보고 무척 애를 썼다. 지금은 말들이 ‘회화체’에까지 쓰이어 완전히 조선어로 되었지만 처음 써 볼 때는 너무도 직역 같아서 매우 주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술회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알 수가 있다. 즉 당시의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인 동인은 글을 쓸 적에 머릿속에서 먼저 일본 말로 생각을 하고 나중에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방법으로 작품을 썼다. 그때 자신의 생각을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는 우리말이 매우 궁색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바꾸어 말해 본다면, 당시의 우리말이 문법 요소, 어휘, 표현법 등에 있어서 개화된 생각을 표현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1920년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말의 모습이 특히 어휘 체계 면에서 일본 말의 모습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일본어 또는 일본식의 표현은 1920년대를 전후하여 각종 문예지나 일간 신문의 창간을 통한 언론 및 문예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김동인이라는 영향력이 컸던 한 지식인, 특히 언어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소설가로서의 지식인이 남긴 회고담을 통해서 그가 일본어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 중에는 동인과 비슷한 고뇌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도 많았을 터이고, 별다른 고민 없이 이미 익숙해져 버린 일본어를 우리말로 간단히 직역, 의역을 하거나 아니면 일본어를 그대로 수용해 가면서 쉽게쉽게 적응해 나간 지식인들도 또한 많았을 것이다. 수용자의 태도가 어떤 쪽이었든 간에, 다른 각종 문물 제도의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것을 일본에 수출하는 쪽보다는 일본의 것을 거의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물질적, 문화적 격차, 양 언어의 유사성 등으로 말미암아 그의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3. 국어 속의 일본어

          가. 고유 일본어

  일본어는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말에 간섭을 해 들어왔다. 그중에는 고유 일본어의 어휘인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라졌거나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을 발췌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송민, 1979;4-6).
(1) 아다리, 우끼, 에리, 오뎅, 구두, 곤색, 사꾸라, 사시미, 시다, 다다미, 다마네기, 노가다, 쓰리, 히야시, 마호병, 무데뽀, 모찌, 와사비, 와리바시, 쓰메끼리,……
(2) 아지, 아부라게, 이다, 가다, 가다꾸리, 기마이, 게다, 도꾸리, 노깡, 마에가리, 야지, 와이당, 와이로, 아다라시, 신마이, 닥상,……
  이 유형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다기보다는 특수한 분야나 사회 집단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다음과 같은 잔재들로 있다(송민, 1979;7-10)
(1) 곤조, 습뿌, 시마이, 찌라시, 오야붕, 꼬붕, 분빠이, ……
(2) 아이노꼬, 이다바, 에노구, 가도방, 간조, 주찌베니, 구미, 사까다찌, 사요나라, 쇼오부, 시로도, 소오당, 당가, 노리까에, 하바, 히니꾸, 히야까시, 흠모노, 몸메, 와꾸, 와리, 아다라시, 신마이, 닥상,……
  이 말들은 일본어라는 냄새가 가장 강한 것으로서 그간 우리는 이러한 말들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보여 왔다. 따라서 이러한 말들은 그간 대표적인 일본어의 잔재라고 지목되어 오면서 꾸준하게 국어 순화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한 운동은 바람직한 성과를 거두어 가고 있어서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그 전 세대들과는 달리 위에서 (2)번으로 구분하여 표시한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본어들로 되었다3).


          나. 훈독 한자어

  이 밖에도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어로서 다음과 같은 특수한 방식의 차용어들도 있다(송민, 1979;22-5에서 발췌)
明渡, 編物, 言渡, 入口, 受取, 理立, 賣上, 追越, 織物, 買入, 買占, 貸切, 貸出, 貸付, 切上, 切下, 組合, 組立, 小賣, 先取, 差押, 差出, 敷地, 下請, 品切, 据置, 競合, 立場, 手當, 手續, 取汲, 取下, 取調, 積立, 葉書, 引上, 引下, 引受, 引渡, 引出, 引繼, 船積, 見積, 見習, 見本, 呼出, 割引,……
  이러한 단어들은 일본에서는 훈독되는 것으로서 쓰기만 한자로 뜬 것이지 사실은 순수한 일본어이다. 우리는 이미 훈독의 습관을 잃어버렸으므로 이들은 음독(音讀)하는 상태로 우리말 속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일본어들은 그 사용 범위가 매우 넓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단어들이 원래 일본어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조차 인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어 순화의 제2차적인 대상이 되는 말들이다. 그러나 이 말들의 경우 이미 독자적인 용법과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한 운동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다. 문법 표현

  일본어의 영향은 위에서 본 유형들처럼 대개 어휘 부분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역시 다종다양한 신개념이나, 신문물의 표현을 위한 언어적 요구는 그 대부분이 단어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은 그 비율 면에서는 비록 어휘 부분에 비하여 현저히 낮았지만 문법적 표현들에도 미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사 ‘-의’의 과도한 사용 문제이며, ‘-에 있어서, -에서의, -(으)로서의’ 등과 같이 조사를 중첩해서 사용하는 표현들도 일본식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다음이 그러한 예문들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새로운 도약에의 길/범죄와의 전쟁/앞으로의 할 일/한글만으로의 길/제 나름대로의 기준
  문법 표현에 미친 영향과 관련해서는 이 밖에도 전술한 김동인이 개발하였다고 하는 대명사 ‘그, 그녀’ 등을 비롯해서 ‘-에 다름 아니다.’와 같은 표현 역시 일본어 ‘-に 違いない’를 직역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남쪽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북한말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으)로 되다’ 같은 표현도 그 예의 하나로서 지적해 둘 만하다. 이 표현은 계사 ‘-이다’를 사용해도 충분히 가능한 자리에 대신 등장하는데 특히 문어에서 그 빈도가 매우 잦다. 가령, 다음의 예와 같이 북한말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이러한 표현은 말미 부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참으로 우수한 민족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인민의 커다란 자랑으로 된다.”4)
  이 표현은 남쪽의 말로 한다면 ‘-우리 인민의 커다란 자랑이다.’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계사 대신에 이른바 준계사(pseudo-copula)의 용법으로 사용된 ‘-(으)로 되다’와 같은 표현은 역사적으로도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던 표현으로서 일본어의 ‘-に なる’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문법 표현 중에 하나로서 접미사 ‘-적’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현상도 지적할 만하다. 그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접미사 ‘적’은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와 같은 백화문(白話文) 자료에서 사용되었던 예5) 를 제외하고는 개화기 이전의 우리말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던 말이다. 이 접미사가 붙은 단어들은 일본으로부터 그대로 우리말에 들어와 국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특히 그 용법이나 의미 면에서 일본어와 차이가 나는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일본에서 ‘-적’이 탄생하게 된 과정에 관해서는 서재극(1970;95-6)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的(teki)「佛-tique, 英-tic」 -的
  중국어의 ‘底’에 해당됨. 明治初에 柳川春三이 처음으로 -tic에다가 的이라는 字를 갖다 붙었다(科學的, 社會的, 心理的, 目的的 등). -“角川外來語辭典”에서
  ‘的’字를 쓰게 된 것은 -tic과 的이 音이 닮았다는 것으로 하여 익살맞게(우스개 삼아) 말한 것일 따름. -大規文彦의 “復軒雜錄”에서
  이 ‘-적’이 우리말에 유입되게 된 경우에 대해서도 서재극(1970;95)에서는 “상필 일본에 유학했던 자에 의해서일 것이며, 그것이 활발하게 사용된 것은 1908년에 발간 “소년”지에서부터”라고 지적하고 있다.


          라. 일제 숙어

  일본어의 영향이 단순히 단어 차원에 머무르고 만 것이 아니라 숙어나 관용 표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는 사실은 그간 그리 폭넓게 지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어의 간섭이 이러한 수준에까지 미쳐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에 관한 지적 역시 송민(1979;27-33)에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다 필자가 조사한 예를 몇 가지만 더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교가 넘친다-愛嬌が益れる / 달콤한 말-甘い言葉 / 숨을 죽이다-息を殺す / 종말을 고하다-終りを告げる / 어깨를 나란히 하다-肩を竝べる / 기억이 되살아나다-記憶が蘇る / 기가 막히다-氣が詰まる / 희망에 불타다-希望に燃える / 혀를 깨물다-舌をかむ / 패색이 짙다-敗色が濃い / 타의 추종을 불허하다-他の追隨を許さない / 눈을 의심하다-目を疑う / 귀를 기울이다-耳を傾ける / (국제적 마찰을) 불러일으키다-呼び起こす / (석간에) 사진이 실려 있다-寫眞がのっている / 빈축(頻蹙)을 사다-頻蹙を買う
  이들은 원래 전통적인 일본어식 숙어 표현이거나, 참신한 표현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일본의 어떤 문필구가나 문인들에 의해서 창작된 것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참신한 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우리의 어떤 문필가들에 의해서 하나씩 둘씩 우리말 표현으로 직역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물론 우리말과 일치하는 표현이 일본어에 존재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를 일제 숙어라고 몰아 붙일 수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구성 요소가 완전히 똑같은 직역 표현이 양 언어에 존재한다고 할 때, 앞에서 살핀 바 양 언어의 교섭 과정을 고려한다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답변을 할 수 있는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비록 과거의 불행을 좀더 아프게 상기시킨다고 할지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일제 숙어 표현들은 앞으로 확인이 되는 대로 정화 작업을 펼쳐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장차 우리의 후배들이 일본어를 공부하게 될 때 이러한 표현들을 발견하고는 아니 이런 것마저도 일본에서 수입한 것인가 하면서 다시 한번 부끄러운 생각을 가지는 일을 경험하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뜻에서도 그러하다.


          마. 일본식 서구어

  일본어가 우리말에 끼친 간섭에 해당하는 다른 하나의 유형으로 일본식 서구어가 있다. 일본은 그들이 개화기에 근대 중국어, 포르투갈 어, 스페인 어, 화란어, 영어, 독일어, 불어 등을 많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서구 외래어들이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본어에 들어와 표기되는 과정에서 일본어 음운 구조의 영향을 받아 원음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는 곡절을 겪은 뒤 그대로 우리말에 들어왔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단어들은 그 말이 원래 서구어임에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그 말이 원래부터 일본 말인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정도이다. 그 예로는 송민(1979;7-10)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
중국어: 앙꼬, 우동, 고다쓰, 사시, 장껜(가위 바위 보), 단스. 당면, 포대기, 만두, 라면
포르투갈 어: 카스테라, 갓빠(천막), 가루다, 사봉, 담배, 뎀뿌라, 빵, 비로드, 보당, 나사(羅紗)
스페인 어: 메리아쓰
화란어: 잉끼(잉크), 깡통, 칸데라, 곱뿌, 가라스, 고무, 소오다, 뼁끼, 뽐뿌, 비루(맥주), 마도로스, 란도셀, 임파선, 렛델
영어: 구락부, 구리스, 사라다, 샤쓰, 세에타, 다이야(타이어), 도락꾸, 도나스, 빠다, 빵구, 빤쓰, 뼁찌, 바께스, 빠꾸, 밧데리, 후라이판, 마후라, 남포, 와이샤쓰……
불어: 쎄무 가죽, 쓰봉, 다오다, 부라자, 낭만, 바리깡,
독어: 코펠, 스피츠(개의 일종), 데마, 멘스
  이 유형에는 일본식으로 음역(音譯) 표기된 서구어들도 집어넣을 만하다. ‘獨逸, 佛蘭西’나 ‘浪漫’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원래 일본 발음인 ‘도이츠, 후란스, 로망’으로 발음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조어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 발음으로 읽으면 원음에 가까운 것이지만 국어의 발음으로 읽게 되면 ‘독일, 불란서, 낭만으로 되어 원래의 발음과 상당한 거리가 생긴다. 이는 원래 우리가 매우 훌륭한 음소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도이치, 프랑스, 로만’ 등으로 적지 않고 일본식의 音譯 표기를 받아들인 결과로 나타난 부끄러운 유산이다. 이러한 말들은 현재 국어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 아무런 반성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청소해 버려야 할 앙금의 하나이다.


4. 일제 한자어

          가. 신문명 한자어

  19세기 말 우리나라의 개화기를 전후한 한일 교섭 과정에서 일본의 언어가 우리말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할 때, 특히 한자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신문명어는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6).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이 같은 유형의 한자어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룬 고유 일본어 또는 일본식 표현들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살핀다.
  일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국어의 한자어 부문에서 일어난 변화는 두 가지 양상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양적인 변화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문명어들이 대량으로 유입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질적인 변화로서 동일한 형태의 한자어들의 의미에 개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개화기의 신문명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송민(1979, 1985, 1988, 1989)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있다. 또한 송민(1990;70-1)은 신문명어로 분류되는 한자어를 이른바 ‘비전통적 한자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전통적 한자어가 국어에 수용되는 시기는 최소한 1870년대로부터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7). 이러한 단어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술, 제도, 천문, 지리, 신식 문물’ 등 사회 전반의 영역에 걸쳐 있다. 송민(1990;74-81)에서 제시된 신문명어의 예를 참고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空氣, 電氣, 地球, 郵便局, 銀行所, 電報局, 理髮, 寫眞, 大學校, 小學校, 公事, 領事, 內閣會議, 權利, 鐵筆, 鉛筆, 印刷, 牛乳, 針機, 電氣燈, 電線, 石油, 火輪船, 鐵路, 蒸氣, 洋鐵, 鐵絲, 紙錢, 磁石, 病院, 牛痘, 石硫黃, 時械
<원전: 李鳳雲, 境益太郞(1895) ‘單語連語日話朝携’>
閣議, 開化, 警察署, 公使館, 敎會, 汽船, 內閣, 內務部, 代數, 停車場, 動物學, 東洋, 地球, 禮拜日, 陸軍, 六穴砲, 萬里鏡, 木星, 文法, 博物院, 算術, 商業學校, 植物, 新聞, 銀行, 人力車,自鳴樂 自針機, 自行車, 天文學, 下議員, 寒署針, 顯微鏡, 形容詞, 花草學, 化學, 會社, 黑人,
<원전: j.S.Gale(1897) ‘韓英字典’ A Korean-English Dictionary에서>
  한편, 당시까지 아직 한자어들의 정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기도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중국식 번역어와 일본식 번역어 사이의 경쟁이었는데, 뒤에 그 주류는 일본식, 번역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는 결국 문호 개방과 더불어 밀려들어 온 일본식 신문명어가 훨씬 커다란 세력을 발휘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은 거의 일본 쪽의 것들이다.
警時鐘/時種/自鳴鐘, 汽船/火輪船/輪船, 汽車/火輪車, 萬里鏡/遠視鏡/千里鏡, 時票/時牌/時械 巡査/巡檢, 郵信局/郵便局, 自縫針/自針機, 海軍/水軍, 海軍/稅關
  일본에서 근대에 만들어진 한자어도 사실 두 종류로서, 하나는 중국 고전에 나타나는 어휘를 새로운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文明, 自由, 文學, 自然’ 등이 그에 속하는 어휘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신조된 것으로서 ‘大統領, 日曜日, 演說, 哲學, 美術, 進化論, 生存競爭, 適者生存’ 등의 어휘이다. 일본에서 번역된 이 ‘大統領’이라는 단어가 이미 1881년에 이헌영(李櫶永)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91년에 이르기까지 국가 공문서에서조차 president의 음역인 ‘伯理璽天德’으로 줄곧 사용되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밝혀졌다(송민, 1990;73-4) ‘大統領’이라는 단어가 ‘國王’ 정도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었기에 이러한 구별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자어 체계에 일어난 변화는 비단 새로운 단어 형태의 등장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 여파는 전통적인 한자어와 동일한 형태를 지닌 한자어들의 의미 개신에까지 미치기도 하였다. 이는 한자어 부문에 나타난 질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j.S.Gale(1897)의 “한영자전” A Korean-English Dictionary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의미가 요즘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전통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송민, 1990;81-2).
圖書 개인적인 인장, 도장. / 發明하다-변명하다, 증명하다. / 表하다-(종기 등이) 돋다, 솟다. / 發行하다-출발하다. 길을 떠나다. / 放送하다-(죄인을) 풀어주다. /職業-직업, 交易, 부동산. / 社會-희생물을 올리는 제사. / 生産하다-아이를 낳다. / 食品-맛. / 新人-신랑이나 신부. /室內-남의 아내. / 自然-당연히, 물론. / 中心-마음, 심장. / 創業하다-왕조를 세우다.
  이상과 같은 개화기 또는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매우 광범위한 일본식 한자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현재 국어의 한자 어휘 체계는 그 어형이나 의미 면에서 중국어보다는 일본어에 훨씬 가까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에서 발생한 신문명어들은 일본에서 먼저 번역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러한 차용은 광복 이후에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계속되었던 것임은 물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다음의 단어들이 이러한 예들이다.
冷戰, 壓力團體, 微視的, 巨視的 國民總生産, 團地, 公害,……
  이러한 현상은 특히 전문적 학술 용어의 분야에서 현저하다. 다음은 일본에서 최근에 나온 “언어학 백과사전”(1992)에 나오는 언어학 관련 술어들의 예인데 그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다. 이들만을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용어들이 한일 양 언어에서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한자어로 된 술어에 관련된 이 같은 상황은 다른 전문 분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强勢, 格, 膠着語, 交替, 肯定, 能動態, 同義語, 動作主, 同化, 母音交替, 無聲, 反意語, 發說, 附加語, 副詞, 分布, 分節的, 相補的, 先行詞, 習得, 語尾, 語形變化, 聯想的意味, 容認可能性, 有聲, 類推, 隱語, 音響音聲學, 意味, 人工發話, 人類言語學, 恣意性, 接辭, 接續詞, 條件節, 助動詞, 抽象的, 破搽音, 形容詞, 活用, 會話의 公準, 喉頭音, 後天的, 休止……

          나. 근대 한자어의 탄생

  일본에서 이 같은 근대적 신문명어가 대량으로 탄생하게 된 것은 주지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명치 시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일이다. 일본의 국어사에서도 이 시기에 일본어의 어휘 체계가 커다란 변화를 입었다고 기술하고 있다(佐藤喜代治꟟, 1977;281). 일본에서는 현대 어휘 성립의 기점이 된 것을 “百科全書”8) (佐藤喜代治編. 1977:795).
  일본에서는 이러한 외국어를 번역한 말, 정확히 말하여 의미상으로 대응하는 외국어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을 역어(譯語)라고 부른다(佐藤喜代治 편. 1977;98-9) 그러나 역어에 재료로 사용된 말은 한자어가 화어(和語:고유 일본어)를 압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자는 그 수가 많고 의미가 세분화되어 있는데 반하여, 화어(和語)는 어휘 수가 적고 한 단어가 표시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한자어 하나하나마다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임이 지적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가령 ‘看, 觀, 見, 察, 視, 睹, 瞥’ 등과 같이 더 세분된 의미로 나뉠 수 있는 것을 일본어로는 모두 ‘みる’라고 읽기 때문에 전문어에서는 한자어가 더 선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佐藤喜代治 편, 1977;98-9). 이는 고유 일본어와 한자어의 일대다 대응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지적한 말인데, 의미의 폭이 넓은 하나의 고유어를 중심으로 분화된 의미를 가지는 다수의 한자어들이 대응 관계를 형성하는 사정은 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양 언어의 언어적 환경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11)./+11) 국어의 일대다 대응 현상에 관해서는 김광해(1989). “고유어와 한자어의 대응 현상” 참조.+/ 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들이 그처럼 쉽게 우리말에 침투되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를 이해할 수가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 같은 신문명어의 대량 확산 현상은 우리말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중일 삼국의 현대 국어 어휘 체계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은 이미 16세기 무렵부터 서구와의 교섭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근세에는 네덜란드와 교섭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른바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으로 에도(江戶:지금의 동경) 지역에서 융성하였다. 근대 일본의 많은 선각자들은 바로 이 난학(蘭學)을 통해서 서구의 문명에 입문을 하는 한편 스스로 시야를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까지 넓혀 가면서 열성적으로 서양 문물을 도입하는데 앞장을 섰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명치 유신은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면에서도 커다란 전환의 시기였다. 언어도 이에 의해 크게 변화하였다. 언어가 범람하면서 차츰 정착되어 가는가 하면, 구어와 문어가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동경어가 공통어의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서양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하게 되는 과정에서 한자가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중에는 일본인이 새로이 번역을 한 것이 많으나 중국의 고전 및 한역 불경 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있으며, 중국에서 새로 만든 한자어도 있다. 전자의 예는 ‘形而上 敎養, 國會, 國語, 巡査, 外務’ 등이며, 후자의 예로는 중국어에서 직접 또는 사전을 통해서 차용한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森岡建二에 의하면
(1) 수학 용어 ‘立方根, 數學, 比例, 方程式’
(2) 기독교 용어 ‘天使, 洗禮, 黙示, 敎會,
(3) 정치·법률 용어 ‘條例, 內閣, 民法, 主權’
(4) 천문·지리학 용어 ‘熱帶, 半球, 星座, 地平線, 黃道’
(5) 화학·물리학, 용어 ‘凝結, 結晶, 電氣, 炭酸’
(6) 의학 용어 ‘膽汁 血管, 氣管, 消化, 傳染’
(7) 기타 ‘敎師, 眞理, 學校, 批評, 原稿, 牛乳, 鉛筆’
등 광범위한 내용들이 중국어로부터 들어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佐藤喜代治 편, 1977:281). 한편 중국어가 변형되어 들어온 것으로는
‘船房→船室, 鐵路→鐵道, 現銀→現金, 博物院→博物館, 大槪之論→槪論, 結氷点→氷點, 養病院→病院, 白面人→白人, 留在→在留, 加增→增加’
같은 말들이 있고, 다음과 같이 중국어의 문자 순서로 바꾼 역순어도 있다.
‘健康, 惡行, 實習, 事實, 運命, 貯蓄, 認識, 抵抗, 統一’
  일본에서 만들어진 역어가 실용화된 것은 영·난학 계의 학자들에 의해서 먼저 문법과 이화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佐藤喜代治 편, 1977;281). ‘代名詞, 前置詞, 主格, 接續詞’, ‘酸素, 窒素, 無機, 細胞, 花粉, 雄(雌)’ 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이다. 번역을 한 학자의 이름이 확실하게 전하는 것도 있어서 나카무라(中村正直)에 의해 번역된 ‘結果, 理論, 官僚’ 등의 단어, 니시(西周)에 의한 ‘演繹, 歸納, 哲學, 歸納的, 抽象的, 具體的, 意識, 義務, 觀念, 道德, 觀察’ 등의 단어, 기타 소설가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郵便, 建築, 發見, 洋服, 日(月, 火, 水, 木, 金, 土)曜日, 國(公, 官, 私)立’ 등의 일상어들도 있다(佐藤喜代治 편, 1977;281). 이 같은 여러 분야에 걸친 한자어들의 대량 확산은 근대 일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된 종교, 학문, 기술 등 전문어들에 특히 많다. 이러한 특징은 문명 개화의 시대에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한자를 사용한 데서 나타났다. 그후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영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우리말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번역어로서의 한자어는 제도, 학문 등 문화의 각 영역에 걸쳐서 사용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한자어들 중에는 중국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한 것들이 있다. ‘常識, 良識, 哲學, 郵便, 悲劇, 喜劇, 冒險’ 등은 신조어이고, ‘銀行, 保險, 代數, 幾何, 化學’ 등은 중국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며, ‘觀念, 演繹, 良心, 福祉’ 등은 예전에 사용되던 한자어를 역어로서 채택한 예이다. 역어도 처음에는 일정했던 것이 아니라 ‘法敎→宗敎, 理學→哲學 血脈→靜血脈→靜脈, 血→血液, 金→金屬’ 등의 과정을 거쳐서 정착하였다.


다. 일제 한자어의 처리 문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의 신문명어들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서 주로 한자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들이 일본어 체계 속에 자리 잡는데도 우여곡절이 심하였으며 시간도 상당히 걸렸다. 이 말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이미 한자를 잘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심지어는 한자의 원산지인 중국에서까지 별다른 저항감을 보이지 않고 급속도로 수용해 들어감으로써 널리 유포되었다.
  이러한 신문명어의 표현을 위한 한자 번역어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현재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실로 난감한 실정에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이 일본에서 먼저 조어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고 여기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어에서부터 물리, 화학, 생물, 예체능 분야에 이르기까지 사용되는 상당량의 교수 용어들이 일제 한자어이므로 이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현재까지도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교육 신문, 95년 4월 24일자). 이러한 사정은 중국의 경우에도 비슷했던 모양인지 중국의 공산 혁명 시절에 ‘공산주의,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 사상 관계 술어들이 대개 일제 한자임이 밝혀져 고민했었지만 어쩌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제 한자어가 현대 국어의 어휘 체계, 특히 한자어 부문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다. 근대에 일어난 일제 한자어들의 유입은 국어의 어휘 체계의 특징마저 변화시켜 놓았다. 만약에 이들을 모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언어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인데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 사용의 범위가 얼마나 광범위했던지 현대의 한일 양 언어는 다음의 표에 제시된 것과 같은 정도로 한자어들을 공유하는 상황이 되어 있다.
표) 이 통계는 일본어 교육용 기초 어휘 2,899항목 중에서 ‘か’ 항에 해당하는 한자어들만을 가지고 분류한 것임(木村益夫, 1965;75)
한국 사람들은 그대로 이해하는 한자어 89 60%
조금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는 한자어 30 20%
한국 사람으로서 알기 어렵거나, 오해할 수 있는 한자어 30 20%
합계 149 100%
  이 통계는 일본어 교육을 위한 2,889개의 기본 어휘 중에서 한자어들을 뽑아, 그것을 한국인에게 가르치고자 할 때 한자어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일 양 언어에서 사용하는 공통 한자어의 비율을 조사한 결과이다. 이 표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은 기초 한자어의 60% 정도는 한국인에게 특별히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이를 바꿔 말하면 현대의 국어와 일본어는 한자어 부문에 있어서 60% 이상을 공용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기초 어휘의 범위를 넘어서 전문어 부문까지 확대하여 조사를 한다면 이 비율은 더욱 심화될 것이 틀림없다.
  일제 한자어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를 둘러싼 고민은 비록 기분은 좋지 않은 것이 틀림없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는 데에 더 큰 딜레마가 있다. 이들을 모두 조사해서 당장에 제거하여 버리게 되면 우리의 언어생활 자체가 당장에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일제 한자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너그러운 시각을 가지는 일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성격상 일본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의해서 먼저 번역된 한자어, 즉 이 글에서 이미 명명하여 사용하고 있듯이 ‘일제’이기는 하지만 사용이 불가피한 한자어라고 생각해 둔다면 마음이 다소 편해질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신문명어에 해당하는 한자어들에 대해서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을 일본인이 먼저 만들었다는 점뿐이다. 사실 이러한 말들은 일본인이 만든 것이 많기는 하지만 한자를 재료로 하여 조어되었으며, 일본의 한자음(Sino-japanese)으로 발음될 뿐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어를 공유하게 되어 온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만 한자로 된 말을 우리는 우리의 한자음(Sino-Korean)으로 발음하며, 중국에서는 중국의 한자음(Sino-Chinese)으로 발음한다. 결국 이 말들은 한자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언어적 자원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으며

  글을 마치면서 필자 자신이 이 글 속에 사용한 단어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단어가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것일까 하고 반성해 보니 심정이 매우 착잡하다. 글의 주제 자체가 일본어의 간섭 과정에 대한 조망이었던 까닭에 집필과 퇴고의 과정에서 일본식 표현들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장 작성이나 단어의 선택상 불가피한 상황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아마도 필자의 일본어에 대한 깊지 못한 지식도 더불어 작용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우리가 처해 있는 우리말의 부끄러운 상황일 것이다. 어떤 나라의 말이든지 외국어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은 언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는 과거에 불행했던 역사 문제와 관련되는 특이한 상황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말 속에 유독 일본어의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매우 개운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단시일 내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야말로 우리 세대에서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라고 지적되는 경향이 강한 것도 현실이다. 그 방향은 두 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고유 일본어의 처리 문제인데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은 이미 강렬한 바 있었으며 실천에 옮겨진 사례도 많아서 조만간에 그 청소 작업은 성공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일제 한자어 부분은 그 광범위성으로 말미암아 장기간 문제로 남을 것이다. 이를 청소하기 위한 방법은 아직 뚜렷한 것이 없다. 가령 각종 술어들을 고유한 우리말로 바꾸는 방법 같은 것이 있을 터이나 그간 상당 기간에 걸친 실험의 결과도 그리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결국 지금까지의 한자어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치더라도 앞으로 만들어지는 각종 전문 술어들은 어떻게 해서든 한자가 아닌 고유한 우리말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 나가자는 합의 같은 것이 나올 수 있다면 일제 한자어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고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언어 정책 기구가 국가에 상설되어 이러한 일을 담당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일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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