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외국인을 위한 교육 기관]

체코에서 한국학이 걸어온 길

Vladimir Pucek(블라디미르 푸체크) / 한국 외국어 대학교 체코어학과 교수

서울 도심의 어떠한 장소에서, 혹은 어떠한 행사 중에 한국어로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게 되면 사람들은 으레 내게 묻곤 한다.
    "아! 우리 한국어를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북한에서 유학을 하셨습니까?"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그들은 한국에선 멀리 떨어진 중유럽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구 공산권에 속해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대학 센터가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는 한국어 전문 교육 기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1. 카렐 대학교의 동양학(Oriental Studies)
    한국어를 전공으로서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수도 프라하에 있는 카렐 대학교(Charles University)이다. 이미 1348년 체코의 왕인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렐 4세에 의해 창설되어, 지금은 중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학교 철학부에서는(1) 오래 전부터 동양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 특히, 아라비아 어, 페르시아 어, 히브리 어, 고애급 어, 아시리아 어, 인도학 등의 분야에서는 많은 업적들이 이루어져 오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을 위주로 한 극동지역 국가들의 언어와 문학 연구는 그보다 좀 늦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중국학 연구에 대해서 언급하기 이전에 우리는 1890년 동양학의 전임 교수로 임명된 드보르작(R. Dvorák: 1860~1920)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아라비아 어, 페르시아 어, 히브리 어 등 동양 언어와 철학에 박학한 지식을 가진 그 교수는 중국어와 중국 철학, 윤리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여 카렐 대학교에서 19세기 말에 중국학의 기초를 마련해 놓았고, 이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중국 철학, 종교, 윤리에 관한 많은 논문과 서적을 저술하였으며, '시전', '노자 도덕경' 및 유교 경전의 일부도 체코 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계속 중국학, 일본학을 발전시킨 것은 프르셰크(J. Prušek: 1907~1980) 교수로서 그는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파시스트들이 우리 대학교를 폐쇄시켰을 때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암흑 시기인 1940년에 공자의 '논어'를 체코 어로 번역 출판하였다. 전쟁 이후 프르셰크 교수는 우리 대학교 철학부에 신설된 '극동 지역 언어 및 역사 강좌'의 과장이 되었으며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과학원 원사로서, 동방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동양학의 발전을 가일층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학의 발달하에서 점차적으로 일본학, 한국학, 몽골학, 티베트학, 월남학도 생겨나고 계속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 한국학과의 신설과 발전
    1945년 독일로부터 해방된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양학 연구에 있어 새로운 국면에 부딪히게 되었다. 즉, 아시아, 아프리카 국민들의 반식민주의 투쟁과 민족 해방 운동의 장성, 이로 인한 신생 독립 국가들의 세계 무대 진출은 우리가 이러한 제3세계 국가들과 정치, 문학, 경제의 다방면적인 접촉과 관계의 강화를 꾀하여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동양 여러 나라들의 언어, 역사, 사정에 대하여 보다 깊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요구로 대두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카렐 대학교 철학부 극동 강좌에서는 알로이스 풀트르(Alois Pultr: 1906~) 박사의 노력에 의해 한국학과가 설립되었고 1950년에 처음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학과가 그저 푸른 잔디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생겨날 순 없지 않겠는가! 원래 독일어, 불어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풀트르 교수는 1940년대 초부터 일본어와 한국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새로운 학과의 선구자로서 그는 많은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그는 한국에서 종교 활동을 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쓴 한국어 사전이나 교과서, 에카르트(Eckardt), 람스테트(Ramstedt) 등 유럽 학자들의 한국어 문법책과 같은 자료들을 독학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일제 통치기에 조국을 떠나 유럽으로 망명하다가 임시 프라하에 머물렀던 몇 명의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를 연구하였다.(2) 그는 우리나라에서 첫 한국어 교과서(1949, 1954), 체코 어-한국어 소사전(1954)을 집필 발간하고 또 처음으로 한국 문예 작품도 번역하였다. 그의 한국어 교과서는 독일어로도 번역되었다(1958, 1960). 그는 한반도를 단 한 번(북한: 1954년 1개월간) 방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에서 스스로 독학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에 한국학과를 신설함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여러 서양 대학에서와는 달리, 카렐 대학교의 한국학과는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의 보충적인 분과로 되어 있지 않고 처음부터 독립적인 학과로 발생 발전하였다.
    1950년대에 한국학(그 당시는 조선학과라 칭함.)의 점차적인 발전에 영향을 준 여러 가지 외부 요인과 내부 사정을 고려해 보자. 먼저, 50년대에는 한국 전쟁과 관련하여 한국 문제가 국제화되고 한반도에 대한 관심도 커져 국제 간의 교류도 늘어나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1948년부터 사회주의 국가 진영 이었으므로 바로 그해에 창건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고 곧 외교 관계도 맺게 되었다. 6.25 당시와 전후 시기에 평양에서 우리나라도 많은 고아, 유학생, 연구생, 기술자들이 와서 공부하고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에 의료단과 많은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파견하고 물자, 기계 설비, 공정 등을 납입함으로써 북한의 전후 복구 사업에 다방면적인 원조를 적극 제공하였다. 또한 1953년 정전 협정에 근거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중립 감독 위원회의 회원국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우리 대학교는 한국어와 한국어 사정 전문가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한국어 교육을 이론적으로, 실무적으로 개선하고 사정, 역사, 문학사 등의 연구를 더 깊이 할 수 있기 위한 제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6~62년 사이에는 교육부 초청에 의하여 평양에서 파견된 조선어 강사가 우리 강좌에서 직접 강의하기도 하였다.

3. 한국학의 교과 과정
    프라하에 한국학이 생긴 이래 40년 동안에 그 교과 과정은 계속하여 조금씩 개정·보완되어 왔다. 우리 대학교 철학부에서는 1990년까지 모든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두 개의 학과를 선택하여 그것을 병행하여 공부하여야 했다. 한국어의 경우에 병행되는 학과가 처음에는 극동 역사였으나 그 후에는 노어나 혹은 일본어, 서지학, 일반 역사로 바뀌었고 1989년부터는 남한과의 관계 발전을 염두에 두어 다시 영어로 바뀌였다.
    학제는 5년제이고 공부는 졸업 논문의 옹호와 철학, 그리고 두 개 학과에 대한 국가 시험으로 끝이 난다. 두 개의 학과 공부를 하는 것이 사고 범위를 확대시킨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인 교수 방법이라 하겠으나 한국어와 같이 매우 어려운 말을 습득하기에는 시간상으로 너무 벅차다 하겠다.
    지금까지의 교과 과정을 살펴보면 수업 시간은 주당 30시간이며 그중 10시간은 철학, 정치학(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 경제학), 일반 언어학, 문학 개론, 논리학, 제2외국어와 같은 교양 과목에 할애되고 나머지 20시간은 두 개의 학과에 10시간씩 나누어 배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학 공부에 주당 단 10시간밖에 할애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이 시간을 5년으로 계산하면 약 1,500시간이 되며 그중에서도 한국어 교육(문법, 실습, 강독, 세미나)이 약 60%를 차지하고 그 외에는 한국 자연, 경제 지리와 사정, 한국학 개론, 한국 역사 개관, 한국 문학사 개관, 각종 세미나, 한자, 그리고 전공 졸업 논문에 관련되는 선택 과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언어 교육은 현대어를 위주로 한 것이다. 또한 국가 간의 문화 협정에 의하여 학생들은 70년대부터 평양의 김일성 종합 대학 조선어 문학부 유학생 강좌에서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게 되었다.
    한국어를 전공하려는 희망자들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입학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동양 언어의 경우는 조금 달라 필기 시험과 구술 시험을 통하여 다른 외국어의 습득 정도, 일반 지식, 한국학에 대한 취미 정도를 고려하여 입학 여부를 결정한다.
    1990년까지 국립 기관인 모든 대학의 신입생 수는 사회의 수요, 취직전망, 학교의 내부 조건, 가능성 따위에 따라 교육부에서 내려온 기획 지표에 의해 정해졌다.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작은 나라에서, 더구나 외교 관계가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에만 한정된 상태에서 한국학에 대한 전문가의 수요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므로 신입생의 수도 많지 않았다. 70~80년대에 와서 단지 3~5년 만에 5~8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나간 40여 년간에 한국학과에서 졸업 논문에 통과하고 국가 시험을 친 졸업생의 수는 약 40명 정도이다. 그 외에 한국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한 학생도 있었다. 졸업생 중의 일부는 교육 기관, 과학원 동방 연구소를 비롯한 연구소, 대외 관계 분야나 무역 부문, 출판 보도 기관, 박물관 기타 부문에서 연구원, 전문가, 통역원 등으로 일하면서 한국과의 관계 발전과 한국에 대한 지식 보급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있다.
    1989년 11월 17일 대학생들도 큰 역할을 해 낸 소위 벨벳 혁명에 의하여 공산 독재 체제가 무너진 뒤에 교육 부문에도 큰 변혁이 일어났다. 그것은 학원의 자유화, 민주화, 세계에 대한 개방 정책의 실시, 새 대학령의 채택 등으로 각 대학, 각 학과의 교과 과정의 내부 개편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한국학과의 경우에는 1991년 가을부터 한국학을 더 깊이, 더 광범위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학제를 개편하고 (주당 16~18시간) 신입생의 수도 늘릴 예정이다. 또한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지 않았던, 한자, 한문의 교육도 개선하여야 하겠다.

4. 교재 작성
    한국학과가 생긴 이래 우리들은 한국학의 오랜 전통을 가진 소련, 서유럽 및 미국 그리고 북한의 교과서와 일부 남한의 교과서(서울대, 연세대가 발간한 유학생용 자료)를 교재로서 이용하였고 또한 조노 사전, 서울에서 발간한 한영 사전 등도 많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학의 더 체계적인 교육 방식을 위하여 과목 수와 시간 수 등의 교과 과정 안에 적합한 교재 작성의 과제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를 부분적으로라도 수행하기 위해 한국학과의 교수들은 많은 연구를 계속해 왔으며 지난 40년간에 약 15종의 교재와 교과서가 집필 발간되었다. 풀트르 교수는 상기 저서 외에도 1945년까지 한국 문학사 개관(1973), 한국어 문법(음운론과 형태론, 1978)을 발간하였다.
    풀트르 교수가 은퇴한 1972년부터 한국학과 과장을 지낸 이 글의 필자는 또한 북한 경제 지리와 경제 발전(1968), 한국 출판물 강독(1970), 한글 교과서(1975), 한국 현대어 교과서(1980), 한국어의 기초(1982), 한국학 입문(어문편, 1982), 한국어 문법 2.(통사론, 1986) 등을 썼다.

5. 기타 활동
    교양 교육 활동 이외에 과학 연구 또한 교수들의 활동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학과 교수들과 과학 동방 연구소를 비롯한 기타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한국학을 좀 더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 통사론의 일부 문제, 북한과 남한의 언어 차이, 1920~1930년대의 카프 문학과 그 시기의 기타 작가 연구, 고대 시조와 현대 시의 작시법, 해방 전의 한국 연극, 신소설 문학, 실학 사상, 한국 미술사 따위가 그 연구 대상인 것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학위 논문이나 국내외 전문 잡지를 통하여, 또는 유럽 한국학회(AKSE)를 비롯한 국제 한국 학술 대회에서 해마다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동양학자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교수와 과학 연구 활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공에 따른 각국의 생활 풍습, 그들의 역사, 문화, 문학에 대한 글도 쓰고 예술 문예 작품을 번역함으로써 동양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 제공 및 계몽 활동에 전력하여 왔다. 한국학의 교수들과 전문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소수의 전문가들이 많은 작품을 번역할 수는 없었지만 몇몇 작품들이 체코 어로 번역되어 단행본 또는 잡지상으로 출판되었다.
    한국 신화 전설집, 한국 동화집, 김시습 작 금오신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박지원의 양반전·허생전, 최서해 단편 소설집, 조명희의 낙동강, 김동인의 단편 소설(감자, 배따라기, 광염 소나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소낙비,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김남천의 장편 소설 대하,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와 일부 단편 소설, 신라 향가와 고려 가요의 일부, 시조 편(3편) 박인로의 선상탄, 또한 김소월, 이상화 등의 개별적인 시 작품들이 번역되었다. 홍길동전이나 해방 전 일부 단편 소설 등은 프라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하여 방송되었으며 심청전은 각색되어 프라하 아동 극장 무대에서 50회나 공연되기도 하였다.
    한국학의 교수와 졸업생, 학생들은 한국에 대한 지식을 보급하고 두 나라 사이의 친선 관계를 심화할 것을 활동 목표로 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한국 협회(1990년 봄에 창립)의 회원이기도 하다.

6. 대외 관계
    이전의 남한을 인정하지 않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외 정책 방향으로 말미암아 우리 한국학과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 특히 소련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는 각 대학과 연구소, 동독의 훔볼트 대학교, 바르샤바 대학 등의 한국학과와 연결을 가지고 상호 자료 교환, 공동 세미나 개최, 학생의 단기 연수, 교수들의 특강 교환, 국제 세미나 참가 등을 실시하여 왔다. 물론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김일성 종합 대학과 사회 과학원의 일련의 접촉을 가졌으며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문화 협정에 근거하여 자료 교환과 학생, 교수들의 실습도 다소간 실시해 왔다. 그러나 우리 학과와 대외 관계는 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서양의 일부 대학교(런던, 파리, 보훔, 튀빙겐, 스톡홀름)의 도서관과 한국학과, 그리고 그 교수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였으며 그들의 도움을 통하여 서양 자료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남한의 과학 도서, 교육 자료, 잡지 등도 적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1980년부터 우리나라 한국 학자들이 유럽 한국 학회에 매년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한국학의 발전에 큰 의의를 가졌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양의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연구 업적과 교수 경험을 요해하였을뿐더러 유럽 한국 학회 학술 대회에 참가한 많은 저명한 남한 학자들과의 개인 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학술 진흥 재단의 커다란 도움에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남한과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기 전부터 이 재단은 우리 학과에 해마다 많은 서적, 잡지, 녹음 카세트, 슬라이드 등과 같은 자료를 보냈으며 그 후에는 우리 교수와 연구원들의 단기 실습, 학생들의 여름학교 초청 등의 배려를 해 주었다. 그 외 한글 학회, 한국 국제 문화 협회, 한국 유엔 민족 위원회 등이 우리나라 한국학의 발달에 여러 모로 힘이 되어 왔다.
    이 글의 필자가 방한한 1989년 가을부터는 서울대, 고려대, 한국 외대, 한글 학회, 한국 정신문화원을 비롯한 여러 대학과 연구 기관과의 접촉 및 자료 교환이 현저하게 늘어났다.
    1990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와 대한민국과의 대사급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은 우리 한국학의 가일층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해 4월 카렐 대학교의 초청에 의하여 한국 학술 진흥 재단 이사장과 여러 명의 대학교수로 구성된 대표단이 우리 대학교를 방문하고 뒤이어 동년 7월에 한국 외대의 총장 일행이 프라하에 방문하였을 때 두 대학 사이의 자매 관계를 맺었다. 이에 근거하여 금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상호 교수 교환은 한국 외대의 체코어과와 카렐 대학의 한국학과의 언어 교육 수준을 효과 있게 높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조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 국제 포럼의 발기에 의하여 1990년 11월에 카렐 대학교와 체코슬로바키아-한국 협회 공동 주최하에 프라하에서 개최된 '체코슬로바키아-한국 포럼'이라는 토론회가 보여 준 바와 같이 상호 협력이 다만 언어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다른 과학 연구 분야에서도 유익하게 발전되고 있으며 또 확대될 전망과 가능성도 크다.

필자는 이 글을 마치면서 카렐 대학교 철학부 한국학과와 한국 외국어 대학교 체코 어과의 교수, 졸업생과 학생들이 앞으로도 협력의 새로운 형태를 많이 찾아내고 상대편 나라의 언어, 사정, 문화를 더 깊이 연구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 관계, 국민들의 이해감과 상호 경제 문화 교류를 가일층 발전시키는 데 더욱더 이바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표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