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망-국어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
1. 머리에
국가의 불행한 역사가 남긴 앙금은 과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말끔히 가시는가? 특히 그 앙금이 언어에 관련된 것일 때, 그 앙금은 과연 말끔하게 청소를 해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2. 일본어의 간섭 과정
가. 우리말과 일본어
그 많은 일본어 또는 일제 한자어들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쉽게 우리말 속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정도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나. 일본어의 간섭 약사
일본어가 우리말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경과를 살펴보면 그 기간이 의외로 길다. 일본어가 우리말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역시 일제 강점기가 중심이 된다. 이 기간은 시간상으로는 35년이 되는데 이 기간만 하더라도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실제로 우리말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이 시작된 때부터 살펴본다면 그 기간은 비단 이 35년간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어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결정적인 계기를 지적해 본다면 역시 1876년(고종13년)에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이 될 것이다. 그 몇 년 뒤인 1881년에는 홍영식(洪英植),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조작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근대 문명을 시찰하게 하였으며, 같은 해에 김옥균(金玉均), 이듬해에는 박영효(朴泳孝) 같은 개화파 인물들이 일본의 문물을 배우기 위하여 도일하였다. 이들은 이때 이미 개화 인물 후쿠자와 (福澤諭吉)가 설립한 명치 학원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 일본어의 간섭은 이미 이때부터 개화기 지식인들의 왕래 과정을 통하여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한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어의 간섭이 극도화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 35년 동안이다. 한일합방과 더불어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을 일인화하기 위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분야가 일인들의 손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를 위해 일인들이 대량으로 한반도에 건너와 살게 되었다. 반대로 선진 지식을 익혀 출세를 꿈꾸는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일도 보편화되었다. 이때에는 이미 ‘국어’라고 하면 일본어를 뜻하는 것이었고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여야만 하는 공식 용어가 일본어였던 것이다.다. 사례 연구-김동인(金東仁)의 경우
일본어 또는 일본어식 표현이 우리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주로 당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지식인들 가운데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하며 나아가 두고두고 후세까지 우리의 언어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소설가 김동인이 있다. 그는 특히 자신이 처음으로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 언어 문제로 얼마나 고충이 많았는지에 대해 상세한 언급을 남겨 놓았다. 그가 잡지 “창조”의 간행을 앞두고 당시(1918년 무렵)의 일을 회고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와 함께, 당시의 지식인들이 일본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 지식인의 경우를 사례 연구 삼아 살펴보기로 하자.3. 국어 속의 일본어
가. 고유 일본어
일본어는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말에 간섭을 해 들어왔다. 그중에는 고유 일본어의 어휘인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라졌거나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을 발췌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송민, 1979;4-6).나. 훈독 한자어
이 밖에도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어로서 다음과 같은 특수한 방식의 차용어들도 있다(송민, 1979;22-5에서 발췌)다. 문법 표현
일본어의 영향은 위에서 본 유형들처럼 대개 어휘 부분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역시 다종다양한 신개념이나, 신문물의 표현을 위한 언어적 요구는 그 대부분이 단어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은 그 비율 면에서는 비록 어휘 부분에 비하여 현저히 낮았지만 문법적 표현들에도 미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사 ‘-의’의 과도한 사용 문제이며, ‘-에 있어서, -에서의, -(으)로서의’ 등과 같이 조사를 중첩해서 사용하는 표현들도 일본식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다음이 그러한 예문들이다.라. 일제 숙어
일본어의 영향이 단순히 단어 차원에 머무르고 만 것이 아니라 숙어나 관용 표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는 사실은 그간 그리 폭넓게 지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어의 간섭이 이러한 수준에까지 미쳐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에 관한 지적 역시 송민(1979;27-33)에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다 필자가 조사한 예를 몇 가지만 더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마. 일본식 서구어
일본어가 우리말에 끼친 간섭에 해당하는 다른 하나의 유형으로 일본식 서구어가 있다. 일본은 그들이 개화기에 근대 중국어, 포르투갈 어, 스페인 어, 화란어, 영어, 독일어, 불어 등을 많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서구 외래어들이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본어에 들어와 표기되는 과정에서 일본어 음운 구조의 영향을 받아 원음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는 곡절을 겪은 뒤 그대로 우리말에 들어왔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단어들은 그 말이 원래 서구어임에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그 말이 원래부터 일본 말인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정도이다. 그 예로는 송민(1979;7-10)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4. 일제 한자어
가. 신문명 한자어
19세기 말 우리나라의 개화기를 전후한 한일 교섭 과정에서 일본의 언어가 우리말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할 때, 특히 한자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신문명어는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6).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이 같은 유형의 한자어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룬 고유 일본어 또는 일본식 표현들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살핀다.나. 근대 한자어의 탄생
일본에서 이 같은 근대적 신문명어가 대량으로 탄생하게 된 것은 주지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명치 시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일이다. 일본의 국어사에서도 이 시기에 일본어의 어휘 체계가 커다란 변화를 입었다고 기술하고 있다(佐藤喜代治, 1977;281). 일본에서는 현대 어휘 성립의 기점이 된 것을 “百科全書”8) (佐藤喜代治編. 1977:795).다. 일제 한자어의 처리 문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의 신문명어들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서 주로 한자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들이 일본어 체계 속에 자리 잡는데도 우여곡절이 심하였으며 시간도 상당히 걸렸다. 이 말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이미 한자를 잘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심지어는 한자의 원산지인 중국에서까지 별다른 저항감을 보이지 않고 급속도로 수용해 들어감으로써 널리 유포되었다.한국 사람들은 그대로 이해하는 한자어 | 89 | 60% |
조금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는 한자어 | 30 | 20% |
한국 사람으로서 알기 어렵거나, 오해할 수 있는 한자어 | 30 | 20% |
합계 | 149 | 100% |
5. 맺으며
글을 마치면서 필자 자신이 이 글 속에 사용한 단어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단어가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것일까 하고 반성해 보니 심정이 매우 착잡하다. 글의 주제 자체가 일본어의 간섭 과정에 대한 조망이었던 까닭에 집필과 퇴고의 과정에서 일본식 표현들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장 작성이나 단어의 선택상 불가피한 상황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아마도 필자의 일본어에 대한 깊지 못한 지식도 더불어 작용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우리가 처해 있는 우리말의 부끄러운 상황일 것이다. 어떤 나라의 말이든지 외국어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은 언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는 과거에 불행했던 역사 문제와 관련되는 특이한 상황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말 속에 유독 일본어의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매우 개운하지 못한 것이다.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