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번역 문화
문용/서울대 교수·응용 언어학
1. 오역과 상업주의
우리가 번역을 운위할 때 당장 문제가 되고 또 마땅히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오역(誤譯)의 문제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고 있는 번역물 가운데서 오역을 찾아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의 모 영자 신문만 봐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영자 신문이 영어 학습자를 위해서 제공하고 있는 간지(間紙)인 한국어 해설판에 다음과 같은 번역이 실려 있다.
1. | Mere Girl |
멍청한 여자 아이 |
Little Johnny was second in his class. The top place was held by a girl. "Surely, son "said his father, "you are not going to let yourself be beaten by a
mere girl." "Well, you see, Dad," Johnny explained, "girls aren't nearly as
mere as they used to be."
(꼬마 죠니가 그의 반에서 이등을 했다. 일등의 자리를 여자 아이가 차지했다. “얘야, 물론”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단순한 여자 아이한테 질 작정은 아니겠지.” “글쎄요. 아빠. 보시다시피,” 죠니가 설명했다. “여자 아이들은 예전처럼 멍청하지 않아요.”)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1)에 나오는 mere의 의미는 “단순한, 단지…에 불과한”이다. 그렇다면 (1)에서 mere girl을 ‘멍청한 여자 아이’라고 옮기고 있는 것은 오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기는(1)에는 mere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두 번은 ‘멍청한’으로 옮겨져 있고 한 번은 ‘단순한’으로 옮겨져 있다. Mere를 ‘단순한 ’대신 ‘멍청한’으로 바꾼 것은 나름대로 머리를 쓴 (오역이 아니라) 의역(意譯)이라고 (1)의 영문을 번역한 이는 주장할런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오역 시비가 벌어질 때 그것이 오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문제는 심심찮게 논의거리가 되는 것이다. Mere의 문제를 좀 더 따진다면 mere는 원래 명사 앞에서만 쓰이고 명사가 지니는 내재적 속성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A mere boy를 ‘애송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mere가 boy가 갖는 ‘아직 철이 없고 어린’이란 속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A girl이 통념상 ‘멍청한’이란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1)에서 mere를 ‘멍청한’이라 번역해도 오역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girl은 ‘멍청한’이란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 남자들이 흔히 여자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a mere girl은 ‘그까짓 여자 아이’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 주위에 불량 식품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번역물의 오역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많은 소비자들이 불량 식품을 불량품인 줄 모르고 먹고 있듯이 우리가 오역을 오역인 줄 모르고 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국민 건강을 해치는 불량 식품이 적발되어서 마땅하다면 번역물의 오역도 마땅히 지적되고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불량 식품의 적발은 보건 당국에 맡기면 되지만 오역의 지적이나 비판은 역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인신 공격으로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어, 우리나라의 경우 오역의 지적이나 비판이 건설적으로 이루어지는 풍토는 아직 조성이 안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둘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가령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전문가의 경우라도 좀처럼 오역을 피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와 역사가 묻혀 있고 스며 있는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익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오역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격하여야 하지만 오역의 불가피성 자체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에도 나오는 ‘번역 문화’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번역이 필요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또는 문화적 요건하에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받아들여지는 나의 ‘행위적 유형’을 가리킨다는 전제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상업주의적 또는 비도덕적 중역(이중 번역)과 중역에서 생겨나는 오역이다. 이런 중역과 오역의 대표적 예는 인기 있는 (추리 소설 등) 영미(英美) 대중 소설의 번역에서 발견된다.
이런 번역물들은 문필가나 대학 교수의 이름을 빌렸을 뿐 실제로는 일본 번역본이 대본이 되고, 일본어를 아는 번역의 하청업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하청업자들이 사용한 일본 번역본에 나오는 오역은 영락없이 번역본에도 오역으로 나타난다. 동일한 번역본을 복수의 출판사가 사용하기 때문에 역자는 달라도 오역은 유사한 경우가 번번이 생긴다. 한술을 더 뜨는 출판사는 중역했다는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 일본어 번역의 표현을 일부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바꾸어지는 표현은 일쑤 원문에서 더 멀어지기도 한다.
1920년대나 30년대라면 또 모른다. 1980년대에도 이와 같은 번역은 성행했다. 앞서 언급한 불량 식품에 정말 비유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상업주의적 또는 비도덕적 중역과 오역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번역 문화가 건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이와 같은 중역에 관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어 중역의 흔적이 농후한 번역물에서 오역의 사례를 몇 가지 골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Mrs. Ferras died on the night of the 16th-17th September…a Thursday. I was sent for eight o'clock on the morning of Friday the 17th.
There was nothing to be done. She had been dead some hours…
(Agatha Christie, The murder of Roger Ackroyd) |
(Agatha Christie, The Mysterious Affairs at Styles) |
번역과 관련해서 논의가 끊이지 않는 이론과 직역과 의역의 문제만 잠시 살펴보아도 번역의 얄궂은 특성의 일면이 드러난다.
직역은 ‘낱말 대 낱말의 번역’(word for word translation)을 원칙으로 삼는 번역을 말한다. 직역을 하다 보면 두 언어 사이의 문법(문장) 구조의 차이가 클수록 목표 언어의 고유한 문법(문장) 구조와는 차이가 벌어지는 생경한 문장이 만들어진다.
의역은 이러한 폐단을 지양하기 위한 대안으로 원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우선 찾아내어 만약 원문의 필자가 목표 언어로 글을 썼다면“이러이러한 뜻을 이러이러하게 표현하겠지”라는 가정에서 그 뜻과 표현을 찾아내는 번역을 가리킨다.
한국어와 영어의 경우를 놓고 따져 보면 애당초 엄격한 의미에서의 직역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Good Morning을 “안녕하십니까”로 번역하는 것은 이 두 개의 단어가 합쳐서 이루어진 의미를 하나의 단위로 본 것인데, 의역이란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 또는 복수의 문장이 만드는 문장의 묶음을 하나의 의미 단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의역은 자칫하면 ‘번안(飜案)’이 될 위험성도 없지 않다.
다음 (5~6)에서 (a)는 이른바 직역의 범주에 들어가고, (b)는 의역의 예가 된다.
5. The business made me go there.
a. 그 용무가 나를 그곳에 가게 만들었다.
b. 그 용무 때문에 나는 그곳에 갔다.
6. (A: To speak frankly, I need at least ten thousand dollars.)
B: Do you think money grows on trees?
a. 돈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생각하니?
b. 만불이 애 이름인 줄 아니?
직역과 의역의 논의에서는 그 중간적인 번역이 온당하다는 주장도 있고, 이 주장은 중간을 택함으로써 양자의 장점을 취할 수 있다는 추론에서 나온 것이지만, 의역과 직역의 타당성 여부는 이와 같은 주장이나 역자 자신에 달려 있다기보다 원문이 지니는 언어적 특성에 달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순수 과학 논문 같은 것은 비교적 (상대적인) 직역이 가능하다. 그것은 과학 논문이 지니는 객관적 화법이나 과학 술어가 함축적 의미를 지니지 않아서, 소재 언어와 목표 언어 사이에서 의미상 1대 1의 관계를 용이하게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공리적으로 따진다면 과학 논문 같은 것은 실질적 지식의 전달을 주기 때문에 그 번역은 형식이 무시되고 설명적이어도 무방하다. 표현의 재현이나 형식의 정확성이 요구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문학 작품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직역이 필요 없는 전자는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나아가서는 구문까지도 꽤 근사하게 옮길 수가 있고, 글자 그대로 형식과 내용의 직역이 필요한 문학 작품은 형식과 내용을 살리기 위해서는 직역의 필요성과는 반비례로 원문의 내용에 역자의 창작성이 가미되는 의역적 요소가 끼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번역은 이율배반적인 얄궂은 일면을 지니고 있다.
사족이 되겠지만 번역이 원문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일단 번역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번역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단적으로 우리는 A라는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감정이나 사상을 B라는 언어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할 것 없이 번역과 원문이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해서 번역이 원문을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오역을 해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원문을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 번역이고 보면 번역은 가능한 한 원문에 접근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3. 악역(惡譯)과 악문(惡文)
번역에서 오역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악역(惡譯)이다. 악역은 악문(惡文)에 의한 번역을 말하고 번역에서의 악문은 흔히 지나친 직역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예부터 들어 보자.
7. A business letter is a letter written to or from a place of business. It usually has one of the following jobs to do: order something; ask for an adjustment; request information.
To get the job done, you must give cleat, exact, and complete information. Try to put yourself in the place of the person receiving the letter.
8. 상용 편지는 사업하는 곳끼리 서로 주고받는 편지이다. 그것은 보통 다음과 같은 임무들 중의 하나를 갖는다. 무엇인가를 주문하는 임무, 어떤 조정을 요구하는 임무, 정보를 요구하는 임무이다.
그 임무가 수행되도록 여러분들은 간결하고 정확하고 또 완전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편지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라.
이(7)의 번역인 (8)을 굳이 오역이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8)이 악역의 예는 된다. 영문을 전제로 하지 않을 때 이 (8)처럼 상용 편지를 설명하는 한국어 문장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8)은 결코 한국어의 문장답지가 않다.
이(8) 같은 번역이 흔히 나타나는 것은 영어를 외국어로 공부하는 교실에서이고, 교실에서의 이와 같은 직역식 번역을 굳이 합리화시키자면 직역은 가능한 한 원문의 구조를 재생시킴으로써 한국어와는 문법(문장) 구조가 다른 외국어의 문법(문장) 구조를 익히게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는 이유를 댈 수가 있다.
말을 바꾸자면 직역식 번역은 의미상 원문에 대응하는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하고 영어의 문법(문장)구조를 옮기려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당초 영어와 한국어의 문법(문장) 구조는 차이가 있어, 영어의 문법(문장) 구조를 그대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영어의 구문을 따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 번역의 경우,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원문의 의미를 독자가 가장 이해하기 쉽게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고, 가장 이해하기 쉽게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서는 말할 것 없이 가장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
(7)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9. 상용 편지는 상사와 상사 사이에서 업무를 목적으로 오고 가는 편지를 말한다.
상용 편지는 흔히 물건을 주문하거나 어떤 업무상의 타협이 필요하거나 상용상 알고 싶은 사항이 있을 때 그런 사항을 문의하는 구실을 한다. 이와 같은 구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편지의 내용이 분명하고 정확하고 빠트린 것이 없어야 한다. 그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편지를 받는 입장이 되어서 내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자들에게(8)보다 (9)가 이해하기 쉽다면 (7)의 번역은 (8)보다는 (9)에 가까워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8)은 (9)와 같은 번역을 위한 기초 작업의 구실을 한다면 할 뿐이다.
이 말은 영어 수업 시간에서의 우리말 번역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조금 앞에서 필자는 영어 수업 시간에는 우리말답지 않은 지역이 합리화될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말할 것 없이 이와 같은 직역은 외국어의 문법 또는 문장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편법이요 기초 작업이지, 이것이 그대로 우리말 번역으로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8)과 같은 기초 작업으로나 머물러 있어야 할 번역이, 그러니까 우리말답지 않는 우리말이 우리 주위에는 허다하다.
이와 같은 직역에 가까운 번역과 그 원문을 비교해서 읽어 보면 우선 원문이 훨씬 수월하게 읽히고 이해하기가 쉽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원문은 자연스러운 그 나라의 언어로 쓰여져 있는데 반해서, 직역식 번역은 선택된 어휘가 일쑤 생경한 데다 소재 언어와 목표 언어의 문법(문장) 구조의 차이를 메워야 할 이차 작업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은 원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다. 원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원문을 읽을 때 수월하게 읽힐 정도로는 수월하게 읽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번역의 문장이 우리말답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국어 생활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는 오역보다는 악역에 더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악역보다 더 고약한 것은 번역의 포기이다.
필자가 말하는 번역의 포기는 단적으로 요즈음의 영화 제목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왕년에 The Third Man이란 영화가 있었다. The Third Man은 우리나라에서는 ‘제3의 사나이’라는 이름으로 상영이 되었었고 오슨 웰스가 주연을 맡았던 이 ‘제3의 사나이’는 명연기와 긴박감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명화로 오늘날도 많은 영화 애호가에 의해서 기억되고 있다. 오늘날 ‘제3의 사나이’가 다시 우리나라에서 상영된다면 아마도 영화 제목은 ‘제3의 사나이’가 아니라 ‘더드 맨’이 되지 않을까.
이‘더드 맨’이 필자가 말하는 번역의 포기이고, 근래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던 영화의 제목으로 이렇게 번역을 포기된 한심한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타워링
‘타워링’의 원명은 Towering Inferno(높이 솟은 지옥)이다. ‘지옥’을 떼어 버려 ‘높이 솟은’이란 뜻을 갖는 towering을 소리 그대로 옮긴 것이 ‘타워링’이다.
(2) 어게인스트
‘어게인스트’는 원명인 Against All Odds(역경을 디디고)에서 전치사인 ‘어게인스트’만을 떼어 내어 만든 기상천외의 영화 제목이다.
(3) 스워드
‘스워드’의 원명은 The Sword and The Sorcerer(칼과 마술사)이다. 이유 없이 and the Sorcerer를 탈락시키고 차라리 ‘소오드’에 가까운 sword의 발음을 왜곡시킨 영화 제목이 ‘스워드’이다.
그 밖에 Nine and half weeks를 적당히 줄여서 만든 ‘나인 하프 위크’가 있고 Friday the 13th를 둔갑시킨 ‘플랙후라이데이’가 있고, Dressed to kill에서 to를 뺀 ‘드레스트킬’이 있다. 그런가 하면 영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뜻이나 구문 이해가 어려운 the Jury의 소리를 그대로 옮긴 ‘아이더 주어리’도 있다.
도대체 미국에서 우리나라의 영화가 상영된다고 가정할 때, 가령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거두절미해서 ‘하는 것은 날개’로 바꾸고 그것을 소리 그대로 옮겨서 선전하고 광고하는 일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일이 예사로 이루어지고 있고, 날이 갈수록 성행할 기세인데(이런 현상을 한탄하는 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량 식품보다 유해한 이와 같은 현상을 멀쩡한 당국이 단속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번역의 포기가 자행되고 있는 큰 이유는 말할 것 없이 외래어 또는 외래어처럼 보이는 의사(擬似) 외래어에 대한 선호 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저 ‘회색’하면 ‘우중충하게’ 들리고 ‘그레이’하면 세련되어 보이는 심리 말이다.
이런 외래어 선호 심리는 특히 상업주의와 영합해서 각종의 상표나 상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이 영화 제목에까지 영향을 미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이유 말고도 좀 더 근본적으로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악역의 문제나 번역의 포기의 문제는 역시 그런 번역을 하거나 번역과 관련을 갖는 사람들의 모국어(소재 언어)와 외국어(목표 언어)에 대한 지식이 덜 된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정말 국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국어답지 않은 생경한 직역에 만족하며, 정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영화 제목을 ‘어게인스트’나 ‘타워링’으로 옮겨 놓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이 말은 번역가는 누구 못지않게 국어에 대해서 애착과 예민한 감각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그만큼 외국어에 대해서도 통달하여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우리 주위에 국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흔히 그들은 외국어를 그만큼 알지 못하고, 우리 주위에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은 많지만 흔히 그들은 국어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못하고 국어에 대한 감각이 예민치 못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번역 문화가 건전하기 위해서는 국어와 외국어를 똑같이 잘 하는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 드문 직업적이며 전문적인― 번역가의 출현이 요망된다.
이 직업적이며 전문가적인 번역가가 말하자면 ‘쟁이’적인 정신을 발휘해서 번역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고, 번역을 학문으로 다루는 작업이 활성화되어서 그를 측면에서 도와줄 때, 우리는 우리나라의 건전한 번역 문화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後 記
1. 필자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문제와 관련된 특정 자료가 중심이 되고 말았다. 이 점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2. 위에서 언급한 영화 제목과 관련된 부분은 필자의 동료인 서울대 인문대의 천승걸 교수에 의해서 이미 지적된 바 있고, 필자가 든 예의 대부분은 천승걸 교수의 ‘제3의 사나이와 더 더드 맨’(英文學 교수 에세이 21人選)에서 따온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서 필자에게 자료를 제공해 준 그의 후의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