吏讀·鄕札 表記法의 原理와 實除

南 豊 鉉 / 檀國大 敎授, 國語學

Ⅰ. 吏讀와 鄕札의 개념
    漢字를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던 表記法을 借字 表記法이라 한다. 이 表記 資料는 三國 時代부터 朝鮮朝 末期까지의 것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표기법상 여러 변천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사용 범위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吏讀·鄕札·口訣·固有 名詞 表記(語彙 表記)로 나뉜다.
    吏讀란 말은 廣意의 吏讀와 狹意의 吏讀의 두 개념으로 쓰인다. 廣意의 吏讀는 狹意의 吏讀는 물론, 鄕札, 口訣, 固有 名詞 表記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니 借字 表記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이다. 吏讀가 이러한 개념으로 쓰인 것은 이 명칭이 생겨난 초기부터였다. 李承休의 帝王韻記에서 '薛聰이 吏書를 지었다.'고 한 것이나, 訓民正音 序文에서 '薛聰이 吏讀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 것은 吏讀를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三國史記에서는 '薛聰이 우리말로 九經을 읽었다'고 하였고 三國遺事에서도 '薛聰이 우리말로 中國과 우리의 民間에서 사용하는 物名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六經文學을 訓解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薛聰이 그의 學問을 借字 表記로 기록함으로써 그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던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이두와 차자 표기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시대 이후는 漢文이 교양인들이 쓰는 文語임에 대하여 吏讀는 吏胥을 중심으로 하여 민간에서 쓰이는 文語였으므로 이와 같이 쓰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吏讀을 이와 같이 借字 表記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하는 것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협의의 吏讀란 '吏讀文에 쓰인 우리말'을 가리킨다. 吏讀文이란 實用的인 文章으로서 散文이 중심이 된다. 시대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漢文과 우리말이 혼용되는 文體이다. 行政 文書에 주로 쓰였지만 민간에서도 書簡이나 造成記, 發願文 등에 널리 쓰인 實用文이다. 이는 三國 時代부터 近代까지 사용되었고 保守性이 강하여 近代의 이두이면서도 中世나 古代의 國語을 다분히 유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 吏讀란 이 협의의 개념으로 쓴 것이다.
    鄕札이란 명칭은 옛 기록으로서는 均如傳에 오직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崔行歸가 均如의 普賢十願歌를 漢譯하기 위하여 편하면서 漢文(唐文)에 대하여 普賢十願歌와 같은 우리말의 문장을 鄕札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도 본래는 吏讀과 같이 借字 表記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는 鄕歌와 같이 우리말을 全面的으로 表記한 借字 表記를 가리키는 데 쓰이고 있다. 우리말을 全面的으로 表記한 借字 表記 資料는 향가밖에 알려진 것이 없으므로 현재 鄕歌의 표기법이 곧 향찰 표기법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吏讀와 鄕札의 이러한 구별은 표기된 자료를 세부적으로 검토하면 그 한계를 명쾌하게 구별지을 만한 특징들을 지적하기 힘들다. 특히 차자 표기가 우리말의 유일한 표기 수단이었고 이 표기가 후대보다는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고려 시대나 신라 시대로 올라가면 그 한계를 긋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다만 散文 表記 吏讀는 우리말의 반영보다는 전달 내용이 중요하므로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의 표기가 소홀해질 수 있지만, 詩歌의 표기는 詩로서의 形式이나 韻律도 중요하므로 그 표기가 보다 충실해지지 않을 수 가 없었을 것이다. 또 吏讀文은 文書로서의 자리가 굳혀지고 그 사용 범위가 한정되므로 일정한 套式이 있고 비교적 한정된 套語가 사용되지만, 鄕歌는 詩情의 發露에서 지어지는 것이므로 이러한 제약이 없이 詩作 당시의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 先人들의 文字 生活을 한문과 국어 문장으로 兩分하면 순수 국어 문장 표기를 지향하는 것이 鄕札이고 이보다는 漢文的인 성격을 지향하거나 그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띠는 것이 吏讀文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다. 그 밖에도 吏讀는 三國 時代부터 近代까지 사용되었지만, 鄕札은 統一 新羅 時代에 완성되어 고려 시대까지만 이어졌던 것으로 믿어지므로 이것도 한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의 鄕札 表記는 普賢十願歌와 悼二將歌뿐이지만 13세기 중엽의 鄕藥救急方의 鄕名 表記에도 이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으므로 자료상으로만 보더라도 이 시대까지는 鄕札 表記法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口訣은 漢文의 原典에 吐를 단다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자료와 쉽게 구별이 된다. 이는 漢文을 정확하고 쉽게 해득하기 위하여 발달한 것인데 크게 釋讀 口訣과 音讀 口訣로 나뉜다. 釋讀 口訣은 漢文을 우리말로 해석하여 읽는 방법을 토로써 표시한 것이다. 현존 자료는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지는 舊譯仁王經 釋讀 口訣이 最古의 것이다. 이러한 구결은 늦어도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薛聰이 訓解六經하였다는 것도 바로 이런 釋讀口訣이었을 것이다. 이 口訣이 吏讀 表記法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鄕札 表記法의 母胎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니 借字 表記法을 論함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音讀 口訣은 漢文을 音讀하면서 그 句讀處에 우리말의 助詞나 語尾를 넣어서 읽는 것이다. 漢文이 널리 보급되고 그 學習 方法이 발달되면서 발달한 것이니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료상으로는 15세기 이후의 것이 남아 있으나 鄭夢周의 詩(經) 口訣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口訣은 吏讀의 漢文化 傾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固有 名詞 表記는 人名, 地名, 國名 등의 固有 名詞 表記가 중심이 되어 왔으나, 官名이나 物名 등의 普通 名詞도 포함되므로 語彙 表記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한 것이다. 이는 우리말의 文章에는 물론 漢文 文脈에도 사용되었으므로 文章의 借字 表記와 구별한 필요가 있다. 漢文이 이 땅에 들어와 우리 先人들이 우리의 것을 漢文으로 표현할 때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을 것이니 借字 表記法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 표기는 表音字만으로 표기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 表音字들은 後代까지 이어져서 文章 表記의 발전에도 공헌을 한다.
    이와 같이 借字 表記 資料는 네 가지로 나뉘지만, 表記法上의 근본 원리는 같으므로 하나로 묶어 借字 表記法이라 한다. 먼저 借字 表記法의 原理를 밝힌 다음 吏讀와 鄕札 表記法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Ⅱ. 借字 表記法의 文字 體系
    表記法은 文字 體系와 그 運用 法則으로 크게 나뉜다. 訓民正音에서 자음과 모음의 문자 체계를 보인 다음 그 운용법을 규정한 것은 이러한 표기법의 원리를 가장 간명하게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文字 體系는 한 언어를 모두 기록할 수 있으면서도 간결한 것일수록 우수한 것이다. 한글과 같은 音素 文字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借字 表記法의 文字 體系는 漢字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자의 문자 체계에 의지하게 된다. 한자의 문자 체계가 복잡한 것에 비례하여 차자 표기법의 문자 체계도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빌어오는 과정에서 차자 표기법 나름의 문자 체계가 형성되어 왔다.
    이 文字 體系의 原理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하나는 한문의 學習 方法에서 얻어진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원리이다.
    漢文의 學習은 原文을 音讀한 다음 우리말로 새기는 두 과정을 밟고 있다. 이러한 방법이 언제부터 발생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밝힐 수가 없지만 漢文이 이 땅에 들어온 초기부터였을 것이다. 외국어의 학습, 특히 文語의 학습은 이 두 과정을 취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三國 時代 借字 表記 資料들을 보면 당시 이 방법으로 한문을 학습하였던 것으로 믿어지는 증거가 있다. 한문을 새기는 방법이 체계화되면 漢字에 제한된 범위에서의 訓을 부여하게 된다. '天'에 대하여 '하', '地'에 대하여 ''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한자를 音으로 읽는 방법과 訓으로 읽는 방법이 성립되어 이 音과 訓이 차자 표기법의 문자 체계를 이루는 첫 원리가 된다.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방법은 表意 文字인 漢字의 뜻을 살려서 이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뜻을 버리고 표음자로만 이용하느냐의 둘로 나뉜다. 前者를 '讀'의 原理라 하고 後者를 '假'의 原理라고 한다. '讀'이란 漢字가 본래 表意 文字이므로 이를 읽으면 자연 그 뜻도 살려서 읽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고 '假'란 한자가 표의 문자이지만,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빌어서 쓴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音과 訓, 讀과 假의 原理가 적용되어 漢字로부터 借字 表記法의 文字 體系가 나오는 과정을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  音讀字
   
 
 
     
漢字    →  音假字
   →  訓讀字
     
   
   
   →  訓假字

이 문자 체계를 좀더 부연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音讀字:漢字를 音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하는 차자.
音假字:漢字를 音으로 읽되 그 表意性은 버리고 表音性만을 이용하는 차자.
訓讀字:漢字를 訓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하는 차자.
訓假字:漢字를 訓으로 읽되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을 이용하는 차자.

이 가운데 音讀字와 訓讀字를 묶어서 讀字(表意字)라고 할 수 있고, 音假字와 訓假字를 묶어서 假字(表音字)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音과 訓의 구별이 필요 없거나 그 구별을 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音讀字는 漢文에서의 漢字의 용법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말의 표기에 사용된 것이라고 보면 이는 우리말에 들어온 中國語 借用語의 表記이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는 글에서 한자로 표기된 漢字語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漢字語는 중국어에서 借用한 것도 있지만, 국어 내에서 조어된 것도 있음은 古今이 같다. 오히려 借字 表記 文體에서는 이 경향에 의한 조어가 현대어보다는 더 생산적이었다. 때로는 借字 表記 文字에 漢文句가 대량으로 사용되어 漢文의 語順만을 바꾸었거나 한문에 吐를 단 듯한 文章이 사용되어 한문과 차자 표기 문장과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수가 있다. 이 경우 이를 國語 文章으로 보느냐 漢文 文章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어느 쪽의 입장에 서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국어 문장으로 보면 이 경우의 漢字는 모두 音讀字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音讀字는 漢文에서 무제한으로 빌어올 수 있는 것이 되므로 漢字와 獨立하여 音讀字의 文字 體系는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말에 사용되는 漢字語는 漢文의 용어 그대로가 아닌 제한된 범위에서의 사용이므로 音讀字의 범위가 한문에서 사용되는 한자의 범위보다는 적다고 하겠다.
    訓讀字는 漢文의 單語에 해당하는 漢字에 국어의 새김이 대응하는 범위에서 사용되는 借字이다. 두 言語 間의 對應은 日常用語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만 中國語의 특수한 개념을 나타내는 漢字는 국어에는 대응하는 訓(새김)이 없으므로 이러한 漢字는 訓讀字로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訓讀字의 수는 音讀字의 수보다는 제한된다고 하겠다. 訓讀字 가운데는 한 글자가 여러 訓으로 읽힐 수도 있고, 여러 글자가 같은 訓으로 읽히는 것도 있다.
    音假字란 漢字의 形成 原理인 六書 가운데 假借의 原理를 빌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中國語로는 번역할 수 없는 외래어를 중국인들이 한자의 音을 이용하여 표기한 것이 假借의 한 방법인데 固有 名詞는 이 방법에 의하여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의 音假字도 초기에는 漢譯할 수 없는 우리의 固有 名詞를 표기하다가 보편화되어 일반 단어는 물론 조사와 어미를 표기하는 데에도 이용된 것이다.
    音假字의 수는 시대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느 정도 한정된 수의 글자가 사용된다. 차자 표기법의 발생 초기인 固有 名詞의 표기 단계에선 한문의 假借字에 준해서 사용되었을 것이므로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자 표기법이 발달하여 문장의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는 단계에 이르면 제한된 수로 한정되는 音假字의 문자 체계가 이루어진다. 後期 中世 國語 時代에 口訣의 吐를 표기에 사용된 借字는 110字 내외인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 가운데는 訓假字도 이지만 音假字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口訣의 吐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는 音假字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고 이것이 각 시대의 吏讀이나 鄕札의 표기에 응용되었고 영향을 준 것으로 보면 吏讀와 鄕札에 사용된 音假字의 수도 이러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後期 中世 國語의 口訣에 쓰인 音假字는 音讀 口訣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된 것이지만, 統一 新羅 時代나 高麗 時代의 吏讀나 鄕札은 釋讀 口訣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믿어지므로 音假字의 수가 이보다는 증가할 것이다. 鄕藥救急方의 鄕名 表記에 사용된 音假字의 수는 단어의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111字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한된 수의 音假字가 국어의 음절 체계에 준하여 어느 정도의 체계를 이루고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音假字는 單音節語를 표기하는 한자에서 빌어온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音節 文字이다. 다만 우리말의 音節 末 子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에 '只(ㄱ) 隱(ㄴ), 乙(ㄹ), 音(ㅁ), 邑(ㅂ), 叱(ㅅ)'이 있어, 이것이 音節 文字性을 벗어나는 것이다. 音假字에는 같은 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글자가 사용되는 예가 흔히 있다. 鄕藥救急方을 보면 '古, 高, 苦'가 '고'音의 표기에, '包, 苞, 甫, 鮑'가 '보'音의 표기에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 같은 글자가 前代의 音과 當代의 音을 나타내기도 한다.

'彌'는 吏讀와 鄕札에서는 '며'로 읽힌다. 이는 古代의 漢字音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鄕藥救急方에선 '미'音의 表記로 사용되어 당대의 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訓假字는 訓讀字에서 발달한 것이다. '以'字는 漢文의 介詞로서 국어의 造格 助詞 '-로'를 표기하는 데 주로 쓰인다. 이는 漢文의 원뜻에 따라 쓰인 것이므로 訓讀字이다. 이것이 '幷以/아오로'에도 쓰였는데 이는 '아올+오'로 분석되는 것이므로 '以'의 원뜻과는 무관한 것이다. 訓讀字가 訓假字로 바뀐 것이다. 訓假字의 用例는 語彙 表記(固有 名詞 表記)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늦어도 6세기 중엽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藯州川前里書石의 追銘에 新羅의 官名인 '波珍干支'가 나타난다. '波珍'은 '바돌(海)'로 읽히는 것으로 '珍'이 '돌'로 읽히는 것은 訓에 의한 것이다. 그 表意性이 반영되지 않았으니 訓假字이다. 이와 같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訓假字가 쓰이긴 했지만 그 수는 音假字에 비하면 매우 적다. 鄕藥救急方에서는 音假字가 111字로 쓰였는데 訓假字는 21字가 쓰여 그 5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訓假字도 音假字와 같이 單音節을 나타내는 것이 원칙이다. 그 訓이 2音節인 경우에도 訓假字로 쓰이면 單音節을 나타낸다. '靑'의 訓은 '프르-'인데 訓假字로서는 單音節 '플'을 표기하는데 쓰인다. '加'의 訓도 '더으-'이지만 訓假字로서는 '더'音의 표기에 쓰인다. 訓假字는 그 수가 적으므로 국어의 音節數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따라서 訓假字만으로 표기되는 독자적인 표기법은 성립될 수가 없다. 音假字와 함께 假字로서 이루어지는 문자 체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표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音假字와 訓假字의 구별은 엄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별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글자가 音假字와 訓假字로 쓰이는 것도 있다. 鄕藥救急方에선 '加'가 音假字로선 '가', 訓假字로선 '더'로 읽힌다. '耳'도 音假字로선 '', 訓假字로선 '귀'로 읽히고 있다. 이 假字들은 起源的으로는 固有 名詞 表記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初期의 固有 名詞 表記는 音假字만으로 표기되었을 것이지만, 後代로 오면서 訓假字도 쓰이게 된 것이다. 三國 時代 新羅의 初期의 資料에서 訓假字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固有 名詞 表記가 상당히 발달된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借字 表記法의 네 가지 文字 體系를 설명하였지만 表意 文字性과 表音 文字性이 혼합된 문자 체계에선 이 둘의 한계가 항상 분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둘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借字가 있을 수 있으니 讀字이면서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擬似 讀字가 있을 수 있고 假字이면서 그 表音字的 性格에 어느 정도의 表意性을 부여하여 사용하는 擬似 假字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2차적으로 擬音讀字, 擬訓讀字, 擬音假字, 擬訓假字가 있게 된다.
    '靑黛'는 여인의 눈썹을 그리는 染料인데, 藥草인 藍(쪽풀)을 재료로 만든다. 그런데 鄕藥救急方에 보면 이 제품의 이름이 提喩에 의하여 그 재료인 藍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言衆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俗語가 되었다. 이 俗語를 鄕藥救急方에선 '靑台'로 표기하였다.'靑'은 '靑黛'의 '靑'에서 온 것이니 이는 분명히 音讀字이다. 그러나 이 '靑'은 '黛'와 결합하면 그 뜻이 분명하지만 '台'와 결합하면 그 본래의 뜻은 약화되어 假字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靑'은 擬音 讀字라 할 수 있는 것이다.
    普賢十願歌의 禮敬諸佛歌에 쓰인 '心未筆留 慕呂白乎'의 '慕/그리-'는 訓讀字이다. 그러나 그 漢譯歌를 보면 '書/그리-'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語原으로 보면 '그리-(慕)'가 '書(그리-)'의 뜻에서 온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이 文脈에서 '그리-'는 '書'의 뜻이므로 '慕'字의 讀字性은 그만큼 약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慕'는 擬訓讀字이다.
    鄕藥救急方에서 早莢의 鄕名은 '注也邑(주엽)'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早莢의 차용어이므로 '注也邑'은 이를 순수한 音假字만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것이 같은 책에서 '鼠厭木(쥐염나모)'로도 표기된다. '鼠'는 訓假字로서 '쥐'를 '厭'은 音假字로서 '염'을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鼠'와 '厭'자를 사용한 것은 이 나무의 특성을 은연중 암시하기 위하여 선택된 借字이다.

'鼠(쥐)'는 이 나무의 특성이 작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厭'은 이 나무에 벌레 구멍같은 것이 있어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 즉 '鼠/쥐'와 '厭/염'은 순수한 訓假字나 音假字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表意性을 감안하여 선택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鼠'는 擬訓假字이고 '厭'은 擬音假字인 것이다.
    이와 같이 '擬'라는 원리는 借字 表記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讀과 假의 기본 원리가 적용된 다음 2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讀, 假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고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讀, 假는 차자 체계에서 필수적으로 적용돼야 하는 것이지만 '擬'는 수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讀, 假의 原理를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Ⅲ. 吏讀와 鄕札 表記의 實際
    吏讀와 鄕札의 表記는 어느 한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변천되어 온 것이다. 吏讀는 三國 時代부터 近代까지의 자료가 남아 있어 각 시대의 변천상을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지만 鄕札은 遺事의 鄕歌 14首와 均如傳의 11首, 悼二將歌 1首밖에 없어 그 表記法의 변천상을 추적하기가 어렵다. 이에 따라 吏讀 表記의 변천상을 먼저 설명하고 다음에 鄕札 表記의 實際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三國 時代의 吏讀文은 讀字만으로 표기되는 것이 특징이다. 助詞나 語尾를 표기하지 않고 讀字들을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같은 吏讀文에서도 우리말의 語順과 漢文의 語順이 함께 쓰였다. 敬州川前里書石의 原銘을 보면 '善石得造(좋은 돌을 얻어 만들었다)' '作書人(짓고 쓴 사람)'과 같이 우리말의 語順으로 讀字들을 배열한 句節이 있는가 하면 '始得見谷(처음으로 골짜기를 볼 수 있었다)'와 같이 漢文의 語順으로 배열한 구절이 섞여 쓰이고 있다. 丹陽新羅赤城碑(眞興王代)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壬申誓記石(552 ?, 612 ? ), 戊戌塢作碑(578 ?), 南山新城碑(519 ?)들은 讀字들을 완전히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고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 失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이는 壬申誓記石銘의 일부분이다. 현대어로 해석하면

壬申年 六月 十六日에 두 사람이 함께 다짐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다짐한다. 지금부터 三年以後, 忠道를 執持하고 過失이 없기를 다짐한다. 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느님께 큰 죄를 얻음을 다짐한다. 만약 나라가 不安하고 크게 어지러운 세상이면 가히 모름지기 행할 것을 다짐한다.

와 같다.
    당시 이러한 문장들을 이렇게 읽었는가, 音讀을 하였는가, 아니면 우리말로 풀어 읽는 釋讀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단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재까지의 연구들을 보면 壬申誓記石銘은 音讀한 것으로 본 주장이 있고 戊戌塢作碑銘이나 南山新城碑銘은 釋讀을 한 것으로 본 연구가 있다. 音讀을 하거나 釋讀을 하거나 뜻이 전달되는 데 있어서는 같은 것이므로 개인에 따라서 읽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音讀되었다면 變體 漢文的인 성격이 강한 것인데 이러한 文體는 統一 新羅 時代의 資料나 高麗 時代의 자료에도 나타난다. 統一 新羅 時代의 것으로는 810年의 記錄인 昌寧仁陽寺碑文이 대표적이고 高麗 時代의 것으로는 若木淨兜寺造塔記(1031)나 鄕藥救急方에서도 볼 수 있다. 若木淨兜寺造塔記는 대표적인 이두문인데도 그 題目에 해당되는 部分이

太平十一年......若木郡內 巽方在 淨兜寺 五層石塔 造成形止記

라 되어 있다. 여기서 '巽方在'는 '巽方'에 있는'으로 풀이되는 것으로서 이 '在'는 國語의 語順에 따라 쓰였지만, 音讀되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鄕藥救急方에서도 藥材 牽牛子에 대한 이름을 '朝生暮落花子(아침에 피어 저녁에 지는 꽃의 씨)'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音讀字만의 表記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音讀字들을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는 表記法은 오랫동안 사회적인 공인을 받으면서 사용되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三國 時代의 吏讀文을 釋讀도 하였으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이두문과의 관계에서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이두문은 讀字들을 우리말의 語順으로 배열하면서 助詞나 語尾 등을 나타내는 吐를 넣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서 吐가 쓰인 最古의 吏讀文은 甘山寺阿彌陀如來造成記(720)이지만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新羅華嚴寫經造成記(755)이다. 이 造成記의 한 部分을 예로 하여 이 시대 吏讀文의 表記法과 아울러 三國 時代 吏讀文이 釋讀도 되었으리라고 보는 논거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經 成 楮根 香水 散 生長 令內弥 然後 若 楮皮脫 脫皮練......
    佛普薩像筆師走使人 菩薩戒 授 令 薺 食 右 諸人 若 大小便爲哉 若 師宿 若 食喫 爲者 香水 用 沐浴 令只但 作作處在之

이를 현대어로 직역하면

經을 이룬 法은 닥나무 뿌리에 香水를 뿌리어서 生長시키며 然後에 혹 楮皮脫이나 脫皮練이나 佛菩薩像筆師의 走使人이나 菩薩戒를 받도록 시키며 薺를 먹으며 위의 모든 사람들이 혹 大小便을 한다거나 혹 師宿을 한다거나 혹 밥을 먹는다거나 하면 香水를 써서 沐浴시켜어야 만드는 곳에 나아갔느니라.

가 된다. 이 글에는 漢文 文法的인 表現도 없지는 않으나 완전히 우리말의 語順으로 되어 있다. 밑줄을 그은 부분이 吐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實質 槪念을 나타내는 讀字들이다. 이 讀字들은 다음과 같이 音讀字와 訓讀字로 나뉜다. (訓讀字는 15세기 국어와 근대 이두를 참고하여 그 독법을 표시한다. )

音讀字:經, 法, 香水, 生長, 然後, 楮皮脫, 脫皮練, 佛菩薩像筆師走師人, 菩薩戒, 薺, 大小便, 師宿, 沐浴
訓讀字:成/일-, 楮/닥, 根/불휘, 散/빟-, 令/시기-, 若/다가, 授/받-, 食/먹-, 右/오, 諸/모, 人/사, 用/-, 作作/질질, 處/곳, 進/나-.

音讀字로서 표기된 단어 가운데, '楮皮脫(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사람)', '脫皮練(벗긴 껍질을 다듬는 사람)'은 우리말의 語順으로 音讀字를 배열하여 造語한 것이고 '師宿'은 그 뜻이 분명치 않은 것이나, 音讀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밖의 것은 中國語 借用語이다.
    訓讀字들은 吐에 의하여 訓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과 우리말과의 대응 관계에서 파악되는 것이 있다. 일례로 '成'字에는 '內'字가 吐로 쓰였는데 新羅 時代에는 '內'를 吐로 가진 讀者는 모두 訓讀字인 것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면 확인된다. '楮根' '食喫'과 같은 연결체는 漢文의 成語로 보기보다는 고유어에 쉽게 대응하는 말이어서 訓讀字로 본 것이다.
    吐에 쓰인 借字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訓讀字;者/-(으)ㄴ, 中/-긔, 等/-, 爲/-, 但/-(어), 在/견, 之/-(이)다.
音假字;內/-, 弥/-며, 那/-(이)나, 哉/-재, 只/기
訓假字:厼/-(이)금, 中/-긔

吐에 쓰인 訓讀字는 漢文에서 虛辭字로 쓰이는 것들이 주가 된다. '在'만이 實辭에서 온 것이지만 이것은 國語의 특성에서 虛辭的인 기능으로 발달한 것이다. 이 訓讀字들은 '但'字만을 제외하면 모두 三國 時代의 吏讀文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삼국 시대의 이두문이 비록 讀字만으로 표기되었다고 하더라도 釋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虛辭字들이 新羅 時代의 吐로 이어져서 訓讀되고 있기 때문이다.
    吐에 쓰인 音讀字는 '哉'를 제외하면 모두 三國 時代부터 固有 名詞 表記字로 쓰이던 借字이다. '哉'는 後代에 '制', '薺'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音假字인 것이 분명하지만 漢文에서도 語氣詞로서 文의 終結에 쓰인 점을 고려하면 讀字性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는 擬音假字이다.
    訓假字 가운데 '厼'은 '彌'字에서 변한 略體字로 생각되는 것이다. 즉 '彌→弥→厼'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彌'字에는 '그치다'는 뜻이 있어 그 古代 訓이 '금다'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中'은 訓讀字로도 쓰였지만 '然後中(연후에)'라고 한 것은 한문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어서 이 '中'을 국어의 처격 조사를 표기한 訓假字로 본 것이다. 이는 訓讀字가 訓歌字로 바뀌어 간 擬訓假字이다.

吐의 기능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또 하나의 기능은 末音 添記이다. 이는 借字 表記法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인데 이것이 이 造成記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즉 '令只'는 '令'의 訓이 '시기'인데 여기에 그 末音을 나타내는 '只/기'가 添記된 것이다. 이는 '시기+기'의 표기로서 '시기'를 나타낸다. 이러한 末音 添記는 비록 수의적이긴 하지만 借字의 讀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와 같이 吐 표기가 발달되었어도 국어의 조사나 어미들을 모두 표기하지는 않고 있다. 主格, 屬格, 對格을 나타내는 표기가 없고 語尾의 表記도 불완전하여 보충하여 읽지 않으면 안된다.
    이 이후의 新羅 時代 吏讀文은 대체로 이 造成記의 표기법에서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吐의 表記에서 讀字들이 假字化되어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記憶해 둘 일이다. 吐는 후대로 올수록 假字가 많이 쓰이는데 이렇게 되면 文의 語節의 表記 構造가 '讀字+假字'의 構造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 걸음만 나아가면 鄕札의 表記法이 되는 것이다.
    高麗 時代로 넘어오면 이 吐 표기가 보다 정밀해진다. 鳴鳳寺慈寂禪師俊雲塔碑陰記(941, 太祖 24年)는 高麗 時代 最古의 吏讀文이다. 여기서 新羅 時代의 吏讀文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屬格 助詞와 對格 助詞를 발견할 수 있다. 吐의 길이도 훨씬 더 길어진다. '成造爲內臥平亦在之'에서 밑줄 그은 부분이 吐인데 무려 7자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吐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말의 표기가 정확해졌음을 뜻한다.
    1031年(太平 11年, 顯宗 22年)에 쓰여진 淨兜寺造塔記에서 高麗 時代 吏讀文의 한 標本을 볼 수 있다. 우선 이 기록은 長文으로 되어 있어 高麗 時代 吏讀文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語順이 일부 套語를 제외하면 거의 국어의 語順으로 되어 있고 吐表記에 있어서도 필요한 조사나 語尾가 거의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伯士 身寶 衆 三亦 日日以 合夫 三百四十八 幷乙良 第二年春節己只兮齊遣 不得爲 犯由 白去平等(伯士 身寶의 衆 셋이 나날로 合夫 三百四十八을 아울러서 돌은 第二年 春節까지 미치었다 하고 이루지 못한 사유를 사뢰었으므로)

이는 造塔記의 한 句節인데 거의 우리말로 된 표현이다. 밑줄 그은 것이 吐인데 '爲/'를 제외하면 모두 假字로만 쓰이고 있다. 이 表記 構造를 보면 音讀字로 표기된 '伯土, 身寶, 衆, 合夫, 三百四十八, 第二年, 春節'을 제외하면 모두' 訓讀字+吐'의 구조이다. 吐가 거의 모두 假字로 되었으니 기본 구조는 '讀字+假字'의 구조인 것이다.
    이 吏讀文은 高麗 後代로 오면 漢文化되어 가는 경향을 띤다. 佛家의 造成記나 發源文이 高麗 前期까지는 吏讀文으로 쓰인 것이 많으나 後期로 오면 漢文化되어 吏讀文 造成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밖의 吏讀文에도 音讀字로 표기한 漢文 句節이 대량으로 쓰인다. 朝鮮初의 大明律直解의 吏讀文도 우리말 어순의 표기가 많은 것이 사실이나 고려 전기의 吏讀文과 비교하면 漢文句가 대량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壬亂 때의 記錄인 農圃集이나 李 忠式公의 狀啓로 내려오면 漢文句에 口訣의 吐를 단 듯한 느낌을 주는 文體로 바뀐다.
    朝鮮 後期의 吏讀文을 보면 자연스러운 國語에 바탕을 둔 生産性이 있는 말이 아니라 套式化된 用語를 漢文句에 섞어 쓰는 特殊한 文語로서 그 生命을 유지한 것에 불과하다.
    鄕札 表記는 遺事의 鄕歌 14首, 均如傳의 11首, 悼二將歌 그리고 鄕藥救急方의 鄕名 表記도 여기에 포함시키면 統一 新羅 時代서부터 13세기 중엽까지의 자료가 전하는 셈이다. 鄕札 表記가 발생되어서 쓰여온 기간도 이 기간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 表記는 吏讀와 固有 名詞 表記가 보여 주는 여러 특징이 모두 응용되어 있다. 먼저 특징적인 표기 구조로 들어야 할 것은 '讀字+假字'의 구조이다.

東京 明期 月良 夜人伊 遊行如可/東京 긔 아 밤들이 놀니다가

이는 處容歌의 첫 句節이다. 이를 借字 體系에 따라 그 연결 구조를 분석하면

東京/동경, 音讀字+音讀字
明期/긔, 訓讀字+音假字
月良/아, 訓讀字+音假字
夜/밤, 訓讀字
入伊/들이, 訓讀字+音假字
遊行如可/놀니다가, 訓讀字+訓讀字+訓假字+音假字

와 같다. 이로 보면 語頭는 모두 讀字들이고 後尾는 假字들이다. 이 假字는 곧 釋讀 口訣이나 吏讀의 吐에 해당한다. 이 吐는 文法 關係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明期(+긔→긔)'와 같이 未音 添記를 겸한 것도 있다. 鄕札에서 이 吐는 우리말에 필요한 조사나 어미 및 그 밖의 文法的인 형태소들을 거의 다 표기하고 있어 이두문에서와 같이 보충해서 읽어야 할 곳이 거의 없다.
    鄕札 表記가 모두 이러한 構造로만 된 것은 아니다. 禮敬諸佛歌의 '身語意業无疲厭'은 音讀字만으로 表記된 漢文句가 그대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表記는 初期 吏讀文에서 보아온 것이다. 또 같은 노래의 '此良 夫作沙毛叱等耶/이아 부질 사못야(이에 떳떳함을 삼을 것이로다)'의 '夫作'이나 '沙毛叱等耶'는 모두 假字만으로 表記된 것이다. 이렇게 假字만으로 單語를 表記하는 것은 固有 名詞 表記에서부터 있어 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鄕札은 固有 名詞 表記, 初期 吏讀文, 그리고 統一 新羅 時代부터 나타난 吐가 들어간 吏讀文의 表記法이 융합되어 자연스런 우리말을 거의 완벽하게 표기한 表記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表記法은 舊譯仁王經의 釋讀 口訣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鄕札 表記法은 이러한 釋讀 口訣이 발전되어 보편화된 것으로 믿어진다.

Ⅳ.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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