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어식 사람 이름에 대하여

金文昌 / 인하 대학교 교수·국어학

一. 머리말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기 성명 석 자를 끔찍이도 소중히 여기면서,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고자 목숨조차 바친 일이 허다하였다. 오늘날까지 이름을 떳떳이 流傳한 수많은 충신 열사가 그러했으며 이름 없는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이름을 명예롭게 지키고자, 당대의 부당하거나 일시적인 부귀영화를 등지고 흔연히 가시밭길을 택했던 것이다. 곧 이름은 그 사람의 생명이요 인격으로서, 이름을 훼손함은 바로 육체나 영혼을 해치는 일과도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姓名觀은 마치 종교처럼 승화되어 正名 思想 또는 敬名 思想이라고도 命名할 수 있는 일종의 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즈음 이 사회는 어떠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온 나라의 기강을 뒤흔들며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저 오욕된 이름과 그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일까. 자신의 길을 성실히 살아가는 이름 없는 우리 匹夫匹婦들은, 세상을 온통 어지럽히는 일부 저 유명한 이름들로 하여 삶의 의욕조차 상실한 채 망연히 손과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면서 방황하는 듯하다.
    이름은 실체의 그림자와도 같다. 그리하여 사람 한평생에 늘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으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도, 이름 석 자가 아닌가 한다. 실체가 곧고 거대하면 그 그림자도 그만큼 곧고 클 것은 정한 이치라 하겠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우리 선조 가운데는 이름 석 자를 正大하게 靑史에 길이 남기고자 삶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자 일생 동안 自省하며 은거했던 사람 또한 不少하다. 생명을 빼앗을 수 있어도 이름까지 거둘 수는 없으며,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남기 때문이다.
    한편 분수를 망각하고 부당히 명성을 탐하는 자는 도둑과 다름없다면서, 이름을 훔치는 것은 돈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 荀子는 경계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름의 상징성을 지나치게 신비화할 때 이른바 姓名 迷信이 理性을 誤導하여 사회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 기실 이름이 발하는 이미지나 인상과, 실제 그 사람의 성품·실체·운명 등이 매우 다른 경우도 자못 많은 줄 안다. 一例로, 鄭澔가 젊은 날 과거 치를 때 "이름이 나빠서 낙방하리라."는 꿈을 세 번이나 꾸었지만 그 현몽을 一笑에 부치고 뜻대로 행하여, 18세기 영조 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나이 90까지 장수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옛 사람들이 이름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했던가,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 이름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 이름에 관한 연구 분야를 일반적으로 姓名學(Onomastik;onomastics)이라 부른다. 성명학의 연구 대상은 물론 고유 명사(Nomen proprium)가 주축을 이룬다. 이 외에도 地名·事物名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성명학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인접 과학으로서 사회학·심리학·인류학·철학 등 여러 학문 분야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회학은 성명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겠다(Kohlheimlkj 1977a:5, 26. 1977b:151). 作名者(Namengeber)인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이름(Vorname)을 지어 주는 일은 사회적으로 특수한 행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각 개인이 자신의 이름과 동일화(Identifikation)되는 사회적 관습이 성립되는 것이다(Hertzler 1965:4). 命名(Namengebung)이라는 행위는 부모의 직업·교육 수준·출신·나이·종교·거주지·사회 참여 등 사회의 제반 상황과 직결되므로 성명학은 사회학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간 우리 학계에 보고된 성명학 관계 논저 30여 편과 신문·잡지 등의 기사·논설·보고문류 70여 편은 물론,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름의 종류·유형(Mode)·作名 動機(Motivation) 등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성명학 이론(Namentheorie)이나 사회 성명학(Sozioonomastik)의 관점에서 作名者의 사회적 상황과 그 작명자가 부여한 이름과의 상관 관계 등에 관한 연구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듯하다(李光淑, 1981:85)

二. 敬名 思想
    Ⅰ. 한국의 敬名 思想
    한국인은 고대로 사람 이름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名譽'라는 어휘는 '훌륭한 이름(을 칭찬함)'을 뜻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명예라는 것을 지극히 존숭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욕되지 않고 자랑스럽게 보존하고자 목숨까지도 걸었던 것이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생명이요 인격으로서 그의 모든 것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좋은 뜻이 내포된 이름을 짓고는 그 이름이 발하고 있는 훌륭한 의미를 언제나 음미하여 '願名思義'라 하여 명예를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며 그것에 합당한 처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은 修身의 한 방법이기도 하였으므로,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높이려는 의식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申用浩, 1990:9). 作名者인 부모는 자신들이 당대에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들에게 기대하며 그 이름에 다시금 자신들의 꿈을 담고자 부심했다.
    이러한 경명 사상에 의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타인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자기 겸양의 필요성에서였을 뿐 그 외에는 삼갔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다. /임금 앞에서는 신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子於父母 則自名也/君前臣名"(禮記 卷 2, 曲禮 下).
    미성년자가 成人이 되면 그의 이름을 임금·스승·부모 정도만이 부를 수 있었으나, 그나마도 부르기 좀 어려워서 임금·스승·부모·웃어른·친우들이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名 대신에 字를 불렀던 것이다. 아랫사람의 경우 윗사람의 名은 물론, 字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윗사람의 號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란 한 사람의 전 존재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 先人들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눈이요 마음이며 피요 정신과도 같이 생각되었다. 곧 이름이야말로 그 사람의 육체요 생명이며 인격이나 영혼으로 간주되어 신성불가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드러냄은 귀신에게 그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더구나 이름 훼손은 바로 그 사람의 생명이나 인격 또는 영혼의 파괴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가령,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官職名이나 封爵 또는 號나 字를 덧붙이지 않고 오직 이름만을 부르거나 기록하는 일은, 그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후가 失政하여 관할하던 영지를 잃으면 이름으로 부르고, 人倫을 그르쳐서 同族을 滅한 경우에도 이름을 부른다: 諸候失地名滅同姓名"(禮記 卷 2, 曲禮 下). 이 경우 제후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를 중죄인으로 취급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申用浩, 1990:14).
    16세기에 栗谷 李珥 선생이 제정한 海州 鄕約에는 다섯 종류의 罰則이 있었다. 지방 자치제의 규약이라고 할 이 향약에는 上罰·次上罰·中罰·次中罰·下罰이라는 5단계의 벌칙을 마련하고 그에 해당되는 罪狀은, 아버지에게 부당히 항거하거나 喪中에 주정하는 일 등이었다. 형량은 사회 계층별로 차등을 두었는데, 常民의 위법은 笞杖 40度를 쳤으나 兩班의 경우는 滿座名責形을 가하였다. 이 만좌명책형이란 일종의 名譽形으로서 최고 형벌에 해당되었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죄과와 이름을 써서 들고는 그 자리에 앉아 수모를 받는 것이었다. 이름을 공개·훼손함이 그 어떤 체벌보다도 더 무거웠으며, 그만큼 이름을 중시했음을 보이는 증거라 하겠다.
    19세기 말에 明成 皇后 閔妃는 자기와 갈등이 심했던 시아버지를 저주하고자 시아버지의 성명 '李昰應'에서 '昰' 字를 '矢' 字로 바꾸어 '興宣 大院君 李矢應'이라고 틀리게 쓰고는 그 위에 화살[矢]을 쏘고 있다(李圭泰, 1983). 이는 이름을 훼손함으로써 그 사람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예가 되겠다.
    지난날 새신랑 또는 서당·관청·군대·감방 등에서 신참자가 한 조직에 새로 들어오면 고참자들이 온갖 모욕과 학대를 가하고, 주식을 향응받는 습속이 있었는데 이를 申告式이라 불렀다. 이 신참 학대 벌칙이 너무 가혹하여 더러 죽거나 평생 동안 병신이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신고식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이, 신참자 아버지 이름을 종이에 써서 불에 태운 뒤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게 하는 벌칙이었다(李圭泰, 1988). 이는 일종의 父名毁損形이라고도 명명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私刑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으로 보인다.
    경우와 목적은 다르겠지만, 오늘날에도 형벌 중의 하나로 이른바 '명단 공개'라는 것이 있다. 가령 지난날에, 양담배 피운 자·비밀 과외 당사자·호화 결혼식 당사자·가명 예금자·악성 채무자·상습 부동산 투기자 등등 그 명단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그 명예를 징벌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이름을 올바로 보존하겠다는 正名 思想은 무참히 짓밟혀 擧世皆濁의 지경에 이른 듯한 요즈음, 이름쯤에 형벌을 가하여 치욕을 준다고 한들 그 '범법자'들이 왼눈 하나 까딱하겠는가 자못 의문이다.
    위에서 보인 사례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나 윗사람의 이름을 존중하는 경우였으나, 다음은 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각별히 예우해야 될 사람의 이름 또한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겠다. "國君이라 하더라도 上卿과 兩媵(시집갈 때 데리고 가던 하인들)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大夫는 父代로부터 부리던 老臣이나 姪娣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士는 家事를 맡은 사람들의 우두머리와 長妾(妾으로서 자식을 낳은 여인)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國君不名卿老世歸 大夫不名世臣姪娣 士不名家相長妾)"라고 하였다(禮記 卷 2, 曲禮 下).
    7세기경에 신라 태종 무열왕이 强首의 학식에 경탄하여 그의 이름인 '牛頭'를 차마 부르지 못하고, 그가 任那가야 출신이라 하여 '任生'이라고 別稱하겠노라던 기록이 전한다(三國史記 卷 46, 列傳 6). 이상은 모두 아랫사람의 이름조차도 忌諱했던 敬名 思想의 관습을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한국인은 이름과 함께 姓으로 표상되는 家系를 중시하였다. 姓은 육체적으로 한 家系의 피를 이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유산과 家風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姓을 중심으로 忠··명예·相扶相助 등 윤리 덕목이 강조되고 함양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조상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 후손들에게는 자기 또한 떳떳한 조상으로서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고자, 청빈과 지절을 지키며 부정한 부귀영화와 타협하지 않고 한 성바지 家門이 집단적으로 목숨까지 바친 예가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말에, 다시는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나 단언할 때 '성을 갈겠다.'는 관용어가 있다. 최후의 수단에 姓을 걸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고한 우리의 경명 사상은 일찍이 중국에서 영향 받은 바 크지만, 중국에 못지않게 세계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이름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민족으로 간주되고 있다(램지, 1983).
    일본 제국은 지난날 한때, 이러한 우리의 경명 사상을 그대로 두고는 제 뜻대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 끝내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京鄕新聞, 1982.8.6.). 일제는 1940년 2월 11일을 기하여 이 땅에 드디어 '創氏改名'을 강행한다. 누천 년을 지녀 온 우리의 성과 이름을 하루아침에 일본식으로 갈아 치움으로써 우리의 민족혼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소위 '皇國 臣民化' 하려던 그 식민 정책은 세계의 식민지사상 유례가 없는 일대 폭거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말과 글로 된 성명만을 지워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 그리고 생명의 최후 그릇인 언어마저도 말살하고자 1941년 4월 1일부터는 조선어 교육과 조선어 사용조차 전면 금지했던 것이다. 그 악폐는 지금도 남아, 일상 언어생활에서 일어 잔재는 구석구석에 쓰이고 있으며 특히 중년층 이상의 여성 이름에는 여전히 일본식의 '子'자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더불어, 그 상황은 다르지만, 고대의 우리 전통적인 이름과 한자식 이름과의 상관 관계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금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Ⅱ. 외국의 敬名 思想
    중국의 경우, 그들의 종교는 名敎라 할 만큼 이름의 尊嚴性·神通力·萬能性을 지나치게 信仰해 왔다. 그래서 胡適은 중국이 근대화하려면 모름지기 名敎를 타도해야 한다고까지 극언한 바 있다(京鄕 新聞, 1982.8.6.).
    2500여 년 전에 孔子는 그 당시 사회의 타락상을 개탄하면서, 올바른 사회가 되려면 正名主義를 확립해야 한다고 도처에서 역설하였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한다. (중략)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맞지 않고, 말이 맞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예절과 음악(예술)이 흥성하지 않는다. 예절과 음악이 흥성하지 않으면 법이 제대로 준수되지 않는다. 법이 제대로 준수되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둘 데가 없어진다: 必也正名乎 (中略)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論語 子路 三).

여기서 正名은 물론 사람 이름에만 국한되는 개념은 아니다. 이는 보편적으로 언어의 개념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서, 만물의 명칭 즉 名分에 상응하는 실질을 바르게 하여 人倫의 명분을 밝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 구체적인 사항을 공자는 다음과 같이 예시하고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論語 顔淵 十一).

이처럼 모든 사물은 제각기 자기에게 부여된 이름에 걸맞게 그 실질을 행사함으로써 윤리와 질서가 확립되고 세상이 올바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름을 존중한 공자의 사상은 실제 행동으로 실천되어 "(공자는) 호적 대장을 짊어진 사람에게도 존경의 표시로서 고개를 숙였다: 式負版者"(論語 鄕黨 十七)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을 명예·명성·성공 등 인간이 도달해야 될 윤리적 최고 가치와 동일시한 공자의 사상은 '孝經'이나 '小學' 등에서 "이름을 후세에 떨치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라고 결론하고 있다.

공ᅵ 증려 닐러 샤, 몸이며 얼굴이며 머리털이며  부모 받온 거시라, 감히 헐워 오디 아니홈이 효도 비르소미오, 몸을 셰워 도 야 일홈을 후셰예 베퍼  부모 현뎌케 홈이 효도 이니라: 孔子謂曾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小學 卷二, 明倫 第二 34).

중국 六朝 末期의 학자 顔之推가 7세기 초에 지은 '顔氏家訓'에서도 "이름을 세우도록 권장하면 마침내는 그 實을 얻게 된다. 한 사람의 伯夷를 칭송하면 천만의 사람이 그를 본뜨려 한다."라고 하여 이름의 중요성과 위력을 강조하였다(東亞日報, 1986.7.22.). 중국 사람들은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이름을 명예나 인격처럼 존중하였으므로 함부로 더럽혀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敬名主義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첫째, 附字法: 사람의 名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적당한 나이에 이르면 字를 지어 주던 제도.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이름이 두 가지 씩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字 이외에도 兒名··諡號·美稱 등이 붙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므로, 한 사람의 이름이 보통 서너 가지는 될 수 있었다. 다음에는 중국에서 名과 字가 언제부터 어떻게 쓰였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시대별로 몇 사람의 것을 제시하겠다.
    둘째, 諱字法: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 B.C. 2세기에 '史記'의 저자 司馬遷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자인 '談' 字를 사용하지 못했다. 4세기에 晋의 서예가로 書聖이라고 불리는 王義之 또한 자기 아버지의 이름자인 '正' 字를 사용할 수 없어, '正'자가 쓰여야 할 자리에는 '政'으로 대신하며 '正月'은 '初月'으로 바꾸어 사용했던 것이다(中央日報, 1979.12.17.).
[중국인의 名과 字]
通稱 時代
공자
노자
제갈량
이태백
두보
주자
이여송
장개석
모택동


諸葛











如松
中正
澤東
仲尼
伯陽
孔明
太白
子美
元晦
子茂
介石
潤之
B.C. 6세기
B.C. 6세기
2~3세기
8세기
8세기
12세기
16세기
19~20세기
19~20세기

11세기의 宋나라 文人 歐陽修의 '五代史記 王彦章傳 畵像記'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豹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사람은 살아 생전에 훌륭한 일을 하여야 그 이름이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것이니, 마땅히 선행하여 빛나는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죽은 뒤 모름지기 남겨야 할 것은 권력도 재산도 아니요 명예로 상징되는 자랑스런 이름뿐이라는 것, 이름에 결부되는 명예와 인격을 그토록 숭앙하고 추구하였기에 儒敎는 달리 名敎라고도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敬名 思想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타 외국의 경우는 몇 가지 사례만 간략히 보이기도 하겠다.
    미국 뉴욕에서 발행되는 '석세스: Success'誌는 1990년 10월부터 誤字 벌금제를 실시하고 있다. 즉 편집 담당자가 철자나 문장 부호 하나를 틀리면 25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어 있으나, 문법적 사항이 사람 이름이 하나 틀리는 경우는 500달러나 되는 고액을 부담시키고 있다(朝鮮日報, 1990.12.22.).
    이집트 사람들도 두 개의 이름을 지닌다고 한다. 本名은 큰 이름이라 하여 종생토록 비밀로 간직하며, 假名은 작은 이름이라 하여 이것만을 평소에 부르며 사용한다는 것이다(李圭泰, 1983). 이는 동양의 경명 사상과 상통하는 實名 忌癖 風習이라 하겠다.
    고대의 올림피아 광장에는 '汚名石'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올림픽 경기 때에 반칙 선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돌을 헌납토록 강요하여 그 곳 광장에 세워 두고는 두고두고 그 부정한 사람의 불명예를 질타했다는 것이다(東亞日報, 1986.7.22.). 이는 우리 이조 사회의 名譽刑보다도 엄청나게 더 준엄한 형벌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온갖 부정한 사람들도 그렇게 비명을 세워 길이 남기면 어떨까 망상해 본다.

三. 한국 사람 이름의 역사
    Ⅰ. 고대의 사람 이름
    고대의 人·地名은 일반적으로 고유어로 作名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도 일부분 계승되어 농어촌 지방의 인명이나 자연 취락·산야의 지명 등에 그 모습을 전하고 있다(安秉禧, 1977:65). 그런데 신라에서는 제3代 유리왕 9년에 (A.D. 32) 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각 部에 '李·····薛'이라는 姓을 賜姓했다는 기록으로 (三國史記 卷一, 儒理 尼師今條) 미루어 보아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특수층을 제외하고는 본래 이름만 있었고 姓은 없었는데 나중에 국가로부터 집단적으로 姓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된다(金敏洙, 1972:73). 그러나 성뿐만 아니라 이름도 실상 사람마다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니, 남자의 경우도 노복들은 제대로 이름이 없었다. 여자들도 남존여비 사상에서 이름이 없었으나, 신라의 帳籍·고려의 戶籍·이조의 民籍 등에 여자 이름이나마 올라야 할 때는, 가령 金 씨의 딸인 경우에 '金姓女' 李 가의 女息은 '李姓女' 하는 식으로 명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韓國日報, 1975.9.13.).
    다음에는 고대 국가별로 인명 자료를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三國遺事, 金敏洙 1972:75, 金用淑 1989:281~6, 기타 人名 事典類).

1. 고조선系 이름
(霍里)子高·麗玉
2. 신라系 이름
(1) 남자 이름
(朴)赫居世(弗矩內, 言光明理世也)·儒理(弩禮·儒禮)·未斯欣·智度路(智大路·智哲老)·(金)閼智·味鄒(未祖·味照)·素那(金川)·異斯夫(苔宗)·居柒夫(荒宗)·延烏郞·處容郎·耆波郞
(2) 여자 이름
閼英(娥利英)·雲帝(阿婁)·憂禮·伊利(金利)·阿爾兮·善兮·阿孝·萬呼(萬&內)·阿尼·摩耶·保反(內禮吉怖)·萬明·寶姬·文姬·水路·姣貞·桃花·知思·希明
①{阿-} 字系
阿老·阿尼·阿留·阿爾·阿好里·阿海·阿之·阿志·阿只
②{-刀··途} 字系
息刀·色途·巴道·息道·思道·知道·深道
③{-禮} 字系
愛禮·述禮·休禮·內禮
④{-里·伊} 字系
古老里·古路里·古巴里·觀肖里·阿好里·肖里·吉伊
3. 고구려系 이름
(1) 남자 이름
(高)朱蒙(鄒牟·衆解·扶餘俗語善射爲朱蒙)·瑠璃(類利·孺留)·摩離·夫婁(寧稟離)·穆度婁·憂婁·慕漱·鄒꠸素·乙巴素·(乙支)文德·(淵)蓋蘇文(蓋金)·乙弗(憂弗)·杜魯·斯由(釗)
(2) 여자 이름
柳花·禾姬·雉姬·貫那·召西奴·八須
4. 백제系 이름
(阿)直岐·(王)仁·薯童·階伯·(黑齒)常之·(遲)受信·福信·(道)琛
5. 일본側 한국인 이름
蘇那曷叱智·毛麻利·微叱許(未斯欣)·宇流助富利知干(于老舒弗邯)·伊梨柯須彌(蓋金)·阿道至·牟留至·須流枳·奴流枳

이들 이름은 그 당대의 기록이 아니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뒤에 문자로 정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표기 문자도 한글이 아니라 漢字 音訓借 表記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오늘날 그 讀音과 의미를 추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이 문제는 여기서 상론할 여유가 없으므로 별고로 미루고 표면적인 특징만을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이들 이름과 그 出典만으로는 그 당시 姓의 전반적인 유무가 불분명하기는 하나 일부 사람들에게는 姓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 유리왕代에 나라에서 6部長들에게 姓을 주었다는 기록도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둘째, 이름의 길이는 오늘날 2字制로서 2音節型이 기본형인데(崔範勳, 1980:118), 위의 事例만을 볼 때 고대에는 3음절형이 어느 정도 보편적이었던 듯하다.
    셋째, 語種上 고유어식 이름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보이나, 이 문제 또한 별도로 면밀히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인명은 우리 고유어식이 일반적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든 명칭들이 漢字化하면서 고유 어휘는 차차 그 주도권을 상실해 가고 말았다.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32)에는 6部에 漢字式 姓을 부여하고, 제22대 지증왕 4년(503)에는 國名(鷄林·徐那伐→新羅)과 王名(麻立干→王)을 漢字化하며 (三國遺事 卷四, 新羅本紀 第四, 智證麻立干條),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는 人名·地名·官名 등을 한자식으로 改名하여 (三國史記 卷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條) 국어의 발전을 크게 위축시키는 계기가 된다. 뒤이어 국어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고려 광종 9년(958)에 시작된 중국식 料擧 制度였다. 이로써 국어의 어휘·문장 구조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思考方式과 사상 그리고 나아가서는 문화 전반에 걸쳐 나날이 中國化해 가면서 드디어 우리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지칭하기에 이른다.

Ⅱ. 중세·근세의 사람 이름
    지난날 고유 명사는 한자어나 고유어나 모두 漢字로 표기함이 관례였다. 戶籍이나 公私 文書가 원칙적으로 漢文 및 史讀文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한글 표기는 예외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자 표기는 다소 부정확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편을 덜고 보다 쉽고 정확하게 이름을 표기하려는 노력이 한글 창제 이후 일각에서 일기 시작하였다(安秉禧, 1977:65). 그러한 움직임이 '龍飛御天歌'에서 인명과 지명을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싹트기 시작한다(예: 鶴橋 학리, 善竹 션, 白達 다리).
    다음은 중세 이후 각 세기별로 사람 이름이 어떻게 쓰였는가 차례로 예시하고자 한다.

1. 15세기의 사람 이름
    1447년 刊 '釋譜詳節'에 사람 이름이 한글로 처음 기록되고 있다. 한글과 한자로도 표기된 이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安秉禧, 1977:66).

(1) 현, 重현, 金重賢, 重賢, 仲賢, 賢
(2) 한, 韓, 韓衆伊, 韓衆
(3) 朴티손, 治孫
(4) 우, 友, 友仁, 右仁

1450년경 간행된 '舍利靈應記'에는 많은 인명이 대부분 한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분인 46명만은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안병희, 1977:67).

(1) 前典樂署典律臣韓실구디
(2) 前上林園司正臣朴검
(3) 前上林園司正臣朴타내
(4) 前上林園司正臣金올마대

이들은 正7品인 典律(雜職)·司正(軍職)과 正8品인 給事로서 하급 관리의 이름이다. 이로써 15세기 중엽 하급 관리의 이름은 보통 고유어였음을 알 수 있다. 문자 표기상 姓은 漢字로 이름은 한글로 되어 있음도 한 특징이라 하겠다.
    이름의 길이는 음절상 다음과 같다. 46명 가운데 확인된 44명의 이름을 음절수별로 나누고 이에 해당되는 이름들을 모두 제시하기로 하겠다.

[15세기 인명의 음절수별 분류]
音節數 2 3
人名數 26 18
百分率 59.1% 40.9%
해당 이름 , 거매, 검, 검불,
곰, 눅대, 더내, 더믈,
도티, 돌히, 관, 마,
막(5명), , 매뇌,
북쇠, 재, 디, 수새,
은, 타내, 
리대, 고소미, 구디,
오지, 뫼리, 실구디,
아가지, 어리, 오마대,
오디, 오미디(3명),
올마대, 올미, 우루미,
쟈가, 쟈근대

이들 44명의 명단에서 몇 가지 경향을 추출해 보고자 한다.

1) 이름의 音節上 특징
(1) 2音節型 ...... 26명, 59.1%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대표적 유형으로서 기본형이 된다.
(2) 3音節型 ...... 18명, 40.9% 오늘날과 달리 2음절형과 대차 없이 상당히 보편적이었으며 앞서 고찰한 고대 인명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2)Ⅴ-型의 특성 ...... 11명, 25%
(1) /ᅩ-/型(7명, 15.9%): 朴오마대, 高오망디, 龍오미디, 李오미디, 田오미디, 金올마대, 崔올미.
(2) /ᅡ-/型(1명, 2.3%): 李아가지
(3) /ᅥ-/型(1명, 2.3%): 金어리
(4) /ᅮ-/型(1명, 2.3%): 許우루미
(5) /ᅳ-/型(1명, 2.3%): 劉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이름은 모두 11명(25%)인데, 그 중에 3음절형이 절대 우세하여 10명(22.7%)이며, 2음절형은 오직 1명뿐이다. 특히 (1)에 '오미디'가 3명이나 있음은 그 당시 이것의 선호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3) -Ⅴ型의 특성 ...... 30명, 68.2%
(1) /-ᅵ/형 ...... 13명, 29.6%
① 2음절형(3명): 도티, 돌히, 딧
② 3음절형(10명): 고소미, 구디, 오지, 실구디, 아가지, 오디, 오미디(3명), 우루미
(2) /-ᅢ/型 ...... 10명, 22.7%
① 2음절형(6명): 거매, 눅대, 더내, 재, 수새, 타내
② 3음절형(4명): 리대, 오마대, 올마대, 쟈근대
(3) /-ᅬ/型 ...... 7명, 15.9%
① 2음절형(6명): , 곰, 망, 매뇌, 북쇠, 은
② 3음절형(1명): 뫼리

모음으로 끝나는 이름은 30명(68.2%)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 그 당시 대표적 유형으로 믿어진다. 특히 /-ᅵ/型은 -Ⅴ型 중에서도 거의 절반을, 전체 인명 중 30%나 차지하여 가장 보편적인 유형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고유어 이름에 '나리, 새미, 단비' 같은 유형이 많은 것도 이러한 오랜 전통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추론된다.

4) /-동/型 ...... 9명, 20.5%
검, 막(5명), 올미, 쟈가, 자음으로 끝나는 말음절 중에서는 이 /-동/형의 선호도가 제일 높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귀동, 막동, 순동'과 같이 고유어 인명의 대표적 유형으로 애용되고 있다.5) /-디/型 ...... 7명, 15.9%
구디, 디, 실구디, 오디, 오미디(3명)
특히 '오미디'는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6) /-/쇠/型 ...... 6명, 13.6%
, 곰, , 모리, 은, /북쇠
/-쇠/는 오늘날에도 남자 이름에 '돌쇠, 마당쇠'처럼 사용 빈도가 높은 유형이다.
7) /-대/型 ...... 5명, 11.4%
리대, 눅대, 오마대, 올마대, 쟈근대

이 외에도 15 세기 사람으로 수백 명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있다.
    1453년(단종 1)의 癸酉靖難, 1456년(세조 2)의 단종 복위 사건 등 세조 찬위를 위요한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1806년에 나온 '晝永編'(卷二 44a~46b)에 실려 있다. 그 중에 '성삼문, 김시습, 김문기, 안평 대군, 엄흥도' 등 상류층 한자 이름 35명은 본고의 고찰 대상이 아니 된다. 우리의 관심은 그 사적이 자세하지 아니한 중인 이하 평민·軍奴·노비 등에 이르는 236명 가운데서도 특히 고유어식 이름이라고 추정되는 것에 한한다.

(1) 성과 이름이 다 기록된 것 ...... 24명
① /-동/형 ...... 17명
尹介同(개동), 趙季同(계동), 崔季同(계동), 趙貴同(귀동), 姜莫同(막동), 安莫同(막동), 崔莫同(막동), 金ꡛ同(분동), 宋石同(석동), 崔石同(석동), 黃石同(석동), 李小童(소동), 金壽同(수동), 金秀同(수동), 金祖同(조동), 崔哲同(철동), 尹孝同(효동)
② 기타 유형 ...... 7명
金末生(말생), 李末生(말생), 皇甫加麽(가마), 羅乫豆(갈두), 李乃斤乃(내근내), 李勿金(물금), 閔石伊(석이)
(2) 이름만 기록된 것 ...... 14명
① /-동/형 ...... 3명
丐同(개동), 占同(점동), 則同(칙동)
② -Ⅴ형 ...... 4명
꣩未(올미), 凡伊(범이), 仇之(구지), 仲才(중재)
③ -C형 ...... 7명
銀山(은산), 佛連(불련), 仲銀(중은), 好仁(호인), 貴珍(귀진), 乭中(돌중), 波彔(파록)
(3) 여자 이름 ...... 6명
加之(가지), 介阿(개아), 德非(덕비), 佛德(불덕), 隱德(은덕), 龍眼內(용안내)

이상 44명의 이름 가운데 /-동/型이 20명으로 앞에서 고찰한 바와 마찬가지로 단연 우세하다. 반면에 3음절형은 앞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2명밖에 아니 된다. 본래 여자는 姓만 있고 이름은 兒名 정도 외에는 別無한 것이 지난날 관습이었었는데, 이 책에는 반대로 여자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姓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타 더 이상의 고찰은 역시 지면 관계로 뒤로 미룬다.

2. 17세기의 사람 이름
    1617年 刊 '東國新續三綱行實'에 기록된 이름 가운데 특징적인 사항만을 간략히 예시하기로 한다(安秉禧, 1977:69~70).

1) 1음절형
금이(今伊), 녜(禮伊), 논이(內隱伊), 눈이(目隱伊), 니동이(李同), 문이(文伊), 쇠(金伊), 풍이(風伊)
이들은 15세기 자료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던 새로운 유형으로서, 閉音節 아래 接尾된 有情物 指稱語 '-이'를 제거하면 1음절로 간주되는 이름들이다.
2) 3음절형
개미티(介未致), 거물덕(檢勿德), 무적쇠(無其叱金), 리개(伴里介), 쟈근개(者斤介), 진가히(眞加屎), 큰아기(大阿只) 이 3음절형에는 남자명인 '개미티, 무적쇠' 이외에는 대부분 여자명이 이에 해당된다.
3) 남자명 말음절 유형 '-동(20명), -쇠(5명), -산(4명)'이 보편적이나 앞서 고찰한 바와 유사하므로 사례는 생략한다.
4) 여자명 말음절 유형 여자 이름 말음절 유형은 '-금(36명), -덕(28), -개(20), -비(16), -디(11), -지(10명)' 등이 주류를 이루어 남자 이름보다 유형화의 종류가 비교적 단조롭고 집중적이어서 同名異人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상황이므로 하나의 일관된 관습으로 해석된다. 특히 /-ᅵ/型이 37명, -Ⅴ型이 57명으로 위의 전체 121명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여, 여성명 말음에서의 母音型 선호 경향이 거듭 확인된다. 이 또한 오늘날과도 일맥상통하는 경향이라 하겠다.
① 4명이 동명인 이름
옥금(玉今), 막덕(莫德), 츈금(春今)
② 3명이 동명인 이름
금이(今, 今伊), 막금(莫今), 말금(末今, 末乙今), 현금(玄今, 賢今), 연이(燕伊).
③ 2명이 동명인 이름
검덕(檢德), 금지(今之), 논덕(內隱德), 덕지(德之), 금(同叱今), 막개(莫介), 복(福代), 복(卜台), 삼덕(三德), 슌덕(順德), 옥개(玉介), 옥시(玉時), 죵이(從伊, 終伊), 츈덕(春德).
[남자명 동명이인: 금동(今同, 今叱同), 동이(同), 막동(莫同), 알동(卵同, 卵乙同)]
5) 兄弟 姉妹의 行列字名 굿비(仇叱非)~굿덕(仇叱德), 문길이(文吉)~문이(文伊)
박운이(朴云)~운산이(云山), 윤희(允熙)~풍이(風伊)
희식이(希式)~희뎡이(希禎).

3. 19세기의 사람 이름
    다음은 19세기 사람 이름을 作名上의 소재별로 제시하겠다(崔範勳 1980). 그런데 자료가 워낙 방대하므로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씩 보이고, 음절 유형·말음절 유형·의미 범주 유형 등등의 고찰은 역시 별고로 미룬다.

1) 용모류
거묵(巨黙, 巨墨, 居黙, 居墨, 居木, 去墨, 可莫, 嫁黙, 儉模, 桂梅/甘孫, 甘順, 甘東, 甘分.......)
고술(古瑟, 古述, 古術)
꼬마(古忙, 古孟, 古梅, 姑馬, 高望, 高孟)
납작이(納足伊)
동골(同Ꝏ, 同骨, 登屈, 東右里, 東口岩, 東九伊)
몽골(蒙骨, 蒙屈, 蒙古伊)
몽탁(蒙澤, 蒙Ꝏ, 牟澤)
바둑이(所得)
보골(富骨, 報骨, 卜屈,鱉掘, 方屈)
복술(福術, 伏戌, 卜戍, 北述, 北述伊, 北室, 博述)
비딱(斐宅, 非澤)
얼룩이(於彔)
오골(午骨, 牛骨, 於九伊)
오목(五目, 五穆, 五木, 五黙, 五莫, 五木禮, 五莫伊, 五木得, 吾幕, 吾莫禮, 吾目, 梧睡, 烏穆, 午木, 於穆, 右黙)
왕눈이(王目)
육발(六發, 六足)
육손(六孫, 六遜, 六手, 陸孫)
이쁜이(立分, 立粉, 立芬, 粒分, 粒粉, 笠粉, 苙芬, 伊分, 伊粉, 伊分里, 利分, 利粉, 梨粉, 入分, 入芬, 二分, 理分, 翌粉)
자근~(自近阿只, 自根福, 者斤今, 子斤兒其, 紫建年, 作根樂伊, 昨焉然/小介, 小干, 小根敬, 小看爛)
짝귀(作貴)
투득(投得)
2) 성격류
노랭이(老郞, 老娘, 老仰, 老良伊, 老朗, 魯郞, 魯良, 魯琅, 魯狼, 魯仰)
단단이(丹丹)
달랑이(月郞, 月娘, 月央,乭娘, 乭郞)
더펄이(加八, 多八)
모돌이(某乭, 毛乭, 母乭, 模乭, 慕乭)
모진이(母眞, 某陳)
발발아(發發我)
앙알이(仰謁), 약발이(藥發), 얌전이(也岩田, 也音田, 暗田, 黯田, 岩田, 也全, 也田), 어진이(於辰, 於鎭), 억지(億之, 億芝, 億知), 억척이(億尺, 於陟), 영악(英岳), 으뭉이(意夢伊), 은근이(垠根)
3) 동물류
강아지(江牙之, 江兒之)·개(加喜, 可伊, 可喜, 介伊, 江伊, 康伊)·동내개(洞來介)·똥개(同介, 同改, 洞狗), 수캐(遂開, 宿介), 나귀(羅貴, 羅九), 도야지(道也地, 道也知, 道也池, 道野只, 道耶知, 道下至, 道花枝, 刀也只, 都也之, 逃野地, 道也禮, 道也, 逃野, 大之, 道之), 말(末致, 末芝, 末伊, 馬之, 馬孔), 고래(鯨伊), 고양이(古伊), 곰(古味, 古音, 態伊, 態甫), 범(凡伊, 範伊, 猛虎, 虎鳴), 용(龍伊, 龍而, 龍甫), 원숭이(元崇), 까마귀(加莫), 독술이(獨洙伊, 讀述), 두루미(斗能), 부엉이(富仰女, 富興, 富興), 제비(地備, 芝妣), 학(鶴如, 鶴伊, 乘鶴), 가재(可再, 加才), 거북이(巨卜, 巨福, 巨北, 居福, 居北), 달팽이(月彭), 두껍이(蟾伊, 蟾月), 매미(春蟬), 벌(伐伊), 삼치(三耻), 올창이(兀昌), 지렁이(地龍, 知龍), 진득이(眞得, 辰得)
4) 식물류
국화(菊伊, 秋菊), 난초(蘭伊, 蘭花), 도토리(道吐里, 道吐利, 道土伊), 매화(梅月, 梅雲, 梅態), 모란(牧丹, 某蘭, 謀蘭, 吾牧丹), 목화(木花), 백합(百合), 버들(柳花, 柳色), 복숭아(桃花, 桃仁), 부용(芙蓉), 살구(杏月, 杏雨, 杏女, 杏花), 석류(榴月), 소나무(松伊, 松月), 아가위(棠伊), 앵두(櫻桃), 연꽃(蓮花), 오동(梧桐, 桐月), 오얏(李月), 지초(芝花), 토란(吐蘭), 호박(呼朴)
5) 장소류
개천(開天, 介川, 改遷), 노적(老積, 老赤, 駑的), 다락(多樂), 다리(板橋, 石橋), 둔덕(屯德, 彦德), 마당(馬堂, 場女, 場出), 마루(磨婁), 방(安邦, 上房, 內房, 乾於房), 방축(方丑, 防築), 부엌(富億, 夫億用, 廚女, 廚業), 사랑(舍廊女, 舍廊禮, 舍郞釗), 새터(新垈, 新基), 서당(書堂, 書院), 측간(厠間), 행길(行吉), 기타 각종 地名들
6) 시간류
하루 중에서: 日出, 朝伊, 午出, 一夕, 黃昏, 月出, 夜兒, 五更
月名 중에서: 正月, 二月, 三月, 四月, 閏四月, (中略), 十月
名節.節候名 중에서: 春分, 端午, 七夕, 秋夕, 秋分, 冬至
生日名 중에서: 還甲, 回甲, 辰甲, 眞甲
年號 중에서: 光武, 建陽
7) 器具類
가위(可外, 可士伊), 고두(高斗, 固頭), 광우리(光乙, 光五里), 구유(久有), 도끼(道治, 道致), 도마(道馬, 道磨), 두지(斗乙), 목탁(木鐸), 몽치(蒙致, 蒙稚), 방울(芳鬱, 金鈴), 보배(寶培, 寶貝, 寶石, 寶拜, 寶銀), 솥발[鼎足], 쇠몽(釗夢), 양금(洋琴), 연적(硯滴, 石硯), 장돌이(長乭, 長突), 장쇠(長金, 狀鐵, 場金), 지갑(志甲), 지팽이(支彭)
8) 岩石類
돌덩이(乭同, 乭丸, 突石), 돌맹이(乭夢, 乭明, 乭作), 돌벽(乭壁), 바위(岩, 岩回, 岩爲, 岩又, 巖衣, 方于, 所伊), 반석(盤石, 立石)
9) 祈願類
게도(거기두어)(介道, 寬道), 두리(斗里, 斗羅, 乧伊), 붙들이(釜乭, 扶斗里, 扶乭, 富乭), 억만쇠(百歲, 千歲, 千年金, 萬歲, 萬年壽, 億萬釗), 장수(長壽, 無限, 無窮, 白首), 죽지마리(竹之馬里, 莫夭)
10) 남자 선호 사상류
고만(古萬, 古晩, 錦安), 또나(又出, 又伊, 又男, 又忍, 又不), 딸막(達莫), 분해(富乃, 部內, 父愛, 忿女, 忿任, 忿例, 三忿, 七忿, 憤順, 憤金), 서분이(西分, 瑞粉, 書分, 徐分), 서운이(西雲, 西云, 西云禮, 瑞雲, 書雲, 徐運), 섭섭이(攝, 攝攝, 攝順, 涉涉), 오죽(五稷, 梧竹, 實竹), 원통(元痛, 切痛, 根深), 인제두(仁諸斗)
11) 賤名爲福 思想類
개똥(開東, 開動, 介同, 箇童, 癸東, 季童, 繼東, 可童, 佳童), 개발(介發, 開發),
개불(皆拂, 加佛), 말똥(末東, 馬東, 馬糞), 말불(末弗, 馬拂, 午弗), 쇠똥(世東, 小東, 金東, 細洞), 쇠불(釗佛)
12) 人物類
간난(干蘭, 干難里, 間難, 艱難, 看爛), 동방삭(東方朔), 마리(馬里, 麻理, 末伊), 마리아(馬利兒, 末二也, 末於多), 석숭(石崇), 수산나(守山羅, 小山兒, 首先亞), 아기(阿只, 阿起, 阿哥, 阿智, 牙喜, 兒具, 我棄, 岳伊, 惡伊), 아이(阿二, 兒伊, 我意), 애기(愛只, 愛琪, 愛奇, 愛年), 옹주(翁主), 장군(將軍, 將軍金, 將君), 직녀(織女), 천석군(千石軍, 萬石君), 태백(太白)
13) 順次類
① 干支: 甲子, 甲午, 乙丑, 乙酉, 丙子, 丁亥, 戊戌, 己酉, 庚子, 辛丑, 壬辰, 癸未
② 序次: 初生, 初産, 初女, 初男, 初雄, 新出, 新女, 新年, 新阿其, 長男, 長年, 孟伊, 昆女, 末女, 末介, 末禾, 末出, 末尾, 唜任, 唜男, 畢女, 女畢, 終女, 終順, 晩得, 晩金, 莫來, 一女, 一出, 二女, 次女, 次男, 三女, 四出, 七女, 八女
14) 자연류
雨中春, 雨霜, 風雨, 旱雨, 雲雨, 雷聲, 霹靂, 銀河
15) 색채류

다음은 색채어의 사용 빈도 수치인데, 앞의 숫자는 총 횟수, 가운데는 어두 음절, 뒤의 숫자는 어말 음절의 사용 횟수이다.

白(31=21+10), 丹(24=6+18), 紅(22=12+10), 黃(11=11+0), 靑(10=6+4), 黑(6=6+0), 藍(5=3+2), 碧(4=2+2), 綠(2=1+1), 赤(1=0+1)
16) 기타 유형
거식(巨軾), 고장(高長), 남녀(男女), 다담(多談), 명구(鳴鳩), 모갈(某葛), 부전(富田), 불숙(佛淑), 보비(甫非), 비홍(非洪), 삼한(三韓), 색남(色男), 신라(新羅), 아망(兒望), 아씨(阿氏), 야단(也丹), 야미(夜味), 여자(女子), 열녀(烈女), 유복(遺腹), 이색(二色), 일색(一色), 조이(昭吏), 지근(之根), 타관(他官)

이상 유형별로 제시된 19세기 인명의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사람의 외모·인체적 특징을 소재로 작명하는 방식은 가장 보편적이며 다수를 점하고 있다. 내면적 성격 즉 선악·애증·鈍敏 등의 소재는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내용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본고에 제시된 이름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특히 동물명 소재는 서민 이하 하층민의 인명에 흔히 쓰인다. 여성명에는 식물명·지명·색채어 등이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름에서도 백의 민족의 백색 선호 사상, 여성의 식물 상징화, 從地名制는 여성의 종속성, 남존여비 사상 등이 반영되고 있다. 남성명에 주로 쓰이는 금속류와 賤名 作名制는, 악귀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고 장수를 빌기 위한 역설적 사고의 투영이라 하겠다.

4. 일제 시대의 사람 이름
    이 시기는 여성명과 創氏改名에 대해서만 몇 가지 사항을 관견하고자 한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여 여자에게는 제대로 이름이 없었다. 본명이 있다면 妓女나 사대부가의 일부 여성 정도였고 나머지 대부분 여성들은 姓이나 兒名·別名 정도가 고작이었다(한국일보, 1975.9.13.). 그리하여 호적 등 문서에 기록될 필요가 있을 때 金 氏 딸이면 '金姓女'요, 갓 낳아서 '간난이'며, 예쁘다고 '예쁜이' 식으로 지어, 할머니가 되어도 '간난이'였다. 그러다가 1922년경부터 朝鮮 戶籍令이 발표되고 (李弘稙, 1973) 일본식 이름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여성·노비 등 無名人들에게 이름을 부여해야겠다는 시대적 필요성이 점고하여 일대 혼란과 희비가 엇갈렸다.
    당시 官立 漢城 女學校(京畿 女高 前身) 교장이었던 魚允迪의 최대 고충은 여학생들에게 낱낱이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작명하였다(朝鮮日報, 1928.?, 李圭泰, 1988.2.10.).

(1) 生年 干支型......甲順, 乙禮, 午蘭
(2) 生月型......三月伊, 冬至女
(3) 용모 성격型......立粉伊, 同屈伊
(4) 無個性型......方乙伊, 丙乙伊, 思審伊
(5) 기타......無名兒(기생에게나 이름이 있는 법이라고 학부모 반발이 심한 경우, 따라서 몇 명은 이렇게 동명이인이 되었다.)

이상은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의 전통적인 작명법과 일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전통은 날로 강화되었던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에 압도되어 일본식 이름으로 급속히 동화되면서 여자 이름은 '-子' 字의 홍수를 이루게 되었었다(金用淑, 1989:291).
    인명의 '-子'는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金圭泰, 1985.7.23.).

(1) 남성 존중 사상 ...... 아들·청년·극히 존귀한 남자의 존칭어. 孔子(名은 孔丘), 管子(管仲),吳子(吳起), 韓非子(韓非)
(2) 남아 선호 사상 ...... 아들을 가지고 싶은 강한 염원에서 여자에게 붙인 이름(현대 한국에도 잔존함. 예: 基男, 承男, 後男, 希男).
(3) 특권층 여성 의식 ...... 男子[衛나라 靈公의 부인名(論語 雍也 26)], 仲子[宋나라 武公의 딸 이름(左氏春秋傳)].

일본의 경우 '-子' 字의 사용은 이미 6세기 문헌에 등장한다. 남자의 경우, 皇室 家系 중에서 大伴 氏系의 '昨子'가 보이며, 587년에는 '蘇我馬子'가 物部守屋을 죽이고 592년에는 崇峻天皇을 살해한 뒤 天皇에 즉위한다. 607년에는 '小野妹子'가 隋나라에 遣修使로 파견되었다(日本史辭典, 1981, 詳說日本史, 1983). 이로써 '-子'는 王家나 고위 관리의 이름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여자 이름은 뒤늦게 8세기 말 平安朝(794~1191) 초기부터 발견된다. 皇室 藤原氏四家의 '宮子'(文武妃 聖武母)·'光明子'(聖武妃 孝謙母)를 비롯하여, 北家藤原氏家에는 보다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順子(仁明后 文德母), 褒子(宇多后), 懷子(冷泉女御花山母), 媓子(圓融后 掘河中宮), 定子(一條后), 尊子(以下 생략함), 超子, 嫄子, 多子, 彰子, 硏子, 威子, 嬉子 등등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子' 字는 과거 일본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왕실이나 고위층 인물의 특권적 이름으로 쓰였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민층에서는 일종의 諱字法에 의거해 거의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화와 더불어 인권 의식이 싹트면서 일반 서민의 이름에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일반인에게는 '-江, -枝, -繪' 등이 널리 애용되었다.
    19세기 말 明治 初에 서구의 첫 유학생으로 알려진 여학생 '津田節子'에서 '-子'가 발견된다(한국일보, 1975.9.13.). 그리하여 '-子'의 사용은 급속히 증가하면서 1900년대에는 일본 모든 여자 이름의 40%, 1910년대에 75%, 1930년에 이르면 85%를 넘어서서 거의 모든 일본 여성이 '-子'로 통일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李圭泰, 1985.7.23.).
    우리의 경우, 친일파 상류층 부인들이 솔선하여 '-子'를 사용하면서 딸에게도 부여하고 이어서 보편화한다. 게다가 남아 선호 사상에 편승하여 그 유행은 급격히 확산된 것으로 이해된다(한국일보, 1975.9.13.). 그 당시의 상황은 별도의 주제로 따로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를 벗어난 지 어언 반세기, 오늘날에도 이 '-子'를 더러 쓰고 있는데, 멀리는 중국에서, 직접적으로 일본이 강요한 역사의 아픈 상처이므로 과감히 불식되어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또한 性 差別 意識을 스스로 표방하는 전근대적 사고의 청산이라는 관점에서도 재고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1940년 2월 일제는 "一視同仁의 大理想을 구현하는 大和大愛의 발로요 朝鮮 民衆의 열렬한 요망에 따른 큰 恩典"(權五惇, 1982)이라는 어이없는 美名下에, 민족의 뿌리마저 없애고자 植民地 史上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創氏改名制'를 강행하여 우리의 성과 이름조차 빼앗고 말았다. 그들은 한민족 고유의 姓名制를 전면 부정하고 일본식 氏名制로 강제 변경시켜 마침내 우리 민족의 絶滅까지 획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전국 2천4백만 한국인 중 90%가 그 해 연말까지 명목상 개명당하거나 솔선하여 개명하기에 이른다. 文書上으로는 이 지구상에서 한국인이 거의 전멸된 셈이었었다.

金星英子←金英伊, 山田今枝←田今禮, 高村三雄←高貴乭, 芳村香道←朴英熙, 香山光郞←李光洙, 宮本豊信←李奉昌

위의 예에서 독립 운동가 이봉창(1920~32)의 경우, 일제에게 그 육신이 처형된 8년 뒤에 떠도는 영혼 같은 이름마저 엉뚱한 倭式으로 둔갑하여 또 한 번 이름조차 죽는 등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두 번씩이나 사형 당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 당시 '不逞鮮人, 非國民'이라는 낙인을 찍어 온갖 위협을 가하던 稀世의 폭거 앞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의 마지막 혈통과 뿌리요 명예를 의연히 지킨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탄압의 구체적 내용은 이러했다. 학생들은 체벌·추방당하고 입학·진학 불가, 직장인은 그 직에서 해직·추방당하며, 사회생활상 각종 민원 사무 증명서 발급 거부·우편 배달 중지·식량 등 물자 배급 중지·노무 징용에 끌어가는 등등 한마디로 살 수 없게 굴었던 것이다.
    적극적 저항자 중에는 마치 死六臣처럼 죽음으로써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지키고자 했다. 全南 谷城의 柳建永은 1940년도 당시 조선 총독 南次郞에게 엄중한 항의서를 보낸 뒤 자결하고, 全北 高敝의 蘇鎭永은 자녀가 당하는 고통을 눈뜨고는 차마 못 보겠어서 이름을 고쳐 학교에 보낸 뒤 우물에 투신하여, 姓을 갈아치운 천하의 대죄를 조상 앞에 죽음으로써 사죄하고 있다(權五惇, 1982). 한편 生六臣처럼 생존하며 저들에 끝내 굴복하지 않은 無籍者들도 있었다. 시인 한용운·김영랑, 어문 학자 이윤재·이희승·권오돈 등은 創氏와 神社 參拜를 거부하며 '풍란화 매운 향내'(鄭寅普 時調에서)보다 더한 절개로 끝끝내 민족의 志節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소극적 저항자들은 당시의 칼날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동시에 민족의 전통과 주체성을 지킨 사람들이다. 이는 마치 철학자 칸트(1724~1804)가 학문적 활동에 라틴어 사용을 강요당할 때 정부 제출용 논문에는 라틴어를 사용하고 개인적인 저작·강연 등에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애용하여, 현실의 냉혹한 요구와 孤高 理想의 當爲性과를 슬기롭게 조화시킨 것과도 比肩되는 일이었다. 趙必大(독문학자)의 경우 창씨에도 응하는 듯하면서 국어의 고유성도 유지하도록 자녀의 이름을 '로치(璐緻), 로아(璐阿), 아미(阿美), 아란(阿蘭)'으로 지었다(趙必大, 1966). 혹자는 日人들이 하늘같이 알고 있는 天皇家나 최고 가문의 諱名을 감히 차용하여, '德川·豊臣·若松仁' 등으로 바꾸는가 하면, 장난기로 '江原野原,' '姓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란 뜻의 '犬子' 氏로 창조하여, 간접적으로 創氏制를 냉소·야유하며 항거하였다(權五惇, 1982, 朝鮮日報, 1987.11.13.).

四. 맺음말
    1.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사람 이름을 생명이나 인격과 동일시하며 지극히 존중하는 敬名 思想을 굳건히 지켜 왔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2. 고대 삼국 시대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姓이 제대로 없었고, 평민·여자·노비들은 이름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0세기 초까지도 여성이나 하층민들은 여전히 제대로 본명이 없었다.
    3. 고대부터 개화기까지 우리의 전통적 作名法은 고유어식이었다. 그러나 신라 초기에 漢字式 姓 制度 실시, 8세기에 모든 사람··관리직 이름을 한자식 2字制로 改名, 10세기에 科擧 制度를 도입하여 漢文으로 모든 시험을 치르게 함으로써 학문의 발달·어휘의 증가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우리의 주체적인 姓名制는 크게 위축되고 우리의 사고 구조까지 다분히 중국화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상류층을 제외한 하급 관리·중인 계층·서민층·여성·천민·노비 등 일반 대중들은 2천 년 동안 여전히 우리 고유어식 이름을 면면히 애용하며 지켜 오고 있었다.
    4. 형태상 이름의 길이는 2字制가 약 60%로 기본이고, 3음절형도 40%쯤 되어 2字型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요즈음 다시 출현하는 3음절형의 한글 이름도 (예: 나비나, 슬기나, 빛여울) 기실 숨겨졌던 저 오랜 전통의 희생이 아닌가 한다.
    5. 음운상 남녀 이름의 약 70%가 말음절이 모음으로 끝나는 -Ⅴ型에 속한다. 모음 중에서도 'ᅵ'로 끝나는 이름이 30%에 해당된다. 이것 또한 현재 젊은 여성 이름 중 최다형이 'ᅵ'로 끝나는 형태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예: 송이, 나리, 누리, 슬기/보라, 빛나, 하나). 그런데 -Ⅴ型은 서구의 여자 이름에서도 최대 빈도수를 보여 세계적인 공통 유형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예: Anna, Maria, Monika, Sandra, Susana, Elke, Gabriele, Stefanie).
    6. 음운상 이름이 자음으로 끝나는 -C型 중 '-동'이 약 20% 정도로 가장 선호도가 높다. 남성명 중 '-쇠' 또한 최대 빈도수를 보인다.
    7. 作名上 소재는 사람의 외모·신체적 특성이 제일 많이 이용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가 쓰이고 있다.
    8. 현대 중년층 이상의 여자 이름에서 절대 다수를 점하는 '-子' 字는 본래 고대 중국에서 특권 의식 및 남성 존중 사상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6세기경부터 皇室 家系 및 최고위 관리 이름에 사용된 예가 발견되는데, 서민층에서는 일종의 諱字인 양 감히 사용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는 거의 모든 일본 여성에게 '-子'가 85% 이상 쓰이며 급속히 획일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도 그 영향으로 절대 다수의 여성명이 '-子'였었고, 아직도 그 왜식 잔재는 남아 있는데, 이는 식민 사관의 청산이라는 입장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9. 본고의 자료는 2천여 년 동안의 이름이므로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다각적으로 면밀히 검토하기 곤란하였다. 앞으로는 각 시대별로 나누어 별도로 공시적 연구가 행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현대편이 사정상 여기서 생략되어, 이 글은 미완성품이 된 셈이다. 이 현대 인명론은 다른 기회에 논의하고자 한다. 이름 하나하나의 전거를 밝히는 일도 너무 번거로워 생략되었는데 이것도 다음 기회에 상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기타 별도의 독립 주제로 연구되어야 할 분야들로서 아래와 같은 것이 설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漢字 人名論, 男性名論, 女性名論, 字論, 號論, 諡號論, 姓氏論, 姓名 素材論, 姓名 音韻論, 姓名 形態論, 姓名 意味論, 姓名 通時論, 姓名 共時論, 姓名 位相論, 作名法論, 姓名 表記 文字論, 比較 人名論 등등

우리의 성명학 연구는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이 방면에 많은 사람들의 진지한 탐색이 절실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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